-
-
건축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 ㅣ 100 IDEAS 시리즈 2
리차드 웨스턴 지음, 김광현.서울대 건축의장연구실 옮김 / 시드포스트(SEEDPOST)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를 바라보는 이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우리는 늘 철근, 콘크리트, 나무, 벽돌, 유리로 만든 건축 속에 살면서도 쉽게 잊는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브릿지를 보면서, 뉴욕의 마천루와 런던의 코쿤을 보면서, 파리의 퐁피두와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보면서도.
'뉴욕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만큼 철골구조(강구조)를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는 건물은 없다. 102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놀랍게도 단 14개월 만에 지어져 40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책속에서.
건축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가지. 이 명쾌한 100이라는 한정 속에는 부정이 없다. 지은이 리차드 웨스턴이 시작하는 글에서 밝히듯, 이 책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건축의 흐름을 주도한 아이디어와 이 아이디어가 선별된 건축과 어떻게 그 흐름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건축가의 눈으로 본 것이되 낯설지 않고, 편향과 파편화가 있되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미술공예운동이 어떻게 건축으로 모습을 드러냈나? 바우하우스는 왜 중요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 기둥 양식과 인본주의가 지금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저자는 평범한 특성을 기술의 발전과 건축가의 생각, 형태와 기능에의 고민을 담은 건축물과 함께 제시한다. 이것은 교과서와 같이 일정한 흐름에 따라 엮은 책이 아니다. 일정한 범위를 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공간을 구성하는 수단을 좀 더 실용적으로 다루었을 뿐이다. 단, 백 가지 아이디어를 연대순으로 간략히 소개하며 개념을 소개할 뿐이다. 이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논점이 최근의 혁신에 집중되었으며 아이디어와 아이디어 사이를 오가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 다양한 생각을 잇는 여행은 깊고 넓은 가벼운 나들이와도 같은, 시계토끼가 지닌 시계를 살짝 엿보는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벽, 천장, 창문, 기둥, 벽돌, 계단 같은 것으로 먼저 드러났다.
사진은 마요르카의 요른 웃존의 자택, 칸 리스. 전망을 특별하게 선사하고 빛과 공간을 나누는 방식을 보노라면 창문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공기, 건물의 표정을 보여주는 건물의 눈. '창문을 설계할 때는, 여자친구가 밖을 내다보며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는 알바 알토의 말을 떠올리면 창문이 사람에게 어떤 것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수사학은 창문이 실용적인 이유 외에도 건물의 표정을 결정짓는 요소임을 일깨워 준다.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이루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적인 비례를 따르는 창문, '벽보다 유리가 더 많다'는 농담이 오가던 하드윅 홀의 유리의 성과도 같은 수많은 창문, 20세기 들어 나타난 알루미늄과 강철, UPVC로 이루어진 실용적인 창문까지, 창문은 건축의 성격을 나타내는 눈과도 같다. 절벽의 저 창문을 바라보노라면 그 공간이 한없이 깊어,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이루어진 듯한 극적인 효과까지 느껴진다. 감성과 질서, 장식과 형태는 그러나 비단 창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조화와 질서를 이루는 다른 영역을 살펴본다. 코니스, 프리즈, 기둥머리 등으로 이루어진 기둥을. 아주 먼 옛날부터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듯 지금도 있는 기둥을 훑어보면, 아래와 같은 양식이 눈에 들어선다.
책에서는 '오더'라고 영어를 한글로 굳이 옮기지 않았지만 잰슨의 '서양미술사'를 참조하자면 역자는 오더를 양식이라고 옮겼다. 이 양식이 어떤 기원을 가졌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논쟁이 되고 있다 전하는데, 서양 건축 역사에서 그 단어 자체가 그러하듯, 양식은 특정한 형상, 형태, 모양, 비례를 넘어 음의 높이, 지속, 조화와도 같은 전체적인 체계를 아우른다. 콜로세움만 하더라도 아래에서부터 토스카나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기둥이 함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더'라는 단어가 갖는 느낌이 좀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추상적인 연상작용, 상호 관련성, 일괄된 방식.
책에서 소개하는 그리스의 건축 양식은 오른쪽에서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이 있다. 가장 복잡한 상부를 가진 도리스식은 아키트레이브, 트리글리프, 메토프로 조직된 프리즈와 코니스가 그 특징이다. 분명 세 가지 고전적 건축 양식이 그리스에서 나타났으나 가장 코린트식은 실제로는 이오니아식의 변종이라 할 수 있기에 실제로는 이오니아식과 도리스식, 이 두 가지 양식만 존재한다 하여도 무방하다. 건축학자들이 도리스식 양식에 더욱 집중하는 이유를 잰슨은 도리스식이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며, 가장 먼저 나타나 다른 양식에 비해 훨씬 정확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과 잰슨의 책을 번갈아 들여다보노라면 결국, '양식'은 건축의 형태가 기능과 기술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그 목적이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어쩌면, 잰슨의 해석처럼 이 두 가지 입장이 서로 어우러질 때 그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초기 고딕 양식의 아미앵 대성당의 형태를 바라보노라면, 가벼워진 조적 구조가 보인다. 끝이 뾰족한 아치, 높이에 대한 폭의 비례. 이 책에서 지적하는 석재 건축의 가능성에 나타난 혁명적인 변화가 아치에서 단번에 드러난다. 공간을 가로지를 수도 있고 석조 벽에 개구부를 낼 수도 있는 잠재력. 누르는 힘은 강하지만 밀고 당기는 힘에는 약한, 벽돌로 만들기에 이상적인 구조. 이 책에서는 구조상의 건축기법에 주목하고 있으나 나는 잠시, 고딕 양식이 가져다주는 그 특징을 떠올려 본다. 초기 고딕, 전성기 고딕, 고전적 전성기 고딕, 국제 고딕, 국제 양식. 얼핏 생각하면 앞의 세 단어가 시대 명칭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은 서로 다른 양식적 특성에 따른 분류이다. '위대한 성당의 시대'였던 1150~1250년의 건축. 처음 건축에서 시작된 이 단어는 회하 쪽으로 그 비중을 옮겨가면서 건축적인 성격이 회화적인 성격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고딕의 효과는 '가벼움'에 있으리라. 회당의 벽이 얇아 보이는 효과, 높이에 대한 깨달음. 시간이 좀 더 흐른 1400년대, 유럽 전역을 뒤덮은 놀랍도록 통일된 양식, 국제 고딕이 꽃피기까지, 고딕은 높이와 무게에 관한 인간의 개념을 다시금 창조해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건축은 저 홀로 돌연 생겨나지 않는다. 사진의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원형의 순교자 기념 성당은 로마에 위치한 것으로, 이 책의 설명으로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이 고대 로마문화와 이상적인 기하학을 지향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더는 중세에 살고 있지 않음을 자각하는 목소리, 인간 스스로 이름을 부여한 최초의 시기, 과거와 현재의 구분. 이런 것들이 생겨난 '새로운 시대'로 서서히 그 이름표를 붙여나간 시기.
스위스 미술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우리에게 있는 예술적인 재능, 인간의 주관성을 강조하였다. 일반세상의 모든 사물과 상태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태도를 부르크하르트가 생각했다면 사진의 순교자 기념 성당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고전적 형태, 신체 치수의 비례에 기반을 둔 건축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 아름다운 제퍼슨 격자를 보며 나는 잠시 말을 잊고 오랜 시간, 이 사진을 들여다보았음을 고백한다. 한 변이 1마일로 이루어진 이 사각의 격자. 서부 개척을 용이하게 하려 도입된 것인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카고의 사진을 보노라면 로마의 군사 주둔지 계획에서 비롯된 격자 시스템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 풍경에서도 여전히 반짝임을 볼 수 있다. 교차하고 평행한 선, 미국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질서와 합리성을 여전히 증명해 보이는 격자의 역사는 이 책에서 이르듯 '공간의 질서를 그물 안에 넣는' 시도였을 것이다. 평등주의에의 지향, 인체와 비례적으로 관계를 갖는 원주 지름을 이용하는 고전적 방식에서 벗어난, 원주의 중심과 중심 사이의 거리를 측정했던 그리드 사용은 분명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사용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것. 이러한 격자 사용을 보면 지금 흔히 우리가 바라보는 수많은 양식과 형식은 아주 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연의 원칙을 건물에서도 따른다."-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땅, 그 자체에 부응하는 행위. 공간보다 장소에 갖는 관심. 재료의 본질을 살리는 건축.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을 보노라면 대지의 기운이 어떻게 형상화되는지가 보인다. 지질학적 성층, 나무줄기 주위를 감싼 콘크리트 그리드 구조. 이 낙수장을 자세히 보면 귀퉁이가 둥글게 처리된 것이 재미있다. 어떻게 콘크리트가 둥글게 나타날까, 생각하는 즉시 떠오른다. 콘크리트는 본래 액상 재료였음을.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 재료를 다루는 태도, 재료의 특성과 본질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형태.
베네치아 출신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인정된 양식에 자기 이름이 붙어있는 최초의 건축가이다. 팔라디오의 작품은 그리스와 로마 신전건축의 기반이 되는 형식적 원칙을 엄격하게 해석함으로써 전 세계에 영향을 두루 미쳤는데, 이는 그의 저서인 건축사서의 출간 때문이었다. 이 건축사서에는 건물에 대한 실무적 조언, 설계에 대한 체계적인 규칙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 건축과 팔라디오 자신의 계획안을 실측한 도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책 속에서
팔라디오의 이러한 고전적 본보기를 따른 건축물 중 하나가 사진의 치즈윅 하우스. 이후 주택, 공공기관에 많은 영향을 준 팔라디오의 건축은 사진에서 전하듯 주택, 건물의 정면에 신전의 정면을 사용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빌라 로톤다의 모든 장식을 떼어낸 재해석. 주택 옆에 나란한 부속건물...... 대통령이자 아마추어 건축가이기도 했던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건축 경전이라고까지 부른 '건축사서'에 따라 자신의 가족 사유지와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심지어 백악관도 팔라디오주의의 아일랜드풍 변형임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건축이든 미술이든 어떠한 사조의 중요성은 후세에 끼친 영향이 그 맥락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기준 삼아 판단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미국의 이미지가 팔라디아니즘에 따른 것이었다니!
그런데 이러한 건축사조가, 아카데믹한 양식이 그 양식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위의 설계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보자르, 프랑스어 그대로 옮기자면 BEAUX-ARTS. 이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의 장 니콜라 루이는 183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저 설계도를 통해 다양한 교회 설계가 비교하고 있다. 화려한 장식, 엄격한 방법론. 초점을 고전주의 미술과 건축에 두고 회화, 조각, 건축으로 교육과정을 나누고 당시 건축 실무를 가르친 프랑스 국립토목햑교는 지금에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보자르를 굳이 지금에 와서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 명맥을 짚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현재 주요 공과대학의 교육 시스템(아이디어 구성, 에스키스, 부공간과 주공간 개념)에 영향을 주었고 뉴욕 그랜드 센트럴역, 버클리의 대학 건물과 파리 오페라 극장을 둘러보는 작업의 일환이다. 즉, 현재를 훑어보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시대정신, 세계의 계획을 각 시대가 펼쳐나가는 것이 역사라고 보았던 칸트, 특정 사회나 문명의 정신을 형성하고 진보에 그 위치를 규정하는 능동적인 힘이 시대정신이라 보았던 헤겔의 철학이 있었다. 신고전주의자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물음. '모든 중요한 시기는 후에 그 시기의 고유한 건축 양식을 남겼다. 우리는 왜 우리만의 양식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건축의 영역에서 근대를 향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건축 디자인 학교의 건물을 들여다보면 그 어느 건물보다도 당시 기계시대의 정신을 형상화하려 했던 의지가 느껴진다. 기계의 효율성, 수공예품의 대량생산. 이 지점에서 나타난 기계시대라는 낱말. 강철, 철근 콘크리트, 유리. 벽을 아예 전면 유리로 대체한 저 바우하우스 작업장 건물을 실제로 보면 어떨까. 투과와 반사를 동시에 하는 유리를 전면에 두른 저 구조를 보노라면 생각지 못했던 생동감이 느껴진다. 1920년대 초반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
"건축은 공간으로 변환된 시대의 의지이다. 건축은 살아있고, 변화하며, 늘 새롭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 독창적이고 아름답다. 왜 아름다우며 왜 독창적인 것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르 코르뷔지에 건축의 아름다움을 다섯 가지 특징에서 찾는다. 자유로운 기둥의 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가로로 긴 창, 전면부의 자유로움. 강화 콘크리트로 만든 기둥, 추상적으로 존재하던 '공간 블록'에의 표현, 기계적인 효율성을 벗어난 생활을 위한 설계. 활짝 열려있으면서도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 르 코르뷔지에의 양식은 참신하며 명료하며 정확한 형태를 보인다. 잰슨의 말을 빌리자면, 어쩌면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이 지은 주택에 의해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창조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설계 개념이 전통적인 주택 개념과 다르다는 점을 표명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서양미술사 참조).
회화와 건축을 따로 떼어 볼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지만, 앞서 고딕을 살펴보며 건축에서 시작된 이 이름표가 회화로 넘어갔음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이 반대의 현상이 추상에서 드러난다. 이 책에서 68번째 아이디어로 다룬 '순수한 형태 언어', 추상.
추상을 처음으로 옹호한 선언은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2년에 출간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 담겨있다. 당시 칸딘스키는 독일 표현주의 집단에서 활동했는데, 이 집단을 통하여 처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낸 추상적인 건축물이 바로 에리히 멘델존의 설계로 등장한 아인슈타인 탑이다. ... 추상은 급진적인 새로운 표현 형식일 뿐만 아니라 영국 비평가 허버트 리드가 1935년 글로 썼던 표현을 빌자면 예술과 건축의 영원한 성질을 '신성하게 유지하는' 수단으로서도 간주되었다. 이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새로운 개념에 대해 주장하면서 스스로 왜 '보수파'라고 묘사했는지,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는 '로마의 교훈을 끝없이 격찬하면서도 어떻게 건축 혁명을 주창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다.-책속에서
추상, 그 비구상적 작품. 근대주의의 특징, 그 개념 중의 하나. 어쩌면 이는 어떠한 연관도 없는 새로운 건축일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니티 템플에서는 정방형 격자가 등장한다. 비율과 구조를 통제하는 이 격자는 추상의 특징이 건축에 어떻게 투영될 수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앞서 말한 순수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르 코르뷔지에가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수도 있는 건축을 생각했다면, 스위스 발스에 있다는 피터 줌터의 온천 욕장은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건축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신체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강렬한 느낌. 신체로 경험하는 건축물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가 이야기하는 현상학을 설명한다. 체화된 존재의 경험, 형태의 복잡함과 규모를 강조하던 건축이 이제는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도 느끼는 감각과 삶의 문맥, 일상과 마주하는 공감적 태도를 통한 현상학적 환원.
줌터가 설계한 온천욕장에는 설재 벽과 콘크리트 지붕 사이의 빛이 있다. 공기의 흐름이 보일 것이다. 아마도,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이 생활세계에서 열릴 것 같은 느낌이다.
보는 순간 '지금' 볼 수 있는 건축이라는 느낌이 든다 했는데, 설명을 보니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캘리포니아 과학 아카데미. 초록 융단을 덮은 지붕, 에너지 효율, 자연순응형 설계. 이제는 건축물의 생애주기와 생태 발자국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자 하는 시기. 급격한 오염, 급속한 인구 증가. 지속가능한 개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경제학자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렌조 피아노의 설계를 본다 하여도, 이 쟁점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시스템은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이를테면 '옛날 수도자가 털이 섞인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듯이, 친한경 자격증처럼 식물을 담고 있는 노골적인 생태 건축물을 넘어 건축의 질을 혁신하는 지속 가능한 건축물을 찾아내기란 아직도 어려운 실정이다.'와 같은 문장을 읽노라면 환경 건축, 지속가능성, 건축물이 신축 건축물에는 효과적일지도 몰라도 기존 건축물에서는 적용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보인다. 특징과 맥락을 짚고자 하는 평가기준.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이 사진의 왼편에는 발바오의 구겐하임이 있었다. 수평의 바닥과 수직의 벽, 직교 구조에 대한 공격이라는 이름표를 단 '해체', 는 이 챕터의 이름이 그러하듯 순수한 형태를 위한 꿈의 파괴이다. 저자가 붙인 이름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펠릭스 누스바움관을 떠올렸다. 내부의 불안정한 구조, 지하 요새를 연상시키는 공간.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당시 펠릭스 누스바움관을 설계하며 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애와 작품을 이어주는 비극적 관련성을 표현하고 건물 자체가 기념물과 같은 상징성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책을 잠시, 서경식의 '고뇌의 원근법'에서 서경식은 '경사와 비스듬히 날카롭게 뻗어 나가는 평생선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극히 기능적이면서도 방문자의 심리를 끊임없이 불안감과 위기감에 몰아넣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이 책의 사진으로 눈을 돌려 본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
무너질 듯 말 듯 보이는 선. 직교와 질서에 대한 도전. 어쩌면 데리다가 말한, 군림, 지배, 권력, 해체와 타자, 대립항이 분해와 탈중심화, 불연속으로 드러난 것일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해체와 구성의 특징은 렘 쿨하스의 머리를 거치면 이렇게, 직물과도 같은 형태를 드러낸다. 주름이 있는 건물. 캐드와 3D 모델링, 스플라인 기법의 패키지를 이용한 이러한 설계는 구성요소에의 관심과 주름 잡힌 형태, 다양한 요소의 복잡한 결합과 구조체의 생성을 가능케 했다. 그리하여 사진의 시애틀공공도서관.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이러한 기술은 미국의 디지털 건축분야의 선구자 그렉 린이 '디지털 고딕'이라고 칭한 이러한 형상의 구현에 일조하고 있다. 이질적인 장비로 둘러싸인 친숙한 주름을 보노라면 사람이 생각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구상이 느껴진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개념과 아이디어는 다른 시공간 속의 서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 생겨난 것. 어떻게 처음 반짝였을까. 그 '어떻게'를 이 책을 읽는다 하여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말하였듯, 앞으로도 그것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길을 걷듯 같이 호흡하는 철학과 회화, 조각과 건축의 대화 도중 탄생한 사진의 아름답고 놀라운 건축을 바라보노라면 평범하지만 특색있는 흐름이 엿보인다. 저자는 전문용어를 최대한 덜 사용해가며, 그러나 굳이 사용해야 할 때에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며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백 가지의 재료와 역학, 특성과 개념을 설명한다. 다양한 아이디어의 유형, 연대순 정렬, 그리하여 나타나는 이 흐름. 개념과 개념 사이를 오가는 친절한 설명. 세심하면서도 친숙하고 일상적으로 보이면서도 전문가의 기술이 엿보이는 건축의 한 자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