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로렌스는 타오스 푸에블로에서 어딘가에 도달한 느낌, "어떤 최종적인" 느낌을 경험했다고 한다. 어떤 장소들은 지구상에 잠시 머물러 있는 것처럼만 보이는데, 타오스는 "옹이처럼" 단단히 자리잡은 느낌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곳 렙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내 발로 들어간 어떤 장소가 아니라, 과거의 꿈의 공간이었다. 나는 '구역' 안에 있었던 것이다. '구역' 안에 있을 때는 다른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 '구역'안에 있을 때는 다른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 '구역'이 아닌 곳에 있을 때는 늘 어딘가 다른 곳, '구역'에 가기를 소망한다.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제프 다이어
아니, 제프 다이어는 물리적인 공간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책의 모든 폐허는 궁극적으로 그 자신이었다. 그것은 고대와 현대, 전쟁과 평화를 아우르는 한 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 사람의 마음이란 참 불가사의하다. 언제 어떤 움직임의 바람이 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니까.
여행기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줄 거라는 환상은 도로시의 작은 구두 뒷굽 소리만큼이나 황량한 것이 되었다. 우디 알렌이 언젠가 속독법으로 전쟁과 평화를 읽은 다음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났다.'라고 줄거리를 요약한 것과 같이 결국, 여행기도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난 것 이상이 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좀처럼 가기 힘든 장소를, 혹은 아무 것도 배우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기를, 또는 이렇게 자기 마음 속을 향하는 시선(제프 다이어)을 읽게 되는 것이다.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나는 풍경 사진도, 인증샷도 찍지 않는다. 음식 사진을 찍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빈 접시만 눈앞에 있을 뿐이며 호텔 사진 한 번 찍어볼까 생각할 때 즈음엔 방은 이미 룸서비스가 필요한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므로 내가 카메라 중의 카메라 아이폰을 들이미는 순간은
1.증거가 필요해서(이를테면 결혼식장 증거사진같은 하객사진처럼)
2.마음이 너무 격해진 나머지 진정시키느라
3.그 풍경을 꼭 보여주고 싶은 누군가가 있어서.
4.그 풍경을 함께 기억해줄 사람이 옆에 없을 때.
1의 경우 평소 참되게 살았다 생각했건만 내가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않는 이에게 증거 사진을 제공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였다. '아니, 내가 지금 튕기는 게 아니고 정말 뉴욕에 있다니까요.'
2의 경우는 내가 내 눈으로도 그 장소에 있다는 걸 못 믿을 때였는데 막상 공항으로 향하는 시티의 택시 안에서 그 사진을 찍었을 때는 이미 때가 많이 늦었다.
3의 경우는 주로 술을 마시거나 호텔의 룸서비스를 혼자 느긋하게 시킬 때. 새벽 세 시의 술집, 오전 10시 대륙의 아침식사가 주를 이루었더랬다. 그리고 4는,
4는 내 마음이 텅 비기 삼 초 직전. 내가 가까이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는 오히려 사진을 잘 찍지 않았다. 그저 그럴 때는 '지금 참 좋아. 나,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할 거야.'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든다. 그런 다음 몇 달이 지나 그에게 다시 물어본다. 우리가 같이
나란히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를 마셨던 이른 저녁을
한밤의 센트럴 파크를 내려다보았던 때를
광화문 어딘가에서 늦은 아침, 선물받은 새 구두를 신고 좋아서 팔짝 뛰어올랐던 때를
부산, 해운대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던 때를
기억하는지를 물어보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그런 순간이 365일 24시간 계속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365일 365개의 그림자가 다 다른데, 그 순간은 아주 찰나일 뿐이다. 사람이 옆에 있어도 늘 같지 않고 풍경이 늘 머물러도 늘 반복되지 않으니까. 우리는 어제의 강물에 발을 다시 담글 수 없고 깨진 거울을 붙일 수도 없다. 내 모든 사진이 가난하지는 않지만 애처로운 까닭은 여기 있다. 나중에 네 모습을 기억하려고. 네가 없을 때 네가 있는 거라 마음을 속이기 위해. 언제 내 마음이 변할지, 네 마음이 변할지, 내 사정이 여의치 않을지, 네 사정이 지금과 다를지 알 수 없으니까, 오래오래 보려고. 이런 마음이 없어지면 아마도 그땐 내가 진짜 늙은 것일 게다. 산도르 마라이는 이를 이렇게 잔인하게 증언한다.
세상만사 답답할 정도로 지루하게 되풀이되거든. 그것도 나이와 관계있겠지. 유리잔은 그저 유리잔이라는 것을 아네. 그리고 인간, 이 가련한 존재도 무엇을 하든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지. 그리고 나서 육신이 늙어가네. 단번에 늙지는 않아. 그게 아니라, 처음에는 눈이나 다리, 심장이 늙네. 단기적으로 늙어간다네. 그리고는 별안간 영혼이 늙기 시작하지. 육신은 늙었을지 몰라도, 영혼은 동경과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기 때문일세. 영혼은 여전히 동경하고, 기뻐하고, 또 기쁨을 희구하지. 기쁨에 대한 동경마저 사라지면, 추억이나 허영심만이 남네. 그런 다음 정말로 영영 늙는다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지. 그런데 무엇 때문에 깨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게야. 하루가 어떠할지 너무 잘 알지. 봄 아니면 겨울이고, 삶의 자질구레한 일들, 날씨, 하루의 일과.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어. 예기치 못한 일, 특별하거나 끔찍한 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네. 인생의 모든 화복을 알고,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고, 좋든 나쁘든 더 이상 알고 싶은 게 없기 때문이지. 그것이 노년이라네.
-산도르 마라이, 열정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다. 흉터도 마찬가지다.오히려 상처는 더 많이 받아도 상관이 없다. 아픈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아픈 것이 너무 싫지만 잘 참는 것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내 특기 아니던가. 아니, 달리 말하면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내 특기다. 몇 일을, 몇 달을, 몇 년을 나름의 기억으로 메우면서 금맥을 찾듯 시간을 기다렸다. 하루키가 쓴 1Q84의 아오마메처럼 물론 강인하게 기다릴 자신은 없다. 하지만 강인하게든 연약하게든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그 시간이 쌓였을 때 젊을수록 상처를 많이 받겠지만 늙을수록 상처를 덜 받는다는 것도 명명백백하다. 무엇보다도 상처는 치유할 수 있지만, 후회는 치유할 수 없다는 점이 어릴 때나 지금에나 두려웠다. 지금 읽는 산도르 마라이는 너무나도 담담하고 조용해서 두렵다. 겨울의 어둠, 안개비가 내릴 때 찾아드는 습기. 불을 밝히고 잔에는 따뜻한 글뤼바인을 채우고 촛불까지 켜고 나면, '열정'이라는 덮개 아래 후회와 진실, 사랑과 우정, 사실과 추억이 이야기의 외피를 쓰고 나타난다. 인간은 그 자신에 관해서는 늘 아무것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을 드러낸다는 그의 글을 읽으면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진실을 숨기는 쪽으로 발전해 왔는지가 보인다. 그럴 때 들여다보는 마음속 풍경은 어떤 것인가. 상처와 기다림, 시간과 기억이 뒤덮을 때의 폐허는.
오든의 시는 "자신만의 풍경을 가지지 않은 자가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1연의 중간쯤 "자기 삶의 지도를 그릴 수 없는 자가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 나는 그릴 수 없다(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이 책은 내 삶의 특정 시기에 겪었던 몇몇 풍경에 대한 조각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지도다. 어떤 일이 생겼거나 생기지 않았던 장소, 내가 보고 싶었던 장소, 혹은 그저 지나쳤거나 마지막에 다다른 장소. 어떤 의미에서는 그 모든 곳이 같은 장소, 같은 풍경이기도 했다. 그 일들을 경험한 사람은 결국, 이런저런 장소에서 생겼거나 생기지 않았던 일들의 총합인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프 다이어, 위의 책.
이 책을 읽는 내도록 진한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리 곡진하지도, 강렬하지도 않지만 여러 층위에 걸친 폐허가 향하는 곳은 결국, 제프 다이어의 폐허 같은 마음 속이었다. 그것은 나이, 성별, 인종, 심지어는 안경을 쓰는지 안 쓰는지조차도 뒤로 하고, 한마디로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의 폐허이다. 마음에 품었던 무언가를 내려놓을 때 필요한 위로. 수많은 장소와 사람, 시간과 공간의 총합인 그 사람은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이러한 황폐한 시간과 공간에서도 여전히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떠올리게 한다.
행복감을 느끼는 능력 말고 인생을 판단할 기준이 뭐가 더 있을까? "그들은 뭘 바라는 걸까요? 구역을 찾는 사람들 말입니다." 라고 영화 <스토커>의 작가는 묻는다. "행복이지요, 그 무엇보다도." 스토커가 답한다. 어떤 사람들이 구역에 들어갈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착하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이요"라고 답한다.
-제프 다이어, 위의 책.
시간이 이룬 폐허, 사람이 이룬 폐허, 사건이 일으킨 폐허를 둘러보는 그의 글귀는 오로지 시선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행복감을 느끼는 능력이라는 말에서 만져지는 희망은 당위를 벗어난 능력에의 문제가 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신념으로 타인을 피곤하게 만드는 자기계발서적과도 같은 말이 얼마나 많은가. 도덕의 문제가 아닌 이상에야 당위가 인간의 감정까지도 조정하게 내버려두느니 나는 차라리 발륨과 프로작의 손을 잡겠다. 그러나 제프 다이어의 행복에의 능력은 의외로 간단하고 진실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은 오로지 바라보는 것이라는 통찰은 얼마나 다양성을 품은 것인가. 어느 여행지를 가도 제프 다이어의 기준은 단 하나. 자신이 그 광경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가. 마음이 폐허가 되었다는 이 사십 대 남자의 읊조림은 내도록 황폐함을 노래하지만, 읽고 나면 이상하게 긍정도, 부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모든 판단과 느낌은 자신을 응시할 줄 아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바다를 걸어 들어가 짐을 먼저 실은 다음 긴 배에 올랐다. 잠시 후 배는 나를 싣고 출발했고, 만을 끼고 크게 돌아 핫린으로 향했다. 바람은 없었다. 하늘도 맑았고, 바다는 짙은 바다색이었다.
작은 배를 타고 어딘가를 떠나는 일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물결의 움직임, 엔진이 내는 소리. 삶을 뒤에 남기고 떠나지만, 당신은 여전히 뒤에 남기고 떠나는 그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당신의 일부는 그곳에 남는다. 죽음도, 최고의 죽음이라면 아마 그것과 비슷할 것이다. 모든 것은 기억이지만, 또 모든 것은 확장된 현재 안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제프 다이어, 위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