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옹! 에에에옹!"

 아까처럼 잦아들겠거니 하며 다시 눈을 감아 보았지만, 새끼고양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옆집에서도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내려가 봐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믿기지 않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네!!! 내 야구 빠따 어디 갔어! 내 이 도둑고양이 새끼들 다 잡아 죽여버릴라니!"

 자리에서 90도로 로보트처럼 삐끄덕 하고 튕겨져 일어났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엌에 씻어 놓은 햇반 그릇 하나와 간식 캔을 호주머니에 넣자마자 문을 잠그고 파자마 바람으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숨을 몰아쉬며 새끼고양이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옆 건물 1층 주차장에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오도카니 건물 현관을 등지고 앉아 울고 있었다. 

 ... 순간 묘하게 뒷덜미가 서늘했다. 이상한 느낌에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얼마쯤 떨어져 있는 어둠 속에서 아저씨 하나가 비틀비틀 약주를 거하게 한 모양새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온."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을 말과 판이하게도 다르게 아저씨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물체가 나를 소리 없이 경악케 했다.

 "나비야. 나비 시키. 이 도둑괭이 새키. 어디갔어. 이리 나와 봐!"

 아저씨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붉은색 벽돌 한 개였다. 



 인연과 묘연이 엉키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잠시 맡아만 봤다가 입양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양이 넷을 맡은 것이 올해 5월이 되면 이제 채 2년이다. 엄마 고양이 하나와 새끼 셋, 그중 엄마 고양이는 입양처가 생겨 중성화 수술을 한 다음 보냈고, 새끼 셋은 지금도 나와 함께 지낸다. 얼마 전 동물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고 몸무게를 재어보니 그나마 제일 큰 수놈 셜록이 4킬로그램, 암컷 칼리가 3.6킬로, 님부스가 3.1킬로그램.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잘 난다. 세 마리의 이름을 지었다고 했을 때 지인 하나가 '너 그러다가 못보낸다'라고 한 말대로, 임시 보호 기간이 끝나고도 나는 셋을 보내지 않고 데리고 있기로 했다. 그래서 잠시 여행을 결심했을 때 셋을 함께 케이지에 넣어 같이 여행을 다닌 다음부터는 아예 여행을 포기했다. 



 포기한 것은 아래와 같다.



 =내가 삼남매 칼리, 셜록, 님부스와 함께 살면서 포기한 것=

고양이 털 안묻은 검정 옷

고양이 털 안묻은 흰색 옷

여행

외박



반면 삼남매와 함께 살면서 하게 된 일들은 아래와 같다.



=내가 삼남매 칼리, 셜록, 님부스와 함께 살면서 하게 된 일=

고양이 화장실 청소(매일 2회, 화장실 살균소독 주 1회)

집안 환기(매일)

바닥 청소(진공청소기, 진드기 퇴치제 살포 주 2회)

캣사료, 캣 모래 구입

고양이용 음식(주로 닭가슴살, 새우, 가끔씩 연어) 상비





귀여우면 됐지 뭘 더 바래?-김칼리, 1년 10개월, 암컷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냥?-셜록 딩글베리, 님부스 이천(1년 10개월령, 수컷, 암컷)


 아무리 보아도 득보다 실이 많은 이 관계인데, 이들이 눈을 맞추며 내게 말을 걸고, 침대에서 곁을 파고들고, 내게 놀자고 장난감을 물고 올 때면 예상치 못한 만족감이 스민다. 이들은 간섭하지 않고 공감한다. 종종 내가 집을 오랜 시간 비우면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린다. 고양이는 장소를 섬길 뿐, 주인을 모른다니. 개처럼 충성스럽지도, 머리가 좋지도 않다니. 원래 길에서 사니까 버리고 가도 된다니, 역시 '신비롭다'는 말의 어원은 '모른다', 내지는 '관심 없다'가 아닐까. 






 


 윤소해의 '커피 타는 고양이'는 고양이에 관심 없으면 지나치기 쉬운 책이다. 책의 언어는 뜨겁고 종종 집사의 마음이 글의 리듬을 앞질러가서 정돈되지 않은 듯 보일 수도 있다. 어쩌랴. 지나친 애정은 불출산 맑은 공기를 불러올 수밖에. 어쩌면 전의 고양이 키우는 집사들과 2017년 지금 고양이 키우는 집사들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1990년대 초반 정도만 하여도 고양이를 돌볼 수 있는 동물병원도 드물었고, 길고양이를 보살피는 사람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동물 보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나만 빼고 다들 고양이 있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이 키우고, 많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버려진 고양이들 42마리와 윤소해가 만든 풍경이 '커피 타는 고양이'라는 캣카페이다. 




 길고양이들과 유기된 고양이들을 구조하면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순간이 있다. 도둑고양이에게 또 밥을 주면 망신당하게 할테니 각오하라거나 죽여버리겠다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듣는 순간도 아니다. 오랜 시간 밥을 챙겨주며 멀리서 자라는 것을 지켜보던 아이가 누군가의 잔인함과 서슬 퍼런 외면 때문에 보란 듯 처참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가난한 살림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병원비에 허덕이며 비어있는 통장 잔고를 매번 확인하는 순간도, 가족과 친구에게 왜 그러고 사냐며 한심하다는 핀잔을 듣는 순간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이 아이를 지켜줄 수 없다는 걸, 내가 이 아이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직감하는 그 순간이다.




 왜 하필 고양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할까. 그저 나 자신보다 더 작고 약한 존재, 자신을 챙길 수 없는 존재를 보살피는데 왜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 라는 질문에 '그럼 당신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에 반대합니까?'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최근에는 '너는 왜 그렇게 도둑고양이 밥을 주고 다녀?'라는 질문에 '그러면 너는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해?'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책임질 수 없으면서 모든 생명을 떠안고 데려와 내버려두는 것이 애니멀 호더라면, 나는, 혹은 저자 윤소해는 자기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어떤 친구는 차라리 독거노인이나 기아난민을 도우라는 말을 들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왜 틀린 일,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보통 죄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왜 약한 존재를 보살피는 사람에게는 그가 한 일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종용할까. 





 지하철역 부근에서 성인 남자에게 빗자루로 두들겨 맞다가, 꽁꽁 묶은 쓰레기 봉지 속에 버려져서, 이민 간다고, 여행 간다고, 결혼한다고, 들였다가 알레르기가 있거나 다른 이유로, 임신해서, 줍냥했다가 부모님이 반대해서, 싫증 나서.




 42마리의 사연이자 흔히 접하는 사유.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한 나라의 국격이 보인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떠오른다. 저자의 희망은 그래서 카페 문을 닫는 것이다. 더는 버려지는 고양이가 없어서 카페 문을 닫는 것. 자생하기 위해 영업하는 곳. 생명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을, 무지가 무관심으로, 혹은 폭력으로 번지는 것에 반대하는 곳. 

 거대한 담론보다 한 마리의 고양이. 커피 타는 고양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로 언젠가의 쉼터를 준비하고 싶다. 동물이 가족이라고 하면 이해 못 하는 시선이 있어도 좋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아직도 도둑고양이가 표준 국어로 등재되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저자가 후기에 썼듯이, '어느 날 불현듯 만난 고양이가 지금의 성격과 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과 이유가 궁금해지고 그 이유를 알게 되거나 느끼게 되는 때. 바로 그 순간 내가 '움직일 이유'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반드시 받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왜 카페를 하시는 거에요? 이렇게 힘든데."

 그러면 한참 부연 설명을 들려준 뒤 마지막에 대답한다.

 "카페를 그만두기 위해서 카페를 합니다."

 사람들은 고양이 카페에 대한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고양이 카페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은 거의 대부분 품종묘이다. 그 아이들은 숍에서 사왔거나(나는 이 표현을 굉장히 싫어한다. 숍엔느 어떻게 아이들이 오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가정에서 분양받아 데려왔거나.

 애초에 고양이 카페의 존재 자체가 슬픈 일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고양이들을 제대로 케어한다면 고양이 카페는 엄청난 적자에 시달리다 빚만 떠안고 망할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카페가 영업을 종료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많든 적든 카페의 고양이들은 당장 갈 곳이 없어진다. 품종묘라 하여도 몇 개월 몇 년 동안 입양처가 구해지지 않는 것이 태반인데 하루아침에 그 많은 고양이들을 어찌한다는 말인가. 

 ...더 이상 버려지는 고양이들이 없어서 카페 문을 닫는 것. 이것이 내가 진정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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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7-01-31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삼남매 칼리, 셜록, 님부스와 함께 살면서 포기한 것=
고양이 털 안묻은 검정 옷
고양이 털 안묻은 흰색 옷
여행
외박


저도 얼마전 이 얘기 했어요. 예전에 여행 많이 다녔지만, 고양이와 함께 하고 나서, 고양이들 때문에 못 간다고 해도,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이 고양이와 함께 하는 늘 같은 일상뿐이라고 해도 비교대상에 올릴 수도 없을만큼 고양이와 함께 하는 일상이 소중해요.

별 일이 없는한 내가 녀석들보다 오래 살텐데, 함께 하는 모든 시간 아끼며 잘 보내야지 싶습니다.
말로는 이제 두자릿수 나이라 제 노년도 냥님 노년도 점점 자주 생각하게 돼요.

Jeanne_Hebuterne 2017-01-31 11:48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떠오르지는 않지만 포기한 것이 더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카펫이 깔린 목조건물에 살고, 셜록은 산책냥이라서 매일 뒷마당 풀숲도 다니고 나무에도 올라가고...4,5월이면 벼룩과의 대전쟁이에요ㅠㅠ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제가 벼룩 알레르기라는데 겨울 빼고는 가려워서 잠자리가 힘듭니다. 그만큼 예방과 박멸에 신경을 써도 산책냥+중장모+목조건물+카펫 효과가 ....집을 불태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래도 참고 지내요. 아마 모든 집사들은 뭔가 힘든 점이 있으나 참는 것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여행도 그래요. 함께 다닌다고 해도 세마리를 이동장에 같이 넣고 모래박스 들고 룸서비스 하지말고 푯말 걸고 지내기를 몇 번 해보니 그냥 집에 있고 말자...하게 되더라고요. 남매끼리 떨어지면 힘들겠다는 생각에 셋 다 같이 지내기로 결정하는데 툭탁대며 싸우다가도 같이 그루밍하고 엉켜 자는 걸 보면, 과연 이들과 나는 무슨 인연이어서 이렇게 먼 바다 건너와서까지 만났나..신기해요.

이 글을 쓰다 생각했습니다. 전 모든 사람이 고양이를 좋아하기는 바라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고양이를 좋아하거나, 길고양이를 돕거나, 함께 지내는 고양이에게 정성을 다하는 걸 보고 소위 ‘고나리질‘은 좀 그만 해주었으면...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타인의 취향이고 생명을 대하는 태도이니까요.

덧-말로, 대학까지 보내야죠! 제 주변의 노묘를 돌보는 집사가 ‘난 우리 고양이 대학 갈 때까지 키울거야!‘라던데 그 말이 쏙 박혔어요. 그러니까 오래오래 같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좋아하는 존재를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는 마음.
 

 스포일러 있습니다.




가엾고도 가엾고나. 가짜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강렬하고 단호하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지 않았으니 그만큼 아름답다. 








 


 박찬욱 감독의 2016년 작품 '아가씨'는 이름만큼 요사스럽다. 이미 아는 이야기를 다시 듣게 하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얼굴을 다시 보게 한다. 관객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는 감각을 이미지로 응축시켜 만든 것 같은 주제는 뜻밖에 단호하다. 바야흐로 박찬욱은, 자기 작품을 자유롭게 통제하고 거칠게 풀어뜨려 이 소품과도 같은 영화로 한숨 쉬어가려 한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골방에 갇혀있다가 풀려난 남자가 찾아가는 군만두의 맛, 떨어질 때의 타, 타, 탁월한 황홀함, 이런 것들을 이루어낸 감독이 선택한 로맨스는 어떤 것이었던가.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의 초반 몇몇 부분을 가져와 각색한 박찬욱의 '아가씨'는 19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속고 속이는 사기극이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도 자기가 속는지를 모르고 속았으면서도 다행이라고 말하는 1930년대 배경의, 숙희와 히데코의 터널. 

 자, 이것은 어떨까. 매일 밤 잠들기 전 생각나는 액수의 돈을 가로채기 위해 사기꾼 백작은 아가씨 곁에 몸종 숙희를 붙여둔다. 어머, 백작님이 오신 다음부터 발톱이 빨리 자라네요. 사랑하게 되실 거에요. 라는 말 따위로 아가씨가 백작과 사랑에 빠졌다고 믿게 한 다음, 마침내 결혼하게 되면 아가씨를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아가씨의 상속재산을 나누자는 모의.

 아니면 이것은 또 어떠한가. 다섯 살 무렵 벚나무와 함께 일본에서 건너와 평생 어딜 가본 적도 없고 하는 일은 이모부가 모은 책 낭독회를 하면서 얼마 후면 그 늙은 이모부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 '되어 있는데', 이 모든 수동태 앞에 나타나는 능동의 동사. 사기꾼 백작이 속내를 밝히고 같이 도망가자고 한다. 물론 돈은 좀 나눠야겠지만. 도망가고 나면 이모부가 찾을 테니 몸종 여자아이를 자기 이름으로 정신병원에 넣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읊은 이야기는 영화 '아가씨'의 1부와 2부이다. 같은 이야기가 두 번에 걸쳐 변주를 이루는 1부와 2부. 1부는 하녀 숙희의 눈으로, 2부는 아가씨 히데코의 머리로, 3부는 두 사람의 맞닿은 손으로 끝난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에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나오는 씬이 몇 가지 있다. 아가씨와 숙희가 서로의 옷을 바꿔 입으며 바라볼 때 마주하는 두 사람의 얼굴. 혹은 두 사람이 섹스할 때 맞잡게 되는 손. 능동과 수동의 경계, 보여주는 탐미를 넘어서 즐기는 손이 주는 느낌은 강렬한 주어의 느낌. 어쩌면, 손이 두 사람의 살결을 탐미적으로 훑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손을 아가씨의 장갑 서랍을 들여다보듯 아래에서 위로 쓸어내리지 않아서인지도, 또는 그 맞잡은 손이 굳게 서로만을 의식하고 있어서인지도, 혹은 전부 다 인지. 어느 것에도 잠식되지 않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 나는 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 그 손에 담긴 힘이 참으로 명쾌하고 담대해서 그와 반대로 영화 속 남자들의 속은 시커멓고 남은 여자들의 얼굴은 허여멀건 하다. 





 1부의 빠르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2부의 아가씨의 시선이 하나하나 붙잡는다.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애는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내가 되고 물새 같은 히데코는 물새 같은 내가 된다. 숙희가 히데코를 속이려 했던가? 히데코가 숙희를 속이려 했던가? 백작이 이 둘을 속이려 했었지. 그러다가 숙희와 히데코가 서로를 인정하는 순간, 두 사람의 욕망이 뻗어 나가는 시점에 와서 함께 문 앞에서 멈추어 앉아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문을 밀어서 여는 장면이 몇 번에 걸쳐 나오는 순간, 박찬욱이 하려는 말은 무엇보다도 간단하다. 이것은 로맨스.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부터 인지한 장애물을 하나씩 하나씩 뛰어넘어 마침내 서로 손을 굳게 잡는 연대의 이야기. 나는 굳이 '연대'라는 단어를 골랐는데 그것은 이 두 여자의 사랑이 에로스적 색채와 더불어 '평등'의 모습을 담았기 때문이다. 만약 연대와 사랑,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면 사랑이라고 할 것이다. 두 사람이 느끼는 그 모든 감정의 기본값이 사랑이기 때문에. 극중에는 '사랑? 사기꾼이 사랑을 하나?'라고 스스로 말하는 숙희의 모습이 나오는데 영화 전체는 이 말을 천천히 뒤집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가득 채운 것은 눈빛과 시선, 소리와 낱말, 빛과 그림자.







 배경은 주로 실내이고 서로서로 속일 때 가장 사소하고 중요한 것이 눈빛이니, 영화 속에서는 인물의 시점 숏이 유난하다. 숙희가 처음 아가씨에게 인사할 때 아가씨는 마침 거울을 등지고 있어 숙희에게는 아가씨의 얼굴과 목덜미가 한눈에 보인다. 아가씨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숙희의 강아지 같은 눈이다. 그 직전 등장했던 라쇼몽과도 같던 군인들의 빗길 속 행진, 얼굴이 누렇게 달아올라 돈 이야기와 모의에 정신이 없는 보영당 사람들을 비추던 그 빛과 소리는 아가씨에게 이르면 아이보리빛의 보얀 향내로 피어난다. 지그재그 길을 숙희가 비를 맞으며 걸어와 마침내 커다란 착각에 이를 때, 실내를 채운 것은 아가씨와 백작의 가짜 대화. 세상 부자 중에서도 누구보다 서책을 사랑해서 금을 팔아 책을 산다는 코우즈키가 모은 것은 사실 성애 소설. 의외, 역설, 진짜와 가짜 사이의 틈은 보영당에서는 누렇게라도 들던 빛이 코우즈키의 서재에는 아예 들지 않으며, 그의 지하실은 숫제 어둠으로 가득하다. 그가 푸른 안개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아가씨의 다섯 번째 주인공은 분명 류성희 미술감독이 공을 들인 저택이 분명하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oil on canvas, 1948



 숙희가 히데코 아가씨의 집에 처음 들어갈 때 작은 불빛 하나로 앞을 밝히며 가는 자동차가 가는 길은 마치 피터 그리너웨이의 차례로 익사시키기를 떠올린다. 그런가 하면 한밤중 보이는 집 전경은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 아닌가. 섬세하면서도 계속 보노라면 기괴한 윌리엄 모리스가 작업한 듯한 느낌의 벽지가 드리운 아가씨의 방, 벨라스케스가 한 번쯤 그렸음 직한 아가씨의 옷자락. 거기에서 나아가면 남성 성기의 상징인 뱀이 대가리를 든 코우즈키의 서재가 나온다. 한 번도 영화 속에서 쓰임을 발휘해보지 못한 코우즈키의 성기 대신 빳빳하게 선 뱀 대가리의 쓰임을 보노라면 영화 속 모든 세트가 어떻게 등장인물과 함께 호응하는지가 그대로 보이기까지 한다. 

 가만히 있음으로는 자신의 존재증명을 다 할 수 없는 코우즈키의 서재는 그런 의미에서 안쓰럽기까지 하다. 낭독회도 열고 서책도 탐하고, 어린 조카에게 변태적 글읽기도 가르치고, 아내를 고문할 수 있는 그의 공간은, 앞서 말했듯 '누군가의 무엇'같은 무언가가 가득 채운 코우즈키 월드다. 영국, 일본, 한국의 가옥이 한데 붙어있고, 실제로는 조선인이면서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서 일본인 행세를 하고, 이 겹겹이 문과 문으로 쌓인 집을 보노라면 코우즈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얄팍한 거짓말 그 자체의 인물이라는 것을, 이 모든 '지나가는 세트'가 그 전부로 말하고 있다. 









 영화 전체를 세트가 앞서나가지도, 뒷걸음질 치지도 않는 말하는 배경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조화로운가 하면 이질적이고 어지러운가 하면 간단하다. 뒤틀리고 암담하면서도 제 할 일 못하는 흐리멍덩한 이 안개 속을, 두 사람의 사랑은 거침없이 뚫고 지나간다. 가는 길목길목이 어떠하던가. 커다란 보름달은 숙희의 문에 있다가 두 사람이 저택을 탈출할 때 흐리게 웃는다. 마침내 해피 엔딩에서 달이 환하게 걷혔다가 엔딩 크레딧 장면에서 숙희의 방문에 가서 앉는 커다란 보름달. 이렇게 분명히 밝혔음에도 이 영화 속 두 사람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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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7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04 0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햇살이 가만히 죽은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나는 죽은 내 얼굴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젖을 물리듯 햇살은 죽은 나무의 둘레를 오래도록 짚어보고, 고스란히 드러난 나무의 뿌리는 칭얼대듯 삐죽 나와있는 오후. 어떤 열렬한 마음도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가 싸워야 한다면 그 때문. 내가 누군가와 섹스를 한다면 그 때문. 거짓말처럼 내 몸을 지나간 칼자국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글거리는 상처 따위가 아니다. 맨드라미는 지금도 어디선가 제 키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나를 두소 살이 있는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먼지처럼 그릇 위에 쌓여가는 일은 그러므로 아주 서러운 일은 아니다. 이젠 벼랑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에 잠긴 귀를 흔들어보는 일. 입을 벌리면 피가 간지러운듯 검은 웃음이 햇살 속으로 속속들이 박혀드는 날. 집이 사라지면 골목은 어디로 뛰어내려야 하나. 

-맨드라미는 지금도, 이승희





 검정 원피스와 하이힐을 신고 아끼던 반지와 목걸이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리고 길을 나설 때 그의 전화를 받았다. K, 그날은 네가 헤어진 날이었다. 




 길고양이 같은 표정의 오후.




 십여 년 전 오후, 처음 랑콤의 미라클을 뿌렸을 때 나는 백 밀리그램짜리 오 드 뜨왈렛을 사서 매일 그 향만 뿌렸다. 사각거리는 리넨 원피스, 또각거리는 샌들 굽, 조용한 무채색 인테리어의 향수라고 생각하고 내가 무척 좋아하던 이의 옷장 속에 그 향수를 넣어두고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다시 찾은 그 향은 꽃향기와 달콤함, 단정한 느낌이 사라지고 매서운 초겨울 바람의 냄새로 변한 것에 다시 놀랐다. 

 내가 미라클, 이 향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지금은 디올의 미스 디올과 딥디크의 오이도를 더 자주 뿌리지만 한때 이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이 내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든 것들의 이마를 짚어주며. 




 K, 내가 왜 너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왜 너의 잠든 이마를 모르겠는가. 부드럽고 살짝 사람을 잡아당기는 느낌의 향수를 너와 그의 좋았던 때라고 하자. 또는 내가 사랑에 빠졌던 때라고 생각해 보자. 순진하게 세상을 낭비하고 시간을 엑셀 파일처럼 끌어쓰던 때. 향이 날아가리라는 것도, 체취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리라는 것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단, 내가 놀랐던 것은 네가 했던 말 속 '알지 못한다'와 '행복, 혹은 불행'이라는 낱말이 주는 이질감이었다. 행복과 불행, 이 앞에서 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아직도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은 어디까지나 '아닐 불'자를 써서 행복의 결여 상태가 불행이라고 알린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알지 못한다' 대신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모르는 것은 결코 '앎'의 결여가 아니다. 반대일 뿐. 너는 지금 네가 행복의 반대에 오롯이 앉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너의 체취와 그의 체취 중 누구의 냄새가 변했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이미 헤어짐은 그의 입에서 나왔는데, 너는 네 목을 그 앞에 곱게 내밀 준비가 안 되었으니까. 




 그럴 수 있기나 할까?




 오페라가 눈과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K는 괜찮을까. 거의 십 년을 만나다가 헤어진 그는 어떨까. 그 생각이었다. 나의 현재와 그의 과거가 겹쳤다. 나의 공백과 그의 상실이 겹쳤다. 나는 헤어진 애인이 아니므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의 자존심은 그에게 있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친한 친구들끼리 밤늦게 커피를 마시다가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애인이 많이 취해서 집에 데려다주려고 잠시 일어났다는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사랑은 그런 것일까? 그가 좋아하는 공연도 함께 가고, 축제도 함께 가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고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를 믿고 이야기를 듣고 손을 잡는 것. 그 모습이 너희의 전부라고 말하던 때. 향이 사라지는 것도 변하는 것도 모르고 싶던 때. 지금 변했다는 것을 안 순간 다시 잡고 싶은 네 마음을 모르는 것 아니다. 살아오다 자연스레 만나고 헤어졌던 이들을 하나씩 쌓아가던 때가 있었다. 변해서 향이 다 날아가고 시큼한 맛만 남아도 이제는 그 존재를 그대로 둘 생각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울어도 되는 때가 이미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오페라는 끝났고 바깥은 더욱 짙은 검은 고양이의 털빛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은 빈방이군요.




 사랑은 커녕 연애조차 뜻대로 되지 않고 늘 빈 방에 혼자 있는듯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말보다는 사랑에 빠진다는 말이 좋았다. 사랑을 나누었다는 말보다 섹스했다는 말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다니. 주고받음이 언젠가는 서로의 장사밑천이 바닥나면 끝나는 푸닥거리처럼 느껴지는 것에 반해 빠진다는 말이 주는 그 넉넉함. 그러나 헤어나올 때의 천 길 사람 속이 더욱 막막하다는 것은 이제 K도 나도, 열여덟 살이 아니기에 잘 안다. 소중한 것을 일생에서 몇 번이나 잃었다가, 그것을 어느 골목길에서 우연히 다시 찾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 그 빛나는 것이 진짜였는지 사금파리였는지를 판별하는 과정은 더욱 지리멸렬하다. 낯선 마음, 우울감, 상실과 애도. 누군가를 잊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내가 그에 둔 의미의 무게에 달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불을 빨리 켜고 싶어 했다는 것을. 어둠을 이해하는 빛을 얼른 되찾고 싶었다는 것을. 우울과 체념과 절망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시간. 마침내 애도를 거친 다음 찾아오는, 내가 나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는 빠를 수록 좋았다.





나 맨드라미로 지고 싶네.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열없어지는 때. 이미 충분히 받을 것을 다 받아낸 자의 오만함이 생길까 봐 스스로 다섯 가지 감각을 다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때가 왔다. 가장 간단한 음식이 오히려 더 정성이 들어가고 검은 빛깔의 옷을 입을 때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 실망과 후회가 생길 땐 내가 필시 나에 대해 오해를 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 이런 것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안녕, 안녕.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이승희의 시집은 늙음과 젊음을, 애도와 치유를 같은 무게로 바라본다. 행복과 불행이 아닌 빛과 어둠, 앎과 모름의 세계를 등분하여 내미는 시인 앞에서 그 마음을 읽는다. K의 말을 듣다가 같은 말이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면 잠시 이승희의 낱말을 들여다보곤 한다. 상실과 죽음을 지나 도착한 해진 후의 들녘처럼 따뜻한 시간이, 시집을 다 읽은 다음 천천히 다가온다.





시집을 선물해주신 D님, 고마워요. 멀리서 고맙다는 인사를 보냅니다. 

회색빛 글씨는 이승희 시인의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에서 부분발췌.



Hello from the out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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