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우고 싶지 않다. 왜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렸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문제는 하잘 것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은 무익하고 빈약하며, 열정은 불순하고, 삶은 합리적이며, 삶의 변증법은 악마적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절망은 부분적이고 사소한 것이며, 영원이란 텅 비어 있는 단어이고, 허무의 경험은 환상이며, 운명이란 농담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왜 의문을 가지는가? 왜 답을 찾으려 하는가? 왜 불확실한 것을 받아들이려 하는가? 절대 고독 속에서 눈물을 바닷가 모래에 묻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눈물은 항상 그 눈물만큼 쓰디쓴 생각이 되었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아주 가끔, 보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겪어내게 만드는 영화를 만나는 때가 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는 그런 이유에서 제목 하나만으로도 자취를 남기는 그런 영화였다. 내용과 형식, 대화와 침묵, 질문과 대답, 현실과 철학이 SF와 드라마의 경계에서 만나는 놀라운 지점. 그 자체가 하나의 경이가 되는 체험.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재미있는 몇 가지 오류와 광활한 우주, 간단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힘을 오래도록 이야기할 것 같다. 존재 하나에서 제각각 다른 것들을 끄집어내는 재미있는 상황. 그리고 나는 그에 하나 보태어, 우리가 왜 영화를 사랑하는지를 찾는다.
라이언과 맷, 두 우주인과 나사 스탶의 대화로 문을 열어 물속에서 재생하는 듯한 중력으로 문을 닫는 영화. 알폰소 쿠아론이 전작에 비해 달라진 것은 최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만들어 그 원형에 도달하고자 한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롱테이크는 그대로 남았다.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이름을 라이언으로 지은 아버지 이야기. 아무 이유 없이 죽은 네 살짜리 딸에 관한 라이언의 이야기. 우주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변호사와 바람나서 떠났다는 맷의 이야기. 그리고 어떤 곳에서 친구 여동생을 찾으러 가보니 그녀가 어떤 털복숭이 손을 잡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그 털복숭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는데-여기에서 이야기가 끊어진다-, 라고 말하는 맷. 그러고 보면 천일야화도, 레 미제라블도, 하다못해 마지막 잎새까지, 우리는 종종 '하루만 더'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대화해야 하는가? 왜 소통해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관한 답이 SF의 외피와 드라마의 내피 안에서 이루어진다. 역설적으로 SF가 가장 현실적인 장르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담겨있다. 인간은 끝없이 우주를 들여다보고 밝히고 설명하고 싶어 한다. 왜냐고 묻는 것이 인간의 몫, 묵묵히 있는 것이 우주의 몫. 왜 우주는 그곳에 있는가? 왜 인간은 여기에 있는가? 이 넓은 우주에서, 인간은 무엇이며 왜 숨 쉬는가? 숨쉬기를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때로는 상상과 모험으로 끝날지라도 SF 영화는 드라마와 액션을 빌려 이 질문을 던지거나 답을 해오려 노력한 것이 분명하다. 모르는 것을 통해 아는 것을 정리하고 광활함을 통해 티끌을 본다.
나는 죽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나간 영혼의 과거가 무한한 긴장으로 퍼덕일 떄가 있다. 파묻혀 있던 경험이 현재로 온전히 되살아올 때가 있다. 리듬이 획일성과 균형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때는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에 으레 따르는 공포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죽음이 떠오르며 삶의 절정에서 추락한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잠시 에밀 시오랑의 책을 들여다본다. 영화 속의 어떤 시퀀스는 불면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문장과 만난다. 조용히, 어둡게. 그러나 그 접점을 밝히는 빛은 우주에서 본 지구의 엷은 막을 닮았다. 불면증과 프랑스어의 철학자.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자식에게 라틴어 이름을 지어주었던 사람. 육체의 불면으로 하여금 육신 없는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던 사람. 시오랑에게 있어 삶은 객관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이 아닌, 그 자체가 혼돈이고 무질서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나타나는 또 한 번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와 질서로 체계를 부여하는 대신 시오랑은 자기 스스로, 자기만의 답을 찾기를 원한다. 삶은 분명 파편화된 비논리적인 무엇이다. 주관적 경험의 진실로도 그는 삶의 허무와 권태의 구멍을 굳이 꿰매고자 하지 않는다. 알폰소 쿠아론이 그저 광활한 우주와 멀리 있는 지구를 보여주듯 에밀 시오랑도 죽음, 허무, 절망, 고독의 찬 공기를 그대로 우리에게 들이민다. 자신의 힘으로 이 무섭고 어둡고 광활한 곳을 침묵으로, 혹은 광활함으로 느끼게 하는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노라면 오히려 그 끝에 해뜨기 전의 풍경이 보인다. 하늘 아래 없는 새로움을 찾으려면 하늘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지구에서는 지구를 볼 수 없듯이. 여닫음조차 느낄 수 없듯이.
다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그래비티'로 눈을 돌리자면, 이 영화의 제목 '그래비티'는 오프닝이 아닌 엔딩에 등장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제목 대신 영화를 여는 것은 초반 이십여 분에 이르는 롱테이크. 광활한 우주를 보여주고 태양이 빛을 비추는 지구의 나일강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초보 우주인 라이언(산드라 블록)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그녀의 눈, 코, 입을 바로 앞에서 들여다본 다음 다시 우주가 우리 시야에 들어올 때, 우리는 알 수 있다. 지켜보는 것이 겪어내는 것의 범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강요된 몰입이 아닌 효율적인 이입을 알폰소 쿠아론은 지나치지 않는 선 안에서 카메라 처리 하나로 해냈다. 그리하여 광활한 곳에서 티끌과도 같은 존재가 겪는 질문의 이야기를 형식과 내용의 합일점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때때로 슬며시 등장하려는 자기 고백과 도취, 독백의 감상과 허무주의마저 걷어내는 우주의 객관적인 시선을 바라보자면, 종종 내용과 형식이 무관하게 뒤섞여 형식이 내용의 시녀가 되거나 잘못 군림하는 예술 작품의 무의미함을 우리가 왜 경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야기하는 자의 필연과도 같은 자아도취를 막고 '무엇'의 핵심에 닿으려면 예술가는 종종 철저한 형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넓음과 좁음. 거대함과 하찮음. 버팀과 흔들림.
이런 것들의 대비와 반전이 알폰소 쿠아론의 형식 안에서 끝없이 충돌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숏 안에서의 움직임이지, 숏과 숏의 연결이 아니었을 것이다. 광활한 우주 안에서 끊김 없는 필사의 움직임이 보인다. 배경은 우주이건만 지구의 모습이 매 순간 의식된다.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결국, 라이언이 닿고자 하는 곳은 중력이었다. 그녀를 죽게 하는 것도 중력이었고 살게 하는 것도 중력. 이 변치 않는 존재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기술적 성취와 인간 내면의 드라마가 만나는 순간, 카메라는 계속해서 공간을 강조한다. 어느 존재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에서 안을 보게 되는 객관화의 능력은 영화 전체와 닮았다. 기술이 인간 내면의 잎사귀, 가지, 줄기를 거쳐 뿌리까지 연결될 때, 우리는 이것을 영화라고 부른다.
절망의 끝에서는 부조리에 대한 정열만이 혼돈을 악마 같은 광채로 치장한다. 어떻게 삶을 허무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영화를 닫는 것은 그 육중한 제목이다. 시작이 아닌 끝에 나타나는 제목. 라이언의 오디세이. 그래비티는 라이언이 도달해야 할 지점의 핵심이었다. 드러나지 않음으로 나타나는 거대한 무엇. 결국, 라이언을 살리는 것도 중력이고 죽이는 것도 중력이었을 것이다. 끌어당기고 위태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흔들리게 하고 죽고 싶게 만드는 존재. 인간은 내면의 깊이만큼 흔들린다. 그러나 진동과 진폭의 그래프가 늘 제 1 사분면만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살고 싶음과 죽고 싶음의 시소와도 같은 움직임 사이의 균형을 생각해 보면, 흔들림이야말로 인간을 버티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약함이 강함이 되고 흔들림이 동력이 된다.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반비례 속에서, 라이언은 우주의 고요함을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우주를 싫어한다고까지 말하게 된다.
사랑하는 존재가 좌절케 하는 존재로 돌변한다지만 이때마저 그 존재 자체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우주는 그대로, 파편도 그대로, 지구도 그대로. 오직 인간만이 그들의 당연한 움직임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맛본다.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행복할 때는 인간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할 때는 모든 것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라이언의 딸이 죽었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인지를 묻게 되고 그 아이를 만나거든 어떤 말을 전해달라는 말을 라이언이 할 때, 그것은 결국, 생명이 왜 생명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그래비티에서 이 물음이 그저 모험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그래비티가 나름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기 때문이다. 십 분 안에 타죽거나 살아 귀환하거나 둘 중 하나. 이유가 없고 선택이 있을 뿐인 무수한 갈림길에서 생명은 그 자체로 살고자 하는 당위를 지닌다.
생각을 처음으로 거슬러 가면 이 생명의 당위와 영화의 당위가 만난다.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가? 이 질문은 곧 '왜 영화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역설적 질문이 되기도 한다. 그래비티는 기술적 성취, 우주의 서사, 내면의 드라마, 질문과 답이 만나는 황금 비율을 과장 없이 잡아냄으로써 자신만의 답을 찾는다. 형식과 내용, 주제의 예술적 성취를 제목으로 갈무리하는 한편의 시. 그래비티는 영화가 있어야 할 지점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영화다.
You have to learn to let go.
영화 속 맷 코왈스키의 대사 한 줌이 영화 포스터 속 숨소리와 묘하게 어우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