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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예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고종석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3월
평점 :
11월 21일 오후, 생브누아 거리
Y.A. 당신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하겠어요?
M.D.뒤라스라고.
Y.A.나에 대해선 뭐라고 하겠어요?
Y.A.알 수 없다고.
(서울=연합)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3일 파리 자택에서 82년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소설, 영화, 연극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알콜중독으로 일찍부터 여러차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들어선 바 있으며 특히 88년 이후에는 자주 혼수상태에 빠져 그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다. 작가도 물론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 이미 문학적 유서라 할 수 있는 작품 '이게 다예요'를 최근 내놓은 바 있다. 이 작품은 뒤라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할"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였던 35세 연하의 동성연애자 얀 앙드레아를 위해 94년 11월부터 95년 8월 초까지 쓴 일기를 묶은 것이다. (후략)
-연합뉴스 발췌.
http://www.vuededuras.com/marguerite-duras.html
1996년의 이 기사가 떠돌기 전 나는 '스카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그녀의 소설을 읽었다. 육 년이 더 흘러 히로시마 내 사랑을 스크린으로 보았고 뒤늦게 애도했다. 그 전에 카뮈의 페스트를,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이 모든 것을 내 십대에 읽었고 이 모든 것을 내 이십대에는 뒤돌아보지 못했다. 그림자는 너무 짧았고 석양은 너무 빨리 찾아왔으며 눈동자는 너무 자주 깜박였던 때였고 나는 이 공백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아는 것이 없다.
그 이십대, 낯선 거리에서 길을 찾노라면 손에 지도를 들고 있어야 했지만 나는 자주 지도를 접어두었다. 대신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려는데요, 라고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는데 그때에 특별히 친절하거나 선량해 보이는 사람을 점찍은 것은 아니었다. 목적지가 있었던 내게 그들은 그저 내 옆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내 길잡이가 되었다. 명백한 이유가 없는 우연의 일이었다. 그 책방이 직원할인이 된다는 이유로 나를 그곳에 데려간 어머니가 지금도 내 어머니라는 것도, 그 책방에서 은근슬쩍 뒤라스와 쥐스킨트를 문제집 사이에 끼워넣은 것도 우연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이럴 때면 구름 사이 지나가는 달을 보고 싶어진다. 혹은 비행기가 남긴 비행운을 보고 싶어진다. 있었던 어떤 것과 사라진 어떤 것. 기억에 남은 어떤 것. 그러면서 작게 눈 흘기고 싶다.
1996년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부모를 따라 인도차이나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공산당원이었던 적 있었지만 1950년에는 제명되었다. 법대를 다녔으며 공무원 생활을 하였고 퇴직 후 자유로운 글쓰기를 했다고 전한다. 1950년대에 쓴 그녀의 소설을 누보로망에 넣기도 하지만 실제 그녀의 글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워 어떤 장르에 넣기는 약간 어렵다. 특성이 있다면 단 하나, 뒤라스적이라는 것. 리듬을 다르게 하고 이펙터를 쓰거나 편집을 하여도 뒤라스는 뒤라스다.
살아있는 사람, 죽은 사람, 나무가 없는 곳에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 울듯이 맞는 남자, 너무 행복해 입술을 깨무는 순간, 커피잔을 내려놓는 순간의 정적, 신에게 봉헌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옆을 바라볼 수 없다고 되내이며 똑바로 길을 걸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의 하이힐 소리가 모데라토 칸타빌레에 드러났고 연인에서 그녀의 늙음이 예고되었다면, '이게 다예요'에는 그녀의 모든 것이 있다. 가쁜 숨, 한숨, 웃음, 몰아쉬는 숨, 속삭이는 숨, 거친 숨, 그리고 그 사이의 주름과 그늘, 모든 것이 그저 조용히 '이게 다예요'라고 말한다. 발걸음이 멈춘 조용한 거리, 그 너머 이어지는 실내의 고즈넉한 미온의 침실.
Y.A. 당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겠어요?
M.D. 내가 누군지 이제는 잘 모르겠어.
나는 내 애인과 함께 있지.
그 이름은 몰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마치 애인과 함께 있듯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지. 애인과 함께 있는 것 말이야.
불가능을 떠올리는 꿈. 가능성을 탐하는 희망.
늙음에의 고단함과 매끈함이 사라지고 공백을 채우는 주름.
뒤라스는 힘들다고도, 슬프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불안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이름표를 붙이는 낱말은 늘 지도의 표시 같았다. 그 단어 사이를 헤매다 보면 저 위에 방위표가 보인다. 등고선이 보이고 높고 낮은 곳이 드러난다. 그늘의 적막함, 무너뜨리고 다시 만드는 열망.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요. 그게 다예요.'라는 어느 오후, 그녀가 남긴 기록을 따라간다.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어느 날 저 나뭇잎도 바람에 떨어지고 시들겠지. 하나하나 떨어졌다가 나는 것은 결국, 새로운 나뭇잎이겠지. 얀 앙드레아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짧은 글을 보노라면 그 공백과 그림자가 잔향으로 남는다. '우리는 이걸로 살 수 있어. 웃고 뒤이어 우는 걸로.'라고 그녀가 말할 때엔 한밤중 발작하듯 울며 그의 어린 애인 이름을 부르는 늙은 울음이 들린다. 목적을 향해 차근차근 걸어가는 어린 여자아이 대신 한 번에 담요 자락을 놓지 않으려는 노인이 보인다. '나는 땅에서 솟아나는 시간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야'라고 그녀가 말하면 이제 그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때, 그녀는 그랬을 것이다. 이미 지나치게 어릴 때 확 늙어버린 것처럼, 그녀는 지금도 다시 시시포스처럼 간을 떼어먹히려 내어놓는 것이다.
4월 19일, 15시, 생브누아 거리
우연히 내겐 천재가 있었지.
나는 거기에 이제 익숙해져 있어.
침묵, 그러고 나서
난 하얀 목재 토막이죠.
그리고 당신도 그렇지요.
다른 빛깔의.
어떤 작가는 지금 있는 자리가 아닌 앞으로 가고 싶은 자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뒤라스에게는 공간이 겹쳐지고 시간은 중첩된다.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 끝은 아마 중력과 탄성을 거부하고 높은 곳으로 도약했을 것이다. 나는 하얀 목재 토막이며 당신도 그래. 그런데 당신은 다른 빛깔이야. 얼굴이 희기만 한 사람들이 나오는 지루한 모범을 벗어난 정말 자유로운 글쓰기란 이런 것이 아닐까.
L’homme assis dans le couloir, a play from Marguerite Duras
directed by Razerka Lavant
22.8.2011.
http://www.act-design.com/
글쓰기와 삶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녀에게도 삶이 어려웠을 것이다. '당신의 글은 왜 이리 어려운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그럼 삶은 쉬운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삶은 가볍거나 무거워야 했다. 전체가 몰락했다가 그 다음을 숨죽이고 기다리듯, 백 년을 단위로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은 우연히 앉은 옆자리의 먼지에 얼마나 쉽게 마음 아파하거나 옷장의 좀벌레에 격렬하게 짜증을 내거나 미쳐버리곤 하는가. 그 모든 화르륵 하는 손쉬운 불길 사이를 가라앉혀 우연과 필연을 오가는 회로 사이, 다른 빛깔을 읽는 그녀는 며칠 뒤 일기에 쓴다.
6월 11일
당신은 당신 됨됨이 그대로예요, 난 그게 기뻐요.
나는 여기서 누구에게나 있는 나의 지난 사랑을 토로할 생각이 없다. 모두가 자신의 것이라고 외치던 지리멸렬한 폭우와 찬란한 태양, 풍랑과 격투, 파도를 가르는 마음, 방파제에 부딪히는 절망에 관해서도 입을 다물 것이다. 케케묵은 연애사, 우연을 필연이라고 소중히 메모하거나 애인의 편지를 간직하는 그런 짓은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대신 나는 저 짧은 문장이 세상의 모든 것이구나, 느낄 뿐. 꼭꼭 삼켜야 하는 목소리. 언젠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시가 슬픕니다. 느껴지세요?'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는데 그 짧고 당연한 말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던 것처럼 이 짧은 메모에서도 더 덧붙일 말을 찾지 못한다.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말도 찾을 수 없었다.
주의 깊게 듣는다 하여 그것이 진실하다는 착각은 그만. 허용한다 하여 깊다는 오해도 그만. 격렬하다 하여 열정적이라는 허구도 그만. 지나갈 것이라 하여 아름답다는 굴절도 그만.
이 모든 그만인 것들을 지나고 나서 숨 쉬듯 흘러나오는 저 목소리 앞에 얼어붙지 않을 자, 누구인가.
시간. 침묵, 그러고 나서
당신이 뭔가를 할 시간인 듯합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는 없어요. 아마도 쓰는 것이겠죠.
침묵,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좀더 살기 위해서. 또 좀더 살기 위해서.
이게 다야.
그건 내가 아니야. 더는 알지 못하는 그 누구일 뿐.
모든 일에 시작과 끝이 있다면,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사랑과 죽음이라고 애인을 불렀던 뒤라스는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역치가 마주치는 순간을 글로 남긴다. 기억이 흐릿해지거나 손에 힘이 풀릴 그 직전에도 아마도 당신은 쓸 것, 이라고 말하는 얀 앙드레아에게 자신의 시간을 토로하는 나이 든 손이 보인다. 이게 다라고 말할 때, 그 음성은 앞선 것과 달랐을 것이다. 거울 속 모습이 낯설 때, 사람은 이렇게 느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알지 못하던 누군가 불쑥 옆구리를 찌를 때. 끝났다. 페이지를 닫아야 한다. 이제 가야 할 것이다.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고 우연이 모여 이유가 될 때. 그녀는 끝까지 썼을 것이다.
침묵
나는 광기로 얼어 있어요.
Y.A. 뭔가를 덧붙이고 싶나요?
M.D. 난 덧붙일 줄 몰라. 난 다만 창조할 수 있을 뿐이지. 단지 그것 뿐이야.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말. 쉬운 말이 어려울 때 뒤라스의 기록을 보면 흐렸던 물속이 맑아지는 느낌. 머릿속에서 거대한 우물을 만들었을 그녀의 마음이 보인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저 스스로 숨 쉰다손 치더라도 이 둘을 완전한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여성 작가의 경우 자전적 요소가 더 짙게 깔리는 경향이 있다. 가장 쉬운 고백, 스스로 하는 반성. 남성 작가보다 좀 톤 다운된 우울함, 옅은 촉감.
그러나 뒤라스는 자신의 존재를 얼굴에 내세우는 작가다. 그녀가 생득적으로 가진 모든 조건은 그녀가 이룩한 성취 아래 가려진다. 이 얇은 책에 그 무거운 마음을 눕게 했을 손끝이 서늘하다. 외침과 독백. 드러냄과 숨김. '너처럼 될 수 없다는 것, 그게 내가 아쉬워하는 그 무엇이지.' 이보다 더 서늘하고 뜨거운 속삭임을 내가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자 고종석이 후기에서도 밝히듯, 이것은 작가의 문학적 유서다. 차가워서 뜨거운 김을 허공에 흩어내고 나서 남는 것은 작가 그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