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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____.



정초의 중얼거림이 연말의 복선이 될 줄은 나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 꼬리뼈까지 의자 깊숙이 붙이고 책상에는 진하고 검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두고 천천히 조금씩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병 아래까지 숨어있던 인스턴트 커피 알갱이들은 굳이 스틱으로 젓지 않아도, 뜨거운 물을 붓고 머그컵을 좌우로 흔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스르륵 녹았다. 잔을 꼭 잡으면 뜨거운 기운에 손 전체가 싸르르해지는데, 종종 그걸 어떻게 잡느냐고 신기하게 보던 이가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 날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지. 하얀 백지는 떠오르는 태양같이 눈 부신데 떠오르는 태양은 도리어 커피처럼 캄캄했다.

-일월




 저렇게 정월, 혼잣말하였는데 동짓달, 꼬리뼈를 다치고서야 그 존재를 다시 알게 되었으니 그 까닭은 다쳐서, 아파서, 신경이 쓰인 까닭입니다. 신경은 내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 길 없이 열심 걷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나중을 아껴두었다고 착각하는 자의 오만함과 무지함, 그 합의 가장 총명한 상태였습니다.




 일월, 당신은 내게 늘 불친절했습니다. 남들보다 특히 더. 나는 방망이 다듬는 노인처럼 몸을 옹송그린 채 앉아 고집을 부렸습니다. 갑각류가 된 모양 앉았지만 진주 하나 품지 못한 조개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이것저것 내다 버렸습니다. 사전과 개론서 몇 권만 남기고 책은 모조리 처분하고서야 머릿속 남은 것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자고로 사람은 제 것이 아닌 것을 가까이하기만 하여도 제 것인 양 착각하는 버릇이 있나 봅니다. 원근감에 잠시 속았던 봄이었습니다. 가까이 있다 하여 고통스러웠고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덜 아픈 것이라고 거스러미 하나에, 그렇게 깜박.




 스웨이드를 들었고 실버라이닝플레이북을 읽고 보고, 하릴없이 거리를 걷기도 하고 감정의 뒤를 넓은 보폭으로 착각하여 한숨이 덜거덕거렸지요. 열심 궁리하였으나 들어가는 것은 들숨, 나오는 것은 날숨, 그것들의 총합을 한숨이라 불렀습니다. 봄의 결론은 위에서 중언부언 말하였듯 피곤과 한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이제 깨닫습니다. 불안한 마음의 답답한 상태, 덧없음의 도취. 내가 당신을 그리 맞이하였기에 당신이 나를 그리 찾았다는 것을.







              여름 ; 마음의 상태


 


 나처럼 당신도 남아있었구나, 하고 아스라이 바라보던 순간.

 당신이 내게 건넨 티끌 하나, 마음의 상태.


<state of mind, those who stay> 

Umberto Boccioni


 과거와의 단절, 새로운 재료 사용, 다이나믹한 형태와 기계에의 찬양, 장식의 배제, 폭력의 미화. 움베르토 보초니가 속한 미래주의에 관한 위키피디아의 정의입니다. 질주하는 자동차의 움직임은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더 아름답다는 미래주의 선언문의 구절을 '공간에서의 독특한 형태의 영속성이라는, 속도감 넘치는 조각으로 표현해낸 보초니의 서정적인 작품입니다. 떠나는 존재가 보여주는 속도를 찬양했던 보초니가 바라본 남아있는 자의 도사림은 저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감성적인 것에 반대하는 보초니의 작품, 마음의 상태를 뜯어보면 떠나지 못하는 자들이 보입니다. 그 그림자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청록의 우울함과 자각을 통해 올바른 근거를 찾아낸 후회의 울림이 들립니다. 녹색의 울렁임과 흐물거리는 헤어진 휴짓조각같은 사람들. 떠나지 못한 자들의 흐느낌은 저런 색조일 것입니다. 


 







가을 ; 추억할 수 없음








내 청춘이 지나가네


                               박정대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바람 말고는 만질 게 하나도 없다는 글귀에 설레던 가을이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 천사가 지나간 흔적. 존재의 독성에 뉘우치던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은 늘 조금 매캐한 공기처럼, 근거를 제대로 찾은 후회처럼 찾아오곤 했습니다. 설렘의 뒷면에 남은 뉘우침. 코끝에 살짝 떨어지는 벚꽃잎 같달까요. 그것이 설렘의 마음이라면 코끝의 벚꽃잎이 시드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쓸쓸함일 테지만, 나는 단 하나, 아직도 당신을 추억하는 법은 잘 모릅니다. 내일의 기억이 없고 추억할 어제가 없다는 나를 벚꽃처럼 낙엽 흩날리는 당신은, 나를 머릿속 뇌수를 뜯어보듯 쳐다보았지요. 쳐다보고, 살펴보고, 뜯어보는 것 중 하나의 목적어라도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쩌면 추억하는 법을 모르는 것은 관조할 만한 거리가 없기 때문일 거예요. 늘 배를 곯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적당한 물러섬 끝, 최고로 멀고 최고로 가까운 그 거리, 예상하였다는 듯,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만한 거리가 내게는 없습니다. 욕망의 가장 솔직한 순간이자 한숨의 가장 위태로운 조각. 굳이 나무라자면 내 허기와 영양분 없음을 나무랄 뿐. 내게는 아직  추억할 수 있게끔 알맞게 확보된 거리가 없습니다. 바짝 맞닿으려는 내게 당신은 언제나 들쥐처럼 찾아오고 고양이처럼 옷자락을 들고 일어섭니다. 마음이 사라지는 거리를 영화 그래비티를 보며 느꼈습니다. 가을은 공기였고 잡을 수 없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고서야 내가 이제 가을에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겨울 ; farewell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간증, 티끌만치도 아름답지 않은 물체의 위치, 덜그럭거리며 운반한 시체는 묘지가 아닌 구덩이 속에 툭 던져넣은 까닭에 비석조차 제대로 없는 당신. 이렇게 당신을 푸대접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아차, 하는 마음이 꼭 빈 탁자위에 잘못 남겨둔 장식처럼 빈집에서 그림자만 녹아내립니다. 




 내가 살아있는 시간의 속옷은 이렇게 누추하게 펄럭거리는데 당신은 늘 가장 순진하게 연필 끝의 각을 세워 종이에 사각댑니다. 그 소리가 천천히 자라고 잦아들어 문이 철컹 소리로 먼저 닫히려는 순간. 혹은 거리로 나가 비둘기가 양지를 찾아 무언가 콕콕 쪼아대며 꾸룩거리는 보던 때. 포만감에 가득 찬 사람들의 입술. 겨우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창백하게 책상 위에 정물처럼 굳어졌을 때. 사람들 사이 외따로 서 있던 때. 많은 사람이 본 유령이 공기 중을 떠돌고 나는 욕망과 능력, 욕심과 욕망이 짝 없이 돌아다니는 빈집에 딴에는 할 일도 없으면서 들어앉았습니다.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 바라보는 창밖의 무심함. 당신은 일말의 호기심조차 남겨두지 않고 이제 나를 치우겠지요. 그러고서는 다시 불친절한 다른 숫자를 내게 보낼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존중하려는 마음, 

 무언가의 시작이 이제는 태어나기 전 죽은 상태. 



 나와 당신, 2013이라는 다정하고 매몰찬 숫자가 힘겹게 맞잡았던 손바닥 사이 

 그 어떤 공기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맞닿은 그림자 뒤 아무도 뒤따르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당신과 나를 그 어떤 이도 다시 잡지 않기를. 

 그래서 이제 안녕이라고 하지 않고 farewell 이라고 말합니다. 

 늘 이 목소리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휘청일 뿐입니다. 

 그 위를 아무도 걷지 말기를.


 





 그리고 2014, 새로운 당신.



 내게 멀미와 꿈, 몰입과 첫사랑을 보내주시기를.

 간극과 격차에서 오는 아찔함, 무엇이든 잊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 

 조금으로라도 포만감을 이제는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을. 

 나는 이제 이 벽을 천천히 훑으며 손자국 하나 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2013,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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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우고 싶지 않다. 왜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렸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문제는 하잘 것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은 무익하고 빈약하며, 열정은 불순하고, 삶은 합리적이며, 삶의 변증법은 악마적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절망은 부분적이고 사소한 것이며, 영원이란 텅 비어 있는 단어이고, 허무의 경험은 환상이며, 운명이란 농담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왜 의문을 가지는가? 왜 답을 찾으려 하는가? 왜 불확실한 것을 받아들이려 하는가? 절대 고독 속에서 눈물을 바닷가 모래에 묻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눈물은 항상 그 눈물만큼 쓰디쓴 생각이 되었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아주 가끔, 보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겪어내게 만드는 영화를 만나는 때가 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는 그런 이유에서 제목 하나만으로도 자취를 남기는 그런 영화였다. 내용과 형식, 대화와 침묵, 질문과 대답, 현실과 철학이 SF와 드라마의 경계에서 만나는 놀라운 지점. 그 자체가 하나의 경이가 되는 체험.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재미있는 몇 가지 오류와 광활한 우주, 간단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힘을 오래도록 이야기할 것 같다. 존재 하나에서 제각각 다른 것들을 끄집어내는 재미있는 상황. 그리고 나는 그에 하나 보태어, 우리가 왜 영화를 사랑하는지를 찾는다.
 

 

 

 

 

 

 

 

 라이언과 맷, 두 우주인과 나사 스탶의 대화로 문을 열어 물속에서 재생하는 듯한 중력으로 문을 닫는 영화. 알폰소 쿠아론이 전작에 비해 달라진 것은 최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만들어 그 원형에 도달하고자 한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롱테이크는 그대로 남았다.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이름을 라이언으로 지은 아버지 이야기. 아무 이유 없이 죽은 네 살짜리 딸에 관한 라이언의 이야기. 우주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변호사와 바람나서 떠났다는 맷의 이야기. 그리고 어떤 곳에서 친구 여동생을 찾으러 가보니 그녀가 어떤 털복숭이 손을 잡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그 털복숭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는데-여기에서 이야기가 끊어진다-, 라고 말하는 맷. 그러고 보면 천일야화도, 레 미제라블도, 하다못해 마지막 잎새까지, 우리는 종종 '하루만 더'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대화해야 하는가? 왜 소통해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관한 답이 SF의 외피와 드라마의 내피 안에서 이루어진다. 역설적으로 SF가 가장 현실적인 장르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담겨있다. 인간은 끝없이 우주를 들여다보고 밝히고 설명하고 싶어 한다. 왜냐고 묻는 것이 인간의 몫, 묵묵히 있는 것이 우주의 몫. 왜 우주는 그곳에 있는가? 왜 인간은 여기에 있는가? 이 넓은 우주에서, 인간은 무엇이며 왜 숨 쉬는가? 숨쉬기를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때로는 상상과 모험으로 끝날지라도 SF 영화는 드라마와 액션을 빌려 이 질문을 던지거나 답을 해오려 노력한 것이 분명하다. 모르는 것을 통해 아는 것을 정리하고 광활함을 통해 티끌을 본다.
 

 

 

 

 

나는 죽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나간 영혼의 과거가 무한한 긴장으로 퍼덕일 떄가 있다. 파묻혀 있던 경험이 현재로 온전히 되살아올 때가 있다. 리듬이 획일성과 균형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때는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에 으레 따르는 공포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죽음이 떠오르며 삶의 절정에서 추락한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잠시 에밀 시오랑의 책을 들여다본다. 영화 속의 어떤 시퀀스는 불면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문장과 만난다. 조용히, 어둡게. 그러나 그 접점을 밝히는 빛은 우주에서 본 지구의 엷은 막을 닮았다. 불면증과 프랑스어의 철학자.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자식에게 라틴어 이름을 지어주었던 사람. 육체의 불면으로 하여금 육신 없는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던 사람. 시오랑에게 있어 삶은 객관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이 아닌, 그 자체가 혼돈이고 무질서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나타나는 또 한 번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와 질서로 체계를 부여하는 대신 시오랑은 자기 스스로, 자기만의 답을 찾기를 원한다. 삶은 분명 파편화된 비논리적인 무엇이다. 주관적 경험의 진실로도 그는 삶의 허무와 권태의 구멍을 굳이 꿰매고자 하지 않는다. 알폰소 쿠아론이 그저 광활한 우주와 멀리 있는 지구를 보여주듯 에밀 시오랑도 죽음, 허무, 절망, 고독의 찬 공기를 그대로 우리에게 들이민다. 자신의 힘으로 이 무섭고 어둡고 광활한 곳을 침묵으로, 혹은 광활함으로 느끼게 하는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노라면 오히려 그 끝에 해뜨기 전의 풍경이 보인다. 하늘 아래 없는 새로움을 찾으려면 하늘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지구에서는 지구를 볼 수 없듯이. 여닫음조차 느낄 수 없듯이.
 
 

 

 

 다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그래비티'로 눈을 돌리자면, 이 영화의 제목 '그래비티'는 오프닝이 아닌 엔딩에 등장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제목 대신 영화를 여는 것은 초반 이십여 분에 이르는 롱테이크. 광활한 우주를 보여주고 태양이 빛을 비추는 지구의 나일강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초보 우주인 라이언(산드라 블록)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그녀의 눈, 코, 입을 바로 앞에서 들여다본 다음 다시 우주가 우리 시야에 들어올 때, 우리는 알 수 있다. 지켜보는 것이 겪어내는 것의 범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강요된 몰입이 아닌 효율적인 이입을 알폰소 쿠아론은 지나치지 않는 선 안에서 카메라 처리 하나로 해냈다. 그리하여 광활한 곳에서 티끌과도 같은 존재가 겪는 질문의 이야기를 형식과 내용의 합일점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때때로 슬며시 등장하려는 자기 고백과 도취, 독백의 감상과 허무주의마저 걷어내는 우주의 객관적인 시선을 바라보자면, 종종 내용과 형식이 무관하게 뒤섞여 형식이 내용의 시녀가 되거나 잘못 군림하는 예술 작품의 무의미함을 우리가 왜 경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야기하는 자의 필연과도 같은 자아도취를 막고 '무엇'의 핵심에 닿으려면 예술가는 종종 철저한 형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넓음과 좁음. 거대함과 하찮음. 버팀과 흔들림.

 

 

 

 

 이런 것들의 대비와 반전이 알폰소 쿠아론의 형식 안에서 끝없이 충돌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숏 안에서의 움직임이지, 숏과 숏의 연결이 아니었을 것이다. 광활한 우주 안에서 끊김 없는 필사의 움직임이 보인다. 배경은 우주이건만 지구의 모습이 매 순간 의식된다.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결국, 라이언이 닿고자 하는 곳은 중력이었다. 그녀를 죽게 하는 것도 중력이었고 살게 하는 것도 중력. 이 변치 않는 존재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기술적 성취와 인간 내면의 드라마가 만나는 순간, 카메라는 계속해서 공간을 강조한다. 어느 존재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에서 안을 보게 되는 객관화의 능력은 영화 전체와 닮았다. 기술이 인간 내면의 잎사귀, 가지, 줄기를 거쳐 뿌리까지 연결될 때, 우리는 이것을 영화라고 부른다.

 

 

 

 

 
절망의 끝에서는 부조리에 대한 정열만이 혼돈을 악마 같은 광채로 치장한다. 어떻게 삶을 허무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영화를 닫는 것은 그 육중한 제목이다. 시작이 아닌 끝에 나타나는 제목. 라이언의 오디세이. 그래비티는 라이언이 도달해야 할 지점의 핵심이었다. 드러나지 않음으로 나타나는 거대한 무엇. 결국, 라이언을 살리는 것도 중력이고 죽이는 것도 중력이었을 것이다. 끌어당기고 위태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흔들리게 하고 죽고 싶게 만드는 존재. 인간은 내면의 깊이만큼 흔들린다. 그러나 진동과 진폭의 그래프가 늘 제 1 사분면만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살고 싶음과 죽고 싶음의 시소와도 같은 움직임 사이의 균형을 생각해 보면, 흔들림이야말로 인간을 버티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약함이 강함이 되고 흔들림이 동력이 된다.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반비례 속에서, 라이언은 우주의 고요함을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우주를 싫어한다고까지 말하게 된다.
 

 

 

 

 
 사랑하는 존재가 좌절케 하는 존재로 돌변한다지만 이때마저 그 존재 자체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우주는 그대로, 파편도 그대로, 지구도 그대로. 오직 인간만이 그들의 당연한 움직임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맛본다.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행복할 때는 인간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할 때는 모든 것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라이언의 딸이 죽었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인지를 묻게 되고 그 아이를 만나거든 어떤 말을 전해달라는 말을 라이언이 할 때, 그것은 결국, 생명이 왜 생명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그래비티에서 이 물음이 그저 모험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그래비티가 나름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기 때문이다. 십 분 안에 타죽거나 살아 귀환하거나 둘 중 하나. 이유가 없고 선택이 있을 뿐인 무수한 갈림길에서 생명은 그 자체로 살고자 하는 당위를 지닌다.
 

 

 

 

 생각을 처음으로 거슬러 가면 이 생명의 당위와 영화의 당위가 만난다.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가? 이 질문은 곧 '왜 영화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역설적 질문이 되기도 한다. 그래비티는 기술적 성취, 우주의 서사, 내면의 드라마, 질문과 답이 만나는 황금 비율을 과장 없이 잡아냄으로써 자신만의 답을 찾는다. 형식과 내용, 주제의 예술적 성취를 제목으로 갈무리하는 한편의 시. 그래비티는 영화가 있어야 할 지점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영화다.

 

 

 

 
 
 
 
 
 
 
 

 

 

 

You have to learn to let go.

 

영화 속 맷 코왈스키의 대사 한 줌이 영화 포스터 속 숨소리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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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1-0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뭇 감동적인 영화에 감탄스러운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 또한 시종일관 또는 시시각각으로 피부에 와닿는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 문제인 '삶과 죽음'에 대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에 놀라고, 또 그런 진지한 주제를 SF 영화가 그토록 절박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더더욱 놀랐어요.

더군다나 이 영화의 무대가 '우주'인 이상 '삶과 죽음'을 넘어선 '세계의 본질'까지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에도 놀라게 되는데, 사실 '중력'이라는 영화 제목 자체가 굉장히 무거운 철학적 주제인 것도 그런 경향에 한 몫 거드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읽고 나니 '목표도 한계도 없는 무한한 노력'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이 '중력'이라고 말한 어느 철학자의 말도 떠오릅니다. 그 철학자의 말마따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분명히 불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노력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중력'인데, 스톤박사가 죽기살기로 애쓰며 '무중력 공간'에서 탈출해서 다시 되돌아온 곳이 결국 '중력'이 지배하는 지구임을 떠올리면 '존재'의 궁극적 한계를 떠올리게도 되고, 결국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더이상 '왜'라고 물을 수도 없는 '지점'까지도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참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가 '중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구요.

* * *

실제로 목표와 한계가 없다는 것이 무한의 노력인 의지의 본질이다. 앞서 원심력을 언급했을 때에 말했지만, 그것은 의지의 객관성 가운데 최저 단계, 즉 중력에서 가장 간단명료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며, 그 궁극적인 목표가 분명히 불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중력의 노력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중력의 의지에 따라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덩어리 내부에서 중력은 여전히 중심점으로 향하려고 하면서, 강성 혹은 타성인 불가입성과 투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노력은 언제나 저지당하기만 할 뿐, 절대로 채워지거나 완수되는 일은 없다. 모든 의지 현상의 노력은 이것과 똑같다. 목표가 달성되면 또다시 새로운 진로의 기초가 되고, 이렇게 한없이 계속된다. 식물은 자기의 현상을 싹으로 시작하여 줄기와 잎을 거쳐 꽃과 열매로까지 높이지만, 열매는 또다시 새로운 싹, 즉 새로운 개체의 시작에 불과하며, 이것이 또 처음부터 경로를 따라서 자라며, 한없이 계속된다. 동물의 생활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다. 생식이 동물 생활 과정의 정점이고 이 정점에 도달한 후에는 그 처음 개체의 생명은 급속하게 혹은 서서히 쇠퇴하지만, 그 대신 새로운 개체가 자연에 대해 종의 유지를 보증하며 같은 현상을 되풀이한다. 뿐만 아니라 각 생물체의 끊임없는 갱신까지도 이 영구적인 충동과 변화의 단순한 현상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 쇼펜하우어

Jeanne_Hebuterne 2013-11-18 09:01   좋아요 0 | URL
oren님, 영화 참 좋았지요? 이렇게 단순한 토대로 이렇게 직접적으로 핵심에 달하는 군더더기 없는 영화를 만난 것이 오랜만인지라 더 그랬나 봐요. 그러고 보면 가장 감동적인 작품은 필연적으로 객관적이어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구석을 최대한 많이 확보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오렌 님이 지적하신 중력도 그렇지요. 제목 자체가 no gravity가 아닌 gravity인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제목을 덧붙여 이야기를 완결하는 이런 방식이 참 재미있었어요.

겨울 초입, 잘 지내고 계시지요? 앞으로도 좋은 영화, 음악, 책으로 겨울을 가득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

paviana 2013-11-01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아직 못봤어요. 솔직히 극장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극장에서 본 마지막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인사하고 싶었어요.
이 가을 잘 지내고 계신가요?

Jeanne_Hebuterne 2013-11-18 08:24   좋아요 0 | URL
댓글을 확인한 지금, 늦가을과 초겨울의 문턱입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이도 계속 먹게 되는군요. 친근한 퍼스나콘을 보니 마음이 포근해지기도 하고요. 그냥 인사, 정말 고마워요, 파비아나님. 잘 지내시기를 바라요.

다크아이즈 2013-12-05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님 잘 계시지요?
저도 봤어요. 그런데 이런 리뷰는 꿈도 못 꾸지요.
저도 그냥 안부 전하고 싶었어요.
변함 없는 님....^^*

Jeanne_Hebuterne 2013-12-07 18:06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오랜만이어요. 팜므느와르님의 폭넓은 독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지난 11월에는 한 권도 읽지 않은 저를 반성했답니다. 아마 알라딘 서재 활동하시는 분 중 가장 책 안읽는 사람이 저일 것 같아요. 어설픈 재주로 아무것도 안하고 놀기만 한 것을 숨기려 했는데,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셔야 해요!

나무그늘 2014-03-3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비티를 보고 나서 에밀 시오랑의 글과 관련해서 글을 하나 쓸까 생각했는데,
님이 먼저 생각하셨네요. ㅎㅎ

근데, 님의 서재와 와서는 내게 맞는 제대로 된 클래식 음반 뭐 살까 자극 받고 갑니다. ㅎ

그래비티가 극장에 상연할 때 이 서재를 알고 들리다가 이제야 글 남겨요.

Jeanne_Hebuterne 2014-04-02 11:44   좋아요 0 | URL
나무그늘님, 그래비티와 에밀 시오랑, 둘 다를 잘 보셨군요?
누가 먼저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분명 같으면서도 아주 다른 것을 생각했을텐데요. 나무그늘님의 단상도 무척 궁금한걸요!

그래비티는 정말, 제대로 잘 구운 스테이크 같았습니다. 장식 없이 한가지로 정면승부하는 간단한 영화의 힘을 느꼈어요. 잔재주도 없이, 꾸밈도 없이 카메라와 연기, 간결한 주제로 말하는 영화를 아주 오랜만에 보았기에 더 좋았습니다.

클래식 음반, 참 많지요? 저도 종종 이 많은 음반 중에 내가 어떤 것을 들어야할지를 잘 몰라 주변에 조언을 구해보고, 고민도 많이 해보고 몇가지 구입하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화와 책, 음악이 있어서 숨쉬는 것이 종종 더 견딜만한 것이 되기도 해요.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것을 찾는 것이 인간이라서요.

종종 소식 남겨주세요. 나무그늘님의 재미있는 생각도 기대합니다.
 

작은 별 아래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서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데도,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달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어느 날

 

 

눈꺼풀이 물에 젖은 새의 날갯죽지처럼 축 처져 어디론가 밀려갈 듯한 담요 속.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물기 어린 얼굴이 거울에 아른거린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 하루가 조용히 깨어나는 시각.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말리고 살짝 내려앉은 먼지를 못본 척 하며 집을 나선다. 그 어 느날, 늦은 시각 탓에 고개를 떨군 탓에 못본 사이 집 근처 신축 빌딩은 어느새 콘크리트를 다지던 그 모습에서 벗어나 제법 건물의 외양을 갖추었다. 하룻밤새 창문을 가리는 건물이 생겼다. 거리에는 낯선 억양과 날 선 얼굴이 보인다. 열두 달 다른 열두 개의 얼굴이었다. 저녁, 스스로 몸을 추스르며 조용한 공간에서 버튼 하나를 살짝 건드리면,




어느새 가득한 음악.



바쁘겠지만 

먼 길을 돌아가야 하겠지만 



결국 

 


 


돌아오는 어느 귀퉁이가 있을 거란 생각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던 어느 날 하루.

 

 


 



 

 

드보르작 8번 교향곡.

 

 

케르테츠와 런던 심포니의 조화로움과도 같은 잘 짜인 틀이 하루 종일 그리웠던 어느 날. 그 끝에서 듣는 한 자락. 차분하다가도 어느 순간 격렬해지고 윙윙거리는 말벌떼 같은 현의 목소리가 그득하다. 목관의 목가적인 맑은 고요함, 때로는 호흡조차 영원히 멈추지 않을듯한 플루트, 살며시 감싸며 흘러나오던 왈츠. 체코의 국민 작곡가였으며 32세 처음 작곡을 시작하여 브람스의 인정을 받은 드보르작의 8번 교향곡은 은근히 민족적인 색채가 곡에 스민다. 유유자적 느긋하다가도 휘몰아치고 밝은가 하면 어두워지지만, 전반적으로 중언부언하지 않는 힘이 느껴진다. 

 


 

첼로, 클라리넷, 호른이 플루트와 함께 여는 1악장. 


아다지오의 2악장은 규칙을 벗어나려고 한 듯한 개성. 은근한 밝음과 함께.


유난히 로맨틱한 3악장. 목관이 깔아둔 카펫 위를 바이올린이 미끄러진다. 마치 인간의 목소리 같은 오보에와 플루트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마침내


트럼펫이 시작하여 수차례의 변주를 거친 끝에 처음, 1악장의 G장조로 되돌아가는 이 길을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한밤, 깜깜해서 별도 보이지 않는 시월의 찬 바람. 

 

 

 

 

어느 날

 

 

 

뜀틀 같은 날. 고개를 들어 무심히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다 내 얼굴을 어딘가에 비추게 되었던 날. 몸을 살짝 숙이고 무채색 공기를 내 몸속에 울리게 하면, 누군가에게도 그게 전해질까? 괴괴한 공기. 머무는 공간의 나무 탁자. 내가 곧 조금씩 사용해 가며 길들일 가죽 지갑. 처음이 중요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중요한 때에 사용하려고 생각한 정겨운 사물들. 그 아래 놓인 오늘의 음반을 뒤적여 본다. 그리하여 플레이어에 넣은 시디는 박하우스와 칼 뵘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빌헬름 박하우스.

 

 

요즈음에는 각 국가별 연주자들의 특성이 점차로 흐릿해져가는 추세이지만 그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그 경계가 지금에 비하여 또렷했다고 한다. 독일인의 작품을 연주하는 독일인. 그는 베토벤과 브람스의 충실한 해설자였으며 별명인 '사자왕'답게 강력한 타건, 풍성한 격차를 만들어냈다. 칼 뵘의 빈 필하모닉과 협연한 레전드 시리즈의 모차르트, 브람스 협주곡. 담담한 모차르트와 우아한 브람스. 건반을 스치는 손끝은 깨끗하고 음향의 폭은 넓다.

 

 

 

명반으로 손꼽히는 이 음반 속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1952년 모노 사운드이지만 칼 뵘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박하우스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일체감 측면에서 볼 때 모노 사운드가 (내게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단순히 독주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닌 서로의 반응에 따라 담담하게 진행 방향을 조절해 가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대화. 브람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한 연주.

 

 

 

 

 

협주곡 구성으로는 보기 드문 4악장 구성인데 스케르초 풍의 2악장이 덧붙여져 협주곡과 교향곡의 단계를 넘나드는 구성을 보자면 브람스가 만들고자 한 것은 아마도 피아노 협주곡이 아닌 피아노가 함께 하는 교향곡 정도가 아니었을까. 1번과 2번 사이 틈이 무려 20년이다. 20년간의 시간, 20년간의 생각. 그 끝에 드러나는 2악장의 스케르초. 그는 완성 직후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 '사랑스럽고 연약한 스케르초의 작은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라고 썼다고 한다. 브람스가 일컬은 작고 사랑스러운 세계가 풍기는 장대하고 원숙한 느낌. 독주 악기에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아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동등한 조화로움을 엿보고 싶을 때 듣게 되는 음반.

 

 

 

 

처음 문을 여는 호른의 솔로. 따뜻한 주제를 이어받는 피아노.

뒤를 받쳐주는 당당한 현악의 1악장.

 

단호한 피아노. 뜨거운 스케르초의 2악장.

그 끝이 무겁고 화려하다.

 

현악으로 여는 3악장.

끓어오름을 식히는, 아득하게 펼쳐지는 클라리넷.

 

생기 넘치게 마무리하는 경쾌한 4악장.

이 네 개의 얼굴이 차츰, 가을빛.

 

 

 

 

 

 

어느 날


 

짧게 깎은 머리카락처럼 무심한 하루. 전화기 속에서, 종이 속에서, 컴퓨터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누군가를 불러내는 하루. 누군가 잊힐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꼭 알고 있는 것을 더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날. 전 날의 도돌이표, 그 다음 날의 못갖춘마디. 계절을 더 깊게 만들던 시간. 그래서 마주치게 되는 가을, 리히터의 쇼팽. 

 

 

 


 

루빈슈타인의 쇼팽은 따스하다. 겨울밤 담요 속.

모라베츠의 쇼팽은 몽글몽글하다. 김이 서린 창가.

리히터의 쇼팽은 차갑다. 찍어누르는 청명하고 분명한 대답.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네이가우스에게 영향을 받았으나 그 전에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히고 1960년 미국 방문을 시작으로 바흐의 평균에서 쇼팽, 차이콥스키, 슈만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남겼다. 얕은 곳에서 슬쩍 비추는 것이 아닌 깊은 긴장과 집중력을 바탕으로 한 기본에 충실한 연주.

 

 


'추격'이라는 부제로 유명한 쇼팽의 에튀드를 시작으로 펼쳐지는 이 음반 속 리히터의 피아노는 하나같이 명료하다. 따스하고 섬세한 손놀림의 루빈슈타인, 슬쩍 비눗방울을 만들어 내는듯한 모라베츠의 쇼팽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고 간단하다. 방대한 레파토리, 충실한 해석,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개성. 음표와 음표 사이의 빈 공간을 시간으로 불러내는 그의 강력하고 정직한 연주를 들으면 그는 필시 피아노의 한계가 아닌 이야기를 불러내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조심스레 든다. 

 


 

오랜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이루어낸 분명함을 듣는 밤과 낮. 일 년의 중턱, 한 달의 중턱, 한 주의 중턱, 이 많은 턱을 넘노라면 무언가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쌓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소리는 그림자를 거두어 어디론가 스며들거나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무엇이 되어 있을 어느 날.

 

 

                 가을의 어느 날. 청명면서도 따스한, 세상에 있기 힘들지도 모를

 

 

   무언가를 그리는 오후를 음악으로 처언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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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1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뭐하다 이제야 나타난겁니까 쟌님. 이제나저제나 이 서재를 들락거렸단 말입니다.
어느날 중의 한 날인 오늘,
쟌님이 다시 나타났네요.

Jeanne_Hebuterne 2013-10-26 13:1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잘 지내셨지요?
이제 가을이에요. 하늘이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맛있는 것도 많아지는 계절이지요? 다락방님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해서 다락방님 서재에서 기웃기웃 까치발을 들고 들여다봐야겠어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

레와 2013-10-1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갔다 왔어요!

Jeanne_Hebuterne 2013-10-23 12:07   좋아요 0 | URL
레와님!
제가 요즘 좀 정신이 없어 이모양이어요. 흐흑. 잘 지내시지요? 레와 님 사진 보고 싶어요! 언제 또 전시회 안하시나, 은근 기다리는 1인!

dreamout 2013-10-1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리히터의 슈베르트를 요즘 제법 듣고 있는데. ^^

Jeanne_Hebuterne 2013-10-26 13:11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아, 리히터의 슈베르트를 듣고 계셨군요! 많이 궁금한 연주자였답니다. 가을에 듣기 좋지요?
 

 



 누군가가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 에서 생트 콜롱브가 간직한 보쟁의 정물 한 점.


내게는 바니타스의 속성을 보여주는 이 정물을 물끄러미.




 살짝 머금었다 삼키는 와인 향이 가을이었다. 더워도 물기를 가득 품어도 멈추어도.


 시간을 잊은 듯, 멈춘 먼지 속 고즈넉함.


 째깍, 하는 짧은 공간 넓게 가라앉은 글씨.


 이제 곧 시계가 빨리빨리를 외치면 불어올 차가운 입김.


 가을이 또 하나 쌓일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숨결을 듣는 시간. 

 화가의 붓질 소리. 수프 한 그릇 위에 아른거리는 뜨거운 공기. 

 들뜬 높음이 서서히 몸을 숙이고 가을을 맞는 몸짓.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듯한 체온을 새로이 느긴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풀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긑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내고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맞춘다-나의 시와 함께




김현승, 절대고독




 

 아쉬운 일, 안타까운 일, 작은 성취를 느꼈던 일, 아름다움에 눈을 감았던 무엇.

 어린아이가 누는 오줌 소리, 깊은 밤, 바람에 흩날리던 물소리. 

 여기와 저기의 구분이 없는 목소리, 나룻배를 타고 가서 닿는 세계.





 

아내가 그 옆에 온 것을 아홉번째 느낀 때는 봄이었다. 1679년 6월 대 박해가 있었던 해였다. 그는 탁자 위에 포도주와 고프레를 담은 접시를 꺼내놓았다. 그는 오두막에서 연주했다. 그는 순간 연주를 멈추며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죽었는데 어떻게 여기 올 수 있는 거요? 내 나룻배는 어디 있소? 내가 당신을 볼 때 흐르는 내 눈물은 어디 있소? 이게 정녕 꿈이란 말이오? 아니면 내가 미친 거요?"

 "불안해하지 말아요. 당신 나룻배는 강가에서 오래 전에 썩었어요. 저곳 세상은 당신 배처럼 그렇게 견고하지 않아요."

 "당신을 만질 수 없어 고통스럽소."

 "바람 말고는 만질 게 하나도 없어요."

 





 파스칼 키냐르는 1948년 노르망디 지방의 외르에서 태어나 1969년 '말더듬는존재'로 문단에 데뷔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의 책 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를 훑어보면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의 영향, 5개 국어 습득,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센터의 임원, 혈관 파열, 이런 낱말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시간 말없이 생각 속에서 살아온 사람의 담대함, 맑고 조용하지만 정확한 눈빛을 보여주는 그의 글은 소리와 냄새, 촉각과 모양의 감각을 일깨운다. 시간을 '옛날'과 '지난날'로 떠올리곤 하는 그의 글은 산문이면서 운문이기도 하며, 문학인 동시에 음악이기도 하다. 




 언어가 이루는 성취, 인간이 몸속에 품은 태초의 기억을 일깨우는 그의 글은 순서대로 말 더듬는 존재, 뷔르템베르크의 살롱, 샹보르의 계단, 세상의 모든 아침,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등이 있다. 1996년 갑작스러운 혈관 출혈로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글쓰기는 크게 변하고, 중국과 일본 여행 이후 그 변모된 글쓰기의 첫 결과물인 '은밀한 생', 그리고 그 이후 '로마의 테라스', '마지막 왕국', '빌라 아말리아' 등을 살펴보면, 그의 문학은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 시, 수필, 우화, 민화, 잠언, 단편, 이론, 인용, 사색, 몽상이 모두 뒤섞인 글. 글씨가 스치는 소리조차 만지지 않으려는 개인의 흘려보내는 성취.





 혈관 출혈 이후 '내 안에서 모든 장르가 무너졌다'고 말하는 파스칼 키냐르. 엄청난 독서의 흔적.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경계를 없애는 글쓰기. 아는 것을 가장 많이 모르는 것으로 바꾸고 무언가를 흘려보내는 듯 하지만 조용히 그 층층 쌓인 구조를 말푀유처럼 조밀하게, 그러나 뭉텅이 채로 내놓는 손길. 자신의 글을 보아 내면서 '덧없는 글들'이라는 제목으로 내고, 자신의 지식을 '박학적 무지'로 말하는 글에는 일관되게 근원에 관한 탐구, 방향성 없는 시간, 부드럽게 연속되어 하나가 되었으나 파편화된 세계를 노래하는 작가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그건 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틀렸네. 신은 말하지 않는가."

  "그럼 귀를 위한 것입니까?"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이 귀를 위한 것은 아니네."

  "그럼 황금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 황금은 들을 수 없지."

  "영광입니까?"

  "아니네. 그건 명성에 불과하네."

  "그럼 침묵입니까?"

  "그건 언어의 반대말에 불과하네. "

  "경쟁하는 음악가입니까?"

  "아냐!"

  "사랑입니까?"

  "아니네."

  "사랑에 대한 회한입니까?"

  "아니네."

  "단념을 위한 겁니까?"

  "아니야, 아니야."

  "보이지 않는 자에게 바치는 고프레를 위한 겁니까?"

  "그것도 아니네. 고프레가 뭔가? 그건 보이지 않나. 맛이 나고. 그건 먹는 거 아닌가. 그건 아무것도 아니네."

  "더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죽은 자들에게 한 잔은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자신을 태우게나."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누군가가 먼저 어루만졌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스미는 차고 따스함 속에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책이 이렇게 내 손에 있고, 이 영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손끝에 잡힌 치맛자락 주름이 다시 펼쳐지지 않듯 한 번 지나간 소리는 다시 오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문장, 아내가 죽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혈관 파열 이전 그가 쓴 '세상의 모든 아침'은 상실로 시작하여 음악, 예술, 사랑, 괴로움, 죽음을 펼쳐나간다. 그 속에 살랑이며 보이는 것은 말 속에 숨은 시, 소리 뒤에 감춘 삶이다. 




  알면서도 흘리는 것. 감췄다는 것을 알고도 굳이 잡지 않는 것. 심연과 망각, 흐르는 무엇. '세상의 모든 아침' 속에는 길게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음악이 잡힌다. 들리지 않는 움직임은 유리 상자 속 나비일 뿐,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차가운 유리 벽이 있다. 파스칼 키냐르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글씨를 햇빛 아래, 안갯속에, 작은 오두막 속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보는 것 이면에 흐르는, 우리의 귓바퀴를 울리는 친숙한 소리. 그리고 가끔 반짝반짝 들리는 언어의 숨결. 






 영화 속 나이 든 마랭 마레는 '모든 음은 죽어가며 끝나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일은 자연의 일이고, 어쩔 수 없이 무심한데 인간만이 그것을 붙들고 묻는다. 사랑인가? 경쟁인가? 회한인가? 무슨 의미인가? 하고. 말이 혀끝에서 맴돌다가 마침내 귓바퀴에 닿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덧붙이고 고치고 바로잡는다. 이미 끝나버린 무언가를 다시 잡으려는 노력은, 흐르는 물줄기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가 안은 태생적 한계이다.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무엇. 파스칼 키냐르가 걷는 그 길의 무엇인가는 굳이 그 무엇이 되려 애쓰지 않는다. 제자는 구태여 묻고 스승은 답한다. 방향과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자와 그저 흐를 뿐이라고 바라보는 자의 대화. 손에서 모든 것을 스르륵,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두고 나서야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난함. 답은 질문을 전제한다. 마랭 마레의 질문을 따라가노라면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니라는 대답을 따라가다 보면 음악은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음악은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음악 뒤에 숨은 문학과 예술의 그림자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랍니다. 




 

"왜 연주하시는 작품을 출판하지 않습니까?"

 "아,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작곡을 하지 않아. 난 절대 악보를 쓰지 않아. 내가 가끔 하나의 이름과 기쁨을 추억하며 지어내는 것은 물, 물풀, 쑥, 살아있는 작은 송충이 같은 헌물일세."

 "선생님의 물풀, 송충이 안에 음악이 어디 있는데요?"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영화에서는 소설 속의 낱말을 담금질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의 구도를 더 명확히 한다. 배우는 이의 세계를 부순 다음 다시 하나하나 채워가는 생트 콜롱브의 음악을 조용히 따라가 보노라면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파스칼 키냐르는 일부러 만들어진 아름다움, 작고 유쾌한 재주를 염두에 두지 않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 영화와 소설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도 '세상의 모든 아침'앞에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일거란 생각도. 그러나 더 분명해지는 느낌 한자락. 파스칼 키냐르는 '말을 하고 음악을 듣는 살아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없었을 그 최초의 기억에 다다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늘 품고 있는 사람일거라는 작은 생각 조각.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나룻배마저 썩은 경계가 없는 공간. 끊어지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는 시간 속의 사람. 무엇이 아니라 그 무엇의 근원에 가 닿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이것이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고, 보고, 듣고, 사는 내게 파스칼 키냐르가 남긴 단 하나의 숙제일 것이다. 



지금 여기, 더 넓고 깊게. 




그리고 바로크 고음악이 귀 끝에 닿으면, 이제 가을. 







비올은 비올라 다 감바와 비올라 다 브리치오, 즉 다리에 끼우고 연주하는 방식과 팔로 들고 연주하는 방식에 따라 나뉘었는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는 비올라 다 감바가 유행이었다고 전한다. 르네상스, 로크 시대 악기를 재현, 연주하는 스페인 출신 고음악 연주자 Jordi Savall이 이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아 작업하였다. 그는 시대악기 오케스트라인 르 콩세르 드 나시옹을 만들기도하였는데, '세상의 모든 아침'에 흐르는 음악은 자신이 르 콩세르 드 나시옹과 함께한 것. 






*김현승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인용문은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발췌.


*칼뱅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의인화된 알레고리, 트롱프뢰유와 바니타스, 혹은 포르루아얄파와 자유 사상파, 그럼에도 똑같은 사랑, 똑같은 단념, 똑같은 밤, 똑같은 추위. 파스칼 키냐르가 스치듯 배경으로 준비한 이 많은 무엇과 무엇들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으면 더 생생하거나 생경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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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답을 얻는가는 어떤 질문을 했는가에 달려있다.

-토머스 쿤





 실크햇에서 비둘기가 나타나는 순간.

 소리가 보이고 이미지가 드러나고 조형이 그려지는 순간.

 타인의 재능을 누린다는 속설에도 끊임없이 창작하는 사람.

 나는 앞서 말한 순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람이 바로 영화를 만드는 모든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야 개봉일에 설국열차를 관람한 후 탄 지하철에서는 묘한 덜컹거림이 느껴졌다. 꼬리 칸과 앞칸, 무임승차를 한 가난한 이들과 철도 덕후, 존엄을 보여주는 지도자와 힘없이 바스러지는 사람들.

 봉테일이라고 불릴만큼 디테일에 능하다는 감독, 콘티를 짜는 데 거침이 없는 감독. 한 작품에 컨셉 아티스트를 셋이나 둔 영화, 헐리우드의 자본과 시스템이 더해진 유명 배우들의 연기. 틸다 스윈튼,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를 함께 보는 즐거움.

 


 









 숨이 가쁜 질주와 정교한 액션. 크리스 에반스의 액션은 잘 짜여진 가운데 고속촬영과 망원렌즈의 사용으로 인해 우아하고 고전적으로까지 보인다. 정확한 동선의 슬로 모션을 보노라면 '저 속도로 대체 언제 엔진까지 간단 말인가?' 하는 한탄이 들다가도 칸칸이 나타나는 역사 진행 방향을 보노라면 이 모든 봉기와 저지는 필연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엔진 칸까지 쉼 없이 달려가다가 그 직전 호흡을 멈추고 쉼표를 찍은 다음에, 그리고 마침내 그다음 칸에 가서는 180도 돌려세운 방향과 앵글을 볼 때, 그 필연의 리듬에 살짝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 의문 끝에서 맺어지는, 앞으로 앞으로 가는 커티스의 방향과 옆을 틈틈이 바라보는 남궁민수의 시선이 빚어내는 생태학의 고리. 






 그 고리와 순환 속에서 연민은 제 스스로 몸집을 작게 했다. 안녕, 하고 작게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감독의 차가운 시선을 보노라면, 그의 연민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각도를 튼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살짝 든다. 맡은 역을 하면 정확히 다음 칸에서는 결코 다시 나타나지 않는 죽은 이 처럼, 배우들은 캐릭터에 철저히 종속되어 소비되고 열차의 칸은 사람의 역할을 단칼에 나누는 듯하다. 돌격과 저지 이외의 상호작용이 배제된 듯하지만, 열차의 모든 칸을 훑고 나면 기차의 앞과 끝은 결국 한 사회 속에서 움직이는 유기체로 호흡하며, 그 속 각자의 자리가 유지되거나 허물어진 작은 세계가 보인다. 그 세계 안의 힘은 서로 밀고 당기며 앞으로 나아가거나 옆으로 새어나간다. 


 


 



 




















 


 

잠시 스크린에서 눈을 돌려 종이로 내 손에 만져지는 활자를 들여다본다. 매체가 다르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르지만 결국 이 두 작품-설국열차,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은 같은 그림을 보여준다. 창작자가 그의 작품을 어떻게 다루고 배열하는지를 전작에 비해 냉엄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이전 봉준호 감독의 작품과 달리 약간 우둘투둘한 결을 보인다. 작가와 작품은 종종 인과성에서 어긋나 이렇게 다르게, 팔딱팔딱. 그래서 설국열차의 원작도,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도 아닌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되었다.





 당신이 보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은 그로 인해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본 것이 맞는가? 하는 일련의 질문에 관한 물음 이전에 가십이 설국열차에서 먼저 새어 나왔다면,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에서는 창작자의 두려움, 예술에 관한 두려움, 이해와 인정, 지지라는 문제, 예술 안팎의 세계에 적응해야 하는 창작자의 어려움, 아이디어와 기교, 예술과 공예, 은유와 자기참조 등의 문제를 폭넓고 쉽게 다룬다. 창작자와 그의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관한 이해를 돕는다. 답지가 아닌 지침서로 이 책을 참조하면, 종종 나는 지나치게 내 주관을 앞세워 몇몇 작품을 감상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뒤돌아보게 된다. 이를테면 헨리 제임스가 남긴 이러한 구절을 만난 순간.


 

 



 


 작가 헨리 제임스는 예술가의 작품에 대하여 제기할 수 있는 생산적인 질문 세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첫 두 질문은 천진할 정도로 정직하다. 즉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공했는가?"이다. 그리고 재기 넘치는 세번째는 이것이다. "창작할 가치가 있었는가?"

 이 분류는 첫 두 질문만으로도 인정할 만하다. 이 질문들은 예술을 현실 세계의 가치과 경험에 비추어 직접 검증할 수 있는 수준에 두고 보게 해주며, 감상자가 창작자의 시각을 감상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해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간단히 말해 행동주의, 페미니즘, 후기모더니즘 등 온갖 미학적 여과기를 거치지 않고 작품 그 자체를 대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 세 번째 질문, "창작할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는 진정 우주를 여는 질문이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예술 문제들은 그 본질이 다른 것들보다 더 흥미로운가? 더 적절한가? 아니면 더 의미있는가? 더 어려운가? 또는 더 도발적인가? 현시대의 모든 예술가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맞춰 춤추고 있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에서 

 


  

 


 스크린으로 다시 눈을 돌리면, 봉준호가 하려 했던 것은 계급투쟁의 이야기가 아닌 사회생물학의 구심점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존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도 않다. 생존자의 숫자, 인종은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 더 중요한 핵심이 따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칸칸이 나가는 남자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내딛는 곳도 전체 궤도에서 그다지 중요한 지점은 아니다. 단지 어떤 생명체는 앞으로 나가고, 또 다른 생명체는 옆을 계속 바라본다는 점이 계속 엇박자로 드러났다. 전진과 관찰의 정점이 바로 엔진 바로 앞 칸, 배우 송강호와 크리스 에반스의 대화로 우리 앞에 드러났을 뿐이다. 이보다 더 명확하고 분명한 메세지를 그가 던진 적은 없었다. 



 


 


 이 가로 세로의 축 위에서 어쩌면 봉준호는 아직 세상에 유일한 하나의 규범을 만들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미학적 관점에 대해서는 자신 나름의 기준을 이 감독이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많은 이들의 기차라는 제한된 세트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장면의 박진감, 혹은 액션의 뒷이야기를 하지만 어쩌면 봉준호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이 책,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를 뒤적여보면, '아이디어' 및 '자기 복제'의 관점에서 드러나는 어떤 한계는 기술이 오히려 너무 쉽다는 것에서 온 문제였다. 관객이 느끼는 현란하거나 단조롭거나 아름답거나 추한 모든 장면의 이미지와 소리로 드러나는 느낌은 결국 감독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설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기능 올림픽이 아닌 아이디어의 세계이다.


 



 이러한 또렷한, 감독의 머릿속의 어떤 부분이 형상화된 세계 속에서도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이 존재한다. 만약, 내게도 그런 미는 힘이나 당기는 힘이 있다면 어떤 존재에 있어 내가 당기는 만큼, 혹은 미는 만큼의 탄성이 다시 내게 전해질 것이다. 그것이 칼이라면 탄성이 느껴지는 순간 멈추어야 할 것이고 펜이라면 계속 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회라면 어떨까.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윌슨은 한 생물이 성적 활동을 넘어서 상호작용을 해야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정의를 내린 적 있다. 집합체, 군체, 개체, 집단, 이들이 하는 것은 교류와 상호작용이다. 얼음까지 뚫고 달리는 설국열차 안에서 커티스라는 개별의 개체가 열차 전체의 집단을 훑고 지나가며 마침내는 집합체 내에서 충돌하는 이야기. 이 내러티브를 다루는 화술은 어쩌면 천지개벽과 같이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이보다 더 효율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와 그럼에도 창작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분해야 한다면, 이 영화는 당위가 아닌 존재로 설명되어야 옳다. 





 그러므로 설국열차는 열차라는 닫힌 공간을 바라보는 봉준호의 시선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목적과 출발, 혹은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노라면, 설국열차가 다다르는 목적지가 실은 출발점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실은 내가 설국열차에서 듣고 본 모든 것은 내가 본 것이 아닌 봉준호가 보여준 것이었다. 





 읽고자 하면 보일 것이다. 이때 보는 내 눈에 묻은 읽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닌, 내 눈에 맺히는 무언가의 정체를 들여다보려 하는 일은 늘 영화를 바라보는 내게 지워진 단 하나의 의무였다. 내 입술에 묻은 것과 상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혼동하지 않고 바라보는 일. 이번에 바라본 설국열차는 봉준호가 이제 그 자신의 리듬과 반복으로 자신을 인용해 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변주를 다시금 꾀한다는 상황에 놓였음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닐까?






에셔 <손을 그리는 손>


 



 모든 작품은 앞선 작품에서 필연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어차피 모든 주제는 새로울 수가 없다. 이야기는 가득찼고 새로운 것 대신 이상한 것이 더 쉬울 지경인데, 꼭 모두가 '새로움'에 목말라야 할까? 오히려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왜 그 이야기를 펼쳐 보여야 했는지를 살피는 편이 더 작품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 혹은 저것. 둘 중 하나가 아닌 감독의 앞으로의 행보를 주시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설국열차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하나의 세계를 다루는 창조자로서의 봉준호 그 자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열차가 칸칸으로 이어져 긴 행렬을 만들듯, 아마도 봉준호의 영화도 긴 행렬을 만들듯 싶다. 이 중 어떤 것은 삐걱거릴 수도, 어떤 것은 화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작이 아닌 차기작이 있는 감독의 경우, 종종 자기참조와 반복, 패러디 등이 서로 연관되어 만들어낼 세계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라는 것. 묘한 불협화음과 엇박자의 리듬, 차가운 질감의 설국열차 이후의 창작이 자못 궁금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영감으로, 어떤 사람들은 자극으로, 혹자는 절망감으로 예술을 창조한다. 예술 창조는 위험한 세계, 신성한 세계, 금지된 세계, 유혹의 세계, 그 모든 세계를 맛볼 수 있게 하여 예술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연관될 수 없었을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다. 따라서 사실상 예술 창조란 예술 그 자체가아니라 자신이 찾는 세계와의 연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차이점은 예술 창조는 예술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도록 한다는 점이다. 예술은 곧 접촉이며 예술 작품은 필연적으로 그 접촉의 본성을 드러낸다. 예술 창조를 통하여 예술가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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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8-1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질문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대답을 얻는다'고 말했던 E.E.커밍스의 말이 떠오르네요. 저는 '설국열차'를 아무 생각없이 탔던 탓인지 엔진칸까지 가 볼 욕심도 별로 생기지 않더라구요. 열차칸에서 몹시도 답답하던 차에 그나마 막판에 한방 '뻥' 터트려주는 바람에 시원한 겨울 풍경 속으로 나오고 나니 '숨'을 좀 돌릴 수 있겠더라구요. 집에 돌아와서 다 큰 대학생 아들에게 한 말은 '아들아. 아빠가 네 말을 들을 걸 그랬구나...' 였답니다. '다양한 의견'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 주세요. Jeanne_Hebuterne님의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 * *

다양성

다양성이라는 것은 자연이 좇고 있는 가장 전반적인 방식이며, 정신은 더 부드럽고 더 많은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물질로 되어 있다. 이 다양성은 육체보다 정신에 더 많기 때문에 나는 우리 기분과 의도가 합치하는 것을 보는 일이 더 드물다고 본다. 그래서 세상에 두 의견이 똑같아 본 일이 결코 없었던 것은 털 두 개와 씨앗 두 낱알이 똑같아 본 일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의견의 가장 보편적인 소질, 그것은 다양성이다.
- 몽테뉴, 『수상록』中에서

Jeanne_Hebuterne 2013-08-17 12:09   좋아요 0 | URL
oren님, 설국열차, 보셨군요. 질문과 대답에 관한 경구를 보노라면 제각각의 색채가 또렷해 보이곤 해요. 오렌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엔진칸까지의 행로,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조바심 내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생각을 하는 이도 있었겠지요. 열차칸에서 답답했던 마음, 이해 가요. 막히고 닫히고 폐쇄된 공간이었지요. '문 여는 데 환장을 했나' 하고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던 송강호의 눈빛이 괜한 것이 아니었어요.
겨울 풍경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요. 코카콜라를 보면 곰이 안떠오르는데 그 포즈의 곰을 보면 코카콜라가 자동연상되는 까닭에 많은 이들이 코카콜라를 떠올리기도 했다는 말도 있더군요. 비범한 화술과 의아한 결말의 영화라고도 하던데, 이만큼 이 여름, 많은 관심을 몰고 다니는 영화가 드물 거란 생각을 해봤답니다. oren님의 멋진 댓글, 잘 읽었습니다. 덧붙여 주신 글은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도 다시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곧 가을이에요. 곧, 곧. 잘 보내고 잘 맞이해야 하는 때가 또다시 왔습니다, oren님.
건강하시기를.

saint236 2013-08-16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티스의 전진을 보면서 처음에는 응원을 하다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렇게 앞으로 나가서 어쩌자는 거지? 기관을 차지하면, 기차를 수중에 넣으면 그 다음은? 멈추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이 열차의 주인이 누가 될지에만 관심을 기울이더군요. 그 결말은 마지막에서나 나타나듯이 새로운 윌포드의 강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답답한 마음을 남궁민수가 풀어주지만 이 또한 답답할 따름이지요. 나가서 어쩌자는 것인지? 무엇을 위한 체제의 전복인지는 이야기하지 않더라고요. 봉감독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겟지요?

Jeanne_Hebuterne 2013-08-17 12:14   좋아요 0 | URL
saint236님, 안녕하세요. 영화를 보시면서 '다음'을 생각하셨군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더라도 (윗 댓글에서 오렌 님께서 일러주셨듯) 다양한 의견을 가지게 되는 듯합니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봉준호는 봉준호이니, 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생각하기도 했어요. 부럽거나 샘나거나 하는 많은 일들이 생존과 연관되면 얼마나 따가워지는지도.

열차는 인류 역사와 그 궤도를 같이 하는데, 봉준호 감독은 아마 좀 더 다채로운 색채 대신 일관적인 방향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이 영화에서는 종으로 횡오르 가는 방향이 종종 심하게 의식이 되거든요. 성화봉송을 할 때의 직선, 커티스도 앞으로 앞으로 가면서 한 곳을 향한 인간의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그것이 어쩌면 세상이 지금까지 있어왔던 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선과 악을 떠난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오. 목적과 목표는 약간 다른 것이어서 그것이 늘 함께 하지는 않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고보면 saint236님께서 봉준호 감독에게 바랐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주말입니다. 뭔가 다른 색상의 하루, 채워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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