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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상에 책 한 권이 있다. 4285라는 숫자, 삶, 희망, 기록, 이것만으로도 아...하고 고개를 젓게 되는데, 뒷표지를 보면 더하다. 인생 기록, 오프라 윈프리, 뉴욕 타임스, 피플, 보스턴 글로브. 이 책에는 빌 게이츠와 버락 오바마는 없지만, 일단 빌 게이츠와 버락 오바마, 오프라 윈프리, 이 세사람의 추천이라면 나는 일단 피하고 본다.
각각의 이름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다르면서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미리 강조하자면 한 번도 그 쇼를 보지 않고도 몇십년을 살다 보니 주워들은 풍문에 의하면, 일단 금전이나 건강, 각종 문제를 겪는 호스트가 나온단다. 모두가 그의 불행을 듣고 이런저런 위로를 하고나면 나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라, 내지는 당신은 더 소중한 사람이다, 같은 처방과 함께 산더미 같은 선물들이 쏟아지는데, 그 규모가 음료 교환권이나 숙박권 등의 범주를 넘어 자동차 같은 고가의 선물까지 아우른다는 말을 듣고나니 아, 나도 방청객으로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호스트의 고민은 잊게 되고 '내가 뭘 본거지?하는 느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힘들 때마다 김연아의 밴쿠버 경기영상을 돌려보고 카모메 식당을 보는 친구 하나가 몹시 힘들 때면 이 책을 한번씩 펼쳐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길 잃었다는 이름의 이 저자의 책을 펼쳐보았다. 아마도 더 큰 불행, 더 큰 힘을 지녀서 업계 판도를 바꾸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살다 보면 다양한 얼굴과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 특정한 나이의 어떤 기회가 있기 마련이라면 셰릴 스트레이드의 방황은 적절한 때에 펼쳐졌고 알맞은 시기에 매듭을 지었다. 그것이 술이든, 인생의 미친짓이든, 여행이든, 나는 인생의 총량, 내지는 일정량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쪽인데 이것을 세상에서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도 부른다고. 셰릴 스트레이드는 매 맞는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 함께 대학을 다녔고, 하필 그 학교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갈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 있는 데다가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고.
하버드나 예일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고 갈 생각도 못 했으며 혹시나 생각했다 하더라도 합격 못했을 거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는 대목을 보았을 때, 자기를 사랑해주는 아버지의 느낌 자체를 떠올릴 수 없었다고 말할 때, 에스키모인들의 얼음 지옥과 적도인들의 불지옥이 떠올랐다. 현실은 얼마나 상상력을 제약하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가까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모 프랑스 전 대통령의 말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저 현실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이 여실해진다.
거칠게 말하자면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오리건까지의 여행으로 자기에게 닥친 일들을 좀 해결해보고자 우연한 기회에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사람의 이야기. 그러나 우리의 여행을 돌아보면, 풍경과 환경,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며칠만 지나도 우리는 동행인들과 우리 아버지는..우리 어머니는..내 친구들은..이런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데 저자는 마침 혼자 떠나 혼자 매듭짓는 와중 계속해서 자기 마음속의 라디오 주파수를 찾듯 생각을 이어나간다.
그러다가 아버지 생각에서는 '나는 그런 일을 상상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런 광경을 떠올릴 수가 없었고 사랑이나 안전함, 확신, 혹은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 감정 따위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나를 제대로 길러내는 데 실패했다'라고 하다가 바로 다음 장에서 '그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을 듬뿍 주는 어머니였다'라고 한다니, 이것은 오락가락인가 아니면 주마등처럼 스치는 생각인가...싶다가도 떠오르는 말 한마디가 있으니, '마음은 상태일 뿐이다'라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신임하는 심리상담가의 조언. 얄궂지만 맞는 말이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컨디션, 그날의 기분, 이런 것들은 불안정한 대기처럼 늘 바뀌고, 저자는 어떤 롯지에서는 미리 보내둔 보급품에 돈을 잘못 보내는 바람에 거의 무일푼이 되고, 캠핑장에서 무임으로 몰래 머무르려 하다가 쫓겨나고(몰인정하다고 뒤끝 작렬로 써놨는데 돈이 없으면 나가는 것이 인지상정), 곰이나 여우를 보면 꼭 곰이다! 내지는 여우다! 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PCT에 가보고 싶지만, 그것은 무모하니까 애팔래치아 트레일 정도면 되지 않을까? 마음 정리도 좀 할 겸...'이라는 말에 지인은 '그 정리는 꼭 애팔래치아까지 가야 되는 거냐'라고 반문하여 곧바로 수긍했는데, 어쩌면 인생의 총합을 한 번 정도 내기로 한 이에게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상상의 근거지를 바꾸는 일, 내 주머니 속 밑천을 꺼내어 모두 살펴보는 일, 결국, 스스로 해야 할 일. 어떤 이에게는 마약, 술, 도박, 쇼핑중독, 일 중독, 기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일들을 셰릴 스트레이드는 혼자 하는 PCT로 실행한다. 가끔, 어떤 자리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서는 물리적 고행, 여행, 고난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런 결론을 내린다.
우리 아버지. 내게는 아버지가 아닌 남자. 그 사실이 언제나 나를 놀라게 했다. 다시, 그리고 다시, 그리고 또다시 언제나. 온갖 일이 다 있었지만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아버지의 잘못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PCT에서 어두워지는 대지를 바라보며 나는 더이상 아버지 때문에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그보다 놀라운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글쎄....세간에 유튜브로 많은 돈을 버시는 크리에이터들은 자존감을 채워라, 남이 준 감정 쓰레기는 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 당장 내다 버려라, 여러가지 말들을 하는데 적어도 이 사람의 대단한 장점은 여기에서 빛이 난다. 그는 휘둘리지 않고 방황이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었든, 자기 일은 자기가 하는 사람이다. 결론을 자기 안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 이 점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내 인생의 가장 어두웠던 순간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상담사를 찾아갔다. 이 도보여행을 시작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신뢰나 믿음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빈스가 알려준 다른 상담사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런 사람들이 풀어줄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아, 내게는 그런 사람들이 풀어줄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니. 저자가 별로 힘주어 쓰지도 않고 지나가는 문장을 보면, 일단 그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할 줄 알고, 그것을 풀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스스로' 자기 확신을 끌어내는 힘. 그래서 역설적으론 나는 이 책을 읽고도 내 마음속 온갖 궂은일들의 해결 실마리는 조금도 얻을 수 없었다. 이 책 자체가 '물은 셀프'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처한 상황이 다르듯 저자의 상황과 나의 상황이 다름도 자명했기에.
그럼에도 잘못된 판단으로 말이 최악의 고통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볼 때, 척추가 부러진 연필심처럼 내려앉은 어머니를 볼 때, 맞지 않는 신 때문에 죽은 발톱을 뽑을 때, 그리고 침묵 속에서 머릿속이 텅 비어 머리 전체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노래가 떠올라 미칠 지경이라는 말을 할 때, 순간의 점들을 저자는 입체감 있기 연결해 낸다. 이 수많은 순간을 유기적으로 정리해서 내어놓는 글 전체를 끌고 나가는 리듬감을 느끼며 이 책을 읽는 것은 말하자면....힘든가요? 나는 더 힘들었어요. 라고 말하는 수련자를 보는 마음이랄까.
잘 짜인 로드무비는 불행의 총합이 아니며 책 한 권이 될 수 있는 이야기는 그 자체의 리듬을 지녀야 한다는, 잘 쓰인 논픽션의 전형. 550쪽이 마치 50 페이지라도 되는듯 읽는 이의 눈을 붙들고 자기 마음을 담담하게 쓰는 능력을 지닌 작가이다. 물론, 마지막 몇페이지를 보면 오프라 윈프리가 좋아할 만하겠다.....라는 내 머릿속에서는 딱히 긍정적인 느낌으로 분류하기에는 머뭇거려지는 생각이 떠오른다. 뭐, 내가 젊은 도전정신의 미국인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