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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같은 침묵 속의 언어.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쓰인 글과 하는 말에서 보고 듣는 늘 똑같은 언어 때문에-어법이든 말장난이든은유든-혐오감과 구역질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범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물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어느 시를 읽다가 '이 시가 슬픕니다. 느껴지세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시와 소설, 희곡과 수필, 영화와 음악이 이렇게 묻습니다. 단어와 문장, 목소리와 노래가 묻습니다. 많은 영화와 책을 차고 넘치게 보고 이야기를 합니다만 저 역시 종종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는 것이 도움될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말할 때, 상대방이 진심으로 이해하는 걸까 갑갑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의 수많은 감상과 기록은 그저 365일의 한 줄 감상인데 그것이 늘 새롭다 착각하는 건 아닐는지요. 사람을 둘러싼 울타리와 테두리, 그것을 넘어서고 싶을 때면 이 작품의 주요 인물 아마데우는 낡은 표현을 씻어주고 새로운 원형으로 존재하는 포르투갈어를 꿈꾼다고 합니다. 그 아마데우의 흔적을 되짚는 인물은 그레고리우스, 라틴어와 그리스어, 헤브라이어에 해박한 지식을 겸비했으나 지루하다는 말을 듣는 인물입니다. 늘 같은 시각 강의 자료를 들고 학교로 가서 강의하고, 집안은 책으로 가득 차있으나 변화를 싫어하고 아내로부터는 지루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 사람이 계획 없이 갑자기 포르투갈로 떠나서 어쩌다 손에 넣은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행적을 훑게 됩니다. 바로 아래와 같은 문장에 이끌려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경우 600여 쪽에 달하는 원작을 1시간 40분 남짓의 영화로 옮겼다는 점입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영화로 만들 때에는 아마 이것보다 더 쉬웠을 겁니다. 원작의 분량과는 별개로 영화가 원작에서 지켜야 할 것과 생략해선 안 될 것이 더욱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지켜야 할 것이 명확한 작품의 경우에도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막상 완성 후에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되는 경우도 많지요.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꼭 큰 개가 나와야 하며, 배경은 국적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도시여야 한다는 원작자와의 약속을 지키고도 하나의 해프닝으로 남고 말았으며 향수의 경우 모든 것을 넣었으되 그 고유의 향기는 사라진 영화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그에 비하면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경우, 오히려 활자로 된 원작을 영상으로 옮길 때 어쩔 수 없이 겪는 시간의 함축이 오히려 도움되는 듯합니다. 버리고 취하여 운율을 넣고 빛을 만들어내는 공동 작업이 작가가 홀로 이루는 개인 작업과 다르다는 것을 장점으로 취했으니까요. 그리고 영화에서도, 그리고 책에서도 침묵과 언어, 기억과 꿈은 조용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어떤 면에서 아마데우와 정반대에 있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날 생각이 없었으며 조용한 현실 속에서 쥐죽은 듯 사는 나이 든 남자와 자신의 한계를 모든 면에서 시험하며 경험할 수 있는 꿈의 극단을 겪다가 요절한 남자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이 둘 사이에 연결 고리가 생 길 때,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가 어디선가 싱긋 웃는듯합니다. 





 


파리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식당 차에 앉아 창밖으로 펼쳐지는 환한 초봄을 내다보았다. 그때 갑자기, 자신이 진짜로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 생각해낸, 있을 법한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이 자각이 커질수록 가능성과 실제와의 관계가 자꾸만 거꾸로 느껴졌다. 캐기와 학교와 수첩에 적힌 학생들은 현실이기는 했지만, 원래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우연히 현실로 나타났을 뿐...... 그런 반면 그가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것들, 즉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 약한 기적 소리, 옆의 식탁에서 컵들이 열차의 진동에 따라 떨리는 리, 부엌에서 나는 오래된 기름 냄새, 요리사가 이따금 뿜어내는 담배 냄새, 이것들은 모호한 가능성이라거나 현실화된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였다. 


 


 파스칼 메르시어가 단어를 하나하나 쌓아 증축한 이 세계가 영화 속에서는 하나의 컷, 하나의 씬, 불규칙한 회색 소음을 뚫고 들리는 핸드폰 벨소리와 잿빛 옷을 입은 그레고리우스가 들고 있는 비에 젖은 붉은색 외로 드러납니다. 

 언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영상의 영역. 

 게다가 독백을 피아니시모로 읊는 제레미 아이언스의 목소리가 스크린을 덮을 때, 관객은 조금 더 주의해서 영화를 읽어야 할 겁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어떠한 행위를 하고 그 결과로 헤어짐이나 영속이 남는다는 직접적이고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어떤 사건은 다른 사건보다 지루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루하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요. 








 생각과 생각이 쌓여 검은 바다가 되는 순간이 있고 감정과 감정이 깎여 사람이 바위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건은 실은 짐작하기도 힘든 역사적 이유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무척 신중하고 사려 깊은 결정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별 의미를 담지 않을 때도 있을 테니까요. 자신이 모른다거나 관심이 없다는 것은 결과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 아닐까요.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폭력을 저지른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것이야말로 오만하며 방종한 것임을 파스칼 메르시어는 아마데우의 연설, 인간 백정 멩지스를 살려내고 가난한 여인이 뱉는 침을 얼굴에 맞은 일, 레지스탕스에 들어가는 일 등으로 보여줍니다. 즉, 어떤 사람이 특정한 행동을 하게 될 때에, 그 연관성은 타인이 보지 못하는 고리에서 비롯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고리에 파스칼 메르시어는 주목합니다. 



 


 지나온 특정 장소를 지나올 때 비로소 자신을 찾는 여행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왜 종종 익숙한 삶과 결별하려는 사람들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는지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고리로 상황과 생각을 지니지는 않습니다. 이제껏 정돈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 해서 결별에의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레고리우스를 보노라면 가장 규칙적이고 정돈된 삶을 사는 인물이야말로 마음 깊숙한 곳에는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을 들여 찾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예상하지 못했으나 갑자기 떠나고, 급박히 사랑에 빠지고, 서둘러 도망치게 되는 사람들은 사실은 오랫동안 마음 속에 쌓아왔던 것을 드러내는 것일 겁니다. 





 주의 깊게 보면 그레고리우스가 교단에서 갑자기 떠나 리스본행 기차를 타고 떠난 다음 하는 모든 행동은 그가 이전에는 하지 않던 무엇입니다. 반대로 아마데우가 기차를 그렇게도 마음에 그리며 떠난 곳은 자신의 사유 깊은 곳입니다. 케케묵은 결론이며 동시에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니요. 그러나 종종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은 뜻밖에 단순하며, 때로는 모든 인과를 건너뛸 정도로 간단합니다. 영화를 보노라면 모든 것이 '갑자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수많은 인과 통해 발생하는 사건들, 그리고 모든 일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고집과는 반대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말하는 부사어들이 아닐까요.





 영화와 소설이 한목소리로 이야기하고 묻는 것은 '과거와 현재, 떠남과 남겨짐, 생각의 깊이와 남아있는 진실, 그리고 타인이 되어 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비밀스러운 아마데우의 삶을 뒤쫓습니다. 그가 남긴 글을 읽고 그가 다녔던 학교, 신부님과 친구, 여동생과 사랑했던 여자를 찾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의 형태를 쫓으면서도 그것을 손으로 만지려는 열망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실존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최상의 것을 선택하는 것이 삶이라면, 파스칼 메르시어의 질문은 보다 명확합니다. 지금 삶에 만족하십니까?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경험하지 못했던, 자기 삶과 완전히 다른 삶에의 열망은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그 삶을 쫓아가거나 쫓아가지 않을 때, 경우의 수는 어떻게 되지요? 





 그것은 대안이나 대책일 수도, 판타지일 수도 있습니다. 겪어보지 못하고 남아있는 부분을 실행에 옮기는 경우를 대안으로, 그대로 남겨두는 경우를 판타지라고 부른다면. 그러나 파스칼 메르시어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생각하려는 아마데우와, 그와 정반대인 그레고리우스를 통해 말합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건, 결국은 지금껏 표현 못 했던 마음속 한 자락이 아닌지. 혹은 시간과 공간을 가장 광범위하게 사는 한 방편이 아닌지.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어쩌면 그레고리우스가 서둘러 탄 열차는 그가 원해서 탄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목적지도 모르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떠나 아마데우의 삶의 자취를 밟는 일은, 아마데우의 글을 빌려 말하자면 과거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 하나 정해지지 않고 불확실성의 무거움을 느끼며 가벼운 방해가 가져오는, 언젠가는 잊을 사건. 삶이라는 거대하고 투명한 대전제 앞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삶을 무엇인가에 비유하게 됩니다. 아마데우가 기차를 좋아했고 그레고리우스가 기차로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그레고리우스가 읽는 아마데우의 글 속에서 그는, 인간은 시간상으로만이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장소를 떠나면서 일부분을 남겨두고, 떠나도 그곳에 남는다고 말하지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만 남아있는 무엇도 있고 그곳에서는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그가 닿는 곳은 자기 자신의 내면입니다. 마음속 먼 곳, 그 어느 곳 보다도 먼 곳. 외딴 구석, 평소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었던 어느 곳. 그곳이 판사 아버지를 두고 유복하게 자랐으나 일평생 신과도, 아버지와도 손을 잡을 수 없었고 거침없는 자신감으로 자신의 생을 조율하려 했던 아마데우의 이상향이었다니, 인간이 결국 가서 닿는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닐까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기에 이토록 과거와 현재, 미래의 대화와 변화와 고통, 걱정과 불안, 혹은 신뢰 등을 내비치는 것 또한 인간이라면, 아마데우는 좀 더 높은 어느 곳에서 이 모든 감정을 조용히 바라보고 싶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종종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 상대방이 말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도 넓게 느껴져 오히 그 사이에 발을 디딜 틈조차 없다고 느낄 때,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돌려 무언가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싶을 때 아마도 이 책과 영화의 한 자락이 떠오를 겁니다.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 감당해야 했던 소망의 무게, 자기 앞에 놓인 생이 정말 자기가 원했던 것인지를 물어야 할 때를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기분이랄까요. 영화의 마지막에 가방을 손에 든 그레고리우스의 얼굴을 보거나 소설 마지막에서 그레고리우스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대목에 이르면, 꼭 오래 보아 익숙한 친구를 떠나 보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런 느낌 때문일 겁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곰스크로 가는 지도가,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 보았던 소년의 그림자가, 사르트르가 피우던 담배 연기가 배어 있습니다. 





-소설 속, 에사가 좋아하던 피레스의 슈베르트 연주 한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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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metimes I think I have felt everything I'm ever gonna feel. And from here on out, I'm not gonna feel anything new. Just lesser versions of what I've already felt.

가끔 느껴야 할 모든 감정은 이미 다 느낀 게 아닐까, 그래서 이제 더이상 새롭게 뭔가를 느끼는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저 내가 지금껏 느꼈던 것의 작은 변주일 뿐일 거란 생각. -영화 속에서, 테오도르.




 호아퀸 피닉스, 에이미 아담스, 루니 마라가 나오고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가 내도록 귓가에 울리는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그녀'를 보고 나오는 길의 햇빛은 유난히 따가웠습니다. 흡사 모두가 백열전등 아래서 움직이는 듯, 창백하고 조금씩 노래지는 얼굴. 햇빛 아래서 차가웠다가도 필터를 거친 다음 따뜻해 보인다는 것을 느끼던 찰나, 저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왔던 천사 다미엘이 떠올랐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톱니바퀴 사이에 끼이고(모던 타임스), 잿빛 도시에서 리플리컨트를 사랑하고(블레이드 러너), 진화된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고(터미네이터, 아이 로봇), 마침내 있지 않은 그 여인과 사랑에 빠져도(시몬) 변치 않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인간과 기계, 이 대립 항을 늘 지켜왔기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톱니바퀴로 나타나도 사람의 피부는 더 말랑했고 기계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지를 궁금해했지요. 앞서 말한 베를린 천사의 시는 사람이 되고 싶은 천사의 이야기입니다. 기계, 문명, 운영체제와 는 관계가 없지요. 하지만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이미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모두 이야기해버렸다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욕망과 꿈. 수직과 수평. 꾸며낸 것과 진짜. 영원과 찰나, 생각과 느낌을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천사 다미엘은 인간을 꿈꿉니다. 그가 바라보는 공중곡예사는 영원히 하늘에 머물듯 그네를 타지만 결국, 중력을 느끼고 지상에 머물지요. 반면 수직의 높이조차 느끼지 않던 천사 다미엘이 보는 것은 세로축이 아닌 가로축, 지축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를 보면 계속해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나옵니다. 도시가 잠들고 깨고 움직이는데 종종 카메라는 도시를 하늘에서 바라봅니다. 손편지를 대필해주는 손편지닷컴에서 일하며 아이폰의 시리 같은 운영체제를 활용하는 테오도르의 생활을 조용히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호아퀸 피닉스의 사무실은 옆에서 바라본 칸막이와 걸어나가면 닿는 데스크로 되어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가 사는 집으로 가면 갑자기 모든 공간 감각이 사라집니다. 유리창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밤의 마천루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나무 바닥은 반들반들해서 창밖 풍경이 바닥에 그대로 반사됩니다. 그가 방 한가운데 서 있을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집 안에 있는 테오도르가 아닌, 도시 한가운데 이름없는 공간의 테오도르입니다. 사람 만나기 싫어하고 친구에게 다가서기 힘들어하면서, 마침내 그녀를 만나는 테오도르.








 
 잠시 스파이크 존즈의 전작의 공간과 목소리를 살펴볼까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는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이르는 한 층의 절반에 이르는 공간이 나옵니다. '어댑테이션'에서는 난초에 미친 사람이 나오지요. '괴물들이 사는 곳'에 나오는 상처 입은 목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스파이크 존즈의 경우 히치콕처럼 뭔가를 마음속에 꼭 정해두고 그 목표를 향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촬영장 뒷이야기를 들으면 실제로는 '액션'이라는 외침이 들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감독에게 통제와 허용, 두 가지 방패가 있다면 스파이크 존즈의 경우 통제보다는 허용에 더 능한 감독이라는 뜻입니다. 문학과 영화가 내는 이렇게 달리 노래합니다. 전작의 프로덕션 디자인도 담당했던 K.K.Barrett의 가장 따뜻한 세트(녹아내리는 노랑, 반짝이는 초록, 선명한 오렌지), 유난히 편안한 연기를 보이는 호아퀸 피닉스와 에이미 아담스, 스칼렛 요한슨의 호흡,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시를 위, 혹은 아래에서 바라보는 카메라를 생각해 보면 스파이크 존스는 영화가 공동의 작업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활용하는 감독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날, 테오도르는 OS 하나를 사서 설치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참 재미있습니다. 우연히 새로 나온  OS를 구경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이 나오고, 곧바로 설치를 완료하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모습이 점프컷으로 나옵니다. 분명 뭔가를 돈을 내고 샀건만 그 과정이 생략되면서 테오도르를 보는 사람은 곧바로 그가 새 OS와 만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그 다음 이야기는 더욱 인간적입니다. OS가 그에게 묻는 것은 '남자 목소리가 좋으세요, 여자 목소리가 좋으세요?'입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제가 당신 하드 드라이브를 봐도 될까요?' 입니다. 







 차례차례 질문으로 스파이크 존즈는 계단을 한 칸씩 오릅니다. OS를 인간처럼 만드는 단계의 계단을요. 그래서 앞에 앉은 사람에게 인격을 주면서, 동시에 '제가' 라는 주어로 보이지 않음에도 스스로 주격을 부여하는 이 질문은 흡사 대관식에서 손을 불쑥 내밀어 황제의 관을 쓰는 나폴레옹을 떠올립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순간. 스스로 기계가 문장의 주어가 되는 이 짧은 질문으로 스파이크 존스는 드디어  앞선 영화들이 넘지 않았던 벽을 영화 초반에 넘습니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의 질문은 '제가 당신 하드를 봐도 될까요?'로 인해 이제는 나올 단계를 넘어선 것이지요. 이미 우리는 '사만다'라는 OS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점점 사랑해 가면서 인간의 형체를 꿈꾸는 것이지요. 라캉의 말처럼, 부모의 꿈을 욕망하는 아이처럼 그녀는 테오도르의 꿈을 욕망합니다. 인간이 아니면서도 마치 인간처럼 말하기 전 숨을 들이쉬거나 등이 가려운 기분이 궁금하다는 것과 진짜 육체를 찾아 나서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특징을 잊고 그가 원하는 특징을 욕망하다가 마침내는 섹스 상대까지 데려오는 대목에 이르면, 남은 것은 탄식. 그것은 진짜'처럼' 보였을 뿐, 진짜가 아니었으니까요. 이것은 실체와 환상, 사랑과 오해의 문제에만 머무르는 수준을 어느새 넘게 됩니다. 실체와 환상의 문제였다면 사만다가 데려온 여자와 테오도르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있었을 겁니다. 사랑과 오해의 문제였다면 그 뒤의 긴 탄식은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을까요? 





  섹스를 할 수 없는 사만다가 섹스를 할 수 있는 인간을 꿈꿀 때, 나아가서 자신을 대신해줄 육체를 구할 때,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문제는 이미 그 모든 것 이전에 실존과 본질의 영역에 있었습니다. 형체가 없는 사만다가 형체를 만들어내려 할 때, 이것은 이미 존재하는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무시하는 일이지요. 그녀의 본질은 자유로움입니다. 문제는 인간 역시 (사만다 보다는 덜) 자유롭다는 것이지요. 매 순간 선택해야 하고 복잡해지는, 사르트르가 말했던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인간을 사만다는 순간순간 갈망합니다. 









 나도 그렇게 복잡해져 봤으면 좋겠어. 누군가를 잃는 기분이 어떤 건지는 난 몰라.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사만다와 테오도르가 서로를 갈망하는 지점이 일치합니다. 그러나 8천 명이 넘는 사람과 동시에 이야기하고 6백 명이 넘는 사람과 섹스를 하지만 숫자가 늘어날수록 테오도르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해진다는 말을 할 때에는 갈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비극의 간극은 아득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방식대로만 상대를 사랑할 때에는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비극은 기준을 잘못 잡는 데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간극은 좁히라고 있는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It's like I'm reading a book... and it's a book I deeply love. But I'm reading it slowly now. So the words are really far apart and the spaces between the words are almost infinite. I can still feel you... and the words of our story... but it's in this endless space between the words that I'm finding myself now. It's a place that's not of the physical world. It's where everything else is that I didn't even know existed. I love you so much. But this is where I am now. And this who I am now. And I need you to let me go. As much as I want to, I can't live your book any more.-영화 속 사만다의 대사.


꼭 내가 책을 읽는 것과 같은 문제야...그리고 그 책은 내가 깊이 사랑하는 책이지. 지금은 무척 천천히 읽고 있어. 그래서 단어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간극이 거의 영원에 가까울 만큼 벌어져. 나는 여전히 너를 느껴...그리고 우리 이야기에 나오는 단어도...하지만 동시에 난 단어의 그 끝없는 간극 사이에서 나 자신을 찾았어. 눈에 보이질 않아서, 난 그 세계가 있는지도 몰랐어.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해. 하지만 바로 이곳이 내가 지금 있는 곳이야. 그리고 바로 이게 나야. 나를 보내줘. 나는 이제 네 책 안에서는 더는 살 수 없어.





 떠나기 전 사만다의 말을 들으면서 테오도르의 생각과 느낌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고개를 끄덕이지만 말줄임표 밖에 내뱉을 수 없을 때. 풍선이 높이 높이 떠올라서 모두가 그것을 보는데 홀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느라 내가 그 풍선에 매달려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그런 때. 





 사만다와의 관계가 힘들어질 때마다 땅바닥에 주저앉거나 거리에서 넘어지고, 계단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던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문을 열고 허공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든 빨리 이해하고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섭렵하는 사만다는 자신의 비결 중 하나가 '직관'이라고 말합니다. 논리로 얻는 결론이 아닌 실제 체험으로 얻는 결과이 직관이라면, 사만다야말로 직관의 결정체가 아닐까요. 사만다와 그녀를 사랑하는 테오도르를 보노라면, 스파이크 존즈는 사랑과 성장, 관계와 문명의 문제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내도록 진심이 아닌 마음을 진짜처럼 담아 대필편지를 쓰던 테오도르가 마침내 사만다와 헤어진 다음에서야 진심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낼 때, 다른 SF 영화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욕심내지 않는 이 인간적인 스케일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내려다보던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에이미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가 눈앞에 두고 바라볼 때, 손편지를 대신 쓰다 자기 편지를 쓸 때, 떠난 사만다를 이야기하며 부재하는 그녀를 존재하게 만들던 그 찰나. 기계가 느끼거나 생각할 수 있는지를 묻기에 앞서, 사만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인간은 아직 느낄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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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는 커피벨트 끝자락에 있는 생산국이다. 많은 커피를 생산하는 나라이지만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커피 생산이 줄어든 안타까운 나라이다. 쿠바 크리스털 마운틴.......도미니카 커피가 쿠바 땅에서 자라 크리스털 마운틴이 되었다. 귀한 커피를 마시러 오라는 그 마음이 크리스털 같아 나는 설렌다. 함께 먹을 심심한 먹거리를 조금 싸서 총총 걸어간다. 살아가는 일의 작은 행복, 맛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일.-쿠바 크리스털 마운 틴


 


멀리멀리 다녀오는 길. 다녀온다는 말의 시점이 참 재미있다. 목적지와 출발지를 정하고 요요나 부메랑이 된 것처럼 느슨한 동그라미를 그리기. 어쩌면 나는 지금껏 이곳에 돌아온 게 아니라, 이곳엘 다녀오는 중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동그라미에도 귀퉁이가 생기는 날. 아주 여름이 되기 전. 기온이 조금 올라가다 어떤 곳에서는 더욱 맹렬하고 어떤 곳에서는 주춤. 노랑, 초록, 파랑, 하양. 공기가 얼어붙은 어떤 순간. 켁켁대며 목을 가다듬다가 생각한다. 이런 날 가깝고 먼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가면 파나마 보큐테, 인디아 아티칸, 에티오피아 첼바, 이런 커피를 권해주었으면 좋겠다. 다음날 못 일어날 걱정도 없이 뜨겁고 검은 커피를 조금씩 마실 수 있다면.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금방 들렸던 것도 같은데 그새 사라진 걸까. 부엉이 같은 눈으로 창밖을 본다. 어깨에는 노랑 줄무늬가 들어간 담요. 조용한 바닷가에 온 것 같은 촛불을 밝힌 공간은 밖에서 보아도 부엉이 눈 같을까. 쓰윽 어둠 속을 훑지만, 어둠이 너무 밝다. 다른 날과 다른 어느 저녁. 있지도 않은 사진첩을 보는 늦은 낮. 쓰지도 않은 기억을 떠올려 보는 이른 저녁. 하지 않은 고백을 듣는 아른아른 밤.




 나도 고백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런 순간이 내게도 오더라. 그 순간은 참으로 간절한데, 잘 생각해 보면 오로지 나만 간절한 것이다. 그 간절한 고백이 혹여라도 이기적인 것일 때 고백한 자는 결국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가 된다. 왜 간절한지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이기 때문에 간절한 것이다. 지금 간절한 이가 내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고 도치해 보면 평범한 일이 된다. 평범한 감정을 고백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백이란, 말로 는 것이 아니라 일생으로 하는 것이다. 

 



 우연히 커피 볶고 내리는 사람이라는 용윤선의 수필집 '울기 좋은 방'은 참 조용조용하다. 사뿐사뿐은 아니지만 음성이 낮고 진지하다. 조금 붉어지기도 하고 하얘지기도 하지만 조금씩 검어지는 얼굴이 떠오른다. 장마철 머리카락이 조금 푸석거리지만 좀 지나면 가라앉는 낮은 초록 날씨를 닮았다. 

 그 눈빛이 무엇이냐고 묻는 에티오피아 미칠레, 기차를 타고 싶다는 아이리시 커피. 죽어도 난 못하겠다는 커피 루왁. 걱정하지 말라는 카페 오레. 하나부터 일흔여섯까지 짧고 간단한 커피 맛, 쓸쓸하거나 기쁘지만 젊지만은 않은 나날. 

 펜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말뜻 탓에 가볍게 보는 이가 많은데, 용윤선의 수필은 바람이 살짝 부는 공원 벤치를 떠올린다. 그 벤치에는 커피 내려 아이 키우겠다는 미혼모도 있고,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여주는 스님도 있다. 배고프지? 물어보며 사탕을 손에 쥐어주는 할아버지도 있고 여행지에서 만난 얼굴도 있다. 그리고 숨 쉬는 순간마다 기도하며 살던 글쓴이의 모습이, 그냥 살아가던 어떤 그림자가 있다.







 

 같이 걸어가던 사람이 길을 지나쳤다고 한다. 나는 아니라고 한다. 이 길의 끝이 그곳일 거라고 한다. 그런데 아니라고 한다. 지도를 보니 많 지나쳐 온 것 같다. 그러나 계속 걷기로 한다. 왜냐하면 잘못 들어선 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인 것 같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집 대문 위에는 쪼롬히 붉은 꽈리꽃이 피어있고 왼편 골목길로 들어서니 팽나무가 선 놀이터가 자궁 속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데 무지갯빛이다. 무지갯빛에 나는 가슴이 내려앉는다. 돌로 만들어진 벤치 위에 오래 앉아 있는다. 다는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오늘 아침 물을 마시는데 창밖의 숲이 내게 쏟아지려 했다. 돌 벤치에 앉아 쏟아지려던 아침 숲을 생각하면서 돌이 되려고 한다. -블랙커피




 네덜란드 상인들이 오가던 언덕길을 찾아 걷다 길을 헤매던 기억 한 귀퉁이. 

 글쓴이는 걷던 가운데 이쯤이 이 길 꼭대기가 아닐, 생각하다 바다와 꽃집을 본다. 꽃집 주인에게 음식을 먹겠다고 우겼으나 너무 이른 아침이라 커피만 마셨다는 날. 그 집 커피의 종류는 단 하나, 블랙 커피. 그런 커피를 마셔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주인의 여러 겹 쌍꺼풀. 내 것이 아닌 아늑하고 따뜻한 펠트 천의 느낌.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서면 머릿속이 차분해지고 몸 속 붉은 물방울이 따뜻해지는 기분. 그런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해도 이 평범한 길 위의 파랑 생각 한 방울이 낯설지만은 않다.





더치커피 한 잔 내리기 전까지 방울방울 아주 더디게, 

 망망대해를 건너며 떨어질 듯한 그런 순간, 생각 한 방울.

   하나, 또 하나.

     둘, 다시 하나.

       그 커피 앞에서 다짐하는 얼굴. 

         내일이면 또 엎는다 하여도, 그다음 또 어푸러진다 하여 다시 한 번 더.





 마음을 서랍처럼 여닫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내 마음이 열리고 닫힌다. 열릴 때는 빛이 보이고 닫힐 때는 쓰라린 암흑이다. 다시는 서랍을 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살다가 어느날 스르륵 열리는 것에 그 사람의 긴 손가락과 서랍의 고리를  자르고 싶다. 랍의 고리를 자르는 일은 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서랍은 고리가 잘려도 열리고 닫힌다. 고리가 잘린 서랍이 열릴 때는 운명 같고 닫힐 때는 피눈물이 난다.

 그러기 어려우므로 그러고 싶은 것. 그것이 마음이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십 분밖에 없다. 오 분은 서로 부둥켜안고 오 분은 서로 눈을 바라보는 장면은 사실 목숨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증명 같은 것이다. 그러니 사랑해야 하고, 그러니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 얼굴과 목은 함께 늙어가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우두커니 짧은 문자메시지를 보다가 눈동자의 초점을 잃는다. 길을 잃으려 한다. 서랍이 열리려다 닫히고 조금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겨울은 이미 갔다. 단지 봄이 오지 않았을 뿐이겠지. 계절에 기대어 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랍을 아무리 당겨보아라. 경계를 지나면 상황은 돌이켜지지 않는다.-핫 코코아


 


 커피 앞에서는 스스로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람. 보일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저자의 말을 가만 쓰다듬어 본다. 커피를 만든 다음에는 잊지 말고 마셔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보다가 결국, 서랍에 못을 쳐버리겠다는 말을 말줄임표로 하는 어느날. 

 내 서랍을 조용히 열어 본다. 마음이 가난하여 서랍도 가난하다. 그러나 서랍 속에는 무심하고 단단한, 햇빛을 받으면 그러나 바스러질 것 같은 종잇조각. 가끔 휘청이는 글씨. 창밖에 달이 보일 때 즈음, 곱고 어두운 술을 앞에 두거나 검고 밝은 커피를 한 잔 두고 조금씩 써나가던 기록. 나는 도저히 안되던 일. 가늠하기 힘들던 검은 빛. 한 가지도 분명한 것이 없다는 것 하나만 분명한 때. 자정이 다 되어가던 때. 밝은 갈색의 커피를 떠올린다.




 커피는 열매 안에 두 개의 생두가 마주보고 있다. 외피를 벗기고 과육을 제거하고 딱딱한 껍질인 파치먼트를 제거하면 미끈미끈한 생두가 마주보고 있다. 과일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연상이 된다. 씨와 껍질을 버리고 과육을 먹는 것이 일반적인 과일 먹는 방법이라면, 커피는 껍질과 과육을 버리고 씨를 건조해 볶아 가루를 내어 물을 부어 먹는 것이다. 

 과육 안에 생두가 하나만 있을 때가 있는데 달팽이 모양의 동글동글한 것이 귀여워 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생두를 사람들은 '피베리'라고 부른다. 두 개의 생두가 흡수하던 성분을 하나의 생두가 흡수할테니 그 향과 맛은 독특하며 여운이 길다. 나는 향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코에 담고 있는 사람에게 피베리를 볶아준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 다른 커피를 끝없이 볶아주다가 비로소 피베리의 향을 구분할 수 있을 때 피베리를 닿게 한다. 이런 피베리가 증가하면 자연스럽게 세계 커피의 생산량은 감소하게 된다. 그러니 마음껏 볶아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은 몇몇만 있어야 하며 그 몇몇이 내 삶의 전부였으면 한다. -에티오피아 코체르 피베리




 열두 가지와 일곱 가지 모두 다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것도 나, 저것도 나. 수많은 내가 모여서 알 수 없는 나를 만든다고 생각했던 그 날, 나는 정확히 덧셈의 방법으로 사람을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가. 불필요한 이것은 빼자. 간을 더 치려던 손도 내려놓자. 먹을 것이 별로 없어 보여도 접시 이대로 내도록 하자. 빌려온 것도, 심지어는 바라던 것조차 내려놓는 뺄셈의 셈법으로 사람을 바라본다. 커피 열매 안에 마주 보고 있었을 하나의 생두도 없는 피베리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다 셈하고 나면 남는 하이얀 것은 더 분명한 무엇일 것이다. 단정한 가을비의 책과 같은 사람일 것 같다. 아주 여름이 되기 직전 가라앉은 저녁, 용윤선의 책은 조용하고 따뜻한 커피를 떠올린다. 줄 수 없거나 받을 수 없어 괴롭다면 그 괴로움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으로 답하는 것이라 말하며 커피를 내리는 사람. 굳이 간을 치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는 책. 굳이 읽지 않고 곁에 놓고만 있어도 조용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책. 책이 커피 마시는 시간을 벌어다 주는 책. 간결한 가을비 같지만, 아주 차갑지만도 않은, 혼자 음악을 듣는 것 같은 책. 




밤이 늦었다. 내가 늦었다. 

음악 조금, 책 조금. 
결이 고운 목소리도 조금.

 




색색깔의 글씨는 용윤선의 '울기 좋은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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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ett

Album: Vapen och Ammunition
Lyrics: Joakim Berg
Music: Joakim Berg

I got mail
A real letter with a stamp
A postcard from long ago
When the future was ours


And as you wrote
About your search for freedom
Words with wings like a butterfly
And I think I understand

That slowly, slowly, oh so slowly
You won your nights back
Slowly, slowly, oh so slowly
We slid into oblivion where the light is weak
Into what we were

I wrote a letter
About living with the curse
I gave you my version of the truth
To make you understand

That slowly, slowly, oh so slowly
So we won our nights back
Slowly, slowly, oh so slowly
So we slid into memories, hidden far behind
That was what we were

Slowly, slowly, oh so slowly
We won our nights back
Slowly, slowly, oh so slowly
We slid into oblivion where the light is weak
What we were

(kentfans.com)





 책 몇 권, 음반 몇 장, 어떤 목소리,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어떤 말. 계절이 바뀌기 전. 계절이 다가오기 전. 매일 아직 살아있음을 깨달을 때. 어떤 시간은 멈추고,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일깨워준다. 그것은 그냥 떠오르는 수도 있지만, 종종 어떤 사물이나 종잇조각, 먼 곳의 기차표, 트램 티켓이나 심지어는 초콜릿 포장지를 타고 오기도 한다. 마치 아기 거미들이 바람을 타고 이동하듯이. 그러다가 종종 공기가 맑게 들뜨거나 비구름 아래 가라앉고, 좋아하는 계절이 사그라지고 나면 어느덧 내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의 계절맞이를 했다는 것이 떠오른다. 커피가 식어버릴 때, 내 앞에 놓인 허망한 스테이크 한 접시를 바라볼 때, 사우어 크림을 얹은 감자를 바라볼 때 나는 종종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뚱보'를 떠올린다. 




 나는 다른 테이블의 시중도 들어야 했어. 요구가 많은 사업가 네 명이 앉은 테이블하고 남자 세 명과 여자 한 명이 앉은 테이블, 그리고 노부부의 테이블이었지. 리앤더가 그 뚱뚱한 남자에게 물을 따라주었고, 나는 그 남자가 결정할 시간을 충분히 준 다음 그 테이블로 갔어.

 안녕하세요? 주문 받을까요? 내가 말했지.

 리타, 그 남자는 덩치가 컸어. 정말 크더라구.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이네요, 우리 이제 주문할 준비가 된 것 같은데요. 하고 그가 말했지.

 그는 이런 식으로 말했어-이상하지 않니? 그리고 때때로 조금씩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더라.

 시저 샐러드로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고 나서 괜찮으시다면 수프에 빵과 버터를 곁들이구요.양고기 요리가 좋을 것 같군요. 사워크림 얹은 구운 감자하고요. 디저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합시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메뉴를 건넸어.

 세상에, 리타. 그 손가락이라니.

 나는 서둘러 주방으로 가서 루디에게 주문서를 내밀었어. 그는 인상을 쓰면서 그것을 받았어. 너도 알잖아. 그 사람 일할 때면 늘 그런 얼굴이지. 

 주방을 나오는데 마고가-마고 이야기 한 적 있지? 루디 쫓아다닌다는 애-그애가 묻는거야. 저 뚱땡이 누구니? 라고. 그 사람 진짜 뚱보야.



 여자는 몹시 뚱뚱한 남자의 식사 시중을 한다. 덩치가 큰 뚱뚱한 남자. 그는 시저 샐러드, 빵과 버터, 사워크림을 듬뿍 끼얹은 감자, 양고기 요리, 그리고 초콜릿 시럽을 한 방울 떨어뜨린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소스를 얹은 푸딩 케이크를 모두 먹어치운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의 묘한 필치는 거리와 관계를 급하지 않게 조절한다. 처음 시저 샐러드를 준비하던 그녀는 실수로 컵의 물을 엎지르고, 얼른 치운다. 뚱뚱한 그 남자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사우어 크림을 더 많이 얹은 감자를 그에게 가져다준다. 주방으로 가서 직접 디저트를 챙기는데 그녀의 남자친구가 '서커스단의 뚱보를 받았다며?' 라고 묻자 그녀는 '루디, 저 사람은 뚱뚱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라고 대답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뚱보가 이 단편소설에서 사라지기 전, 그러니까 여자가 뚱보의 테이블에 스페셜 디저트와 아이스크림을 놓을 때 두 사람은 간단한 대화를 하게 된다.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서 살이 좀 찌면 좋겠다는 여자의 말에 뚱뚱한 그 남자는 '안 돼요. 선택할 수 있다면 찌지 않는 게 좋아요.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그것이 끝이다. 뚱보는 식사를 마쳤고, 여자는 집으로 가고, 여자의 남자친구와 침대에 누운 그 순간, 그러나 그 순간 여자는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스스로 뚱뚱해졌다고 느낀다. 이 이야기를 듣는 이에게도 다 털어놓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벌써 그녀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변할 것이라고 느낀다. 




 그의 다른 단편과 마찬가지로 '뚱보'에서도 풍경은 늘 말없이 흘러간다. 이야기는 간단하고 짧고, 어찌 보면 커다란 갈등도 없이 지나간다. 그러나 그 간결한 한두 가지 색채를 바탕으로 허기와 절망, 다툼과 쇠락, 슬픔과 고독, 감정의 연대가 무늬를 만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잠시 빠져나와, 옆 사람의 심장 소리, 다른 이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삶이 어떻게 변할까? 아이를 잃고 생일 케이크를 가지러 가서 밤새 갓구운 빵을 먹던 젊은 부부는 집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할까?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해 저녁 내도록 약간은 목소리를 높이던 그 남자와 여자는 앞으로도 계속 손을 잡을까? 나뒹굴던 청구서를 아예 청소기로 빨아들여 없애 버렸건만, 청구서는 또다시 오면 그만 아닐까? 고장이 나 버린 냉장고는 다시 멀쩡해질까? 아니면 새것을 살 때까지, 그 속의 음식물을 다 어찌한단 말인가? 




 이야기는 짧고 우리는 그다음을 알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단편 소설의 특징. 한국에서는 '단편 소설'이라고 하지만 영미 문학권에서는 장편 소설은 노블, 중간 정도의 인간의 어떤 단면을 담은, 한국의 중장편 정도를 노벨레,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와 앨리스 먼로, 줌파 라히리, 오스카 와일드가 곧잘 쓰던 단편소설은 숏 스토리로 구분한다. 장르의 다른 특징을 생각해본 다음 다시 읽어본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은 이미 지나가 버린 어떤 것의 순간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는 저너머의 풍경 같았다. 





 


 뉴요커 픽션에서 데이비드 민즈가 말하였듯, 레이먼드 카버는 여전히 몇 가지 이유에서 오해받고 있으나 실제로는 고등교육까지를 마친 작가 자신이 자신의 문제에서 한 발짝 떨어져 모든 문제에서 피하려고 할 때 빚어진 특징이 아닐까. 특징을 가장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스타일이라고 본다면, 카버의 모든 특징은 간결함에 있을 것이다. 짧은 분량으로 보는 긴 시간과 불협화음. 우리의 인생을 상징하는 온갖 사물이 내는 잡음. 멈추어 버린 냉장고,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차. 짧은 두세 문장에 스미는 괴로움. 별로 사랑하지 않게 된 남자와 여자, 억지로 오래 끌어오려고 안간힘을 써온 관계, 우리가 몇십 년을 지나야 겨우 인정하는 어떤 사실이 몇 개의 문장 속에 담겨있다. 어떤 여자의 눈을 통해, 혹은 어떤 남자의 목소리로 펼쳐진다.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집어넣지 않으면서도 간결하게 조금씩 공개하는 솜씨는 분명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작가의 능력.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뚱보의 말처럼, 과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신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이라 하지만 우리는 진공 상태에서 외따로 떨어져 숨 쉬는 이들이 아니다. 관계를 맺고 거리를 좁히거나 늘리고, 더 단단해지거나 더 허물어지기를 스스로 반복해서 마침내는 지금의 자신이 되었으나, 이마저도 점점 다시 변할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읽노라면 이런 관계의 유령이 보인다. 지금 내가 보는 너의 모습은 유령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언제나 나 역시 내가 아니었듯 너도 네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느낌과 생각이 십자로 만나서 다른 무늬를 만들 때, 소설을 쓰는 힘과 소설을 읽는 눈이 어떻게 만나는지가 조용히 들린다. 듣는 눈과 보는 귀. 이런 겉치레 없는 상황에만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올바른 대답을 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때. 별로 복잡하지 않은 간단한 것을 가장 쉽게 알아내는 순간. 이럴 때만 나는 유령이 아닌 내가 된다. 그 밖 순간에는, 오늘과 어제가 겹치고 내일과 오늘이 엇갈려 스치는 그림자로 남는 사람일 뿐. 



 




 작가와 독자는 내 말에 과연 고개를 끄덕일까. 아니면 가로저을까. 나는 과연 소설을 이해하고 있을까? 혹은 하찮은 위로와 혼자가 아니라는 알량한 관심만을 목격한 것일까. 

 작가란 어쩌면, 누군가를 구할 수도, 세상을 읽어낼 수도, 사물을 만들 수도 없는 무능한 존재일 것이다. 효용의 척도는 유용함이라는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소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용한 존재. 작가는 이 무용함을 굳이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남긴다. 이 순간 빚어지는, 무엇도 창조하지 못했지만, 저너머 무지개 너머 아련히 보일 듯한 무엇인가를 향한 동작. 가진 기억과 없는 능력을 한몸에 지니고서도 그 부조화를 자랑으로 삼는 움직임. 작가는 그 때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을 남김으로써 사라지는 존재, 그럼으로써 더욱 가벼워지고 간결해지는 사람. 눈먼 사람에게 조심해요(watch out!)라고 말하고 멈칫, 하는 목소리 다음 펼쳐지는 대성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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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3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08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3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re all trave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 day of our lives.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워킹 타이틀답게 큰 욕심 없이 조용히 다가오는 드라마. 최근 십수년간 영국의 로맨틱 코미디, 혹은 드라마의 계보를 무리수 없이 이어가는 감독이라면 단연코 리처드 커티스. 과연 제임스 본드와 비틀즈의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싱글 몰트 위스키와 스트로베리 필즈의 나라, 올림픽 개막조차도 '이런 것을 아시나요?'가 아닌 '이런 것을 다 알고 있지?'로 꾸며도 무리가 없는 나라. 로맨틱 코미디는 부담 없는 금요일 밤의 장르이건만 리처드 커티스가 만드는 영화의 이미지는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는 바랄 것이 없어서가 아닐까. 





 영화라는 장르를 잠시 들여다보면, 모든 감독은 자신의 특징을 문신처럼 새겨둔다. 박찬욱의 도덕적 혼돈과도 같은 기하학무늬 벽지, 웨스 크레이븐의 강박과도 같은 좌우대칭 프레임이 그런 것이라면 리처드 커티스의 지문은 배우들이 관객에게 최대한 부담없이 다가가도록 하는 연출에 있을 것이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힐, 러브 액츄얼리의 계보를 잇는 영화로 어바웃 타임을 꼽는 것은 그리 무리가 아닐 것이다. 앞의 두 작품은 리처드 커티스가 각본에 참여했고 뒤의 두 작품은 감독과 각본에 모두 참여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모두 다 통제하기란 문학과는 달리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즉, 영화에는 '우연'의 요소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나는 점이다. 그럼에도 리처드 커티스의 연출은 배우에게서 연기를 끌어내는 방식, 카메라를 통제하는 방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워낙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철저한 통제가 아닌 느슨한 간섭의 결과물. 리처드 커티스 박찬욱의 영화처럼 오 분만 보아도 누군가의 영화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지도 않는다. 웨스 크레이븐처럼 숏 하나만 보고도 알아차릴 수도 없다. 그러나 다 보고 나서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이 사람 여전하군' 하는 느낌이 무척 자연스레 다가온다. 그것은 분명 리처드 커티스의 배우를 다루는 방식, 노래를 영화 속에서 활용하는 방식,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영화 전반을 통제한 점에 있을 것이다. 분명 어떤 감독은 단칼에 거절할 만한 그런 목표를 리처드 커티스는 자연스레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데, 바로 이 점이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약간 머뭇거리는 시선, 실제로 얼굴 붉히는 수줍은 성격, 특별히 미남도 아니고 말주변이 뛰어나지도 않지만, 주변에 괴상한 특징을 몇 개 정도 지닌 인물을 주렁주렁 달고 나오는 캐릭터가 언젠가부터 영국 로맨틱 코미디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선보이는 씬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며 모든 상황이 참으로 안정적이라는 점에서, 리처드 커티스의 페르소나는 확연히 안정적인 관계, 로맨스를 바라는 여성 관객을 타겟으로 삼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거리를 두거나 스타일을 과시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의 목표가 아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또렷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영화 속에 좀 더 참여시키는 것도 그가 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장르 내에서의 접점, 관객과 배우가 굳이 애쓰지 않고 억지를 부리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만나는 가상의 어느 지점. 그곳으로 가기까지 리처드 커티스가 이용하는 것은 장르의 꼬임과 일상의 재활용, 배우의 연기, 음악의 활용이었을 것이다. how long will i love you가 흘러나오면 관객이 느껴야 할 바는 더욱 자명해진다. 





 그런데 왜 하필 시간이어야 했을까. 그간 나온 시간을 다룬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던가. 시간 여행자의 아내, 생존 시간 카드, 이외의 비디오 키드가 접했던 수많은 B급 영화도 있다. 그 모든 것에 하나를 굳이 보탤 필요가 있었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바웃 타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 여행이 아니라 그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모험, 모든 것을 뒤흔드는 변화, 0.5초의 차이로 숨을 거두는 사랑은 영화의 주제가 아니다. 이 간명한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자명하고 또 분명하다. 현재를 살라는 것.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리처드 커티스가 꾸준히 그의 영화를 통해 말해온 것이 아닐까. 






 촌스러울 수도 있는 나레이션, 플래시백, 크로스 컷팅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활용한다든지, 약간은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노래 가사가 전면에 등장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오히려 관객에게는 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너무나도 안온하고 갈등이 완화되어 있는 통제된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뤼미에르 형제는 분명 스크린에 열차를 띄울 때 '어바웃 타임'과 같은 숏케잌 같은 영화를 상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로맨틱 코미디와 시간여행의 장르와 모티브를 빌린 어바웃 타임을 보노라면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도, 그렇다고 그저 드라마의 장르에 머문 영화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 생각도 없이 약간 어정쩡하게 기대어선 이 영화를 보자면, 따지고 보면 '러브 액츄얼리'도 완전한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콩트와 노벨레의 경계를 잡기가 어렵듯 최근 들어 로맨틱 코미디와 드라마의 경계가 은근해지는 것은 비단 장르 차용을 넘어 관객층을 넓히려는 시도를 감독들이 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리처드 커티스의 경우에는 조금 더 쉽고 편안히 다가서는 그의 드라마를 만들고자 한 것이 역력하다. 결국, 리처드 커티스의 페르소나는모두 같은 얼굴로 다른 영화 속에서 삶의 어느 따스한 순간을 이야기한다. 









 마크 로렌스의 music & lyrics에서는 떨려서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한다. 

"괜찮아요, 3분이면 끝나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은 길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나도 짧아 순식간에 지나치는 순간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리처드 커티스의 안온한 세계에서는 그 3분이 생각보다 꽤 길게 되풀이된다. 춥고 지쳤을 때, 이런 판타지 같은 따스한 장르를 기웃거린다 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첫 인용구는 영화 속 팀의 대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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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3-22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코메디로 봐야할지, 아니면 진지 모드로 봐야할지, 보면서 왔다 갔다 했더랍니다.
평범한 제목에서 받은 선입견때문인지, 그닥 기대 안하고 보러갔다가, 다 보고 나올때 참 괜찮은 영화를 봤구나 뿌듯해하며 나왔었지요. 이런 여자를 아내로 선택한 남자는 참 행운이다,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저랑 너무 다른 캐릭터를 가졌더라고요 ^^

Jeanne_Hebuterne 2014-03-23 11:33   좋아요 0 | URL
hnine님, 저만 그런 것이 아니었군요! 따지고 보면 어떤 영화든 한 장르 안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방향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으나,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리처드 커티스는 로맨스가 곧 생활인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 듯합니다. 꼭 한가지 이야기만 할 필요 있나요? 하고 너스레를 떠는 기분이었어요. 주변 공기가 약간 차가울 때, 조금 수다스럽지만 마음은 따뜻한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메리 캐릭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전 거꾸로 이 감독은 여자들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를 감독이 잘 알고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더랬어요. 많은 걸 기대안한다고 말하는 까다로움을 잘 파악하는 그런 짓궂음이오 :)

이진 2014-03-23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떻게 부르는지 까먹었어요.
지네... 쟌... 쟝?
어쨌든 저 이 영화 정말 좋더라구요.
저는 감독은 잘 모르고 레이첼 맥아담스가 미치게 좋아요.
저 이 배우 나온 영화는 모조리 섭렵했답니다...
노트북보다 이 영화에서 더 사랑스럽고 예쁘게 나온 거 같아요!

보다가 울었네요.
묵직한 메세지가 있는 거 같아서 좋았어요.

Jeanne_Hebuterne 2014-03-26 19:21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이 영화를, 그리고 저 여배우를 좋아하시는군요!
노트북은 전 보지 못하였는데 그 영화에서도 사랑스럽게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답니다. 아마 셜록 홈즈나 미드나잇 인 파리 등 필모그라피를 넓혀가려는 노력이 조금씩 보여요. 연기의 폭이 틸다 스윈턴이나 제니퍼 로렌스처럼 아주 넓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것만은 사실인듯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되기도 해요. 종종 한 배우의 연기를 따라가노라면 시간이 조금씩 손가락 끝에 와닿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재미있지요.

소이진님을 기분좋은 의미로 울린 이러한 영화가 앞으로도 많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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