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이 치사스러워서였다. 황인숙의 시 ''에 나오는 사람처럼, 강에 가서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사는 것이 비루하고 던적스럽고 종종 갈피를 잃은듯한 느낌이 들 때 찾는 시가 있었다. 메리 올리버는 아니지. 초여름 맥주와 함께 모깃불을 피우며 읽어야 하는데 나는 지금 손발이 꽁꽁 얼었잖아. 박정대는 어떨까. , 그의 시집은 이런 애매하게 추운 겨울의 태평양을 바라보며 읽을 게 아니라 바르셀로나에서 마리화나를 한 대 입에 물고 읽는 게 좋지 않을까. 어줍잖게 알지도 못하는 시인 몇몇 시를 떠올려 보다가 집어든 쉼보르스카의 시였다.

 

 

 

 

 

 

 

<가장 이상한 세 단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봄에 쓰기 시작한 시를 가을에 완성하는 때도 있다고 말하는, 다작을 꺼리는, 199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녀의 시를 읽노라면 일상의 언어가 이렇게도 웅장해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를 읽는 내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시를 쓴 시인이 가장 어려운 말을 가장 쉽게 하는 것을 바라보는 신기한 경험. 긴 이야기를 짧게, 깊은 이야기를 간단하게. 전체에 앞선 개인을, 형식에 앞선 내용을 이보다 효율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굳이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여도 핵심은 더 명확해지는 쉼보르스카의 시어는 모든 것이 조용히 사그라지는 새벽 네 시의 언어이다. 그녀의 시 '새벽 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밤에서 낮으로 가는 시간.

옆에서 옆으로 도는 시간.

삼십대를 위한 시간.

 

 

 시간의 반복. 밤과 낮, 옆과 옆. 늙어간다는 착각을 하는 시기. 가고, 돌고, 위하는 시간. 생명이 없음에도 무언가를 품는 무심한 무엇. 작은 무언가를 보는 눈, 그녀의 눈은 그것이 양파이든 모래 알갱이든 이름도 모르는 무엇이든, 혹은 911의 사진이든, 아기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이든, 테러리스트이든, 그녀의 눈은 대상의 진짜를 파악하고 있다. 진짜가 무엇이며 허울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아마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권하고 싶어질 것 같다. 고문을 당하는 이의 말랑말랑한 연약한 피부 아래 관절과 살결, 포르노 배우의 교태로운 단순함과 기묘한 체위, 시체로 가득 찬 수레를 밀고 지나가는 끝과 시작. 일상과 전쟁, 돈과 상품, 테러와 죽음, 1 다음에 2, 3, 4를 건너뛴 5. 쉼보르스카의 시에서 느껴지는 긴장, 순간의 도약, 일상의 언어로 빚어낸 형식미 속의 진실을 보노라면 내가 알고 있었던 세계가 한 꺼풀 얇은 막을 벗는 것 같다. 긴장과 반전, 때로는 열정과 냉소가 함께 품은 언어. 때로는 슬퍼서 냉담하고 우스워서 슬픈 일.

 

 

 

 외국어 낱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La Pologne(폴란드)? La Pologne(폴란드)? 거기는 지독하게 춥다면서요? 정말인가요?

이렇게 물으며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지구촌 방방곡곡 분쟁이 끊이질 않는 요즘, 날씨 이야기만큼 적절한 화제도 없었으므로.

 

", 부인!"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 조국에서는 시인들이 장갑을 낀 채 시를 쓴답니다. 물론 이십사 시간 내내 장갑을 끼고 사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포근한 달빛이 방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면, 그때는 비로소 장갑을 벗지요. 그들이 쓴 시구에는 부엉이의 황량하고 구슬픈 울음소리가 담겨 있답니다. 이따금 사나운 광풍이 으르렁대며 그 틈바구니를 파고들기도 하죠. 시인들은 바다표범을 기르는 어부들의 소박한 삶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답니다. 고전주의자들은 바람에 쌓인 눈 더미를 발로 꾹꾹 누른 뒤에, 그 위에다 잉크를 묻힌 고드름으로 서정시를 새겨넣지요. 나머지, 우리 데카당파 작가들은 흩날리는 눈송이의 덧없는 운명을 보고 비탄에 잠기곤 하죠. 물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직접 도끼를 가지고 호수 위에 바람구멍을 만들어야 한답니다. 친애하는 부인이여!"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프랑스어로 '바다표범'이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고드름''바람구멍'도 확실치 않았다.

 

"La Pologne? La Pologne? 거기는 지독하게 춥다면서요? 정말인가요?"

 

"Pas du tout(, 대체로 그렇죠)"

 

나는 얼음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하고 만다. 

 

 

 

  마음 속 하고 싶은 말이 저리도 많은데 단어를 제대로 찾지 못해 이상한 표정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마치 생을 몇 초밖에 남기지 않은 사형수 머릿속처럼 지나간다. 에트랑제의 서글픔, 나는 속이 어떻게 아프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소화제 대신 두통약을 잘못 집어 먹던 날. Dead end라는 교통표지판을 보며 혼자 기이한 상상을 했던 순간. 농담으로 끝나면 다행일 온갖 실수들. 말을 하지 못해 바보가 되는 건 어릴 때나 귀여운 일인데, 나는 어른이 되고서야 그 짓을 반복한다 

 

 

 

  사는 것이 고단하거나 억울하고, 피곤한 발끝을 녹일 때 떠오르던 어떤 노래, 어떤 시, 어떤 책. 사람은 위안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어서 기억을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활용하곤 한다. 정작 문학의 목적인 미학적인 완성도일 텐데, 어떨 때는 '이렇게 멍청했던 게, 이렇게 피곤했던 게, 이렇게 비루했던 게 나 혼자만이 아니었어.' 라는 제멋대로 위안도 얻는 것이다. 이를테면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나오는 첫 번째 단편, '작업실'이 그렇다.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뻔뻔해져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작업실을 얻어야겠어요."

 

내가 듣기에도 허황한 소리였다. 구태여 작업실을 얻어야 할 까닭이 뭔가. 집이 있잖은가. 쾌적하고 널찍하고 바다가 훤히 보이니 전망도 좋고, 맞춤한 식당과 침실과 욕실에다 친구들과 담소를 즐길 공간도 있다. 게다가 정원까지 있으니 공간이 없어서 작업을 못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맞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로서는 쉽지 않은 말을 털어놓아야겠다. 나는 작가다. 하고 보니 당찮다. 너무 주제넘은 소리다. 잔뜩 겉멋이 든, 아니 누구에게도 먹혀들지 않을 소리다. 다시 해보자. 나는 글을 쓴다. 조금 나은가? 나는 습작을 한다. 이건 안 하니만 못하다. 겸손을 가장한 위선으로 들리니까. 그러면?

 

-앨리스 먼로, '작업실' 앞부분

       

 

 

 

 

 

 

  2013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앨리스 먼로의 단편 한 부분. 단편 소설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노벨 문학상의 권위가 아무리 예전만 못하고 한편의 쇼처럼 보인다 하여도 여전히 어떤 작가를 소개할 때 이 후광은 무시 못할 음영을 드리운다. 하다못해 위안을 받는 소설집을 펼쳐볼 때에도 이제는 노벨상이라는 글씨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으니.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당당한 글씨보다 더 당당하게, 앨리스 먼로가 소시민의 서러움과 비애와 애수를 자신의 작품 전반에 잔잔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집값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한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가정주부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작업실을 얻고 싶다는 말을 하기 전조차 개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여자가 만나는 괴물 같은 숙적. 어느 순간 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가늠하기 어려운, 끝끝내 알 길이 없이 바뀌어버리는 풍경'이 되는 순간. 앨리스 먼로는 그날그날, 하루하루를 사는 작디 작은 사람이 내는 여리디여린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는다. 물론, 신발 밑바닥에 천 원짜리 지폐 하나 몰래 숨긴듯한 희망을 살짝 비추는 것을 표제작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살포시 드러내지만, 정작 내가 종종 위안을 받으면서도 조마조마하게 읽었던 것은 '작업실'이었다

 

 

 

  작업실, 작품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시 복병은 꼭 없어야 할 곳에서 나타나는 법. 처음에는 소파나 커튼을 권하더니 화초와 주전자를 들이밀며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남자가 나온다. 작가들은 모두의 인생에 관심을 가진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작가들의 관심은 '소설이 될법한 인생 이야기'가 아니던가. 적당한 환멸, 적당한 참담함과 배신, 생명의 위협까지, 이 모든 것을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작업실을 얻은 그녀와 작업실을 방해하는 그의 모습은 소설 속의 ''를 괴롭히는 타자로 등장한다. 이 타자의 모습으로 새롭게 조명되는 관계의 갈등으로 말미암은 뒤끝은 뜻밖에 분노가 아닌 잔잔한 우울이다. 마치 밀물이 빠지고 썰물이 들어차듯, 관계의 피로도, 구조에서 들어차는 갈등도, 사람의 속마음에 비할 바가 아닐 때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지우지 못해 한숨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주는 기묘한 힘의 세계가 앨리스 먼로의 단편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 기묘한 힘의 방향이 종종 의도치 않은 곳으로 가는 것을 보노라면 마치 저 스스로 생명을 가진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그 힘의 여파를 겪는 것은 역시나 평범(하거나 평범하지 않거나, 여하튼).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포착한 단편을 보며 위안을 받거나 놀라던 시간. 앨리스 먼로와 쉼보르스카는 간섭이 아닌 시선을 보낸다. 그것은 때로는 조용한 위로이기도 했고, 때로는 진중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둘 다, 강요하지 않는 깊이를 지녔다. 이 정도 되면 문학에서 받는 위안을 넘어, 훌륭한 예술적 경험을 했다는 느낌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보통의 책 읽는 사람일 뿐이니까.

 

 

 

 나는 아직 다른 작업실을 구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볼 생각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그 그림-멜리 씨가 걸레와 솔과 비눗물이 든 물통을 들고 어설프게, 일부러 어설픈 동작으로 화장실 벽 앞에 구부정하게 서서 낑낑거리며 문질러 닦고 서러운 한숨을 토해 내며, 이미 기이하기 짝이 없는데도 웬일인지 절대 성에 차지 않는, 믿음을 배반하는 또다른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짜내고 있는-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는 적어도 기다릴 참이다. 원고를 다듬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 남자를 지워 없애는 것은 내 권리라고.

 

-앨리스 먼로, '작업실' 마지막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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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1-3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과 시작. 이라는 시집 제목의 의미를 몰랐는데,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이 시구에서 무언가를 잡은 기분이 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02 13:54   좋아요 0 | URL
시를 잘 모르지만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으면 우리가 즐겨 쓰는 쉽고 편한 낱말이 이렇게 깊을 수가 있다는 것에 놀라곤 합니다. 아마도 dreamout님에게 이 시가 어떤 의미로든 와닿았다면, 어떤 의미에서였을지가 궁금해요. 결국, 사람은 모순에 모순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나조차도 나를 모르겠지만 쉼보르스카는 그 모순까지 물끄러미 들여다 보려 했을거란 추측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저역시 다는 모르는 이 시집의 의미가 dreamout님에게는 더욱 명쾌하고 분명한 것이기를 바라요!

다크아이즈 2014-02-02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리스 먼로와 쉼보르스카는 간섭이 아닌 시선을 보낸다. 그것은 때로는 조용한 위로이기도 했고, 때로는 진중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둘 다, 강요하지 않는 깊이를 지녔다. 이 정도 되면 문학에서 받는 위안을 넘어, 훌륭한 예술적 경험을 했다는 느낌이다.>

제가 에뷔테른 님을 주목하는 이유가 저런 문장들 때문이에요.
비스와바 쉼보르카도, 앨리스 먼로도 다 제겐 눈물 나는 작가들.
쉼 여사사의 외국어 낱말, 나물 꼭꼭 씹어 먹듯 암독할 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이다.
에뷔님 여여하신지요?

Jeanne_Hebuterne 2014-02-02 13:59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잘 지내셨지요? 2013년이 가고 1월이 가고 2월이 되었어요. 날은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봄날같은 겨울날인데, 무엇 하고 지내시는지요? 여전히 열심히 읽고 좋은 글들 남기고 계신데, 오랜만에 뵙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아는 얼굴이 점점 줄어들어 안그래도 서재 지형도가 잘 떠오르지 않는데 팜므느와르님의 퍼스타콘을 보면 뭔가 든든한 기분이 들어요 :)

저 외국어 낱말이란 시, 참 좋지요? 저 하나하나 낱말을 떠올리며 고국의 공기, 숨결, 시인의 펜끝을 떠올리며 그것을 전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결국 낱말들 하나하나에 부딪혀 에뜨랑제의 입끝에서 터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모국어든 외국어든 말하는 사람의 혀끝은 늘 완전하지가 못하고 마음의 온도가 혀끝의 온도와 같지가 않다는 점 때문에요.

앨리스 먼로를 읽으면서는 어쩌면 이 작가는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의 등불같은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설핏 했더랬습니다. 아마추어같다든지 남는 시간에 쓴 것 같다는 뜻이 아니라, 평범 속의 비범함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의 목소리를 빌려 읽기 쉽게 써내려갔다는 뜻에서요. 모름지기 읽기 쉽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가 독자를 많이 배려했다는 뜻이고, 동시에 많은 것을 생각했다는 뜻일테니까요. 팜므 느와르님과 저 두 작가는 무척 잘 어울릴듯 싶습니다.

봄날같은 겨울날, 감기 조심하셔요 :)

2014-02-02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2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4-02-04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쉼보르스카, 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지만 작품은 제게 아주 낯섭니다. 이름에서 주는 이질적인 느낌 때문에 시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 지레 겁을 먹은 탓이지요. 단 한 번도 들춰볼 생각도 안했어요. 그런데 올리신 시, <가장 이상한 세 단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해서, 방금 시집을 검색해 미리보기로 몇 편을 보았어요. 그러다 이런 시를 읽게 됩니다. <열쇠>라는 시의 일부에요.


열쇠가 갑자기 없어졌다.
어떻게 집으로 들어갈까?
누군가 내 잃어버린 열쇠를 주워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리라-아무짝에도 소용없을 텐데.
걸어가다 그 쓸모없는 쇠붙이를
휙 던져버리는 게 고작이겠지.


나는 그게 없으면 집에도 못들어가는데, 누군가에게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붙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이 시를 읽으니 '좋다'는 말로는 표현 못할 무언가 있는 것 같아요. 바람이 차도 곧 봄이 올텐데, 저는 봄이 올 때를 대비해서 이 시집을 준비해두어야 겠어요. 봄바람이 불때면 꼭 미친년처럼 날뛰게 되는데, 그 때마다 한 편씩 가만히 앉아 읽으며 진정해야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05 12: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내가 좋아하는 다락방님. 전 요즘 저 스스로가 '그 쓸모없는 쇠붙이'가 된 기분이어요. 그래서 다락방님이 인용해주신 시가 슬퍼요.(스스로 제 무덤 파는 자선사업 중이라 오늘은 여기까지 댓글도 다락방님을 향한 사랑으로 겨우겨우 섰다능...킄ㅜㅜ)

다락방 2014-02-05 14:05   좋아요 0 | URL
저 이 시집 주문했습니다. 제게 오고 있어요.

2014-02-05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5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5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소설.

 

 현실과 현실의 너머를 보여주던 이야기.

 

 우리가 사는 곳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

 

 아름답고 리얼한 소설.

 

 

 

 엠마 도노휴의 '룸'을 떠올렸다. 잘린 페이지를 끼워 맞춰 읽던 추운 겨울밤을 떠올렸다. 잭의 작은 손이 내 손 속에 들어와 잡힐 것 같아 허공을 두리번거리던 날에 눈이 따뜻해졌다.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다는 나뭇가지. 낚시를 빠져나가려는 물고기의 움직임과도 같은 좌표.

 

 

 

 이 좌표는 오스트리아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착상한 소설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납치, 감금, 폭행,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탈출하는 사람의 이야기.

 

 

 

 종종 작가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그 바탕을 지워가거나 또렷하게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워나갔을 것이다. 누구도 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는 거꾸로 자기 자신을 또렷하게 그림자까지 아로새겼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녀의 손끝을 따라갈 수 있다. 시선을 돌려 '룸'의 페이지를 넘기노라면 엠마 도노휴는 실제와 실재를 뒤섞었음이 단박에 보인다. 어떤 사건과 현실이 존재할 때에는 현실이 줄 수 있는 중압감, 끝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벽에 맞서는 엠마 도노휴의 무기는, 뜻밖에 가벼운 깃털 같은 시선이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기억나?"

 "섬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래, 한데 어떻게 탈출했는지 기억나? 죽은 친구인 척 수의로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경비들이 그를 바다로 던졌지만 물에 빠져 죽지 않고 수의에서 빠져나와서 헤엄쳐 나왔잖아."

 "이야기 끝까지 해줘."

 엄마는 손을 저었다.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잭, 너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야."

 "바다에 빠지라고?"

 "아니,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탈출하라구."

 다시 혼란스러웠다.

 "나한테는 죽은 친구가 없잖아."

 "죽은 것처럼 흉내 내란 말이야."

 나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고등학교 때 엄마가 본 연극이 있어. 줄리엣이라는 소녀는 사랑하는 남자랑 도망치기 위해서 약을 먹고 죽은 척했다가 며칠 뒤 깨어났지."

 "아니, 그건 아기예수야."

 "그렇지 않아."

 엄마는 이마를 문질렀다.

 "예수님은 사흘 동안 진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거야. 넌 진짜로 죽는 게 아니라 연극 속의 소녀처럼 죽은 척하는 거고."

 "난 소녀인 척하는 방법은 몰라."

 "아니, 죽은 척하란 말이야.

-룸, 엠마 도노휴 '대탈주' 부분.

 

 

 

 간단하다.

 가장 복잡한 일에 가장 쉽게 묻기. 질문이 정확해야 답이 명확해지는 법. 엠마 도노휴는 다섯 살 소년 잭의 시선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탈출을 따라 하자는 엄마의 말에 잭이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바다에 빠져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진짜에 맞서는 진짜를 본 적이 없는 소년과 진짜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엄마의 이야기. 열아홉 살에 납치 감금되어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와 방 안의 사물이 전부인 아이의 눈.

 

 

 

 맑은 소리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오히려 먼지를 통해 일구어낸 문학의 자그마한 조각이 보인다.

 이 조각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두 개의 발자국은, 납치 감금 폭행을 당한 여자의 것과 그 안에 함께 있었던 소년의 것이다. 범죄 현장을 목격한 아이의 눈처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조그만 눈이 더듬었던 발자국은 우리가 익히 아는 범죄 현장과 다르지 않다. 이 '다르지 않음'이 다르게 다가오는 데에서 오는 눈과 머리의 불일치. 나는 이것이 문학이 펼쳐낼 수 있는 커다란 날갯짓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이 어떻든 간에, 사건이 어떻게 완결되었든 간에 문학은 픽션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그 누구도 완결된 글과 종결된 사건을 이길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닫힌 채 우리 앞에 말없이 놓여있다. 바라보면 열리는 그 사건을 뛰어넘을 수 없는, 뒤쫓는 자의 시선이 문학을 열쇠 삼아 오히려 현실을 더욱 현실로 보여주는 마법.

 엠마 도노휴는 엄마와 아이를 동정하지도, 냉대하지도 않는다. 말없이 바라보고 참견 없이 길을 걷는다. 유용함의 갈래로 얼개를 짰다면 이 소설은 르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픽션의 길을 택한 엠마 도나휴의 룸은, 그 자체로 간결하고 명확해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바라보아야 할 구심점을 힘있게 드러낸다. 구심점과 소실점. 재료와 기회. 다듬고 쌓아올리기.

 

 

 

 이 간단하고 복잡한, 뜨겁거나 차가운 발자국에 살짝 부는 바람을 맞노라면 작가는 미학적으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의 머릿속에 일말의 결심이나 동정심, 혹은 한마디로 정리되는 생각과 느낌이 들지 않게끔 소설을 써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명제에 충실한 글. 분명히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거나, 소설이 진행되었을 단계에도 있는 그대로를 옮기기를 피하려 노력했음이 분명한 흔적은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것은 다큐멘터리의 영역이지 소설이 아닐 터, 핸드헬드의 움직임으로 롱테이크의 시선을 옮기는 듯한 엠마 도나휴의 문체는 아이의 시선을 통해 더욱 깔끔해 보인다. 역설적으로 법을 가장 지키지 않는 이가 오히려 법을 가장 잘 알아야만 하듯, 엠마 도나휴는 있는 그대로의 완결된 사건을 엄마와 아이가 룸에서 나온 후 한꺼번에 햇빛을 보이며 더욱 확장한다. 가장 끔찍한 일을 가장 쉽게 바라보는 잭의 물음과 시선을 따라가 보면, 모든 현실에서의 사건을 하나의 시선으로 조망하게 되는 독법을 체험할 수 있다.

 

 

 

 

 대화의 영역에 말하는 사람과 듣는 이가 있다면, 소설가에게는 소설가 자신과 텅 빈 종이가 있다. 글을 쓸 때 대면해야 하는 자기 자신의 펜과 독자가 이미 알고 있을 사실. 독자가 이미 아는 사실과 작가가 만들어야 할 미학적 구조, 이 사이에서 엠마 도노휴는 작가로서 스스로 성취해야 할 역할을 앞서 말한 잭의 시점과 소설의 구조를 통해 훌륭하게 해냈다. 바로 독자가 책장을 덮는 순간 그 어떠한 윤리적, 현실적 판단도 하기 전에 잠시 진공 상태에 이르러 미학적으로 가치 있는 어떠한 변형된 형태의 픽션을 읽은 후 느낄 수 있는 '리얼'의 세계. 낯설고 새로운 진공의 상태. 소설이되 소설이 아닌 사실의 느낌.

 

 

 

 

 이 느낌은 일부는 소설 전체의 구조로 인한 것이다. '룸'을 읽다 보면 책의 중반부에 이미 잭과 엄마의 탈출이 이루어진다. 중반을 기점으로 앞부분에 펼쳐지는 룸 안에서의 생활, 뒷부분에 펼쳐지는 룸 밖에서의 생활. 르포르타쥬와 다큐멘터리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전반부까지였다면, 오로지 미학의 관점에서 현실을 빌려오는 소설의 지향점이 바로 후반부를 품으며 펼쳐진다. 멈출 법한 지점에서 계속 나아가기. 또한, 그 멈출 법한 지점까지 독자가 눈치채기도 전에 펼쳐지는 것은 잭이라는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이다.

 '그 좁은 세상에서 얼마나 갑갑했을까!' 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필시 독자 본연의 생각일 뿐, 오히려 룸 내부에서 엄마와 아이는 놀이를 하고 글씨를 익히고 이야기를 한다. 단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고 완전한 사랑과 지원을 주어진 환경 내에서 주고받는 관계는 잭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는 작은 신세계였다. 이 신세계가 서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룸 밖으로 탈출한 다음의 상황이다. 아이는 계단을 걸어본 적이 없고 엄마는 납치범이 한 번도 사람 앞에 나가기를 허용하지 않은, 룸에 갇혀 사는 사람에 불과했다.

 

 

Some are in robes the exact as ours and some in pajamas and some in different uniforms. Most are huge and don’t have long of hair like us, they move fast and they’re suddenly on all the sides, even behind. They walk up close and have so many teeth, they smell wrong. A he with a beard all over says, “Well, buddy, you’re some kind of hero.”

-엠마 도노휴 '룸', 원문 발췌

 

 

 파자마, 다른 유니폼, 커다란 몸집, 우리같지 않은.....여기저기서, 뒤에서까지. 이빨도 많고 이상한 냄새가 나고....룸 안에서 분명하고 단정적이었고 질서정연했던 잭의 시선이 갑자기 불안정해지는 것은 오히려 룸 밖에서였다. 룸 안에서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 오로지 둘만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밖에서의 두 사람은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아우른다. 이 소설이 현실만을 그대로 그린 평범의 틀에서 비범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간결한 구조로 뛰어난 미학적인 성취를, 사실을 뛰어넘으로써 리얼하게 그릴 수 있었던 작가의 펜에서 나왔다. 잭이 '안녕, 방아.'라고 말하며 룸에 작별을 고할 때 소설은 끝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다음, 잭이 언젠가는 더 많은 것을 엄마에게 물어볼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그 세계는 오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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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1-30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이야기인줄은 알고 샀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간결한 구조, 뛰어난 미학적 성취라는 말씀에.. 그럼. 한 번 읽어볼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이야기는 읽기 힘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04 08:16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역시 이 책도 갖고 계셨군요! 아무래도 좋은 책들은 dreamout님의 감식안을 피해가지 않나 봅니다 :)

얼마 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한 편 보다 그런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 영화 속 고문 장면이 더더욱 괴롭게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실화가 주는 힘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따지고 보면 그 괴로움, 그 힘든 감정은 잔인함이 아닌 불편함의 힘은 아닐까요? 우리는 바라보기 불편한 슬픈 이야기를 피하고 싶고, 그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 의무를 다했다는 편안함을 지양하지만 실제 우리가 지양해야 할 것은 오히려 섣부른 외면과 도피일지도 몰라요. 무엇보다도 엠마 도노휴는 독자가 이 책을 다 읽은 다음 불쌍하다든지, 근처 있는 어린 아이에게 잘 해주어야겠다든지, 이런 다짐이나 결심,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고 대신 잠시라도 구조와 이야기가 줄 수 있는 현실을 떠나 있으면서도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둔 미학적 리얼함을 추구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는 르포와 다큐의 영역이고, 소설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혹여나 읽게 된다면, 꼭 리뷰나 짤막한 감상 남겨주세요! 무척 궁금합니다 :)
 

 



봄 ; ____.



정초의 중얼거림이 연말의 복선이 될 줄은 나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 꼬리뼈까지 의자 깊숙이 붙이고 책상에는 진하고 검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두고 천천히 조금씩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병 아래까지 숨어있던 인스턴트 커피 알갱이들은 굳이 스틱으로 젓지 않아도, 뜨거운 물을 붓고 머그컵을 좌우로 흔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스르륵 녹았다. 잔을 꼭 잡으면 뜨거운 기운에 손 전체가 싸르르해지는데, 종종 그걸 어떻게 잡느냐고 신기하게 보던 이가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 날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지. 하얀 백지는 떠오르는 태양같이 눈 부신데 떠오르는 태양은 도리어 커피처럼 캄캄했다.

-일월




 저렇게 정월, 혼잣말하였는데 동짓달, 꼬리뼈를 다치고서야 그 존재를 다시 알게 되었으니 그 까닭은 다쳐서, 아파서, 신경이 쓰인 까닭입니다. 신경은 내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 길 없이 열심 걷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나중을 아껴두었다고 착각하는 자의 오만함과 무지함, 그 합의 가장 총명한 상태였습니다.




 일월, 당신은 내게 늘 불친절했습니다. 남들보다 특히 더. 나는 방망이 다듬는 노인처럼 몸을 옹송그린 채 앉아 고집을 부렸습니다. 갑각류가 된 모양 앉았지만 진주 하나 품지 못한 조개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이것저것 내다 버렸습니다. 사전과 개론서 몇 권만 남기고 책은 모조리 처분하고서야 머릿속 남은 것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자고로 사람은 제 것이 아닌 것을 가까이하기만 하여도 제 것인 양 착각하는 버릇이 있나 봅니다. 원근감에 잠시 속았던 봄이었습니다. 가까이 있다 하여 고통스러웠고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덜 아픈 것이라고 거스러미 하나에, 그렇게 깜박.




 스웨이드를 들었고 실버라이닝플레이북을 읽고 보고, 하릴없이 거리를 걷기도 하고 감정의 뒤를 넓은 보폭으로 착각하여 한숨이 덜거덕거렸지요. 열심 궁리하였으나 들어가는 것은 들숨, 나오는 것은 날숨, 그것들의 총합을 한숨이라 불렀습니다. 봄의 결론은 위에서 중언부언 말하였듯 피곤과 한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이제 깨닫습니다. 불안한 마음의 답답한 상태, 덧없음의 도취. 내가 당신을 그리 맞이하였기에 당신이 나를 그리 찾았다는 것을.







              여름 ; 마음의 상태


 


 나처럼 당신도 남아있었구나, 하고 아스라이 바라보던 순간.

 당신이 내게 건넨 티끌 하나, 마음의 상태.


<state of mind, those who stay> 

Umberto Boccioni


 과거와의 단절, 새로운 재료 사용, 다이나믹한 형태와 기계에의 찬양, 장식의 배제, 폭력의 미화. 움베르토 보초니가 속한 미래주의에 관한 위키피디아의 정의입니다. 질주하는 자동차의 움직임은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더 아름답다는 미래주의 선언문의 구절을 '공간에서의 독특한 형태의 영속성이라는, 속도감 넘치는 조각으로 표현해낸 보초니의 서정적인 작품입니다. 떠나는 존재가 보여주는 속도를 찬양했던 보초니가 바라본 남아있는 자의 도사림은 저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감성적인 것에 반대하는 보초니의 작품, 마음의 상태를 뜯어보면 떠나지 못하는 자들이 보입니다. 그 그림자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청록의 우울함과 자각을 통해 올바른 근거를 찾아낸 후회의 울림이 들립니다. 녹색의 울렁임과 흐물거리는 헤어진 휴짓조각같은 사람들. 떠나지 못한 자들의 흐느낌은 저런 색조일 것입니다. 


 







가을 ; 추억할 수 없음








내 청춘이 지나가네


                               박정대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바람 말고는 만질 게 하나도 없다는 글귀에 설레던 가을이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 천사가 지나간 흔적. 존재의 독성에 뉘우치던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은 늘 조금 매캐한 공기처럼, 근거를 제대로 찾은 후회처럼 찾아오곤 했습니다. 설렘의 뒷면에 남은 뉘우침. 코끝에 살짝 떨어지는 벚꽃잎 같달까요. 그것이 설렘의 마음이라면 코끝의 벚꽃잎이 시드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쓸쓸함일 테지만, 나는 단 하나, 아직도 당신을 추억하는 법은 잘 모릅니다. 내일의 기억이 없고 추억할 어제가 없다는 나를 벚꽃처럼 낙엽 흩날리는 당신은, 나를 머릿속 뇌수를 뜯어보듯 쳐다보았지요. 쳐다보고, 살펴보고, 뜯어보는 것 중 하나의 목적어라도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쩌면 추억하는 법을 모르는 것은 관조할 만한 거리가 없기 때문일 거예요. 늘 배를 곯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적당한 물러섬 끝, 최고로 멀고 최고로 가까운 그 거리, 예상하였다는 듯,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만한 거리가 내게는 없습니다. 욕망의 가장 솔직한 순간이자 한숨의 가장 위태로운 조각. 굳이 나무라자면 내 허기와 영양분 없음을 나무랄 뿐. 내게는 아직  추억할 수 있게끔 알맞게 확보된 거리가 없습니다. 바짝 맞닿으려는 내게 당신은 언제나 들쥐처럼 찾아오고 고양이처럼 옷자락을 들고 일어섭니다. 마음이 사라지는 거리를 영화 그래비티를 보며 느꼈습니다. 가을은 공기였고 잡을 수 없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고서야 내가 이제 가을에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겨울 ; farewell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간증, 티끌만치도 아름답지 않은 물체의 위치, 덜그럭거리며 운반한 시체는 묘지가 아닌 구덩이 속에 툭 던져넣은 까닭에 비석조차 제대로 없는 당신. 이렇게 당신을 푸대접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아차, 하는 마음이 꼭 빈 탁자위에 잘못 남겨둔 장식처럼 빈집에서 그림자만 녹아내립니다. 




 내가 살아있는 시간의 속옷은 이렇게 누추하게 펄럭거리는데 당신은 늘 가장 순진하게 연필 끝의 각을 세워 종이에 사각댑니다. 그 소리가 천천히 자라고 잦아들어 문이 철컹 소리로 먼저 닫히려는 순간. 혹은 거리로 나가 비둘기가 양지를 찾아 무언가 콕콕 쪼아대며 꾸룩거리는 보던 때. 포만감에 가득 찬 사람들의 입술. 겨우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창백하게 책상 위에 정물처럼 굳어졌을 때. 사람들 사이 외따로 서 있던 때. 많은 사람이 본 유령이 공기 중을 떠돌고 나는 욕망과 능력, 욕심과 욕망이 짝 없이 돌아다니는 빈집에 딴에는 할 일도 없으면서 들어앉았습니다.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 바라보는 창밖의 무심함. 당신은 일말의 호기심조차 남겨두지 않고 이제 나를 치우겠지요. 그러고서는 다시 불친절한 다른 숫자를 내게 보낼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존중하려는 마음, 

 무언가의 시작이 이제는 태어나기 전 죽은 상태. 



 나와 당신, 2013이라는 다정하고 매몰찬 숫자가 힘겹게 맞잡았던 손바닥 사이 

 그 어떤 공기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맞닿은 그림자 뒤 아무도 뒤따르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당신과 나를 그 어떤 이도 다시 잡지 않기를. 

 그래서 이제 안녕이라고 하지 않고 farewell 이라고 말합니다. 

 늘 이 목소리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휘청일 뿐입니다. 

 그 위를 아무도 걷지 말기를.


 





 그리고 2014, 새로운 당신.



 내게 멀미와 꿈, 몰입과 첫사랑을 보내주시기를.

 간극과 격차에서 오는 아찔함, 무엇이든 잊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 

 조금으로라도 포만감을 이제는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을. 

 나는 이제 이 벽을 천천히 훑으며 손자국 하나 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2013,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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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K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이리나 레인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그래요. 닫혔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 겁니다.

-안나 카레니나





 모호하고 불확실한 무엇. 아무리 달콤한 말도 구태의연한 것으로 들리게 하는 재주. 소용돌이 속에서 헛발질하는 개구리 같은 모양새. 남김없이 소진해 버릴 것이라는 헛된 다짐. 왜곡된 시선. 본의와는 무관한 해석. 작가가 전혀 의도지 않은 데에서 홀로 엉뚱하게 감동하는 독자. 단순간 어디론가 뻗어 나가 돌아오지 않는 생각. 안나 케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러시아계 유대인 소설가 이리나 레인이 현대 뉴욕을 무대로 재구성했다. 티파니와 펜디, 나이키, 불가사리 모양의 은 펜던트. 여자의 마음. 첼시와 소호, 소호의 프랑스 레스토랑, 랑그도크 지방의 와인, 그리고 아이오와. 남자의 마음. 세상에 그런 남사스런 일이. 부하라 유대인. 댁의 따님은....세간의 반응. 이 세 가지가 통속적으로 얽혀들어가는 모양새를 보자면 안나 카레리나는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도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결론이 허망하게 남는다. 굳이 누군가를 꼭 살리라고 할 생각 없이도 이 죽음 앞에서는 또 한 번 무릎을 꿇게 된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주변 환경이 다르고 심지어 안나마저도 메타 소설의 모양 앞에서 달라지지만 안되는 것은 역시 안되는 것일까.




 물론 결말에 집중하고 그에 이르는 흐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그런데 참으로 난처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거장의 필치 앞에서 대상을 무한대로 확대하거나 축소한 이리나 레인의 렌즈를 들여다보자니 그 길 끝에 이르는 이 책의 지도가 너무 쉽거나 통속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와 농노제, 법률 사회까지 사회 전반에 관한 깊은 생각을 거친 작품이었다. 많은 이들이 소설의 첫 문장과 그 번역본에 그리 관심을 두곤 한다. 그러나 작가 김영하의 말을 빌리자면, 작가들은 의외로 문장의 얕은 술수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문체와 문맥. 조금의 기교를 부린 장식체 문장이 아닌 소설의 주제, 핵심에 도달하는 독자에게 펼쳐지는 세계야말로 문학의 핵심 중 하나다.




 그렇다면 안나 카레리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것 하나만으로도 괜찮은 논문 몇 개는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안나 카레니나는 넓은 지평을 다룬다. 나뭇잎을 가리키는 손끝이 아닌 나뭇잎을 들여다 보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의 제목과는 달리 안나 없이 시작하여 안나 없이 끝난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을 가정파탄의 슬픔이라고 읽기도 했고, 어떤 이는 이 소설을 독자를 가르치고자 하는 작가의 끝없는 열망이라 읽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이 읽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른 것만 읽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정확히 톨스토이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이리나 레인이 안나 카레니나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다 이 소설을 썼다고 확신한다. 




 이리나 레인은 아주 간단한 선택을 했다.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안나의 외양 묘사에서 알렉스를 만나 하는 연애에서는 탄산이 빠져나간 탄산수의 맛이 느껴진다. 알렉세이 카레닌의 환영이 분명한 알렉스의 청혼을 잠시 살펴보자. 





"사랑하는 안나." 안나가 반지에 묻은 초콜릿을 핥아, 아니 빨아먹어서 다이아몬드 알과 주변 장식은 침 범벅이 됐다. " 당신을 향한 내 마음 알지?"

 "네." 안나는 책을 읽듯이, 어색하고 서투르게 "복선"을 의도한 대화를 읽듯이 대답했다. 자신도 이 일에 가담했다는 걸, 게 그에 따른 피치 못할 결론이라는 걸 간파했다. 아니라고 말할 거였으면 계획을 궁리하고 실행하던 몇 달 전에 했어야 하지 않아?

 "지난 일 년 반 동안 우리가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걸 확인했어." 알렉스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웅얼웅얼 둘이 거쳐온 지난 날들을 훑었다. 와인 두 병을 마시며 밤이 깊도록 이어진 첫 데이트, 그녀가 발을 접질렸ㅇㄹ 때 그가 의사를 불러왔던 버몬트 스키 여행, 그녀가 로댕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로댕 전시회, 처음으로 함께 보냈던 애틋한 밤 등.  ...

 "안나, 나랑 결혼해 줄래?" 시간, 그녀는 시간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책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무미건조하게 지나간다. 

 안나와 알렉스의 모든 것이 잘 깔린 대리석 바닥처럼 평탄하다. 

 그에 반해 안나와 데이비드의 모든 것은 낙차를 지닌다.




 문자가 왔다. "뭐해요?"

 "당신 생가해요." 알렉스가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친정 부모님까지 앞에 계셨다. 가슴은 쿵쾅거리는데 자판을 누르는 엄지는 둔해서 급하게 서두르다 맞춤법이 틀렸다. '전송'을 누르고 자리로 돌아와 알렉스의 팔짱을 꼈다. 너무 행복해 보이는구나. 엄마는 딸의 뺨을 가볍게 꼬집으며 말했다. -책속에서





 이리나 레인의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로 가득하다. 물론 키티와 레빈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똑같이 재현된다. 다름이 없어서 독자는 이리나 레인의 안나를 읽을 때마다 모든 것이 닫혔다고 말하던 톨스토이의 안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리나 레인의 안나를 읽으면 안나 카레니나가 떠오르건만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도 안나 케이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오리지널의 위세. 이것이 원본과 샘플링의 차이라면, 역사상 이런 시도는 무수히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진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어떤 글이 좋다고 말하면 물론 작가는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하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좋아? 좋다고? 좋다는 것은 일차원적인 일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리나 레인의 안나 케이는 어쩌면 참 좋은 소설일 것이다. 끝없이 소설 속에서 안나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남편 알렉스에게 이혼해 달라는 말을 하고 한달음에 데이비드에게 택시를 타고 간 다음 처음 그녀가 하는 말도 이제는 자신을 가지고 소설을 써달라는 말이었다. 알렉스가 낯선 곳,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아이오와에 가자고 말할 때 하는 말도 '당신을 주인공으로 써낸 소설을 좀 더 살려볼 수 있을지도 몰라.' 였다. 픽션 속의 픽션이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펼쳐지지는 않는다. 그 이상 작가가 나아가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의 직업에 집중한다. 바로 그녀의 삶이라는 직업. 




 

이상한 꿈, 배에서 꾸게 되는 꿈. 끈적끈적해서 헤어나올 수 없는 꿈. 곤경에 빠진 안나를 죽음으로 돌아가는 불길하고 모호한 상황들. 좀처럼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일들. 어떤 색깔, 갈색이 도는 엷은 자주색 립스틱을 찾는다면. 양배추 잎 뒤에 숨은 새끼 고양이를 발견한다면. 배를 벗어나 뭍에 오르는 길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여러 남자들의 조합. 얼굴과 정체가 뒤섞인 남자들이 안나의 몸을 위협했다. 주머니칼로 그녀를 으르며 인적이 없는 뒷골목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앞으로 닥칠 재앙을 경고했다. 그리고 그녀의 꿈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기차.-책속에서




 

 이리나 레인이 사용하는 단어는 안나를 향할 때는 혼란스럽게 좌초되는 배처럼, 알렉스에게 가해질 때는 공무원이 꾸민 공문의 첫 페이지처럼, 데비드를 향할 때는 답답한 짐꾼을 볼 때 짜증 나는 회초리처럼, 카티아를 그릴 때는 순진무구한 시절의 지젤처럼, 레프를 묘사할 때는 적당히 타협하는 한강 이남의 회사원처럼 독자에게 다가온다. 

 서서히 베일을 들어 올리지 않고 단번에 확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독자를 사로잡는 안나의 모습처럼, 이리나 레인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이미 알려진 플롯의 재구성을 통해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가치판단을 다시 한 번 미룬다. 이 소설 전체를 통해 독자는 자신이 만나보지도 않은 안나를 들여다보게 되는데, 처음에 안나는 창백하도록 흰 피부에 검은색 모피 코트를 입고 발끝을 살짝 밖으로 틀고 흐트러짐 없이 우아하게 걸으며 무대에 등장한다. 물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서. 




 그러다가 나중에는 관자놀이가 쿵쿵 울리고, 심플함을 드러내기 위해 늘 점점 더 힘들어하고, 조심하라는 말에 조금 물러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혈색과 걸음걸이, 몸매와 눈빛이 등장하다가 언젠가부터 우리가 보는 안나는 실루엣이 아닌 형체로 굳어진다. 

 정지된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가려는 시도. 이것은 이리나 레인의 안나가 소설작법에 관심을 두었고, 계속 데이비드에게 자신을 소설 속에서 숨쉬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일치한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너무 멀리 나가지 말자고 다짐한 다음 이 소설을 다시 들여다 보면, 이리나 레인의 안나 카레니나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톨스토이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강조한다.




 이리나 레인의 안나 케이는 안나가 행하는 행동, 안나가 하는 말에서 그 모든 의미를 끝맺지 않는다. 외려 안나가 겪는 사건을 읽는 이가 마음속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현대 뉴욕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 나를 비롯한 다른 이가 낱말 하나하나를 읽어나갈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있다. 그리고 살짝 생기는 기대와 예측, 호기심. 안나 카레니나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는데 여기서도 그럴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녀는 오일릴리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시간과 공간이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힌 벽, 여전히 높은 천장, 여전히 낮은 바닥에 안나가 부딪힐 때마다 작가는 닫힌 문장이 아닌 허물어진 기대감을 의도했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읽을 때의 기대감과 읽은 후의 실망이 반복되는 리비도의 곡선이 그려질 때, 독자에게 어떻게 작품을 읽어야 할지, 더 나아가서 작가의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관찰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리나 레인의 안나 케이를 읽노라면 독자는 좀 더 확실한 지식을, 명확한 진실을 원하지만 읽기 경험을 통해 늘 기대는 좌절되고 희망은 꺾이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모든 읽기가 쓸모없는 것일까? 오히려 독자 앞에 조용히 놓인 문장은 그 어느 것도 명확하거나 법률처럼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쌓아나갈 읽기에 관한 경험이 더 값진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오독, 읽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 해석을 해나가는 데에 생겨나는 여러 과정, 이런 모든 것이 독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리나 레인은 안나 케이를 통해, 다시 쓰기를 통한 읽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독자의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경험을 살짝 보여줌으로써 톨스토이의 아난 카레니나는 완전무결하거나 이미 원작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유일무이하지는 않아도,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롭지 않다 하여도 읽기의 한 갈래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보면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한 조각. 

그리하여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다른 누군가의 안나 카레니나의 자리를 비워둔다. 







 "대단하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삼십 분도 넘게 기다렸네."

 안나는 노란 선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그 위에 섰다. <데일리 뉴스> 1면에 나오면 어떻게 될까? 신문을 읽는 데이비드, 비통에 잠긴 레프의 모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갔다. 신문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사진, 알렉스를 만나기 전, 어쩌면 서른다섯 번째 생일 케이크 앞에서 촛불을 끄는 사진을 쓸지도 모른다. 길쭉한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긴 그 사진. 무심결에 찍힌 사진이었는데, 물이 올라 봉오리를 터트리기 직전의 튤립 한 단을 몸 속에 품은 것처럼 눈동자가 반짝였다. 카티아의 소개로 데이비드를 만났던 신년 파티의 사진이라면 더 좋겠다. 악수를 나눌 때 데이비드의 눈 속에서 봤던 그 여자, 그의 잔에 비쳤던 그 여자, 검은 옷에 부드러운 홍조를 띤 그 여자의 사진이면 좋을 텐데.

 터널 안에서 불빛 두 개 어렴풋이 빛났다. 이렇게 쉽다니, 제대로 한 발만 디디면. 선택, 결정, 도약. 그런데 정말 할 수 있을까? 승강장 밖으로 오른발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터널을 막 벗어나려는 6번 노선의 녹색 동그라미가 깜빡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조심하세요, 부인." 조금 전에 옆에서 말을 하던 남자였다. "너무 앞으로 나가셨네요."

 그래서 조금 물러났다. 그녀의 몸은 지시를 따르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다시 끌린 듯 그 자리로 돌아갔다. 전철은 빠른 속도로 진입하면서 두 개의 흰 전조등으로 그녀를 강렬하게 비췄다. 생가갈 시간, 가능성을 타진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늘 따지기만 했고 자기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에 지쳐버렸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영원한 연옥. 좀 솔직해지자. 퀸스에 가면 뭐가 될까? 아이오와에서는? 지금은 뭐지? 필요한 것은 찰나의 선택, 근육을 움츠렸다가 스스로 뛰어올라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것.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옳은 선택을 할 거야.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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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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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한가운데. 나는 너무 멀리 떠나왔고 어딘가를 늘 다친다. 음악, 뜨거운 차. 적당히 차가운 공기. 책 몇 권. 닿지 않는 마음 끝. 아니, 이런 것이 지금을 설명할 수는 없다. 지금 내가 현재라고 부르는 시간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새로 일어난 사건을 지나치게 커다란 의미를 지난 것으로 보고 이미 있어온 무언가를 곧 없어질 무언가로 생각하곤 한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레 교차하는 어느 순간. 1913년, 백 년 전의 그 날을 들여다 보기 전의 나의 마음이었다. 아마 여느 독자들도 그러했으리라. 




 시간은 흐르는 것인데 그것을 종종 잡으려 하거나 나누려는 시도가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는 방법의 하나였다면, 벨 에포크, 세기말, 모더니즘, 현대, 근대, 이런 단어들은 어떻게 해야 손에 잡히는 것일까. 별 하나에 1913년, 별 둘에 1913년의 사람들 이름을 붙인다. 어느 날 나의 손끝에도 현재라는 시간이 무성히 쌓이게 만드는 책. 시간은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어느 시간이 중요하다거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곧 그 순간의 사건이 앞뒤를 연결하며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뜻일게다. 아름다운 작품은 지천으로 널렸다. 아름다운 문장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것도 역시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게 왜 아름답고, 왜 올바르며 왜 의미를 지니는가? 말을 만드는 것은 가장 단순한 작업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 어려운 일이다. 나만 이해 못 한다 하여 알 수 없다고 단정 짓거나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만천하에 떠벌이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그리하여 더 알기 위해 들여다 보고 더 이해하기 위해 읽게 되는 역사의 한 페이지. 그렇게 조용 따라가게 되는 오래된 미래. 1913년의 1월부터 12월까지 시간을 사소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찬찬히 들여다 보면 태초에 있던 말과 그다음 생성된 의미가 보인다. 우리가 잡으려 했으나 더러는 놓쳤던 것, 우리가 상상했으나 더러는 실현했던 것이 백 년 전 일 년 열두 달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왜 하필 1913년인가. 저자 서문이 없어 저자 서문 대신 출판사 책 소개를 들여다보면, 1913년은 19세기의 끝과 20세기의 시작을 동시에 알리는 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국주의는 정점으로, 민족주의는 구심점으로, 영토 분쟁이 점조직처럼, 기술 발전은 박차를, 신경과민자들이 넘치는 도시가 꼭짓점에, 모더니즘이 요란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말하는 20세기는 엄밀히 말해 1914년부터 1991년까지이다. 1차 세계대전과 소련 몰락이 그 시작과 끝을 알렸다면, 그 직전, 1913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히틀러와 스탈린은 비엔나 쇤부른 궁전을 자주 산책했다. 아마 슬쩍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카프카는 그 소심해 미쳐버릴 지경인 오락가락 연애편지에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다. 키르히너는 포츠담 광장에서 창녀들을 그리느라 바쁘다. 모나리자는 도난당했고 뒤샹의 '계단을 내오는 누드'는 아머리 쇼의 간판 그림이 되었다. 뒤샹 형제는 미국에서의 명성 소식을 듣지 못하고 뇌이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한다. 카프카는 작년 12월에 보낸 '관찰' 이라는 책에 펠리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 속을 태우다가 몇 달 뒤 펠리체 바우어에게 청혼 편지를 급행으로 보내고, 예술은 추상을 향해 치닫는다. 뮌헨의 칸딘스키, 파리의 들로네, 러시아의 말레비치, 네덜란드의 몬드리안. 그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의 모든 관계를 끊는다. 미래주의는 러시아 지방을 떠돌고 코코슈카는 알마에게 미쳐버렸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현대 산업건축 예술의 발전'을 독일공예연맹 연감에 발표한다. 잠시 그로피우스의 말을 옮겨보자면 이러하다.



 "산업의 모국인 아메리카에서, 독일 최고의 건축물을 능가하는 낯선 웅장함을 지닌 걸작 건축물들이 생겨났다. 그 건축물들은 어청난 설득력으로 관찰자에게 건물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시키는 확실한 건축적 얼굴을 가지고 있다." 



 다르게 말해보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나왔다. 버지니아 울프의 출항이 어렵게 빛을 본다. 사실 아내와의 성교까지 다이어리에 기록한 특성 가득한 남자 무질은 '특성없는 남자'를 낸다. 아나톨 프랑스는 '인생은 짧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너무 길다.'라고 말한다. 마르셀 뒤샹의 자전거 바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파리와 모스크바에서 선보인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객석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며 등장한다. 코코 샤넬의 모자 가게가 있었고 프라다의 첫 매장이 이때부터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사건의 나열, 우연성의 결과일 수도 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주치는 어떤 인물. 이것은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 가장 흔히 하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서로의 학력, 거주지, 하다못해 여행지라도 들추어 보며 우연히 만났을지도 모르는 어떤 상황을 유추해 보는 일. 1913년은 모든 것이 바뀌는 해였다. 그전까지 몸에 맞은 옷처럼 느껴지던 역사에서 인간이 분리되었다. 그전까지 통제하고 구속하고 속박했던 모든 전통의 권위, 그 틀이 허물어지던 해. 그 모든 안절부절과 신경쇠약과 신경과민은 그러한 자유로움에서 온 것. 개인과 사회, 관계와 변형, 개인과 개인의 영속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해. 한마디로 융의 프로이트에 대한 친부살해와도 같은 일이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 것이다.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을 통해,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통해.




5월 29일 저녁에 모인 파리 관객은 구 유럽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교양있는 관객이었다. 특별석에 채권자를 피해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도망쳐 온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다른 특별석에는 클로드 드뷔시가 앉아 있었다. 코코 샤넬은 1층객석에 앉아 있고 마르셀 뒤샹도 마찬가지다. 뒤샹은 나중에, 이날 저녁의 "아우성과 날카로운 부르짖음"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고대의 근원적인 힘을 무대로 불러냈다. 이미 표현주의 예술의 모범이 된 아프리카인과 오세아니아인의 원시성이 이제 문명의 중심, 다시 말해 샹젤리제 극장에서도 약동하는 생명으로 깨어났다. 

 -책 속에서(5월)




그러나 그렇다 하여 1913년의 사람들이 르네상스 인간처럼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까? 오히려 반대가 아니었던가? 과도기의 비엔나는 신경쇠약의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에곤 실레의 집도의와도 같은 여인 누드, 코코슈카의 침대 크기 화폭, 쇤베르크의 뺨따귀 음악회. 음색이 날카롭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뺨을 맞은 쇤베르크도, 알마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코코슈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누드를 그리던 에곤 실레도 아마도 융이 프로이트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 앞머리의 테두리 내에서 움직인 것일 것이다. 



 "제자들을 환자 다루듯 하는 교수님의 태도는 잘못이라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교수님은 늘 저 높은 곳에서 아버지처럼 품위있게 앉아 계십니다. 오로지 복종만 하느라 그 누구도 감히 예언자의 수염을 잡아당길 엄두도 못내죠. "


융은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저는 사적인 인간관계를 끊자는 교수님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교수님께 어떤 의미인지는 당신 스스로가 가장 잘 아시게 될 겁니다. 나머지는 침묵입니다."



 침묵 서약으로 시작된 절교, 서로의 방법론을 버리게 된 두 사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에는 자기파괴의 계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원시 부족 사회의 친부살해. 자신이 죽인 아버지와 같은 가면을 쓰기. 이것은 그 전에 프로이트가 내린 것이 아닌가. 역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통해, 자신이 내린 정의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의미를 가진다. 전과는 달리 어떤 시대 양식도 만들어내지 않는 미술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 우리가 쉽사리 찾았던 일관성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단 하나 발견되는 지속적인 성질은 바로 작용과 반작용일 것이다. 서양미술사의 잰슨이 지적했듯이 다양한 '주의'는 물결이 퍼지듯 국가적, 인종적, 연대기적 경계를 허물어뜨렸고, 어떤 지역에서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1913년, 국가의 개념이 허물어지고 국가 대립항이 아닌 도시 대립항, 아니, 그보다는 개인의 산발적인 사건과 개별적인 작품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주의를 살펴보자면 심증은 물증을 얻기까지 한다. 잠시 책 밖으로 눈을 돌려, 잰슨의 서양미술사 한 단락을 들여다보면 역시 이런 부분이 보인다. 



 이런 주의 들은 끝없는 변화 속에서 서로 경쟁하거나 뒤섞이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근대의 미술에 대한 리의 분석은 국가 개념보다는 양식 개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로지 이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지역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대 미술 역시 근대 과학처럼 국제적인 움직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잰슨, 서양미술사.




 이즈음 되면, 저자가 왜 한 가지 분야가 아닌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1913년의 풍경을 이렇게도 사적으로, 방만하게 보일 정도로, 가십까지 검증하고 때로는 추측도 과감히 옮기며 그려냈는지를 알 수 있다.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부분 부분, 그 조각 조각을 쭉 훑고 나면 전체가 보인다. 따로 떼어내서 한 가지만 보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어떤 그림, 어떤 시, 어떤 소설, 어떤 개론서, 어떤 조각, 어떤 기사, 어떤 건축, 어떤 무엇. 무형의 무엇과 유형의 무엇. 사람의 생각이 빚어내는 복잡함. 이 모든 것의 전체를 조망하고 부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호오의 기준만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1913년이라는 부분을 떼어내어 조망했지만 읽고 나면 저자가 보여주고자 한 맥락과 전체 역사 속에서 1913년이 드러내는 의미가 만져진다. 부분을 통해 흐르는 전체.





 그 가로 세로직조된 사건과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서서히 일어나고 변화를 겪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수많은 가정법이 있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결국,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린 일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소비하면서. 어떤 것을 이야기하거나 떠올리면서. 이 속에서 사람이 빚어낸 1913년의 자유, 역동성. 모더니즘은 예술가로 하여금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고 그에 따른 정의를 내리게 했다. 강렬한 도전의식, 리얼리티의 구조에 중심을 둔 추상주의의 관점. 미래에 대한 가능성, 직관과 양식, 모방과 재창조. 죽지 않은 과거, 오래된 미래. 머지 않았던 시간. 우리가 현재라 부르는 시점의 시작. 우리와 비슷한 우울, 우리와 비슷한 신경과민, 우리와 비슷한 강박. 지금 우리가 겪는 시간은 결국, 그때로부터 온 것이었다. 서로 무관한 사건과 상황의 입체적인 몽타주가 손끝에 닿을 듯 만져진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보이는 것인 1913년, 만져지는 것은 2013년. 아마 백 년 뒤에도 이러한 기획이 역사로 나타나겠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역사이며 조심해야 할 것은 부분만 따로 떼어 자신만의 기준으로 바라본 것을 전체라 우기는 일일 것이다. 

 

 




 "아주 새로운 안무와 음악. 완전히 새로운 비전, 처음 보는 것.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럴듯한 어떤 것이 갑자기 내 눈앞에 있었다. 예술이 아니면서 동시에 예술인 새로운 종류의 야만성이다. 모든 형식을 파괴하고, 혼돈에서 갑자기 새로운 형식이 나타난다." -캐슬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관람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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