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별 아래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서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데도,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달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어느 날

 

 

눈꺼풀이 물에 젖은 새의 날갯죽지처럼 축 처져 어디론가 밀려갈 듯한 담요 속.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물기 어린 얼굴이 거울에 아른거린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 하루가 조용히 깨어나는 시각.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말리고 살짝 내려앉은 먼지를 못본 척 하며 집을 나선다. 그 어 느날, 늦은 시각 탓에 고개를 떨군 탓에 못본 사이 집 근처 신축 빌딩은 어느새 콘크리트를 다지던 그 모습에서 벗어나 제법 건물의 외양을 갖추었다. 하룻밤새 창문을 가리는 건물이 생겼다. 거리에는 낯선 억양과 날 선 얼굴이 보인다. 열두 달 다른 열두 개의 얼굴이었다. 저녁, 스스로 몸을 추스르며 조용한 공간에서 버튼 하나를 살짝 건드리면,




어느새 가득한 음악.



바쁘겠지만 

먼 길을 돌아가야 하겠지만 



결국 

 


 


돌아오는 어느 귀퉁이가 있을 거란 생각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던 어느 날 하루.

 

 


 



 

 

드보르작 8번 교향곡.

 

 

케르테츠와 런던 심포니의 조화로움과도 같은 잘 짜인 틀이 하루 종일 그리웠던 어느 날. 그 끝에서 듣는 한 자락. 차분하다가도 어느 순간 격렬해지고 윙윙거리는 말벌떼 같은 현의 목소리가 그득하다. 목관의 목가적인 맑은 고요함, 때로는 호흡조차 영원히 멈추지 않을듯한 플루트, 살며시 감싸며 흘러나오던 왈츠. 체코의 국민 작곡가였으며 32세 처음 작곡을 시작하여 브람스의 인정을 받은 드보르작의 8번 교향곡은 은근히 민족적인 색채가 곡에 스민다. 유유자적 느긋하다가도 휘몰아치고 밝은가 하면 어두워지지만, 전반적으로 중언부언하지 않는 힘이 느껴진다. 

 


 

첼로, 클라리넷, 호른이 플루트와 함께 여는 1악장. 


아다지오의 2악장은 규칙을 벗어나려고 한 듯한 개성. 은근한 밝음과 함께.


유난히 로맨틱한 3악장. 목관이 깔아둔 카펫 위를 바이올린이 미끄러진다. 마치 인간의 목소리 같은 오보에와 플루트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마침내


트럼펫이 시작하여 수차례의 변주를 거친 끝에 처음, 1악장의 G장조로 되돌아가는 이 길을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한밤, 깜깜해서 별도 보이지 않는 시월의 찬 바람. 

 

 

 

 

어느 날

 

 

 

뜀틀 같은 날. 고개를 들어 무심히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다 내 얼굴을 어딘가에 비추게 되었던 날. 몸을 살짝 숙이고 무채색 공기를 내 몸속에 울리게 하면, 누군가에게도 그게 전해질까? 괴괴한 공기. 머무는 공간의 나무 탁자. 내가 곧 조금씩 사용해 가며 길들일 가죽 지갑. 처음이 중요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중요한 때에 사용하려고 생각한 정겨운 사물들. 그 아래 놓인 오늘의 음반을 뒤적여 본다. 그리하여 플레이어에 넣은 시디는 박하우스와 칼 뵘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빌헬름 박하우스.

 

 

요즈음에는 각 국가별 연주자들의 특성이 점차로 흐릿해져가는 추세이지만 그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그 경계가 지금에 비하여 또렷했다고 한다. 독일인의 작품을 연주하는 독일인. 그는 베토벤과 브람스의 충실한 해설자였으며 별명인 '사자왕'답게 강력한 타건, 풍성한 격차를 만들어냈다. 칼 뵘의 빈 필하모닉과 협연한 레전드 시리즈의 모차르트, 브람스 협주곡. 담담한 모차르트와 우아한 브람스. 건반을 스치는 손끝은 깨끗하고 음향의 폭은 넓다.

 

 

 

명반으로 손꼽히는 이 음반 속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1952년 모노 사운드이지만 칼 뵘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박하우스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일체감 측면에서 볼 때 모노 사운드가 (내게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단순히 독주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닌 서로의 반응에 따라 담담하게 진행 방향을 조절해 가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대화. 브람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한 연주.

 

 

 

 

 

협주곡 구성으로는 보기 드문 4악장 구성인데 스케르초 풍의 2악장이 덧붙여져 협주곡과 교향곡의 단계를 넘나드는 구성을 보자면 브람스가 만들고자 한 것은 아마도 피아노 협주곡이 아닌 피아노가 함께 하는 교향곡 정도가 아니었을까. 1번과 2번 사이 틈이 무려 20년이다. 20년간의 시간, 20년간의 생각. 그 끝에 드러나는 2악장의 스케르초. 그는 완성 직후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 '사랑스럽고 연약한 스케르초의 작은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라고 썼다고 한다. 브람스가 일컬은 작고 사랑스러운 세계가 풍기는 장대하고 원숙한 느낌. 독주 악기에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아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동등한 조화로움을 엿보고 싶을 때 듣게 되는 음반.

 

 

 

 

처음 문을 여는 호른의 솔로. 따뜻한 주제를 이어받는 피아노.

뒤를 받쳐주는 당당한 현악의 1악장.

 

단호한 피아노. 뜨거운 스케르초의 2악장.

그 끝이 무겁고 화려하다.

 

현악으로 여는 3악장.

끓어오름을 식히는, 아득하게 펼쳐지는 클라리넷.

 

생기 넘치게 마무리하는 경쾌한 4악장.

이 네 개의 얼굴이 차츰, 가을빛.

 

 

 

 

 

 

어느 날


 

짧게 깎은 머리카락처럼 무심한 하루. 전화기 속에서, 종이 속에서, 컴퓨터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누군가를 불러내는 하루. 누군가 잊힐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꼭 알고 있는 것을 더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날. 전 날의 도돌이표, 그 다음 날의 못갖춘마디. 계절을 더 깊게 만들던 시간. 그래서 마주치게 되는 가을, 리히터의 쇼팽. 

 

 

 


 

루빈슈타인의 쇼팽은 따스하다. 겨울밤 담요 속.

모라베츠의 쇼팽은 몽글몽글하다. 김이 서린 창가.

리히터의 쇼팽은 차갑다. 찍어누르는 청명하고 분명한 대답.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네이가우스에게 영향을 받았으나 그 전에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히고 1960년 미국 방문을 시작으로 바흐의 평균에서 쇼팽, 차이콥스키, 슈만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남겼다. 얕은 곳에서 슬쩍 비추는 것이 아닌 깊은 긴장과 집중력을 바탕으로 한 기본에 충실한 연주.

 

 


'추격'이라는 부제로 유명한 쇼팽의 에튀드를 시작으로 펼쳐지는 이 음반 속 리히터의 피아노는 하나같이 명료하다. 따스하고 섬세한 손놀림의 루빈슈타인, 슬쩍 비눗방울을 만들어 내는듯한 모라베츠의 쇼팽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고 간단하다. 방대한 레파토리, 충실한 해석,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개성. 음표와 음표 사이의 빈 공간을 시간으로 불러내는 그의 강력하고 정직한 연주를 들으면 그는 필시 피아노의 한계가 아닌 이야기를 불러내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조심스레 든다. 

 


 

오랜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이루어낸 분명함을 듣는 밤과 낮. 일 년의 중턱, 한 달의 중턱, 한 주의 중턱, 이 많은 턱을 넘노라면 무언가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쌓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소리는 그림자를 거두어 어디론가 스며들거나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무엇이 되어 있을 어느 날.

 

 

                 가을의 어느 날. 청명면서도 따스한, 세상에 있기 힘들지도 모를

 

 

   무언가를 그리는 오후를 음악으로 처언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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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1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뭐하다 이제야 나타난겁니까 쟌님. 이제나저제나 이 서재를 들락거렸단 말입니다.
어느날 중의 한 날인 오늘,
쟌님이 다시 나타났네요.

Jeanne_Hebuterne 2013-10-26 13:1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잘 지내셨지요?
이제 가을이에요. 하늘이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맛있는 것도 많아지는 계절이지요? 다락방님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해서 다락방님 서재에서 기웃기웃 까치발을 들고 들여다봐야겠어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

레와 2013-10-1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갔다 왔어요!

Jeanne_Hebuterne 2013-10-23 12:07   좋아요 0 | URL
레와님!
제가 요즘 좀 정신이 없어 이모양이어요. 흐흑. 잘 지내시지요? 레와 님 사진 보고 싶어요! 언제 또 전시회 안하시나, 은근 기다리는 1인!

dreamout 2013-10-1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리히터의 슈베르트를 요즘 제법 듣고 있는데. ^^

Jeanne_Hebuterne 2013-10-26 13:11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아, 리히터의 슈베르트를 듣고 계셨군요! 많이 궁금한 연주자였답니다. 가을에 듣기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