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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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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 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Zu der Zeit, als ich noch auf Baeume klettertelang, lang ist's her, viele Jahere und Jahrzehnte, .... 


 


 오래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 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하늘은 낮게 깔리었던 늦은 오후, 나는 아기 고양이 한 마리를 손에 넣었다. 

 내 주먹보다도 작은 청회색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고 야옹, 하고 울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찌익 짹 꺄앙 하고 우는 작은 아기 고양이였는데 그것이 내 손에 들어온 계기는, 길에 혼자 앉아있어서였다. 우연과 우연의 조합이건만 우주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을 것이었다. 필연이라고 추측한 나는 마음대로 새끼 고양이를 쓰다듬고 따뜻한 수건에 싸서 잠을 재우려다 마침내는 어머니에게 꾸지람과 온갖 잔소리를 듣고서 본래의 장소에 되돌려 놓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기 고양이는 아마 어미 고양이가 꽁꽁 수풀 속에 숨겨둔 것이었을 것이고 동물의 습성에 대해 몰랐다고 하는 것조차 지금은 제대로 된 변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었으며, 하물며 당시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어미 고양이는 아기를 숨겨둔 채 사냥을 나갔다가 자기 냄새가 아닌 낯선 인간 냄새를 갖춘 자기 아기를 버려두고 떠났을 수도 있고, 다행히도 새끼로 인지하고 데려갔을 수도 있지만 이러나저러나 나는 잘못을 저질렀다. 잘못했다는 이 간단한 말을 간결하게 내뱉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조용히 지켜보고 숨죽인 채 듣다가 마지막에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고 끝까지 억누른 채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그 한마디를 위해 수없이 변죽을 울리고서야 기필코 하고야 말게 되는 사건도 있으니, 좀머 씨 이야기가 그렇다.





 오래전의 더 오래전, 키와 신발 사이즈와 날 수도 있었을 만큼 가벼웠던 몸을 이야기한다. 쥐스킨트의 묘사는 독일어의 전형이다.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 이 실오라기 하나 더 입히고 덜 입힌 사람의 마음과 현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독일어만큼 적합한 언어가 없으리라 생각한 적이 있다. 

 비유, 은유, 직유를 거치지 않는 낱말 하나의 무게를 쥐스킨트는 철로 된 공으로 만들어 가볍게 공중에서 떨어뜨리니, 이 모든 것이 낱말과 쉼표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엔 좀머 씨의 느낌표 하나로 끝맺는 짧고 강한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악수가 비위생적이어서 하지 않으며 누구든 자기 거처와 근황을 조금이라도 누설하는 자와는 연락을 끊고 낡은 풀오버를 계속 걸치고 사는 작가, 심지어 입술에 손가락을 댄 사진마저도 초판본에 실렸다가 아마도 작가의 요청으로 쇄를 거듭하면서는 삭제한 저자, 인터뷰를 위해 헬기를 타고 가서 사적인 모든 것은 극비로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제한된 인터뷰를 하는 사람의 소설.





 재독의 긴장감. 또렷한 기시감과 줄거리를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는 여유, 묘사를 더 즐길 자유. 

 이것을 누리며 바람이 휘몰아치는 오전, 멀리서 선물 받은 수국 커피를 내리고는 첫 장을 펼쳤다. 





 이야기는 어떻게 말을 걸까?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를 이야기하는 빔 벤더스의 계보를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날지는 않은 아이의 설명으로 시작한다. 나무타기를 즐기고, 몸이 가볍고, 아버지와 빗길을 뚫고 경마장을 간다. 짝사랑하는 아이가 월요일에 집이 가자는 말을 한 것으로 그 아이에게 보여줄 것을 계획하고, 두근거리며 마음 설레하다가 불발되자 풍경이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고까지 말한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은 또 어떠한가. 아직 자기 몸에 맞지 않고 익숙지 않아 자전거를 타려면 좌우 앞뒤에 아무도 없어야 하고, 지나가기만 해도 사납게 짖는 테리어도 조용히 있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에게 역경이 닥친다. 

 아홉 살 소년에게 닥친 역경은, 어른에게 평화로운 오후이면 족하다. 산책하는 사람들, 앞에 뭔가 지나가면 짖는 개, 그저 시간에 맞추어 와서 완벽한 연습물을 내보이는 교습생을 원하는 미스 풍켈, 그리고 하필이면 건반에 들러붙은 코딱지! 





 그러나 이것은 어떨까. 

 지팡이를 메트로놈처럼 땅에 부딪히며 쉴 새 없이 어디론가 떠밀려 가는 좀머 씨가 있다. 

 그는 아버지와 소년이 폭우와 우박 속에서 마주친 사람이고, 짝사랑에 빠진 소년이 풀이 죽었을 때 규칙적으로 또 그 소리를 들려주며 조그마한 점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행인이다. 일곱 살에서 아홉 살이 자살을 감행하려 할 때 하필 그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무언가를 먹고 마시다가 얼른 일어나 다시 걸어가 버린 사람이며, 마지막엔 호수 속으로까지 걸어 들어간다. 

 한마디로, 그는 언제나 소년이 겪는 가장 극심한 질풍과 노도의 순간에 등장하여 무심히 떠밀려 간다. 죽자. 죽어버리자. 하고 가장 고뇌에 찬 고민을 할 때에 나타난 그는, 아마 아무도 본 적이 없었을 사람 같은 광경까지 보여준다. 즉, '내'가 '나'임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사람, 객관화를 시켜주는 이야기 속의 타자이다. 읽어가며 이런 멋대가리 없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이 책이 굳이 1992년 한국에 번역본으로 나왔다가 2020년 다시 예쁜 장정으로 다시 나올 이유는 이것 말고도 더 있지 않을까?





 소설책이 세상에 나오는 덧없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는 자성과 자각이 있지 않을까. 

 여러분, 책을 읽읍시다. 반성 좀 합시다. 그리고 우리 좀 더 사람답게 살아봅시다. 라고 마음에 1밀리미터도 와닿지 않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침을 좀 더 세련되게 당의에 싸서 내어놓는 일. 그것이 소설가가 하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평화로 덧칠된 행복한 유년 속 역경을 떠올리며 섬세한 묘사에 감탄할 수도 있고, 상뻬의 능란한 삽화에 반하며 훑을 수도 있다. 작가의 펜을 떠난 단어들은 그 자체로 유기체가 되어 물고기의 밤 노래를 하게 되니까. 즉, 읽기와 감상에는 하나의 정답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진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 아름다운 풀숲 속에 숨겨둔 지팡이 하나 정도는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이야기가 누릴 수 있는 지복이 아닐까. 





 숨어 있는 죽음 하나. 

 화자의 아버지는 좀머 씨에게 외친다. 

 Sie werden sich den Tod holen!

 당신 그러다 죽겠어요!

 그러고는 그 유명한 한마디가 나오나니,

 Ja so laßt mich doch endlich in Frieden!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아직도 숨겨진 죽음 둘.

 Mann ... der sein Leben lang auf der Flucht war von dem Tod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




 그리고 마침내 좀머 씨가 사라지기 전 드러나는 세 번째.

 Schau, da geht Herr Sommer. Er wird sich den Tod holen!

 저기 좀머 아저씨 간다. 저러다가 죽겠다!




 이 책 속에서 좀머 씨의 이름이 반복되고 그의 기이한 걸음걸음이 다양하게 변주되는 동안, '나'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말이 길어진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이유를 만들어주는 일, 시간의 정황상 그는 전쟁의 광휘에 휘말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타당하다. 변죽을 울려야만 짤막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 억누르고 있는 마음 속 진실을 풀어놓는다는 것마저도 아니라고 말해야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임이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 번 또렷하게 반복될 때, 다시 선연히 그 외침이 침묵으로 다가온다. 

책 읽기가 주는 기이한 공감각. 읽는 자와 읽히는 글자의 대화. 





그리하여 그를 보는 순간 걸음걸음마다 '나'의 호흡은 사실 극적인 비일상, 실망, 비애였다가 마지막에는 하나의 정물처럼 무관심이 될 때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 남자를 무엇이라 보아야 좋을지는, 읽는 사람마다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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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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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다 은행 잔액의 차이다. 엉뚱하게도 '글쓰는 여자의 공간'을 읽으며 작가의 서재를 구경하다가 든 생각이다. 명작을 쓰지 못해서도 억울한데, 대체 명작을 뽑아내는 사람들은 터를 잘 잡아서인가! 이런 경망스럽고 불순한 호기심과 다른 사람 인스타그램 구경보다 재미있는 다른 사람 집구경이, 특히 작가들의 서재가 아닌 글 쓰는 작업실이 궁금해서 집어 든 책이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의외로 작업실의 스펙트럼이 넓고, 작업실을 규정하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은 개인의 재력과 성향,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글쓰는 여자의 공간'은 버지니아 울프, 프랑수아즈 사강,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실비아 플라스(내가 좋아하는 순서다) 등 여성 작가 35인의 글쓰는 공간을 담고 있다. 집은 그 사람의 성정을 담았다면 작가가 글을 쓰는 공간으로 쓰는 곳은 작가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작업실은 때로는 부엌, 개인 서재, 호텔, 카페, 혹은 집안 곳곳이 되기도 했다. 

 나탈리 샤로트는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허공에 뛰어드는 일과 흡사하다. 카페에서라면 쉽게 뛰어들 수 있다'라고 말하며 전화를 받을 일도, 누군가 자질구레한 집안일로 자기를 찾는 일도, 불쑥 방문을 여는 사람으로 방해받을 일도 없는 카페를 글쓰기 공간으로 칭송했다. 이 책은 가정과 개인, 사회의 여러가지 방해와 비협조 속에서 가까스로 자기의 글쓰기 공간을 찾아내 스스로에게서 무언가를 뽑아낸 사람들의 마음속이 한가득 있다. 




 35명의 작가들의 제각각 글만큼이나 다른 사정들이 있어서, 물론 집이 여러채 있고 글쓰기를 위해 로지아를 지어 글을 썼다는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도 있고, 개인 비서를 두고 사자 모피를 깔개로 둔 서재에서 작업한 카렌 블릭센 같은 작가도 있다. 

 서재는 글쓰는 공간이 될 수 있지만 글쓰는 공간이 서재인 것은 아니어서, 이 부등식에는 오히려 글 쓰는 공간보다 중요한 것도 있으니, 작가 개개인의 성향과 삶의 사이클 같은 것이 포함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실비아 플라스는 결혼과 출산 후 온전히 글쓰기에 집중할 수 없었고, 버지니아 울프는 몽크스 하우스의 헛간을 개조해 글쓰는 공간으로 활용하다가 마침내 정원 구석에 목재로 된 작업실을 짓고 나서야 더욱 마음편히 글을 쓸 수 있었다. 왜 그 전에는 마음이 불편해서 글을 쓸 수 없었냐고? 어머니 사망 후 열세 살부터 9년간 아버지를 뒤치다꺼리했고 의붓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그가 아버지 사후 24년 후 쓴 글을 보면 엿볼 수 있다.



 "아버지의 생일이다. 살아 계셨다면 오늘로 아흔여섯 살이었겠다.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흔여섯까지 살 수 있었을 텐데, 다행히도 그러질 못하셨다.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의 인생은 내 인생을 완전히 끝장냈을 것이다. 살아 계셨다면 어땠을까? 나는 글도 책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실비아 플라스에 관해서는 엇갈린 증언들이 나온다. 주로 알려진 사실은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가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았고,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던 실비아 플라스는 그야말로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는 증언과, 부부가 일을 나누어서 했다는 증언(번역가 유타 카우센)이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책 속 사진의 실비아 플라스는 책상 위에 올라가 앉아 책을 들여다보거나 뒷마당 테이블 위 타자기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사진은 순간이어서 그가 연속 몇 시간 동안 작업을 했는지, 혹은 일할 시간을 넉넉히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단, 실비아 플라스가 남긴 말은 그 시간의 흐름이 녹녹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많이 써보면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작품을 잘 쓸 때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야 할까?"




 서른다섯 명의 문체만큼이나 다양하고 제각각인 글 쓰는 공간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보게 되는 책이다. 주로 세상에 이제는 없는 작가들이 많지만, 엘프리데 옐리네크, 니콜 크라우스처럼 살아있는 작가도 다루고 있다. 제인 오스틴처럼 초상화로 사진을 대신한 작가도 있고, 인물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 같은 작가도 있다. 오죽하면 '식탁에 앉은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는 꼭 타락한 천사 같았다'고 무려 토마스 만이 말했겠는가. 



 

 주로 작가의 서재를 구경하다보면 높은 천장과 시원한 전망, 책으로 가득한 서고 같은 것으로 주눅이 들곤 하는데, 이 책 속의 작가들은 그 스펙트럼이 참으로 넓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지정학적 위치가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해리엇 비처 스토가 뉴잉글랜드 메인 주에 살고 있었으니 다행이었지, 남부 연합군 지역에 살았다면 과연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나올 수 있었을까? 공간에 대해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다시 자연스레 앞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이 책에 소개된 작가 중 메리 매카시는 한나 아렌트와 절친이었지만 시몬 드 보부아르는 메리 매카시를 좋아하지 않았고, 카슨 매컬러스는 엘리자베스 보옌과 친했지만 그는 또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를 사랑했고..읽다 보면 글쓰는 여자들의 굳게 앉은 뒷모습 그림자가 보일듯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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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위의 여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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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도 언젠가 그 그림을 보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갑자기 불쑥 나타난 그림이니 미술관마다 서로 나서서 전시하려고 할 테니까. 카를 슈빈트는 지금 이 시대에 의심의 여지 없이 전 세계에서 최고로 유명하고 최고로 비싼 화가가 아닌가. 그의 일흔 살 생일날에는 무슨 신문을 펼쳐도, 텔레비전의 무슨 채널을돌려도 어김없이 그의 얼굴이 나타나곤 했다. 물론 나는 한참을 쳐다본 다음에야 그 노인이 내가 아는 젊은 얼굴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그림은 보자마자 즉시 알아차렸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넬레 노이에하우스, E.T.A. 호프만, 프리드리히 실러, 괴테.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법학 전공 내지는 법조계 종사자. 어쩌면 이 나라 국민들은 법학과 문학을 그것도 이렇게 훌륭하게 다룬단 말인가. 어쩌면 '작은 이야기'인 소설의 무용함이 사실과 진실의 충돌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더 리더'(책읽어주는 남자)의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계단 위의 여자'를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전작에서 그가 팽팽하게 다루었던 인간 개인의 의사, 그들이 행하는 행위, 작용과 반작용, 이런 것이었다. 아무렴, 문제 해결의 최적임자는 문제 당사자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슐링크가 쌓아올린 탑은 번역자 배수아의 말을 빌리자면 건조하고 담담한 톤으로, 허식이나 과장, 과도한 감상은 찾아볼 수 없다'. 해야 할 일을 하는 법관처럼 슐링크의 낱말은 단정하고 소설의 구조는 간단하다. 소설의 화자의 삶이 그러하듯 최소한도로 바라고, 최소한도로 행동한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되 감상적이지 않고 추리를 해나가되 장르 문법에서도 비켜나가있다. 그러니 차분하게 조용히 이야기 속에 스며, 그의 이야기 문법을 즐기기에 독자로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전신을 그린 그림에서 시작한다. 두 명의 남자가 그림 하나를 두고 싸운다. 그 사건을 중재하는 것은 주인공인 '나'. 그러나 그림의 주인공 이레네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 그는 이레네가 두 남자, 남편과 화가(슈빈트) 모두를 그림과 함께 떠날 수 있게 도와준다. 


 "쉿." 그녀는 손을 내 입술에 갖다 댔다. "내가 알아서 다 할게. 그의 집에 있는 내 짐들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런 넌 언제 올 건데?"

"나중에. 일이 끝나는 대로."

...그렇지만 두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불안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다. 집 안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으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연신 창밖을 내다보았고, 차를 끓였고, 찻잎을 주전자에서 빼는 것을 잊었고, 그래서 다시 차를 끓이고, 다시 마찬가지로 찻잎을 잊어버렸다. 그녀는 혼자서 그림을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일까? 그녀에게 너무 무겁진 않을까? 도와줄 사람은 있을까? 누구일까? 아니면 진짜 혼자서 들 수 있단 말인가? 왜 나를 믿고 맡기지 않는 걸까? 



 그러나 기다리는 이 남자의 마음 속에서, 제대로 된 답이 떠오르지 않는것은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쉴새없이 이유를 생각해내는 인간의 어쩔 수 없음, 그럼에도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이 교만함. 40년이 흐른 뒤 갤러리에서 과거의 그 그림을 본 그는 다시 이레네를 찾아낸다. 늙고 주름지고 쇠약하고 아픈 그녀를. 또한 그녀의 남편과 화가 슈빈트도 그녀를 찾지만 독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늙은 남자들의 니코틴에 절은 손가락 같은 것. 그림의 소유권이 무슨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자기 자식들의 영락을 자랑하고, 자신의 직업적 성공을 뽐내고, 그런 것이 죽어가는 자 앞에서 무엇 하나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나'는 그 모든 것이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림, 이레네, 군트라흐, 슈빈트. 이 모든 것에서 자신은 조력자이자 구경꾼일 뿐. 그 자각과 각성의 시기에 맞물리는 서늘한 죄책감. '위협이 없어도 느껴지는 공포와도 같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밀려오는 슬픔과 같은 느낌.'이락 화자는 말한다. 조용하고 어두운 집안. 죽어가는 이레네, 그리고 모두가 돌아가자 두 사람은 둘만의 과거를 미래의 시간으로 겪는다. 그러는 와중 맞딱드리는 시간의 옹이, 이상한 후회와 지금에서야 찾아오는 자각. 이른 봄, 풀밭에 누워 잠시 잠이 들었다가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차갑고 서늘한 회한.



 "넌 어디서 누벨바그 클리셰를 읽은 모양이로구나? 60년대 후반에는 아무도 검게 차려입지 않았어. 여학생들은 소녀 시절을 보낸 지방 여학교에서 못해본 일을 만회하려고 안달했고, 남학생들은 비판 이론이나 혁명적 프락시스 등을 커다란 소리로 떠들면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고 애를 썼지. 이런 걸 정말로 전혀 모른단 말이야?"

"말했잖아. 난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고." 

"그럼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고, 그게 전부야? 법률회사에 입사해서 회사를 인수하여 크게 더 크게 키운 것 말고는 없어?"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너에게서 아무것도 원하는 건 없어." 그녀는 내 팔을 잡았다. "네 삶을 상상해보는 것뿐이야. 케이스 속에 들어 있는 삶을. 그럼 케이스 속에서 일생을 산다면 바깥세상은 정말로 클리셰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직업상 많은 해외여행을 했고 항상 열린 마음과 눈을 유지했다. 집에서는 두 종류의 신문을 구독하면서 경제와 금융 면을 주로 읽었지만 정치와 문화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단지 60년대 후반 대학생 패션 유행을 잘 모른다고 해서 일평생 케이스 속에서 산 셈이 되어버린단 말인가?그녀의 팔에 벗어나려는 내 몸짓을 느낀 그녀는 나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넌 네 아이들이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구나? 아이들과 함께 학생 주점에 가거나 대학 축제를 구경한 적도 없지?"

"내 아이들은 열네 살 때 영국의 기숙학교로 갔고 대학도 거기서 다녔어. 케임브리지 졸업식에는 나도 참석했지. 화려하고 위엄있는 대단한 행사였어. 막내아들이 옥스퍼드 대항 보트 레이스에 출전해서 우승한 날도 거기 있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나?" 

"아이들은 영국에서 계속 살아. 큰딸과 큰아들은 변호사고 막내아들은 소프트웨어 회사를 갖고 있지. 손자나 손녀가 태어나거나 뭔가 함께 축하할 일이 있으면 나도 영국으로 건너가. 그 이상은 아이들에게 부담 주는 걸 원치 않고." 

이레네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 등을 쓰다듬었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넌 만사를 훌륭하게 하려고만 하는구나." 그녀는 상냥하면서도 슬프게, 다시 한 번 더 반복했다. "순진한 바보같으니."



 꼬마야, 내 꼬마야. '책읽어주는 남자'의 여자가 그랬듯 계단 위의 여자, 이레네는 그의 삶을 한 번에 통찰하고 관망한다. 이레네의 질문, 정말 생활 속에서 공기를 함께 나눈 적이 있는지에 대한 남자의 모든 답은, 아무리 애를 써도 출구를 찾지 못한채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 새 한마리와 다르지 않다. 흘려보낼 수 없는 감정, 다른 사람과 '나' 사이 가로막힌 유리벽, 마침내 그것을 보여줌으로 화자에게 자각시키는 이레네의 서늘한 목소리를 듣노라면, 지나간 시간이 이제는 어제와 오늘, 일주일 안 정도로 나뉠 수 없는 독자의 귓가가 아득하게 울리는 듯하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그녀가 말했다. "너는 살아오는 내내 너의 투쟁을 치렀어. 마치 기사들이 자기 시대의 종말을 알지 못했듯 너 또한 그 투쟁이 어느새 허상의 투쟁이 되어버렸고, 진즉에 전부 종말에 이르렀음을 알지 못한 거야. 그토록 열심히 계약과 계약을 성사시키며 다니고, 합병과 인수 건을 매번 충실하게 해치우고, 그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사안이라고, 그렇게 진심으로 믿고 있는 네가 나는 정말 좋아. 그런 태도는 나를 감동시키지. 그리고 동시에 슬프게 만들어."

 나는 항의하려고 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해명하려고 했다. 합병과 인수가 왜 중요한지,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내가 싸웠던 투쟁들이 허상이 아니라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모든 거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나갔다고 말하고 싶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대개 그들 자신에 관한 내용이니까. 아마도 내가 지금 유일하게 견딜 수 없는 건, 세상은 계속해서 굴러가는데 나 홀로 종말을 맞는다는 그 사실 때문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진정해!"





 아, 우리는 이렇게 생긴 거울을 얼마나 많이 구경했던가. 그 거울은 지나가는 버스 정류장에도, 책을 읽으려 들어간 카페 옆 테이블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기이한 뉴스가 실리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도, 그리고 매일 들여다보는 거울  그 자체로 있지 않은가. 


 마침내 질문과 대답, 대화와 함께 나누는 공기가 다 떨이진 다음, 화자는 마침내 생각한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헤어져야 할 존재에게는 작별 인사를 하고, 멀리 있는 소중한 존재에게 전화를 하기로. 우아한 자각의 퇴장은, 이렇게 커튼을 내린다.



 회사에는 내일에나 가볼 예정이다. 오늘은 묘지로 가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눌 거이다. 나는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리고 작별의 인사를 하고, 내가 왜 더이상 우리들의 집에서, 우리들의 물건과 함께 살 수 업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아내에게 이레네 이야기를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전화할 것이다. 카르힝어와 다른 파트너들에게 할 이야기를 준비할 것이다. 그들이 퍼붓는 수많은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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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 - 빈의 동네 책방 이야기
페트라 하르틀리프 지음, 류동수 옮김 / 솔빛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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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서점 밖으로 나오니 모든 게 허황된 꿈만 같았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서?" 남편이 물었다.

 "뭐가 그래서?" 내가 물었다.

 "당신은 어땠어?" 

 "끔찍해. 당신은?"

 "나도 그래."

 "그럼 뭐."

 침묵.

 "그런데 잘만 꾸미면 작품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그래. 하지만 살림집 말이야. 그건 아무래도 안 되겠어."

 "어째서? 크고 멋짐 살림집이 될거야! 생각해봐, 포장실에는 부엌을 들이는 거야. 그리고 책상이 있는 큰 사무실은 밥 먹는 방으로 만들자고. 복사기가 있는 곳은 텔레비전을 보는 작은 방으로 괜찮을 것 같아. 암실은 욕실로 만들고. 그렇게 하고도 우리 침실과 아이들 방으로 쓸 작은 방 몇 개가 남아."

 "말도 안 돼."

 "그렇다는 거지 뭐."





 취미와 직업이 일치하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 노래를 잘 불러 가수가 되고 악기를 잘해 연주자가 되고 책을 좋아해서 책을 쓰거나 팔고,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를 만들어 판다는 이야기는 마치 구운몽의 한 가닥 같다. 그 자락이 어떤 것일까. 밥벌이의 고단함, 입속의 단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터의 마감 앞에 닥친 막막함 같은 것. 그런 것 한 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 책을 집어 드는 독자의 절반은 이 책의 장르를 절반 정도는 착각했을거라 생각한다. 회고록 VS  판타지.





 어느 날 빈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갔다가 작고 오래된 서점 하나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접한다. 

 폐업하는 작은 서점, 이 말을 듣노라면 가지치기를 하는 많은 낱말이 떠오른다. 인터넷 서점, 수요와 공급, 마감, 매출, 원리금 상환까지.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의 세계에 과감히 발을 들이미는 저자의 모습은 그러나 서점 운영의 길잡이 대신 서점 운영의 재미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내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 등의 말이 오가지만 서점 운영을 해보지 않았으나 흥미를 느낀 독자 앞에서 저자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우리는 일에 파묻혀 살았다' 였다. 


 



 곧, 이 책은 서점 운영의 ABC 대신 자기 사업을 하고 아이도 키우고 남편을 거느리는 오스트리아 출신 여자의 작은 미소. 자기 서점을 갖고 있다는 자만심이 넘쳐나 '아무리 그들이 열심히 일한다 한들 빵의 성분표를 읊어대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을까?'라고 말하며 맞은편 베이커리를 얕보기도 하고, 자기는 몰랐던 서점 직원의 또 다른 생활을 얕잡아 보기도 한다. 처음 면접을 했을 당시 자신의 두 번째 정체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자기도 별로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는 것이 아니라 말할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굳이 필요없이 직함을 나열하는 저자의 글 쓰는 태도를 보아 하면, 이것은 어쩌면 직함 자체에 집착하는 오스트리아인의 국민성일까, 저자 개인의 특성일까, 사뭇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이 책의 태도는 '조금 거만하면서도 즐거운 서점 운영자의 회고록'에 기본을 두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쩌면 이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표정만큼 다르고 또 다른, 책과 서점을 대하는 태도 중 일부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근 나온 다양한 서점 관련 책들을 보노라면, 어떤 책은 서점을 살짝 홍보하거나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책은 동네 책방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또는 자기가 돌아본 서점 여러 군데를 가이드북처럼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서점 경영인으로서의 자존심, 자만심, 긍지를 자기 생활 공간에의 소개로 포장해나가는 것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갑자기 일터에서 일에 파묻혀 살게 되었다. 서점 뒷방을 우리 주거 공간과 연결해주는 회전 계단은 우리 삶의 중심축이 되었다. 처음에 우리는 그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목이라도 부러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우리는 곧 그 철제 구조물을 다람쥐처럼 재빨리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었다. 아침이면 커피 잔을 손에 든 채로, 낮에는 커피를 새로 끌이거나, 세탁기를 돌리거나, 아니면 점심 식사를 하러 그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했다. 남편이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거나 딸이 친구네 집에서 잘 때면 나는 한밤이 되도록 바깥 날씨가 어떤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출근하려고 저고리를 입을 필요도, 차를 탈 필요도 없었다. 또 어떨 때에는 신발 신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오븐에서 닭고기가 익어가고 있으면 맛난 냄새가 서점으로까지 퍼지곤 했다. 그러면 손님들은 유난히 행복해 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방사선과 의사 친구네 아이들이 매주 한 번 우리 집에서 잘 때면 아이들 나름의 의례가 있는데, 그때 이 회전계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녁을 먹고 이를 닦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나는 세 아이와 함께 두꺼운 양말을 신고 그 계단을 지나 서점으로 내려갔다. 서점에는 작은 야간용 조명만이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손을 더듬으며 아동도서 코너로 갔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각자 잠자리에서 읽을 책을 한 권씩 골랐다. 나는 아주 조용히 그 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준 다음 아침이 되면 다시 서점에 반납하곤 했다. 





 집과 연결된 서점, 집에서 커피를 끓여 서점에 들고 오고 일하는 도중 집안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그러던 중 이웃들이 점심이나 저녁을 요리해서 갖고 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저자의 남편은 서점 일을 함께하다가 빈에 일자리를 잡기도 하고 아이들은 조금씩 자란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종종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남에게 추천하는 것을 즐기곤 하는데, 저자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책을 파는 사람이 하는 추천은 매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독서를 좋아하는 이의 관점에서 멀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종종 조심스러워지곤 한다. 이를테면 '읽기가 좀 까다로운 것이 좋은가요, 아니면 재미있는 통속소설이 좋은가요?'라고 묻기도 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 분인가요?'라고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산 분들은 oo에도 관심을 보입니다'라고 보여주는 인터넷 서점의 서비스와 차원이 다른지는?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책을 추천했다가 막상 아니다 싶어 고객에게 밤늦게 '책 계속 읽지 마세요! 모두 다 죽어요. 개까지요!'라고 문자를 보내는 저자의 모습을 보노라면 자만심과 애정은 이렇게 어우러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밤늦게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가 서점 하얀 차양막 위에 쌓인 눈을 단골손님과 함께 치운다든지, 뭘 좀 드셔야 할 텐데, 라고 말하며 집에서 구운 빵을 갖고 오는 손님을 본다든지, 혹은 '책을 전혀 안 읽는데, 추천해주실 책이 있나요?'라고 말하는 손님에게 책을 한 권, 두 권씩 추천해 주고 책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든지, 이런 경험담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게다가 무대는 성탄절이면 책을 서로에게 선물해서 12월에 매출이 급증한다는 빈, 오스트리아. 치명적인 단점, 자만심과 치명적인 장점, 애정이 두루두루 섞인 서점 주인 이야기.





할 일은 끝없이 더 계속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우리로 하여금 그냥 계속 일을 하도록 추동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다른 모든 것은 지루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서점같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가게에 대해 한 주에 한 번, 서점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 나오는 이 시대에 계속 서점을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달리 남은 게 없기에.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우리는 다른 것은 차라리 하고 싶지 않기에.




덧-그런데 어쩌나. 난 이 책을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다른 책을 구경하다가 '이 책을 구경하신 분들이 다음 책도 구입하셨습니다.-by 추천마법사' 코너에서 보고 주문하여 읽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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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6-03-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싫어요. 서점이 없어지는 것이, 손으로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책이 없어지는 것이.
이렇게 우리가 편리한 인터넷으로 소통하고 있음에 시공간의 자유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사라지지 말아야 할 아날로그 중 하나가 - 내게는 책이거든요.

Jeanne_Hebuterne 2016-04-03 09:18   좋아요 0 | URL
L.SHIN님
이 글을 쓰며 저야말로 인터넷 서점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사람 아닌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저번주에도 헌책방에 가서 이것저것 오만원 상당의 책을 사들였어요. 통로 구석구석 배치된 깨알같은 메모도 재미있고, 직접 책을 손으로 만지며 탐색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제겐 재미있는 경험이어요.
인간은 종종 신기술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오래된 무언가가 금방 사라질거란 생각을 많이 하지만, 정작 우리가 아직도 꾸준히 사용하는 많은 물품은 어제 나온 새로운 것이 아닌 몇천년이 된 무엇임이 분명합니다. 전 아직도 전자책은 읽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종이책을 넘기는 사람이어요.
 
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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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한가운데. 나는 너무 멀리 떠나왔고 어딘가를 늘 다친다. 음악, 뜨거운 차. 적당히 차가운 공기. 책 몇 권. 닿지 않는 마음 끝. 아니, 이런 것이 지금을 설명할 수는 없다. 지금 내가 현재라고 부르는 시간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새로 일어난 사건을 지나치게 커다란 의미를 지난 것으로 보고 이미 있어온 무언가를 곧 없어질 무언가로 생각하곤 한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레 교차하는 어느 순간. 1913년, 백 년 전의 그 날을 들여다 보기 전의 나의 마음이었다. 아마 여느 독자들도 그러했으리라. 




 시간은 흐르는 것인데 그것을 종종 잡으려 하거나 나누려는 시도가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는 방법의 하나였다면, 벨 에포크, 세기말, 모더니즘, 현대, 근대, 이런 단어들은 어떻게 해야 손에 잡히는 것일까. 별 하나에 1913년, 별 둘에 1913년의 사람들 이름을 붙인다. 어느 날 나의 손끝에도 현재라는 시간이 무성히 쌓이게 만드는 책. 시간은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어느 시간이 중요하다거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곧 그 순간의 사건이 앞뒤를 연결하며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뜻일게다. 아름다운 작품은 지천으로 널렸다. 아름다운 문장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것도 역시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게 왜 아름답고, 왜 올바르며 왜 의미를 지니는가? 말을 만드는 것은 가장 단순한 작업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 어려운 일이다. 나만 이해 못 한다 하여 알 수 없다고 단정 짓거나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만천하에 떠벌이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그리하여 더 알기 위해 들여다 보고 더 이해하기 위해 읽게 되는 역사의 한 페이지. 그렇게 조용 따라가게 되는 오래된 미래. 1913년의 1월부터 12월까지 시간을 사소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찬찬히 들여다 보면 태초에 있던 말과 그다음 생성된 의미가 보인다. 우리가 잡으려 했으나 더러는 놓쳤던 것, 우리가 상상했으나 더러는 실현했던 것이 백 년 전 일 년 열두 달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왜 하필 1913년인가. 저자 서문이 없어 저자 서문 대신 출판사 책 소개를 들여다보면, 1913년은 19세기의 끝과 20세기의 시작을 동시에 알리는 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국주의는 정점으로, 민족주의는 구심점으로, 영토 분쟁이 점조직처럼, 기술 발전은 박차를, 신경과민자들이 넘치는 도시가 꼭짓점에, 모더니즘이 요란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말하는 20세기는 엄밀히 말해 1914년부터 1991년까지이다. 1차 세계대전과 소련 몰락이 그 시작과 끝을 알렸다면, 그 직전, 1913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히틀러와 스탈린은 비엔나 쇤부른 궁전을 자주 산책했다. 아마 슬쩍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카프카는 그 소심해 미쳐버릴 지경인 오락가락 연애편지에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다. 키르히너는 포츠담 광장에서 창녀들을 그리느라 바쁘다. 모나리자는 도난당했고 뒤샹의 '계단을 내오는 누드'는 아머리 쇼의 간판 그림이 되었다. 뒤샹 형제는 미국에서의 명성 소식을 듣지 못하고 뇌이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한다. 카프카는 작년 12월에 보낸 '관찰' 이라는 책에 펠리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 속을 태우다가 몇 달 뒤 펠리체 바우어에게 청혼 편지를 급행으로 보내고, 예술은 추상을 향해 치닫는다. 뮌헨의 칸딘스키, 파리의 들로네, 러시아의 말레비치, 네덜란드의 몬드리안. 그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의 모든 관계를 끊는다. 미래주의는 러시아 지방을 떠돌고 코코슈카는 알마에게 미쳐버렸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현대 산업건축 예술의 발전'을 독일공예연맹 연감에 발표한다. 잠시 그로피우스의 말을 옮겨보자면 이러하다.



 "산업의 모국인 아메리카에서, 독일 최고의 건축물을 능가하는 낯선 웅장함을 지닌 걸작 건축물들이 생겨났다. 그 건축물들은 어청난 설득력으로 관찰자에게 건물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시키는 확실한 건축적 얼굴을 가지고 있다." 



 다르게 말해보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나왔다. 버지니아 울프의 출항이 어렵게 빛을 본다. 사실 아내와의 성교까지 다이어리에 기록한 특성 가득한 남자 무질은 '특성없는 남자'를 낸다. 아나톨 프랑스는 '인생은 짧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너무 길다.'라고 말한다. 마르셀 뒤샹의 자전거 바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파리와 모스크바에서 선보인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객석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며 등장한다. 코코 샤넬의 모자 가게가 있었고 프라다의 첫 매장이 이때부터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사건의 나열, 우연성의 결과일 수도 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주치는 어떤 인물. 이것은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 가장 흔히 하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서로의 학력, 거주지, 하다못해 여행지라도 들추어 보며 우연히 만났을지도 모르는 어떤 상황을 유추해 보는 일. 1913년은 모든 것이 바뀌는 해였다. 그전까지 몸에 맞은 옷처럼 느껴지던 역사에서 인간이 분리되었다. 그전까지 통제하고 구속하고 속박했던 모든 전통의 권위, 그 틀이 허물어지던 해. 그 모든 안절부절과 신경쇠약과 신경과민은 그러한 자유로움에서 온 것. 개인과 사회, 관계와 변형, 개인과 개인의 영속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해. 한마디로 융의 프로이트에 대한 친부살해와도 같은 일이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 것이다.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을 통해,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통해.




5월 29일 저녁에 모인 파리 관객은 구 유럽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교양있는 관객이었다. 특별석에 채권자를 피해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도망쳐 온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다른 특별석에는 클로드 드뷔시가 앉아 있었다. 코코 샤넬은 1층객석에 앉아 있고 마르셀 뒤샹도 마찬가지다. 뒤샹은 나중에, 이날 저녁의 "아우성과 날카로운 부르짖음"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고대의 근원적인 힘을 무대로 불러냈다. 이미 표현주의 예술의 모범이 된 아프리카인과 오세아니아인의 원시성이 이제 문명의 중심, 다시 말해 샹젤리제 극장에서도 약동하는 생명으로 깨어났다. 

 -책 속에서(5월)




그러나 그렇다 하여 1913년의 사람들이 르네상스 인간처럼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까? 오히려 반대가 아니었던가? 과도기의 비엔나는 신경쇠약의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에곤 실레의 집도의와도 같은 여인 누드, 코코슈카의 침대 크기 화폭, 쇤베르크의 뺨따귀 음악회. 음색이 날카롭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뺨을 맞은 쇤베르크도, 알마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코코슈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누드를 그리던 에곤 실레도 아마도 융이 프로이트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 앞머리의 테두리 내에서 움직인 것일 것이다. 



 "제자들을 환자 다루듯 하는 교수님의 태도는 잘못이라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교수님은 늘 저 높은 곳에서 아버지처럼 품위있게 앉아 계십니다. 오로지 복종만 하느라 그 누구도 감히 예언자의 수염을 잡아당길 엄두도 못내죠. "


융은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저는 사적인 인간관계를 끊자는 교수님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교수님께 어떤 의미인지는 당신 스스로가 가장 잘 아시게 될 겁니다. 나머지는 침묵입니다."



 침묵 서약으로 시작된 절교, 서로의 방법론을 버리게 된 두 사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에는 자기파괴의 계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원시 부족 사회의 친부살해. 자신이 죽인 아버지와 같은 가면을 쓰기. 이것은 그 전에 프로이트가 내린 것이 아닌가. 역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통해, 자신이 내린 정의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의미를 가진다. 전과는 달리 어떤 시대 양식도 만들어내지 않는 미술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 우리가 쉽사리 찾았던 일관성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단 하나 발견되는 지속적인 성질은 바로 작용과 반작용일 것이다. 서양미술사의 잰슨이 지적했듯이 다양한 '주의'는 물결이 퍼지듯 국가적, 인종적, 연대기적 경계를 허물어뜨렸고, 어떤 지역에서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1913년, 국가의 개념이 허물어지고 국가 대립항이 아닌 도시 대립항, 아니, 그보다는 개인의 산발적인 사건과 개별적인 작품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주의를 살펴보자면 심증은 물증을 얻기까지 한다. 잠시 책 밖으로 눈을 돌려, 잰슨의 서양미술사 한 단락을 들여다보면 역시 이런 부분이 보인다. 



 이런 주의 들은 끝없는 변화 속에서 서로 경쟁하거나 뒤섞이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근대의 미술에 대한 리의 분석은 국가 개념보다는 양식 개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로지 이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지역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대 미술 역시 근대 과학처럼 국제적인 움직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잰슨, 서양미술사.




 이즈음 되면, 저자가 왜 한 가지 분야가 아닌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1913년의 풍경을 이렇게도 사적으로, 방만하게 보일 정도로, 가십까지 검증하고 때로는 추측도 과감히 옮기며 그려냈는지를 알 수 있다.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부분 부분, 그 조각 조각을 쭉 훑고 나면 전체가 보인다. 따로 떼어내서 한 가지만 보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어떤 그림, 어떤 시, 어떤 소설, 어떤 개론서, 어떤 조각, 어떤 기사, 어떤 건축, 어떤 무엇. 무형의 무엇과 유형의 무엇. 사람의 생각이 빚어내는 복잡함. 이 모든 것의 전체를 조망하고 부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호오의 기준만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1913년이라는 부분을 떼어내어 조망했지만 읽고 나면 저자가 보여주고자 한 맥락과 전체 역사 속에서 1913년이 드러내는 의미가 만져진다. 부분을 통해 흐르는 전체.





 그 가로 세로직조된 사건과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서서히 일어나고 변화를 겪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수많은 가정법이 있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결국,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린 일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소비하면서. 어떤 것을 이야기하거나 떠올리면서. 이 속에서 사람이 빚어낸 1913년의 자유, 역동성. 모더니즘은 예술가로 하여금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고 그에 따른 정의를 내리게 했다. 강렬한 도전의식, 리얼리티의 구조에 중심을 둔 추상주의의 관점. 미래에 대한 가능성, 직관과 양식, 모방과 재창조. 죽지 않은 과거, 오래된 미래. 머지 않았던 시간. 우리가 현재라 부르는 시점의 시작. 우리와 비슷한 우울, 우리와 비슷한 신경과민, 우리와 비슷한 강박. 지금 우리가 겪는 시간은 결국, 그때로부터 온 것이었다. 서로 무관한 사건과 상황의 입체적인 몽타주가 손끝에 닿을 듯 만져진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보이는 것인 1913년, 만져지는 것은 2013년. 아마 백 년 뒤에도 이러한 기획이 역사로 나타나겠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역사이며 조심해야 할 것은 부분만 따로 떼어 자신만의 기준으로 바라본 것을 전체라 우기는 일일 것이다. 

 

 




 "아주 새로운 안무와 음악. 완전히 새로운 비전, 처음 보는 것.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럴듯한 어떤 것이 갑자기 내 눈앞에 있었다. 예술이 아니면서 동시에 예술인 새로운 종류의 야만성이다. 모든 형식을 파괴하고, 혼돈에서 갑자기 새로운 형식이 나타난다." -캐슬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관람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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