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내 리뷰가 그렇듯이, 이 애니메이션에서 주류로 나오는 후루카와 나기사와 오카자키
토모야 이야기는 뺀다.
사실 끝까지 아버지를 회피하고 후루카와 나기사의 집에서 얹혀사는 오카자키 토모야의 이야기는 상당히 비현실적일 뿐더러, 그게 반드시 올바른
성인 남성으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해답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나기사의 가게를 도와줌으로서 그가 세상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이득은 있겠지만, 정작
그의 가족문제에선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것이다. (꼭 진전이 있어야 하는가?도 숙제이다.) 남성들은 성장하면서 외모도 내면도 자신의 아버지를
닮아가며, 생존의 위기에 맞닥뜨리면 억눌러왔던 무의식이 터지는 게 전형적인 패턴이기 때문이다. 난 최대한 갈등에 휩싸여있는 자신의 내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과 환상을 적절히 골라내서 환상은 떨쳐내버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이다만, 그게
쉬울리가 있나.
그래서 솔직히 2기에서 오카자키 토모야와 그의 아버지 오카자키 나오유키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건 난 관심이 없다. 이 둘이 잘 되던 혹은 이도저도 안 되던 간에 헛소리를 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고전문학적 설정은
흥미롭지만 이 클라나드의 태생이 일본이라서, 잘 그려져봤자 무라카미 하루키적 결말이 아닐까. 내가 관심있게 보는 건 남성향 게임에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는 것 그 자체이다.
살면서 '내가 이 새끼처럼은 살지 말아야겠다'라고 하는 사람이 꼭 한 명 씩은
있다.
인간이 자신의 삶 중에서 빛은 잘 보지 못하고 어둠만 쳐다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아무튼 우리는 그들을 반면교사라
부른다. 이 반면교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데, 예를 들어 폭행과 살인 등 갖가지 사건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그에게 계란을 던지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우리가 그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 걸 퍽이나 다행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오유키는 클라나드 1기의 그늘이자 반면교사같은 존재이다.
그는 왜 그렇게 한결같이 아들의 방임이 자신의 교육방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것이 꼭 토모야를 방임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는 토모야를 실수로 다치게 만들어서, 토모야의 진로를 가로막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실수로 교훈을 얻기 마련이다.
1999년도부터 2013년까지 우리나라의 살인 사건은 한 해에 대략 900~1000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70년대 쯤엔 살인사건(특히
치정이 많은데, 여기서도 역시 연애사건에 관심이 지대하게 많은 우리나라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드라마에서도 연애가 없으면 섭섭한 나라인걸
뭐.)이 발생할 경우 신문 1면에 기재되는 경우도 많았고, 사건이 일어난 경황을 4~5면에 걸쳐서 소설처럼 설명해주는 게 흔했다. 하지만
IMF의 영향 아래서 우리나라는 그런 사건들을 상세히 보기에 너무나 피로해지게 되었고, 2008년에 또 한 번 경제위기가 터진 이후론(놀랍게도
상당히 많은 수의 경제학자들이 IMF보다 더 큰 위기가 우리나라에 닥쳤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힐링물이라던가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삼시세끼라던가 아빠 어디가 같은. 재미있는 건 그 프로그램의 주인공들이 90% 이상은 남자라는 것이며. 이요리라던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가정적인' 남성에 대해서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아버지가 아이를 키우는 내용의 에세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성으로선 환영할 일이지만, 또한 상당히 씁쓸한 일이다. 여성들이 옛날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일들을 많이 맡기 시작하면서 여성적인 키워드들이 취직의 조건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애초에 여성의 뇌와 심장을 지니지
않은 남성들은 조연이나 연출로 물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머니도 인간이다.'라는 키워드는 등장하지만, '아버지도 인간이다'라는 키워드는 그닥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IMF라거나 대대적인 세대교체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1997년 작가 김정현의 아버지라는 소설이 크게
히트했던 적이 있었다. 이처럼 80년대에서부터 그런 키워드는 꾸준히 등장해왔었다. 그러나 2000년대엔, 일그러진 권위를 바라보는 10대들의
분노가 개입되기 시작되었다. 그 경향은 2010년도에서 절망으로 바뀌었다. 사실 난 포기의 시대보다 절망의 시대가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여기에 또 다른 권위적인 부모가 등장한다.
나기사의 아버지도 상당히 전형적이고 보수적인 타입이긴 하지만,
무대에서 벌벌 떠는 나기사를 다그치는 그의 말은 지금 50대의 의견을 담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만일 내가 나기사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래서 뭘 어쩌하오리까?' 경제 호황기 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부모의
과한 기대를 받으며, '하고 싶은 일'을 이루고 싶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 꿈이 산산조각나고 부서졌으며, 머리가 좀 더 커져서 애초에 부모가
돈을 벌기 위해 해왔던 일들이 반 이상은 옳지 못했다는 사실을 (땅투기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포함된) 알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포기의 여지가
있었을까?
애초에 자식이 하고 싶은 일과 부모가 하고 싶은 일은 다르다. 나기사의 아버지가 했던 연기와 나기사가 하는 연기는 다르다. 나기사의
아버지가 하는 말에서 난 엄청난 부담감과 구속력을 느꼈다. 그런 설정이 딱히 클라나드의 탓은 아닐 것이다. 그 시대에 흥행하려면 그런 시나리오를
썼어야 했을 것이고, 나기사의 아버지는 그런 대사를 했어야 했다. 그의 한결같은 양육방식에는 칭찬을 해줘야겠지만, 어느 정도는 반문을 던져야
한다고 본다. 나오유키와 토모야는 다르다. 나기사의 아버지와 나기사는 다르다. 부부는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는 있지만, 그 생명에게 어떤 종류의
삶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난 나오유키의 편이다.
그러니 반드시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게 꼭 답이 될 수도 없다. (그런 공동체가 꼭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데,
여기서부터 난교 등으로 나아가면 상당히 골치아파지기 시작한다.) "가족은 남이 아닌가요?"라고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황정은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원하는 걸 성취하려 노력해도 무언가를 이루기 힘들고 혹은 절대 이룰 수도 없는 시대에, 이 작품에서 대체 무슨 무리한 것을 강요하고
있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볼 일이다. 저출산이니 가족을 이뤄서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구질구질한 메시지라면 일찌감치 무시하거나 벗어던지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