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가장 최근에 작곡한 음악은 현재 산울림 소극장에서 '절찬 상연'되고 있는 사카테 요지(坂手洋二)의 연극 <블라인드 터치>를 위한 것이다. 이번 작업 과정은 특히나 개인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었는데ㅡ하지만 돌이켜보건대, 저 작곡과 연주의 휘몰아치는 작업 과정이 휩쓸고 지나간 후 남은 경험 중 재미있게 기억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었겠느냐마는ㅡ, 비록 느리게 진척되는 작곡 작업 때문에 우리의 수석 엔지니어가 상당히 고생하기도 했지만(이 자리를 차용해, 게으른 작곡가의 투정을 언제나 모두 받아주는 내 수석 엔지니어에게, 새삼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내 작곡 작업 최초로 일본 악기 샤미센(三味線)을 사용해보기도 했고ㅡ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샤미센과 피아노의 조화를 처음으로 시도해본 작곡이었다ㅡ, 또한 결과적으로 상당히 마음에 드는 음악이 산출됐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돌이켜볼 때 꽤나 흡족스러운 작업이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희곡과 연극이 잔잔한 흐름 속에서도 강한 밀도와 여운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나 윤소정 선생의 연기에 주목할 것을 주문하며, 관극을 권한다. 2008년 3월 16일까지, 산울림 소극장.

   

▷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사카테 요지(坂手洋二)의 최근 모습과 그의 희곡집 1권(早川書房, 2007).

2) 일단 관극에의 권유로 운을 떼었으나,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본령(本領)은 사실 다른 곳에 있다. 이번 <블라인드 터치> 공연에 부쳐 사카테 요지가 한국 관객들을 위해 보내온 '작가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길지만 그의 글을 '육성 그대로' 옮겨보기로 한다:

"일본은 '숨기는 사회'이다. 정치범도 있고, 억울한 죄로 투옥된 사람도 있고, 여전히 옥살이를 강요당하는 사람도 있다. 이 작품에서 그려진 세계는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건 숨겨져 있다. 신문도 TV도 그걸 알리지 않는다. 왜 숨길까. '숨긴다'는 비열함은 이 나라가 전 세기 전쟁에 대한 '전쟁 책임'을 숨기는 것과도 상통한다. 차별의식을, 소심함을, 이기적 거만함을 숨겨왔다. 숨기는 행위로 인해 날조된 허위정보를 사실로 오해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난 이 나라의 이런 '숨기는' 문화를 증오한다. 숨긴다는 행위로 얼버무리고, 기만을 안은 채 우선시되는 현상에 긍정하고, 되도록 '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방침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교활하게 처신하고 타자의 불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살아왔다. 이 비열함은 이제 온 세계가 아는 일본이라는 나라고, 그나마 '호의적 평가'를 받던 '전후의 기적적 성장'이라는 이미지조차 무너졌다. 이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신화'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일본은 더욱 빈털터리가 되어야 된다. 빈털터리가 되고, 정말 알몸이 되고, 사심을 버리고, 그렇게 되더라도 살아갈 각오가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또는 이제까지 세상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들을 본받아서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 이번 내 희곡 <블라인드 터치>는 그런 '빈털터리가 된 일본'에서 살아갈 각오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응원가이다. 아직 소수파지만 몇 십 년 후에는 그런 사람들이 넘치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하며, 그 추세가 하루라도 빨리 오는 걸 돕고 싶어서 나는 이 희곡을 썼다. 지금 이런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다."

공연 팸플릿에 수록되기 전에 연출가 김광보 선생을 통해 이 글을 처음 접하고 내가 느꼈던 것은 어떤 저돌적인 힘, 타협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넘치는 에너지였다(단순한 노파심에서 한 마디만 첨언하자면, 저 사카테 요지의 글이 지닌 요지(要旨)는, 대다수가 철학적/사상적 논거를 결여한 채 진부하고 비루하게 반복되고 있는 '국내용' 반일론(反日論) 논의ㅡ예를 들어 저 '일본은 없다' 따위의 천박하고 척박한 문장들ㅡ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근거로 쓰여서도 안 되며 또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다). 사카테의 저 달변과 독설에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 내가 느끼고 확인한 것은 '단순하게도' 바로 이 힘이었다. 글을 쓰는 자들이 본받아야 할 것은 바로 저런 힘이 아닌가, 이는 사실 새삼스럽게 새로울 것도 없는 하나의 '강령'일 뿐이지만, 나는 사카테의 저 글을 읽으면서 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새로운' 생각을 다시금 가슴에 품고 되새기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이들과 함께 내가 공유하고 싶은 것은 어떤 특정한 사상이나 이념의 내용이 아니라 단지 바로 이 힘의 실체일 뿐이다. 그 힘만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 그뿐이다. 글은 낭비되거나 주절거리듯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닌 드물고 고귀한 힘에 의해서 유출되고 넘쳐날 뿐이다. 이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소박한' 하나의 강령에 내 자신은 얼마나 충실했던가, 슬쩍 반성 한 자락 남겨보면서, 저 유출과 넘침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일종의 소진이고 과잉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다분히 '바타이유적'인 명제 한 자락, 덤으로 확인해본다. 그러므로 역시나 저 '반성'이란, 뛰어넘거나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단순한' 과정이 아님을, 재차 확인하게 되는 것. 나아갈 길은 아득하고 요원하지만, 사카테의 저 글에서 힘을 다시 긷는다.



▷ 사카테 요지의 또 다른 작품 <다락방>의 한 장면.

3) 주목을 요하는 사카테 요지의 다른 작품으로는 <다락방>이 있다(국내에서는 일전에 희곡 낭독 공연으로만 공연된 적이 있다).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 문제에 대해 다분히 부조리적이고 표현주의적으로 접근하면서도 그것이 지닌 첨예한 사회성을 놓치지 않은 수작이다. 빠른 시일 내에 국내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공연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 한 자락, 지나가는 길에 내려놓는다. 다분히 여담에 준하는 말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일본사상사와 [일본의] 근대에 관한 담론들을 농담 삼아 '강박적 전공 분야'라고까지 지칭해가며 나름대로 그에 깊이 천착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여기서 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를, 다소 우회적인 길을 통해, 그리고 몇 가지 '소박한' 예시들을 통해 말해보고 싶다. 히키코모리 문제가 언급된 김에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의 『現代日本思想論』을 잠시 들춰보도록 하자(이 책은 개인적으로 2004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을 때부터 구입해 소장하고 있던 책인데, 2006년에는 국역본도 출간된 바 있다). 내가 이 책의 1장 '현대 일본의 사상 상황(現代日本思想狀況)'을 읽으면서 실로 '의아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야스마루가 매우 개별적이고 극단적인 사건/사고들에 너무 큰 사회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특히 1장 4절 부분, 원서 35-44쪽, 국역본 52-61쪽 참조). 하지만 곧 이어서 이러한 '일차적인' 의구심 너머로 품게 되었던 생각은, 바로 이러한 '서술 방식' 자체가 어쩌면 일본 사회사 내지 사상사의 이론적 '틀'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주춧돌'은 아닐까 하는 '묘한' 깨달음이었다. 이러한 '서술'과 '선정'의 방식 자체가 이미 징후적인 것이 될 터(이는 아마도 더 깊게는 매스미디어의 문제와 사상사의 서술 방식을 함께 결부시켜 사유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출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일단은 이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한 자락만을 밝혀두기로 한다). 곧, 일본사상사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지극히 '일본적' 사유의 틀 하나를 확인했다면 확인했다는 것.

   

▷ 安丸良夫, 『 現代日本思想論 』, 岩波書店, 2004.
▷ 야스마루 요시오, 『 현대일본사상론 』(박진우 옮김), 논형, 2006.

4)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하나의 예시는 후지타 쇼조(藤田省三)의 '증언' 또는 '고백'이다. 2007년에 국역된 그의 책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轉向の思想史的硏究)』의 서문에서 후지타는 천황제와 관련된 '언어적 무의식'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개인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책에 대해서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하나를 제외하고 대체로 '전향사(轉向史)'의 각 단계에 관한 '총론'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내가 '연구회'의 주재자 겸 지도자였던 쓰루미 슌스케의 뜻에 따랐기 때문이다. 각 장의 표제가 전부 '원호(元號)'를 사용해서 표기되었는데, 이는 당시에 이러한 종류의 연구 집단과 그 지도자조차도 원호 표기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바꾸어 말하면 적어도 연호의 사용방식에 관해서는 천황제적 '국체 본위'였지 결코 '국제적'이지 않았던 것을 보여준다. '공산주의자' 집단은 10년이나 앞서서 '50년 문제'라는 방식으로 경직된 이분법이라고는 하지만 '논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로, 명저 『미국철학(アメリカ哲學)』의 저자인 쓰루미 슌스케로서도 완전히는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1954년에 '천황제'에 관한 비판적 소론을 펴낸 나 또한 이때의 시야는 '국내주의'적인 범위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ㅡ 후지타 쇼조,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 6쪽.

천황제와 전향 문제에 대해 첨단에 서서 가장 비판적인 연구를 행한 '전향 연구 집단'에 소속되어 있던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와 후지타 쇼조였지만, 그들 역시 천황의 '원호'ㅡ곧 '쇼와(昭和)'ㅡ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그들 자신의 '무의식적' 행위에 둔감하고 무감각했다는 것. 이러한 '고백 아닌 고백', '증언 아닌 증언'은 역사학자로서의 후지타가 지닌 학자적 됨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으로서 재독과 삼독의 가치가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말하자면 원호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면서도 그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않았던 이전의 자신에 대해 지금에서야 오히려 어떤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 그 스스로 '국체 본위'였을 뿐 당시에는 결코 '인터내셔널'하지 못했다는 것, 이러한 '자기 반성'을 읽고 있자면ㅡ내 개인적인 어법을 '도용'해볼 때ㅡ이른바 '신발끈 매기'라는 작업이 얼마나 지난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절실한 일인가를 새삼 '무섭게'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 후지타 쇼조, 『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 』(최종길 옮김), 논형, 2007.
▷ 쓰루미 슌스케, 『 전향 』(최영호 옮김), 논형, 2005.

5) 더불어 후지타의 저 '자기 반성'에 등장하고 있는 '전향 연구 집단'의 좌장(座長) 쓰루미 슌스케의 저작 『전시기의 일본정신사(戰時期日本精神史)』의 일독도 함께 권하는 바이다. 이 책은 2005년에 『전향』이라는 다소 '단순한' 제목을 달고 국역 출간된 바 있다. 비록 <블라인드 터치>는 이른바 저 '고전적' 전향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연극은 아니지만, "내게 전향을 강요하려면 바로 지금이에요!"라고 외치는 여자의 '농담 아닌 농담'은 이 연극이 지닌 진폭과 범위를 가늠케 하는 하나의 '가늠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ㅡ이는 한국 관객이 결코 '적극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일종의 '일본적인, 지극히 일본적인' 농담의 하나일 텐데ㅡ이 자리를 차용해 '전향' 문제에 관한 책들의 일독을 함께 권해보는 것이다.

   

▷ 마루야마 마사오 外, 『 사상사의 방법과 대상 』(고재석 옮김), 소화, 1997.
▷ 마루야마 마사오, 『 충성과 반역 』(박충석, 김석근 옮김), 나남출판, 1998.

6) 아마도 일본사상사 혹은 사상사 일반에 관한 개인적인 '최고의' 여담은 바로 '방법론'이라는 문제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사상사라는 하나의 '기괴한' 장르(genre) 혹은 학제(discipline)가 지닌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징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방법론의 문제, 곧 '메토돌로기(Methodologie)'의 영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개인적인 생각 때문이다. 이에 공감하고 동감하기 위해서는, '사상사'라는 분야에 뜻을 두거나 또한 거기서 일가(一家)를 이룬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저 '방법'에 대한 모종의 '강박'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마구잡이로 예를 든다고 해도,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야스마루 요시오, 김윤식 등의 예들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왜 방법론이 문제인가, 이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는 역시나 일독을 권하면서 한 발 물러서는 수밖에. 이 문제에 관해 가장 기본적이고 집약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글로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사의 사유방식에 대하여」를 꼽을 수 있을 텐데, 이 글의 국역을 싣고 있는 위의 두 판본을 추천하는 바이다. 아직은. 어쩌면, 여전히?

7) 곧 사카테 요지가 한국을 방문하여 관객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2월 20일, 22일, 저녁 공연 이후 두 번의 대화가 예정되어 있다). 다녀온 후 조만간 이 공간을 통해 그 대화의 내용과 분위기를 전해볼까 한다. 나의 거의 유일한 '기대'ㅡ어쩌면 동시에 '우려'ㅡ는 무엇보다도, 앞서 옮겨보았던 저 글의 힘과 울림을 과연 사카테 본인에게서 직접 느껴볼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결부되어 있는데, 벌써부터 무척이나 가슴 설레고 기대되는 '만남'이 아닐 수 없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람혼 2008-02-18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llnaru님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야스마루 요시오의 책보다 잘 읽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후지타 쇼조의 글이 특별히 난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는 일독의 가치가 있는 훌륭한 책이라는 생각입니다. 국역본은 몇 가지 맞춤법 표기의 문제와 약간의 '일본어 번역투'를 제외한다면 준수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후지타의 다른 책들에 관해서도 시간 나실 때 몇 마디 첨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