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뭉크(Munch)가 그린 니체.

27) 광인(狂人)과 맹인(盲人)의 자서전. 거의 모든 자서전들이 생의 말미에 저술된다는 점은 새삼스럽게도 흥미롭다. 물론 이 '말미'라고 하는 시간적 규정이 단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의 임박을 알리는 표현일 뿐인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자서전을 쓰는 행위는 자서전의 저자가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완결된' 통일적인 시점을 갖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그러나 이러한 '완결성'이 어떤 궁극적인 '완성'이 될 수 없음 또한 물론이다). 그러한 시점이 일종의 '전회' 혹은 '일단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자서전은 삶의 기록임과 동시에 죽음을 '회고'해가는 일종의 '묘비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따라서 죽음은 단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로부터 '역으로' 육체적인 죽음을 제외한 생의 결정적인 죽음은 단 한 번뿐이라는 환상과도 같은 언명 또한 가능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서전은 죽음을 '소화'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그것은 죽음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 순간으로 인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저자의 '현재' 위치를 다져간다. 변신의 이야기. 그러므로 자서전은 하나의 '유언장'이며 저자는 그러한 유언의 내용을 스스로 집행하고 증명하는 법적 '대리인'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여기서 '법적(法的)'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내 자신의 신용으로(auf meinen eignen Credit) 살아간다. 어쩌면 내가 산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편견(Vorurtheil)일까?"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57(번역: 람혼).

28) 자신의 존재는 그 존재 스스로에 의해서만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숙명. 자서전은 이러한 '치명적' 조건을 고스란히, 가장 '정직하게' 안고 가는 글쓰기의 형식이다. 왜냐하면 작품에 대한 저자의 '사법적 권능'은 자서전 안에서 가장 극명하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서전의 저자는 가장 강렬한 강도를 띠는 저작권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이러한 글쓰기의 '사법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환경은, 르죈(Lejeune)도 지적하고 있는바, 고유명사의 공간, 곧 서명(signature)의 공간이다. 니체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람을 보라』의 서문에서 자신의 '신용(Credit)'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니체에게 있어서 이러한 신용이 자기 자신의 것만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이러한 질문이 가능한 것은, 자서전에 있어서 서명의 문제가 단순히 '안전하게 보장되는 사법성'의 표현에만 국한된 문제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광인의 자서전'이라는 문제는 자서전의 '영원한 타자'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 자서전 안에서 일견 견고한 듯이 보이던 저자의 진실성과 서명의 사법성은 광인으로서의 자서전 저자라는 개념에 의해서 동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광인의 자서전'이라는 말 안에서 '광인'이라는 개념과 '자서전'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서로 충돌하는 일종의 형용모순(oxymoron)을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자서전의 효과가 진실성/성실성(sincérité)이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때, 광인의 글쓰기는 그러한 조건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것, 오히려 그러한 전제 조건 자체를 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자서전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어떤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자서전 저자의 자격 자체가 이미 '법적으로' 인가되며 또한 공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서전 저자의 자격을 규정 짓는 이러한 정상성(normalité)의 기준은 자서전의 은폐된 바깥을 구성한다.

  

▷ Friedrich Nietzsche, Kritische Studienausgabe, Band 6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8[2. Auflage].
▷ 프리드리히 니체, 『 바그너의 경우 外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2.
▷ 프리드리히 니체, 『 도덕의 계보 / 이 사람을 보라 』(김태현 옮김), 청하, 1982.

29) 그럼에도 혹자는 '소박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자서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누구나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갖고 있어야 하며 자서전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삶의 굴곡들과 업적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식의 '소박한'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저 문장 안에서 "누구나"라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나름의 삶의 굴곡들과 나름의 절실한 이야기들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자서전'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저자의 인지도에 의한 자서전의 유명세와 판매량의 문제를 떠나서, 사회적이고도 사법적인 심급에서 가장 먼저 결정된다: 그 기준이란, 저자가 정상적인 정신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가 없는가, 즉 그가 서술하는 이야기들을 그의 삶이 지닌 '진실한' 부분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 그러므로 이는 곧 자서전 저자의 '법적' 자격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광인의 글쓰기 '능력'은 믿을지언정ㅡ왜냐하면, 우리에게 때때로 '광인'은 천재적 예술가의 표상이기도 하므로ㅡ그 글의 '진실성'은 믿지 못한다. 설령 그가 자서전을 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진실성의 심급에서의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허구', 혹은 하나의 '예술 작품'의 위치에 준할 수도 있는 '착란'의 결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따라서 소위 '정상인'은 자서전을 쓰는 데에 있어서 이미 어떠한 사법적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 광인에게는 원천적으로 말해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저자'의 자격이 박탈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자서전 저자의 '사법성'이라는 문제이다. 저자로서의 권리와 그것이 지닌 법적 정당성이 광인의 자서전 안에서는 쉽게 결여될 수밖에 없는 것. 이러한 의미에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자서전' 텍스트는ㅡ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와 함께ㅡ알튀세르(Althusser)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L'avenir dure longtemps)』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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