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an-Jacques Rousseau, Œuvres complètes, tome I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59.
▷ 장자크 루소, 『 고백 』(김붕구 옮김), 박영률출판사, 2005. 

7) 자서전 텍스트 내에서 '속임수'가 만들어내는 '틈새'를 읽는 한 사례로서 루소(Rousseau)의 『고백록(Les confessions)』 1권의 몇 부분을 중심으로 그의 '정체성'이 어떤 방식으로 성립되고 서술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가장 나의 흥미를 끄는 곳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나는 이미 정의의 기사(redresseur des torts)가 된 것이다. 정식으로 유랑기사(Paladin)가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단지 귀부인(Dame)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귀부인이 둘이나 있었다."
ㅡ 루소, 『고백록』, 전집 1권, p.26(번역: 람혼).

8) 이 부분은 아마도 표면적인 텍스트 그 자체로는 별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부분을 문제 삼는 이유는 이 문장이 배치된 위치와 전후의 문맥이 내게 매우 미묘한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의 앞에 서술된 부분은 자신의 사촌을 "바보 당나귀 베르나르(Barnâ bredanna)"라고 부르며 놀리는 아이들에 대항해 루소가 싸움을 거는 내용이며, 그 뒷부분은 뷜송(Vulson) 부인 그리고 고통(Goton) 양과 가졌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이다(그러므로 저 '두 귀부인'이란 곧 이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 그나저나 한 여인의 이름이 '고통'이라니!). 그런데 왜 여기서 사촌 베르나르를 악동들의 놀림으로부터 지켜줬던 행동과 귀부인을 흠모하는 수호기사의 이미지가 그토록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것일까. 왜 루소의 글은 그러한 '수호'의 경험으로부터ㅡ저 돈키호테의 모험을 연상케 하는ㅡ"유랑기사"를 매개로 하여 자연스럽게 이성에 대한 사랑의 기억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일까. 곧, 왜 이 문장들은 바로 '이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것이 나의 물음이다.

9) 그런데 여기서 사촌 베르나르와 맺었던 이러한 '우정'이 어린 루소에게 있어서 일종의 '근원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르죈(Lejeune)이 이미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자서전의 규약』, 원서 pp.94-99, 국역본 142-149쪽), 현실과 제도적 질서의 '침탈'에 의해 초래된 이 우정의 파국은 결국 "철기(âge de fer)"의 정점을 이룬다. 점진적인 하강을 그리던 '타락'의 곡선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더욱 그 속도와 각도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와 함께 루소의 '낙원 시대'도 완전히 끝장나버리고 만 것. 이것이 이토록 결정적인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는 만큼, 어린 루소에게 있어서 베르나르와의 우정은 인간 관계의 어떤 원형을 제시하고 있는 본원적인 상태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베르나르와의 관계가 루소에게 있어서 '모든 관계의 원형'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 하나가 절실해진다. 원형은 그것을 원형이게끔 만들어주는 근원적인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10) 이러한 근원적인 경험이 문제가 된다고 할 때 내가 특히 주목하고 싶은 루소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나의 아버지가 이러한 상실[아내, 즉 루소 어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나는 몰랐다. 그러나 그가 결코 그 상실의 슬픔을 가라앉히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그로부터 그녀를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잊지 못한 채, 내 안에서 그녀를 다시 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껴안을 때마다, 나는 그 한숨과 그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포옹을 통해서 그의 애무에 쓰디쓴 회한이 섞여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애무는 더욱 부드러웠다. 아버지가 나에게 "장 자크, 우리 네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에게 "어, 아버지, 그럼 우린 울 게 될 걸요"라고 말했었다. 이 한 마디 말에 아버지는 벌써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신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그녀를 내게 돌려줘, 그녀 때문에 슬퍼하는 나를 달래줘, 그녀가 내 영혼 속에 남긴 빈 자리를 채워주렴. 네가 단지 내 아들일 뿐이라면 내가 널 이렇게까지 사랑했을까?" 아내를 잃은 지 40년 후에 그는 후처의 팔에 안겨 죽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전처의 이름을 되뇌고, 가슴 속 깊은 곳에는 그녀의 영상을 간직한 채로."
ㅡ 루소, 『고백록』, 전집 1권, p.7(번역: 람혼).

11) 이 인용문은 아마도 '정신분석적' 해석 방법에의 유혹을 가장 강하게 느끼게 되는 부분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해석의 방향을 따를 때, 우리는 이 일화를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일화는 기본적으로 '거세(Kastration)'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것. 여기서 루소의 탄생이라는 기표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기의를 항상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어린 루소에게서 그가 앗아간 어머니의 존재, 곧 회귀 불가능한 존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루소가 '퇴행'하는 아버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부재하는 어머니에 대해서도 똑 같이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게 되는 됨과 동시에, 또한 루소 안에서 어머니의 현전을 갈구하는 아버지에게서 루소는 아들이기에 앞서 여성이자 아내이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곧, 어린 장 자크는 아버지에 의해 거세되기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

▷ 만 레이(Man Ray), <눈물>.

12) 그러나 여기서 단순히 표면적이고 '생식기적'인 남근의 개념만을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경련을 일으키는 포옹"과 "눈물"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다분히 '여성적인' 기질이 아닌가. 아버지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오히려 여성성으로서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위의 인용문에서 "아버지"를 모두 '어머니'로 바꿔 읽어보라. 그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깜짝 놀랄 수도 있을 테니. 한 가지 더, 오히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고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장 자크가 아닌 아버지인 것은 아닌가. 이러한 맥락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 추궁과 그 징벌로써 어린 장 자크에게 거세 의식을 행하는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여기서 아버지야말로 거세되고 처벌 받는 존재로 표상되고 있지 않나.

   

▷ Sigmund Freud, Werke aus den Jahren 1906-1909. Gesammelte Werke, Band 7
    Frankfurt am Main: Fischer, 1993[7. Auflage].
▷ 지그문트 프로이트, 『꼬마 한스와 도라』(김재혁, 권세훈 옮김), 열린책들, 1997.

13)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어린 루소와 그 아버지 사이에서 으레 빚어질 것이라 추측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출구'가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에게서 남근이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어린 한스(Hans)의 사례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아버지-남성'과 '어머니-여성'이라고 하는 생물학적이고 표면적인 구분이 전혀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상기해보자: "왜 [성적인] 속성들이 오직 위협을 통해서만, 게다가 오직 박탈의 측면에서만 수용되어야 하는가."(La signification du phallus, Écrits, p.685) 하나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어린 루소에게 있어서는 거세의 메커니즘을 '학습'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처음부터 부재했었고, 그는 탄생과 동시에 아버지라는 '모델' 없이 '남근' 역할을 학습해야 했던 것(이러한 맥락에서 아버지와 형의 싸움에 끼여들어 형을 두둔하는 루소의 행동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형에게 내려지는 '형벌'을 말리는 루소는 일종의 '승리자'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루소의 행위는, 여성성의 이미지로 화한 아버지의 애정이 남성성(='아버지')으로 화한 형에게가 아니라 바로 루소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확인 사살'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살스러운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터). 그러므로 실제로 어린 장 자크에게 부재했던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존재는 그 자신의 부재를 통해서, 그리고 그가 남긴 '소설책들'을 통해서, 다가갈 수 없는 현존으로 규정되고 있다. 부재가 존재에 대해, 존재보다도 더 큰 영향력과 규정력을 갖는다는, 이제는 일종의 '원칙'이 되어버린 하나의 '역설'.

▷ Jacques Lacan, Écrits,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1966.

14) 루소의 탄생부터 부재하게 된 어머니의 존재와 관련하여 내게는 라캉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왜 두 성(性) 모두에게 있어 어머니는 보다 근원적으로 남근(phallus)의 소유자, 즉 남근적 어머니로 간주되는가."(Écrits, p.686) 곧 바로 다시 라캉의 입을 차용해 대답하자: "왜냐하면 남근은 기표이기 때문이다."(Écrits, p.690) 즉, 새삼스럽게 한 번 더 확인하게 되는 사실이지만, 남근은 단순한 신체적 성차(性差)에 의해 그 유무가 판별될 수 있는 기관이 아니라 다분히 '상징[계]적인' 성격을 띠는 하나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15)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근에의 욕망, 곧 '타자의' 욕망이 어린 루소에게 어떻게 전이되고 그 자신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의 욕망은 "어머니가 남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중요한 것으로 기능한다(Écrits, p.693). 그러나 루소에게는 어머니에게 남근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한스의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 오히려 바로 그의 탄생 '때문에' 부재했으므로.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거세'되고 그 때문에 자기 처벌을 행하는 아버지에 의해서 루소에게 간접적으로 학습될 수밖에 없었다. 루소에게 있어서는 기표로서의 남근, 즉 상상계를 뛰어넘어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한 전범이 '원천적으로' 부재했던 것. 루소에게 부재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남근의 전범으로서 작용하는 하나의 '남성성'인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존재하는 아버지는 여성성으로 현전하고, 부재하는 어머니는 루소에게 근원적으로 결여되었던ㅡ그래서 루소가 경험할 수 없었던ㅡ남성성으로 현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소가 결투를 슬기롭게 회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 또한 다른 시각에서 해석해볼 수 있을 텐데, 결국 그것은 아버지의 '여성성'을 숨기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르죈이 말하듯, "루소에게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는, 성숙(maturation)의 단계와는 거리가 먼, 미성숙(immaturité) 상태에의 고착을 의미하"는 것이며(원서 p.103, 국역본 155쪽), 이에 이 일화를 일종의 '텍스트적 틈새'로 독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루소는 그 스스로가 '전범'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성립에 있어서 이렇듯 자기 자신을 일종의 '타자화'하는 시선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의 판화.

16) 바로 이 지점에서 루소가 '부재하는 남성성'을 체득하기 위한 과정에서 '선택'한 대상이 베르나르라는 사실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아버지-대체물'로서의 베르나르와의 관계는 루소에게 있어서 상징계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 여기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베르나르가 보호받아야 할 여성성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바로 여기서 나는 루소 스스로 구성해낸 최초의 남성성이 수호기사의 이미지로 드러나게 되었던 사정, 곧 베르나르를 감싸고 보호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귀부인을 수호하는 유랑기사의 이미지로 전환되게 되었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17) 이러한 루소의 정체성 성립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라캉의 말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의 동성애는 욕망을 이루는 남근의 결핍을 따라 그 측면 위에서 구성된다."(Écrits, p.695) '모델'로서의 남근의 결핍, 루소에게 있어서 이러한 결핍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도처에 편재하며 그 어떤 것으로도 변용될 수 있는 근원적인 '어머니-남근'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아마도 이것은 하나의 존재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존재 방식, 곧 이상적인 '자웅동체'의 모습일 것이다. 내가 '루소는 어떻게 동성애자가 되었나'라고 하는, 일종의 '허구적' 질문으로 운을 뗀 것은, 바로 이러한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 Marquis de Sade,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1
    Paris: Pauvert, 1990. 
▷ 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 Journal inédit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94(1970¹).

18) 이 시점에서 갑자기 내게 떠오른 것은 사드(Sade)의 일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Vous voulez donc absolument que je vive?(폴리오 판 p.66, 포베르 전집판 p.122) 아마도 이 말은 결국 샤랑통(Charenton)에 갇혀 있던 사드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니었을까? 사드는,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내게 '도착된 여성성'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루소와 사드, 도착적인 두 개의 초상화.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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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8-03-02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습니다. 람혼님, 감사합니다.

람혼 2008-03-03 13:37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누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