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내가 다시 부재와 존재의 문제를 제기하는 논의의 층위는 루소의 '근원적인' 경험과 관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서전 텍스트 안에서 제기되는 '첫 번째 기억'에 관한 문제를 가리키고 있는 것. 자서전이 거의 언제나 저 '유년기의 기억'이라는 문제와 떨어져 생각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기억이라는 것이 '경험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자서전의 '기억'은 나에게 복원과 재구성의 문제, 곧 자서전 안에서의 허구와 거짓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Jacques Derrida, De la grammatologie, Paris: Minuit(coll. "Critique"), 1967.

20) 앞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듯이, 루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원'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부재, 더 정확하게는 바로 부재하는 어머니의 '존재감'이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루소의 '음성중심주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백록』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를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순간, 루소는 에크리튀르(écriture)로의 이행을 어떤 특정한 부재를 통해, 그리고 계산된 소멸(effacement calculé)의 한 유형을 통해 음성언어(parole) 속에서 자신에게 실망한 현전의 복원(restauration)으로 기술한다. 따라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음성언어를 보존하고 회복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음성언어가 자기 자신을 내놓으면서 동시에 또한 스스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p.204(번역: 람혼).

21) 여기서 루소의 유년 시절에 있었던 독서 체험이 그의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첫 기억'으로 부상한다. 어머니가 남겨 놓은 소설들, 그 안에서 어린 장 자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따라서 르죈의 다음과 같은ㅡ비록 그것이 '음악'과 관련하여 서술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ㅡ말은 이러한 루소의 첫 경험이 어떠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자기의 목소리를 통해서 어떤 목소리에 다시 생을 부여하는 것(redonner vie à une voix à travers la sienne)."(원서 p.111, 국역본 168쪽) 이어 르죈은 또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글쓰기는 말 속에 있는 구멍을 메우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toute l'écriture est là pour combler un trou qu'il y a dans la parole)."(원서 p.111, 국역본 169쪽) 이는 루소의 저 '대리보충'에 대한 르죈만의 어법이 아니겠는가.

22) 음성언어는 현전을 약속하지만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포착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음성언어의 성격은 다시금 루소의 탄생 이야기를 환기시킨다. 어머니는 루소의 현존을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그 자신은 곧 사라져버렸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이미지는 '도처에 편재하는 부재'라고 하는 근원적인 존재 방식, 곧 목소리라고 하는 '청각적' 절대성을 지닌 이미지를 머금게 되었으나, 동시에 또한 지속적이고 물질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르죈이 말하듯, "독서의 기원은 출생, 그리고 어머니의 이미지에 연결되며, 글쓰기의 기원은 사춘기에, 그리고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짊어지는 소설적 세계로의 복귀에 연결된다."(원서 p.93, 국역본 140쪽)

23) 그리하여 여기서 내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근원을 보유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고안된 대리보충(supplément)의 형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차라리 '필요악'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음성언어에 대해서는 문자언어가, 목소리에 대해서는 책이, 그 자체로는 포착되지 않는 부재하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그것의 여러 물질적 변용들이, 그리고 세상의 구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역사들이, 각각 '충실한' 대리보충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 루소에게 있어서 이는 본질적인 현전을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탈피하고 극복해야 할 무엇이지만, 동시에 포착할 수 없는 것의 재전유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는 반대로 복권되어야 할 무엇이기도 하다.

   

Paul Ricœur, Temps et récit. Tome 1: l'intrigue et le récit historique
    Paris: Seuil(coll. "Points essais"), 1991(1983¹).
▷ 폴 리쾨르, 『 시간과 이야기 1: 줄거리와 역사 이야기 』(김한식, 이경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9.

24) 그러나 목소리의 기억은 과연 '근원적'인가. 오히려 그 목소리를 근원적이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 목소리를 '발음'하게 했던 책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이 가장 '데리다적인' 질문은 곧 자서전 텍스트가 독자에게 제기하는 '자기정당화'의 문제로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서전의 '첫 번째 기억'이란 이미 '사후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며, 그것은 항상 '현재의' 저자에 의해서 서술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루소 자신의 '역사'를 이루는 일종의 원형이 제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고백록』의 1권은 폴 리쾨르(Paul Ricœur)가 "시간 경험의 강화(intensification)"로서의 "영원성(éternité)"이라 부르고 있는 것에 해당하는 시간일 터(『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 1권, 문고판, p.22 참조), 그것은 그 이후 그로부터 뻗어나가 여러 번 반복되고 변용될 다양한 기원들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견 직선적이고 비가역적으로 보이는 역사의 순서를 '그런 형태로' 가능하게 해주는 것, 그렇게 해서 '첫 기억'을 살려내며 '있음직한 근원'의 모습을 그리게 해주는 것은 언제나 그러한 태초와 근원에 대한 현재의 대리보충이었던 것.

▷ Jacques Lacan, Encore. Le séminaire, livre XX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1975.

25) 따라서 기억과 관련하여 '근원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대리보충 안에 자리 잡게 된다. 라캉은 한 세미나에서 '주이상스(jouissance)'에 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 바 있다: "내가 '추가적인(supplémentaire)'이라고 말한 것에 여러분은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보완적인(complémentaire)'이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우리는 전체(le tout) 속으로 다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라캉, 세미나 20권, p.68) 근원으로서의 영원성은 초월로 가는 '잘못된' 길 또는 하나의 함정일 수 있다. 근원을 상정하면서 그 '완전한' 것에 대해 어떤 것이 '보완적'이라고 말하는 방식은 닫힌 동일성의 논리, 곧 쉽게 "전체 속으로" 침몰하는 논리일 것이다. 반대로, '근원'은ㅡ만약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ㅡ언제나 그것에 대한 대리보충을 통해서만, 또는 '추가적인' 어떤 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자리와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루소는 이미 문자언어를 '대리보충'으로 명명하면서 그것을 '필요악'이라 인정했을 때부터 이미 이러한 '차이'의 놀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터.

26)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유명한ㅡ또한 동시에 '악명 높은'ㅡ하나의 가설, 곧 '텍스트의 외부'가 아닐까. 그러나 외부는, 르죈도 계속해서 말하고 있듯이, 단순히 역사적으로 검증되는 '전기적 유사성'의 문제일 수 없다(원서 pp.35-41, 국역본 53-61쪽 참조). 당연한 말이지만, "동일성은 유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원서 p.35, 국역본 53쪽). 행간과 여백, 이것은 텍스트 자체로부터뿐만 아니라 흔히 '텍스트의 외부'로 불리는 저 역사적 검증의 장으로서의 '유사성'의 공간으로부터조차도 하나의 '바깥'으로 규정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외부'가 자리 잡고 있는 공간일 것이므로. 따라서 이러한 '외부'는, 자서전적 텍스트를 독해하는 데에 있어서 진실성과 속임수라는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험해보고 검토해볼 수 있는 이론적 장소이며, 그러한 실험의 방법론이 기본적으로ㅡ그 입장이 수용이든 대결이든 간에ㅡ정신분석의 주변을 맴돌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또한 무의식의 장소이기도 하다. 더불어 저자와 화자, 화자와 주인공 사이의 '동일성(들)'을 가르는 어떤 틈새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외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이 틈새 혹은 구멍은 동일성의 즉물적인 외부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동일성의 한가운데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일 테니. 그 공간, 그 장소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보이는 부분들 속으로 침투를 거듭하는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무의식에 대한 '가능한' 정의들 중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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