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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책 - 죽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책들에 대한 기록 ㅣ 지식여행자 2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언숙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고종석의 '여자들'에서 요네하라 마리의 글을 읽은 것이 구랍 중순이고,
거기서 대단한 책과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주워 듣고 집에왔더니, 마음산책에서 마침 마리 여사의 문화편력기를 보내주어서 읽었다. 내킨 김에 두툼한 '대단한 책'을 신청해서 야금거리며 읽었다.
아, 마리 여사를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 참 통탄스럽다. 진작 알았더라면 팬 레터라도 한 편 보냈을 법한 작가다. 일본 작가의 글을 우연히 제법 읽게 되는데, 이렇게 마음에 드는 작가는 드물다.
마리 여사의 글은 늘 '현상'과 '본질'의 모습을 꿰뚫는 데 서 있다.
한국 독자들이 사랑하는 많은 일본 작가들의 글이 '신선한 시선'의 경쾌한 가벼움이 느껴지는 글들이 많은 편이 아닌가 하는데, 상대적으로 마리 여사의 글은 무게가 있으면서도 재미있다.
알라딘에서 서평 도서였던 모양인데, 이제 만나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 아닐까 싶다.
관심이란 그렇게 운명처럼 오는 모양이다.
어느 모퉁이에서 만났다면, 그냥 스쳐 지났을 것처럼...
이 책의 원제목은 '우치노메사레루 요우나 스고이 혼'이다. '압도당할 만큼 대단한 책'이란 뜻인데, 그만큼 좋은 책들을 많이 읽고 소화하고 소개해주는 멋진 서평집이다. 애석한 일은, 한국의 번역 문화는 '돈 번역'이어서 얄팍한 상술 내지 학술적 가치가 없는 책들은 번역의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는 것. 그래서 그이가 소개한 책들을 국내에서 구하긴 어렵다는 것.
이노우에 히사시란 소설가가 덧붙인 해설에선,
"서평가와 책이 눈부신 접전을 벌이고 격렬하게 충돌하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식견이 탄생했을 때, 그것이 바로 좋은 서평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리 여사의 글들이 그렇기 때문에 서평의 독자들도 그 책을 읽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여사는 <통역>을 "A라는 언어와 B라는 언어 사이에 투명하게 자리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서평가>는 그 반대로 "A라는 책과 충돌해 B라는 책을 낳는다. 충돌하기 위해서는 투명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완고한 암석이 되어야 한다."고 했단다.
독서가와 서평가를 겸한 통역가.
어려서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말한마디 못하는 프라하에서 소녀 시절을 보낸 사람.
그의 삶 속에서 책은 길이었고, 빛이었으며, 해결사였고, 종교였다.
그는 러시아어를 통하여 세상을 만나고, 통역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지만,
결국 그는 책이라는 입자를 통하여 세상을 만나고 부딪히고, 소통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경쾌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그러면서도 독자를 소외시키지 않는 글을 쓰던 그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새해 벽두부터 상심의 마음을 갖게 된다.
마리 여사의 글들은 많은 잡지들에 연재한 것들을 묶은 것인데, 유고집의 특성상 중첩되는 내용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그 내용들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보면 이렇다.
1. 진실을 바로 보고, 독서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글들. 주로 정치, 사회, 역사적인 글.
- 악은 건실함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44)
-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니 속국의 지혜인 면종복배를 관철시켜야 하나... 고이즈미 수상은 진심으로 복종(72)
- 본래 미국의 속령에 불과한 일본에 외무성이 있는 것은 마치 독립국인 것처럼 국민이 착각하도록 하기 위한 액세서리와 같은 것(98)
- '비겁한' 이라는 형용사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데 자신의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당할 염려가 없는 높은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말.(77 - 테러리스트는 비겁한 자들이란 부시의 말에 수전 손택이 비판한 말)
- 바미안 석불은 '그처럼 위엄을 갖추었으면서도 이 끝없는 비극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느끼고 수치스러워 스스로 무너져 내렸던 것' , 부처의 청빈과 안녕 철학은 밥을 찾는 국민 앞에 너무나 부끄러워 용기를 내어 부서져 버렸다는 것. (84 - 모흐센 마흐말바프, 아프가니스탄의 불상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치욕에 견디다 못해 무너져 내린 것)
- 남경전, 봉인되었던 기억을 꺼내다 : 전 병사 102인의 증언(127) 이 책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
- 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걸린 병은 무시무시한 공포다. ... 유일하게 숨통이 트인 곳은 저자가 감탄해 마지 않는 북한 서민들의 다정함과 선량함이다.(137)
- 이라크에서 노인, 여자, 아이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치고 있다.(146 - 그러면 남자들은 괜찮다는 걸까? 괜한 시비. 남보원에 고발하고 싶다. ^^)
- 일본에서 건강증진법이 시행되어 금연 구역이 대단한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담배는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피웠지만, 폐암이 급증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과연 담배가 폐암의 주된 요인일까? 1950년대 도쿄의 폐암 발생률은 런던의 100분의 1이었다. ... 급속한 증가의 원인은 대기오염임이 틀림없다. 자동차한테는 뭐라고 하지 않으면서 담배만 나쁘다고...(197) 그렇다면 누가 언제 담배를 폐암의 요인이라고 규정한 것일까? 그들은 바로 다름 아닌 나치의 역학자들이었다. ㅠㅜ
- 참사 현장의 발생지 : 과거 사건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교외의 신개발지. 인간이 공동체에서도 과거의 기억에서도 분리되어 가는 과정이 소비사회화가 진행되는 전 세계의 흐름인 이상, 잔인한 사건은 이윽고 분명 역사를 망각해 가는 세계의 우울한 선단(?)(211)
- 세계는, 특히 유럽도 일본도 미국이 없어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역으로 미국은 세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자각하기 시작했다.(215)
-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눈을 감으면 그 존재의 내적 역사는 썩기 시작하며, 과거에 대한 탐구를 멈추면 그 존재의 오늘, 그리고 내일을 주시하는 눈은 그 빛을 잃고 만다.(485, 아키노 유타카, 위장 동맹 에서)
2. 러시아 번역가로서의 경험, 프라하의 소녀시대에서 우러난 글들. 유고, 체첸 등에 대한 애정.
- 체첸 : 인구 70-100만 명, 10만 러시아군 주둔, 20만 넘는 시민이 살육됨. 체첸과 관련된 보도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움.
-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 여사의 눈이 '사법적 해부'를 하는 임상의의 눈이라면, 벚꽃가지(프세볼로트 오프친니코프)의 저자의 눈에는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따뜻한 호의가 느껴진다고 지적(465)
- 인간이 고국을 떠나도 언제나 고국과 이어져 있는 이유 : 인간을 고향과 잇는 실은 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위대한 문화, 웅대한 국민, 자부심 높은 역사, 그러나 고향에서 뻗어나온 가장 튼튼한 실은 영혼으로 이어져 있다. 아니, 다시 말해, 위장으로 이어져 있다. 이것은 이미 실이라기보다는 그문, 딴딴한 밧줄이다.(502, 피요트라 바이리, 망명 러시아 요리)
- 유목민은 악당으로 기록되어왔는데, 사실 유목민 쪽에도 그들의 입장이 있다. 그들에게 생산이란 초원을 푸르름 그대로 두는 것이며, 그것을 황토색으로 만드는 것은 때로 사활이 달린 중대한 문제. 몇 백 년 전부터 이들이 겨울을 났던 초원이 어느 날 동물들을 이끌고 돌아와 보니 황토색으로 변해 있었고... 이렇게 전쟁이 시작된다.(548, 러시아에 관해서)
3. 암 환자로서 건강에 대한 관심.
- 암에 걸려도 그 전과 그 후의 나 자신을 관통하는 분명한 선이 있다.그것이 분명 바로 나를 나답게 하는 생명선인 것. 재발하면 어떤가. 재발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가 나이기 위한 한 줄기 선은 꼭 지키고 싶다.
- 산다는 것은 일상의 영위와 발견(576, 기시모토 요코, 암에서 시작되다)
- 암의 축소보다도 생명 연장, 그보다도 고통 없는 질 높은 생활을, 곤도 이론의 근간을 관통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인간관, 인생관.
치료법이 없었던 옛날에는 위와 자궁의 암이 많았고, 사람들이 노쇠해져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 인간의 몸은 태곳적부터 암과 함께해 왔으므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미 알고 있다. 암은 인간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장치엔데 모두가 암의 조기 발견과 조기 치료를 부르짖는 것은 의료업계가 실적을 올리려는 목적 때문이다.
암세포는 유전자의 변이로 정상 세포가 변화한 것으로 결코 非자기도 이물질도 아니므로 암세포를 림프구가 비자기로 인식하여 배척하기를 바라는 것은 출발부터 무리가 있다.(630)
4. 독서가로서의 즐거움
- 빨리 걷거나 먹는 일은 상대방과 속도를 맞추어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해 잔소리 들었으나, 책읽는 읽은 아무리 빨리 읽어도 옆에서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다. ... 입시 이후 20년 동안 하루 평균 일곱 권을 읽고 있다...(357) 헐~ 대식가 대신 대독가 大讀家다.
- 공기와 같은 문체. 달리 형용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마지막 339쪽의 마침표까지 전부 읽는 데 1시간 남짓 걸렸다. (403, 버니스 루벤스, 얼굴 없는 소녀) 음, 대단한 속독가다.
5. 동물에 대한 관심...
- 인간에게 길들여진 개와 달리, "고양이들은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한 그날부터" 스스로 자신을 길들여 왔다.(378) - 아, 상큼한 독서~
- 어쨌든 계산된 무관심, 결코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지 않는 처세술, 사랑받아도 길들여지지 않는 자립심. - 인간이 고양이에게 끌리는 이유. 이것이야 말로 완전히 길들여져 자신들의 문명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고 싶다고 바라는 성향 아닌가?(고양이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책, 407)
''''''''''''''''' 오타 또는 시빗거리
207. 긴장김... 긴장감의 오타
211. 선단(先端)...이란 말은 한국어에서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첨단이나 끄트머리, 가장자리... 등으로 번역해야할 듯.
321. 자궁을 제공하고... 제거하고
443. 환골탈퇴... 환골탈태 換骨脫胎
510. 메부리코... 매부리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