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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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5

 

"무지를 뿌리 뽑으려면 사람들의 지식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P24)"

 

위 문장만큼 이 작품이 지닌 존재적 가치를 더 나아가서는 독서의 중요성을 가장 잘 설명한

문구는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처음에는 단순히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정확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순한 계도용’(?) 작품내지는 저자가 다방면에 걸쳐 상당히

똑똑하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책을 집필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접근했는데, 읽을수록 작품이 갖는 의미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주어진 자료나 현상을 보고 그 속에 담긴 있는 의미를 판단하고, ‘해석하는 방식

대해 혹은 자료가 던져주는 일반화된 오류에 대한 방지법 내지는 그 자료가 함의하고 있는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파악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 기업에서 품질관리를 경험해 봤던 본인은 여러 품질관리 기법을 통해 또 Q-COST 등과 같은 기법을 통해 회사나 생산된 제품이 안고 있지만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문제점 파악을 연구해 보고는 했으나 당시 주어진 기법 자체가 대체적으로 자료의 일차원적인 접근은 가능했지만 작품과 같은 관점과 시각을 제시해 주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해당 작품은 '품질관리'와 '마케팅 분야' 등과 같이 어떤 특정 분야에 국한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빅 데이터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경험하고 활용할 수 밖에 없는 정보의 세상에서 강자로 서기 위해서는 한 번쯤은 읽고 활용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무엇이 허위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리는 정보의 홍수속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한번쯤은 읽고, 느끼며 실무에 적용해 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하며 본 작품이 지금도 국가, 사회적으로 문제지만 가짜 뉴스가 판을 쳤던 지난 2019년도에 우리 사회에서 관심을 끄는 우수한 작품 서점가 랭킹 순위로 보았을 때 - 중 하나였었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진실 추구에 목말라하는 모든 이들이 아직 우리 사회에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순간이어서 나름 의미 있는 작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한 때는 드라마로, 어떤 때는 스포츠와 예능 프로로 삶에 지친 국민들에게 희망과 함께 즐거움을 주었던 '만나면 좋은 친구'의 방송용 로고로만 들어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가슴을 설레게 했던

모 공중파 방송.

작금에는 세간의 이슈 중심에 항상 선두자리를 내달리고 있다.

통수권자에게 질문하나 묵직하게 내 던졌다. 열혈 추종자들과 알아서 기는 하수인들로부터

더 이상의 모멸감을 받기 싫다고 스스로 방송을 접어버린 어떤 방송과는 달리 연일 이슈의

중심에 서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그들에게 경의를 표할 뿐이다.

자신들은 언제나 약자 편에서 뛰고 있고, 사회 정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외치고 있는 그들,

정말 그렇다면 그들은 언론인으로서 초심을 되찾기 위해 진지하게 해당 작품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 본다.

내가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듯이 5만원권이 발행되던 날 그들의 메인 뉴스 앵커의 멘트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그 방송을 보지를 않고 있다. - 궁금하신 분들은 5만원이 처음 나오던 날

각 방송 메인 뉴스 앵커의 멘트를 들어보시라. 나는 특정 이념이나 원칙에 경도된 사람이 아닌

우리 주변에 감춰진 진실만을 알고 싶어하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그런 범부(凡夫)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존중하는 방송의 자세를 

그들 스스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작금 연이어 터지고 있는 그들의 추문을 보면서 나는 당시 내린 나의 결정이 훌륭했음을 스스로 자평하고 있다. 작품 301쪽을 보면 

"언론인이 세계를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유와 언론 시스템의 어떤 요소가 그들로 하여금 왜곡되고 과도하게 극적인 뉴스를 내보내게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는 문구를 읽으면서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은 하나 그래도 한 번 저버린 마음은 쉽게 돌아서지를 않고 있다

 

작품의 서평으로 들어가기 전에 작품을 읽으며 가끔 언론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이슈 중 생리대문제를 갖고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일반화의 오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리대가 뭐? 무슨 문제가 있지? 등으로 무관심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는데,

- 여기서는 자료의 이면에 숨겨진 마케팅적 요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한다 -

남자가 웬 생리대? 내가 변태라 그런가?

 

인구 출생률이 떨어지고 있으며 여성은 출산 후 2년간 생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 작품에서

그랬다

외견상의 문제는 출생률 감소에 따른 인구 문제이지만 출생률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임신이 가능한 여성이 적어져 그럴 수 있다는 이유와 함께 정상적인 가임 가능 여성이 성스러운 임신을 거부해 출생률이 떨어진다는 주장을 하면서 임신을 외면하면 그 여성은 어찌되었던 생리를 할 것이 아닌가? 더 이상의 장황한 설명은 필요치 않다. 뒤집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출생률 저하 문제의 이면에는 생리대 산업의 보이지 않는 성장 잠재력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짚어주는 짧은 대목이었지만 나는 이 사례를 통해 자료를 다층적, 다각적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를 크게 느낀 순간이었다. 작품은 이런 식의 전개와 주장을 하고 있다.

 

아무튼 저자가 자료를 접했을 때 사람들이 자주하는 실수와 이를 극복하는 방안 10가지 사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름 정신을 집중하여 정리해 보았다

 

[간극 본능]

- '가난한 개발 도상국'이라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75%에 이르는 대다수 사람이 중간 소득 국가에 산다.(P47)

- 가장 흔하게 범하는 오류가 데이터를 근본으로 왜곡한 간극 본능(P61)

따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실 충실성에 입각하여

1) 평균 비교를 조심하라

   2) 극단 비교를 조심하라

   3)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각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부정 본능]

-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주목하는 성향을 부정 본능이라 한다.(P 75)

- 부정 본능의 세가지 이유 1) 과거를 잘못 기억, 2) 언론과 활동가들이 사건을 선별적으로 보도,

  3) 상황이 나쁜데 세상이 좋아진다고 이야기하면 냉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 부정 본능 억제방법은 '나쁘지만 나아진다'(상황이 나쁠 수도 있고 동시에 좋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는 생각과 '나쁜 뉴스를 예상하라''역사를 검열하지 마라'는 사고이다.(P104)

- 부정 본능을 억제하려면(P107)

   1) 상황이 나쁠 수도 있고 동시에 좋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

    2) 좋은 소식은 뉴스가 안 된다

    3) 점진적 개선은 뉴스가 안 된다

    4) 뉴스에 많이 나온다고 해서 고통이 큰 것은 아니다

    5) 장미빛 과거를 조심하라 

 

[직선 본능]

- 인구 성장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하게 증명된 방법은 극빈층을 없애고, 교육과 피임을 비롯해 더

나은 삶을 제공하는 것(P131)

-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든 소득이 2배 증가면 여지 없이 삶이 달라진다.(P141)

- 직선 본능을 억제하려면 세상에는 다양한 곡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P142)

 

[공포 본능]

- 오늘날 자연재해 사망이 크게 줄어든 이유는 자연이 변해서가 아니라 다수가 더 이상 1단계의

삶에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P154)

- 공포는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게 하고 실제로 매우 위험한

것은 외면하도록 한다방사능 사고로 인한 지역에서의 사망자를 보면 방사능에 의한 사망보다

방사능 공포에 의한 사망률이 높다.(P163~167)

- 공포 본능을 억제하려면 위험성을 계산해 보아라.(P174)

 

[크기 본능]

- 사람들은 비율을 왜곡해 사실을 실제보다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언론의 경우 주어진 

   사건, 사실, 수치를 실제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언론인의 직업적 의무에 

   가깝다.(P183)

- 아동의 생존율 증가의 절반은 엄마의 탈문맹에서 나온다.(P184)

- 비율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비교나누기를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P185)

 

[일반화 본능]

- 사업 계획을 전략적으로 세우는 사람이라면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미래의 고객을

찾아야 한다.(P213)

- 비교 불가능한 여러 집단을 일반화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며, 우리 논리에 숨은 광범위한

일반화를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P231)

- 일반화의 본능 억제하기 위해서는(P232)

   1) 집단 내 차이점을 찾아라     2) 집단 간 유사점을 찾아라     3) 집단 간 차이점을 찾아라

   4) 다수에 주의하라               5) 생생한 사례에 주의하라      6)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겸손한 자세로 사고하라

 

[운명 본능]

- 운명 본능을 억제하려면 더딘 변화도 변화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늘 새로운 데이터를

받아들이면서 지식을 신선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라(P257)

 

[단일 관점 본능]

- 훌륭한 지식은 해결책을 찾는 전문가의 능력을 방해할 수 있다. 여러 해법이 모두 그 나름대로 특정 문제를 훌륭히 해결할 수 있겠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해법은 없다.

따라서 세계를 다양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P273)

 

[비난 본능]

-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특징이 있다.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 보다는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P295)

- 비난 게임을 하다 보면 우리에겐 내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해 줄 나쁜 사람을 찾는 경향이

있다.(P296)

- 언론인이 세계를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유와 언론 시스템의 어떤 요소가 그들로 하여금

왜곡되고 과도하게 극적인 뉴스를 내보내게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P301)

- 비난 본능을 억제하려면 먼저 희생양을 찾으려는 생각을 버리고(P316)

  1) 악당을 찾지 말고 원인을 찾으며         2) 영웅을 찾지 말고 시스템을 찾아라 

 

[다급함 본능]

- 인간은 불충분한 정보로 빠르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후손이다.(P325)

- 두려움에 다급함이 더해지면 어리석고 극적인 결정을 내려,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이

생긴다.(P328)

- 두려움과 다급함이 아닌 데이터와 냉철한 분석에서 나온 행동을 하라(P330)

- 데이터는 절대적인 열쇠다. 진실을 말하는 데 사용해야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행동을

촉구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P337)

 

[사실 충실성 실천하기] ---- 우리의 절대적인 문제들

- 우리는 아이들에게 사실에 근거한 사고의 기본 틀을 가르치고, 사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법을 훈련시켜야 한다.(P355)

 

[사실에 근거한 경험 법칙]

1. 간극 : 다수를 보라                    2. 부정 : 나쁜 소식을 예상하라

3. 직선 : 선은 굽을 수도 있다          4. 공포 : 위험성을 계산하라   

5. 크기 : 비율을 고려하라               6. 일반화 : 범주에 의문을 가져라 

7. 운명 : 느린 변화도 변화다            8. 단일 관점 : 도구 상자를 챙겨라  

9. 비난 : 손가락질을 자제하라         10. 다급함 : 하나씩 차근차근 행동하라


아무튼 작품의 연장선상에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정대협 문제와 

관련된 어느 개인의 진실 공방 문제라든가, 일본은 영원한 우리의 몽니로 존재할 것인가, 안다만 상공에서 폭파된 대한항공기는 어떤 공작에 의한 것인가, 중국은 언제까지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할까?, 선거 개표부정은 정말 있었는가를 확인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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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해석 -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 / 김영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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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 3


작품은 저자의 지명도나 선전에도 불구하고 그리 빼어난 수작은 아니었다.

심리학이나 범죄학을 연구하시는 분들께서는 어떤 평가를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 특히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 그저그런 작품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유는 읽어보면 안다.

그러나 나 같은 평범한 일반 독자들에게 권할만한 작품이 아니기에 참으로 곤혹스런 작품이다

스파이 이야기, 술에 취한 대학생들 이야기, 교통 경찰에 적발되어 자살한 여인 이야기 각 사례별

뒷장에는 작가가 주장하는 뭔가가 있겠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뭔가를 이야기해 주겠지 하며

인내를 갖고 읽다 보니 어느새 400여쪽이 되는 작품을 다 읽었는데, 머리에 남거나 도움이 되는 

구석이 거의 없다. 굳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면

인간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에 대한 심리 디폴트는 신뢰’(?)”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능 프로를 보면 출연진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상황이 벌어지면 사회자가 출연자를 위로한다며 하는 말이 있다.

방송국 놈들이 다 그렇지요 뭐

나는 작품을 읽고 스스로를 이렇게 위로했다.

책 장사하는 놈들이 다 그렇지요 뭐

하면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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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전인적 공부법 - 조선 오백년 집권의 비밀
도현신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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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작품을 읽으며 현대인들이 왜 '역사서'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리가 잘 기술되어 있어 여기에 

옮겨 보았다.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시독관'이라는 벼슬에 있던 '유 관'이라는 인물이 주고받은 내용 중 

일부이다. (216~217)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지나간 사건을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역사의 현장에 

 있다고 가정하고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속내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알아내 진정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역사서를 가까이 해야 하는 입장에 대해 저자 역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역사 

 공부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핍박 받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중요하지 않다.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대목은 나의 공감을 백 프로 이상 불러일으킨 대목으로 내가 역사서를 읽는 진짜 이유를 

저자가 잘 소개해 주고 있어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보았다.


조선은 1392년 건국해 1910년 멸망할 때까지 518년 동안 존속했으며 천년의 '로마 제국’이나 

1299년부터 1922년까지 623년 동안 나라를 지배해 온 터키의 '오스만 제국'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장기간 존속한 왕권이다.

이런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노무색히들이 자기들이 우리를 침탈한 데 대한 

명분을 쌓고 또 우리의 무능력을 각색하기 위해 당파싸움과 왕의 무능력을 이야기하려 간혹 

우리의 조선 왕조를 폄하하고 역사적 가치를 훼손하려 지랄 발광을 하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조선 왕정이 그렇게 무능한 정권이었다면 500여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겠는가를 

주장하고 싶다.

그럼 그렇게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원동력'이 무엇인지는 여러 각도에서 분석되고, 연구

되어야 하겠지만 작품을 통해 본 바로는 왕들의 공부, 즉 부단한 '학습의 결과'였다는 생각을 

해 본다.


왕가의 공부 방식에 대해 작품을 통해 간략히 알아 보았다.

왕과 세자 모두 ‘조강’, ‘주강’, ‘석강’, ‘야대’로 이루어진 학습을 하루 4번 철저히 실시하였다고 

한다. 야간 자율학습을 왕들도 해서 인지는 몰라도 그런 전통이 아직 우리 교육계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왕의 학습을 '경연(經筵)'이라 하고, 세자의 학습을 '서연(書筵)'이라 불렀다.

서연(書筵)의 경우 교육과정은 매우 엄격하여 단순히 유교 경전만 읽지 않고 쉼 없는 토론을 

하고, 역사를 배우고 성현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은 세자로 책봉된 후 6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연에 참석했다.


* 경연(經筵)에 대하여


- 경연은 군주가 인격을 수양하고 지성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올바른 정치를 펼침

  으로써 나라를 번영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경연은 서연과 마찬가지로 하루 4번 이루어

  졌는데, 경연은 신하가 책의 한 구절을 읽은 후 뜻을 해석하고 논평을 달면, 왕이 질문을 하고 

  신하가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경연에서는 유교 경전을 풀이하는 것 이외에 중국과 조선의 역사는 물론이고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다루었는데, 국조보감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치적 중 귀감이 될만한 내용을 모아 

  세종 때 편찬하였다. 경연에서 가장 많이 다루었던 문제는 현실 즉, 민초들의 문제였다고 한다.


- 술시(戌時, 19~21)가 되면 '석강'에 참석하게 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왕은 '석강'이 끝나야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음식을 먹고 '석강'에 임하게 되면 몸에 부담이 가고 머리가 무거워 혹시 학습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까 해서라고 한다.


* 서연(書筵)에 대하여


- 세자가 정해지거나 후보가 되면 곧바로 종2품을 수장으로 하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보양청(輔養廳)'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원손을 양육하는 보모는 종1품이라는 높은 

  벼슬과 함께 '봉보부인' 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보양청에서는 양육만이 아니라 어린 원손에게 교육도 가르쳤다. 원손의 나이가 2~3세에

  불과해도 보통 5~10일에 1회씩 사(), (), 빈객(賓客) 등이 돌아가면서 왕실의 예법은 물론 

  왕가의 법도에 대해 가르쳤다고 한다.

  원자가 5세가 되면 보양청이 '강학청(講學廳)'으로 바뀌는데 매일 아침, , 저녁 등 하루 3번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1회 수업은 3(, 45) 정도였다.


- 서연에 참석한 세자는 일종의 시험인 ‘회강(會講)’을 정기적으로 치러야 했는데 역대 왕 중 

  이를 가장 성실히 수행한 왕은 '정조'라고 하며 회강의 결과는 통(), (), (), (

  4단계로 매겨졌다고 한다.


- 서연은 세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교양과 지식을 습득하게 하여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군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서연에서 이루어지는 지식 교육은 유교의 경전과 

  역사가 중심이었고, 선현의 높은 학식을 책을 통해 익히는 것을 우선 하였다

  서연의 두드러진 특징은 지식을 암기하고 외우는 주입식 교육을 넘어서는 또 다른 방법의 

  교육과 공부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대화와 문답법 공부를 채택했다.


- 학문 증진과 병행해 태종은 체력 훈련의 일환으로 '세자 시사관(侍射官)을 만들어 세자의 

  체력을 증진시키도록 했는데, 이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세자를 모시고 활쏘기 만을 전문적으로 

  연습하도록 했다고 한다.


* 종학(宗學)에 대하여


- 조선 시대에는 왕족들은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국가로부터 녹봉이 지급되었기에 

  생활이 그리 빈한하지 않았던 반면,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거 시험에 맘대로 응시하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세자로 책봉된 적장자 이외의 다른 왕족들(왕가의 딸들과 결혼한 사위들도 동일하다)

  공부를 많이 하거나 영특한 자가 나타나게 되면 자신은 가만히 있으려 해도 주변에서 그런 

  왕족을 부추겨 왕권에 도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왕족들의 학습을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왕권에 위협적 요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관직에 나가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고 한다

  성종 당시, 왕족 중에서 학습적으로 우수한 자를 골라 벼슬을 주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극렬히 

  반대하여 궁궐에 발을 들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 왕족들이 무위도식하며 무식하게 살아가는 게 가슴 아팠던 세종대왕은 왕족을 위한 

  별도의 교육 기관인 ‘종학(宗學)’을 세워 15세 이상, 50세 이하의 남자 왕족들의 학문을 익히게 

  하였으나, 왕족이라는 이유로 왕족을 가르치는 스승으로부터 제대로 제재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은 직접 왕족들의 성적을 챙겨 상과 함께 벌도 내리고는 했다고 한다.


- 조선시대 왕족은 수()자가 들어간 작위를 받았다.

  기생 황진이 시에도 언급되고 있는 '벽계수'도 왕족 중 한 사람이다.


기타 지식들

- 대체적으로 왕들은 짧으면 4시간에서 길면 8시간 정도 잠을 잤다고 한다.


- '격구'는 이란에서 생겨나 당나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데 다른 말로 

  '타구(打毬)'라고도 한다.


- 조선의 선비들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에 전념한 이유는 유학은 대단히 현실적인 학문으로 

  유학을 창시한 공자도 '살아 있을 때의 일도 잘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기이한 힘과 잡된 귀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 고 할 정도로 유학은 현실적인 학문이며 

  유학자들은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반면에 '불교'는 유학과 달랐다.

현실 세계에서 부딪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어떤 답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성종 시절의 '음흉한 신하'는 임사홍을 가르킨다.


- 임금이 내리는 시상 내용 중 ‘휼전()’이 있는데, 이는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가 죽었을 때 

  그 가족들에게 보상으로 내리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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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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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9


지난 2010년은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우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욕의 역사 한 페이지를 기록

하게 한 100년이 되는 그런 해였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경술국치"를 단순히 친일파들에 의해 일본에 나라를 팔아 먹은 날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지, 그런 사건이 왜 생겼고, 그 때 우리의 위정자들은 무엇을 했으며, 우리에게는 진정 문제가 

없었는지 등에 대한 자기반성은 철저히 외면한 채 모든 것이 '다 네 탓이다!'라는 자세로 우리의 굴욕사를 

해석해 왔고 자위해 왔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당시를 반성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고 있는 가운데 본 작품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조선의 망국사에 대해 개인적으로 여러 의문이 있어 접하게 되었다.

망국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저자는 이런 말씀을 작품 중간(127)에 하고 있다.

 

[실패를 반성하는 자세 자체에 반성할 만한 하나의 추세가 있다.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그 원인만 아니었다면 실패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낙관적 성향이다.

특정한 원인만 없었다면 성공이 당연한 것이었다고 보는 환원주의적 관점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잘못된 일을 반성함에도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데는 특별히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반성에도 자아비판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작용한다. 반성에 인색한 자세는 실패를 

극복하지 못한 자세이기도 하다. 실패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은 과거의 허물을 부끄러워는 할지언정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투철한 반성은 실패 극복의 조건이면서 또한 극복의 증거이도 한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서 전통은 자산이면서 부채이기도 한 것이다. 부채의 측면이 부담스러워서 전통을 

부정하는 사회는 스스로 종속 변수의 위치를 찾아 주변적 존재가 된다. 부채의 측면도 기꺼이 짊어지고 

앞길을 찾아 나가는 사회가 역사의 주체가 된다.]

 

아마도 상기의 글은 본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을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치욕적 역사적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문외한들에게 많은 관점과 지식 그리고 시대적 흐름에 대한 

이해를 제고시켜 주고 있는데 단원 하나하나가 무슨 역사 논문인 듯한 착각이 들게 하였으나,

일부 대목에 있어서는 자칫 저자가 친일, 친미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느낌과 함께 조선 왕조 최고의 비운의 

임금으로 평가되고 있는 [고종]에 대한 과한 폄하성 발언은 사건의 사실 여부를 떠나 내게는 그렇게 개운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작품을 다 읽은 지금, 수 백 년에 걸쳐 융성해 왔던 한반도의 마지막 왕조인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첫째, 임진왜란으로 인해 기본적인 국가 기강이 와해 되었고

둘째, 한반도를 둘러 싼 주변 국가들의 급진적인 변화에 둔감하였으며

셋째, 변화를 거부하고 외면한 기득권 세력의 짧은 안목

등의 요소가 시대적, 환경적 요인과 어우러져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작품 후반부에 저자께서는 강력하게 [고종]의 근시안적이고도 치졸한 행태에 대해 힐난을 하고 있는데

나는 솔직히 저자의 그런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다.

[고종]을 현대 지도자적 자질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절대적으로 결함도 많고 좀 부족한 임금일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국가를 그렇게 내 팽게치는 수준으로 관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역사는 어디를 보아도 임금이 권좌에 오른 순간부터 최고의 사부를 붙여서 왕의 신분에 걸 맞는 교육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책임지도록 성군이 되는 교육을 했으면 했지 임금이 사리사욕을 채우도록 교육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고종]을 거의 시정 잡배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반론의 증거가 바로 [고종] 자신이 주도했던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

저자가 주장하시는 그런 수준의 임금이었다면 차라리 일본이나 러시아 등 기타 열강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받치고 안락한 노후를 보장 받았을 것이다


작품을 읽으며 [고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기득권 세력인 외척들이 활개치는 조정에서 좀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고 고르고 고른 마누라 일파가 오히려 

더 난리를 치니 속이 뒤집어 졌을 것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외척들의 온갖 비리에 대해 정보를 얻었으나 

더 이상 [고종]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궁궐 내에는 여러 권력들이 얽히고 설킨 채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고종] 혼자만의 힘으로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고종]은 자신과 나라가 처한 상황에 몹시 힘들었을 것이고 애틋한 부부간의 정도 남아 

있지 않았음은 물론 마누라도 싫었을 것이다. 그러다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마누라(민비)가 죽자, 그간 마음에 두고 있던 상궁을 곁에 두고 조금이라도 안위를 받으며 생활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종]은 한 사람의 개인이기 이전에 나라의 얼굴이라는 생각에서 스스로 이를 타파할 자구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서구의 개화문명을 들고 들어오는 세력에 맞서 신 문물을 조금이라도 배웠음직한 인력을 과거를 

통해서 뽑지 않고 인물 천거 방식으로 뽑아서 신문명 세력들과 대응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기득권들의 천거에 의해 신규 인력들이 궁궐에 들어와 보니 [고종] '지는 해'요 서양 열강과 기득권은 

'뜨는 해'라는 것쯤은 금방 파악하였을 것이고,

천거된 인력들은 기득권층과 이해관계로 뭉쳤을 것이다

[고종]에게 힘이 되어 달라고 뽑아 놓은 놈들을 중용해 보니 외국 편이 되어 헛소리만 삑삑거리기만 하고 

도대체 도움이 되지를 않고 오히려 기득권층에 달라 붙어 호가 호위하는 모습에 정말로 역겨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고종]은 정말 답답했을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줄 집단과 후원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망연 자실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권위가, 지시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또 사사건건 제약을 거는 집단을 향해 경고의 

의미로 국가를 상징하는 '옥쇄'도 내 던졌던 것이다. 그것도 안 통하자 [고종] 최후의 수단으로 세상과 

주변의 인맥들과 싸우기 보다는 그들 속에서 우선 살아 남아야겠다는 선택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종]의 주위에 있던 일단의 무리들은 [고종]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과 술수에 능한 놈들이 나타나 [고종]을 

돕는 척하고 온갖 교설을 부려 [고종]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였을 것이다

어느 날 야비한 기득권 층 속에서 살아 보겠다고 비굴하게 변한 자신을 돌아 본 [고종] 이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자성 속에 정면 돌파를 추진하게 된다.

그래서 [고종]은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의 열강들에게 진정으로 도와 줄 것을 요청하며 '헤이그'에 밀사까지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나 열강들은 아시아의 소국인 조선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만주로의 진출을 

꿈꾸던 러시아와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일본에 의해 망국의 길로 접어 들고 만다.

 (작품을 근간으로 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 식으로 정리한 것임)

 

저자께서 작품을 쓰실 때 모든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작품을 쓰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몇 가지의 사실과 증거를 갖고 '그럴 것이다'라는 주장을 포함해 유추한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몇몇 사항에서 왕으로서의 행동답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종]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 솔직히 기분이 별로 

안 좋다. – 나는 이씨도, 왕가의 자손도 아닌 그냥 단순한 평민 출신의 후손임 -

 

그렇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계백 장군'께는 정말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인터넷 어디를 뒤져도 계백 장군의 출생년도 및 살아 생전의 

공과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는데 '황산벌 전투'만 갖고 현대적 '명랑화' -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를 읽은

분들은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 를 너무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계백 장군이 전장에 출전하기 전에

행한 행동과 관창에게 보여 준 행동을 임의적으로 해석해서 나도 이런 이야기를 꾸며 보았다.

 

황산벌 싸움에 나서기 직전 계백장군이 자신의 가족을 도륙 했는데 사실은 계백 장군 역시 당시 의자왕에 버금가는 바람둥이였다고 한다. 백제가 멸망하면 자신의 부인이 다른 놈의 처첩으로 가는 게 싫어서 부인을 

죽이고 전쟁터로 나갔는데, 첫 전투에서 부하들이 생포해 온라의 젊은 군사(관창)를 조사하다 보니 목에 

걸고 있던 '옥 구슬'이 자신이 한 창 젊은 시절래 신라로 넘어 가 놀 때 어느 젊은 처자와 짧은 사랑을 

나누고 올 때 주었던 사랑의 증표임을 알고는 당시 그 여인을 생각해 그 놈을 풀어 주었다

이 놈은 자신이 왜 풀려 나는지 영문도 모른 채 풀려 났다가 전후 사정을 들은 자신의 사령관에게 작살나게 

혼난 후 '너 여기서 맞아 죽을래 싸우다 죽을래'라는 협박에 못 이겨 계백의 진영에 재차 진격했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어떤가?

계백의 가족 살해 현장에, 관창과의 전투 현장에 없었던 입장에서는 당시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몇몇 가지의 정황을 가지고 모든 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종]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채, 역사적 몇몇 사실만을 갖고 해당되는 사람과 사건에 대해 일방적

평가를 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도 한 나라의 임금을 말이다.

 

분명 [고종]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는 여러 군데 있었다.

그 실수를 악용해 결정타를 날린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을사 오적'이었고 '시대적 상황' 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이 한 권의 작품으로 우리 조선의 흥망사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소견이다 시간을 두고두고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역사적 진실이기 때문에 심층적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고종]만이 나빴다는 이야기는 비록 역사에 문외한이고 이씨 조선 문중과 전혀 관계

없는 나이지만 좀 받아 들이기가 어려워 이렇게 강변 아닌 강변을 저자께 드려 보는 바이다.

 

어쨌든 작품으로 돌아 와서 '조선 망국사'의 배경을 논하기 전에 또 그 원인을 이야기하기 전에 동 시대 

주변국의 상황을 간략하게 나마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일부 내용은 축약해서 또 일부 내용은 

2~3개 단원을 묶어서 여기에 내용을 요약해 본다.

 

[중국의 상황]

- 15세기 말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16세기 초 인도양과 남 중국해까지 유럽인의 항해 활동이 

  확장된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런 현상의 밑바탕에는 16세기 초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그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데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개혁적 측면을 대표하는 단체가 [예수회] 였는데, 1540년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새로운 사업인 '교육' '해외 선교'사업을 활발히 펼쳐 나가게 되는데

  예수회 창시자의 한 사람인 포르투칼인인 '사비에르'는 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아시아 선교 사업의 길을 

  연다. 사비에르는 아시아 선교 사업의 궁극적 무대를 중국으로 보았고 그 후계자들은 이를 이어받아 

  중국 선교를 지상 과제로 삼는데 사비에르 사후 포르투칼이 마카오에 항구적 거점을 가지게 되면서 중국 

  진출을 위한 선교사들의 전진기지가 된다.


- 1583 '마테오 리치'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중국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교회 입장에서 보면 중국 선교의 개척자였고,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과 동아시아 문명간 접촉의 

  수준을 일거에 끌어 올린 거인이었다.

  마테오 리치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서라도 지배 계층을 포섭하는 것이 궁극적 성공을 바라볼 

  길이라는 전략을 세워 사회 주류를 선교 대상으로 삼았고, 종교적 진리를방적으로 주장하기보다 

  기독교와 맺어진 유럽 문명의 훌륭한 점이 중국 지식층의 인정을 받게 하는 작업에 매진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중국에서 벌어진 아편 전쟁(1840 ~ 42)은 서세동점의 불가항력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상황]

- 명나라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을 불신해서 교역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본은 유럽인의 중개무역을 계속 

  필요로 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사상에 영향을 끼치는 기독교 선교는 용납 수 없었다.

- 1600년대 들어 일본에 모습을 나타낸 네델란드인과 영국인들이 포루투칼인의 역할을 넘겨 받게 되고 

  막부의 통제 편의를 위해 외국 무역 주체를 단일화하는 과정에서 영국의 양보로 외국과의 접촉 대상은 

  네덜란드로 단일화되면서 이후 200여 년 동안 일본의 서양인 접촉을 독점하게 된다.

-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근대화의 성공에 자부심이 넘칠 때, 란카쿠(蘭學,서양학문) 전통을 성공의 

  중요한 이유로 내세웠다.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이 1890년대 이후 격화되는 데는 만주로의 진출을 꿈꾸던 

  러시아가 일본을 거들어 준 데 그 원인이 있다.

 

[조선의 상황]


1. 어떻게 조선은 시들어 갔는가?

 - 15~16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는 유교 정치 질서가 적합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왕조 아래 한국 사회가 누린 안정과 번영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많지 않은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조선의 망국은 그 사이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느 사회의 변화에서도 전통을 등지는 개화는 '자기 부정'이라는 정체성의 질곡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개화의 성공은 바로 식민지를 향해  가는 길이다.

 

  (외교권의 난맥상)


  - 한 세기 가까이 몽골의 지배기를 거치면서 고려라는 왕조는 크게 망가졌다.

    왕조 교체를 단순히 임금의 성만 바꾸는 것으로는 안 될 정도로 망가져 나라를 새로 만들 정도의 큰 

    변화가 요구되었다. 고려가 망가진 첫 번째 이유는 안보를 원나라에 의지해 오랫동안 도외시했고 

    원나라에 더 이상 의존하지 못하게 된 '공민왕' 때에야 본격적인 개혁이 추진된 되다가 기득권의 반발로 

    좌절되고 만다.

 

  -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궁극적인 이유는 '조공 관계의 의리"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을 축으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예절의 관계에서 힘의 관계로 넘어가게 된다.

 

  (세력화된 사림)

  - 학자로서의 '송시열'의 업적은 어떠한지 몰라도,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까운 인간 관계까지 번복한 

    그의 행적을 보면 정치가로서는 극심한 파벌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의 지식층은 현재의 권력에 매몰되어 미래에 대한 준비를 너무 적게 하고 있었다


  - '훈구'와 '척신'은 왕권에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왕권과 거리를 가진 사림의 팽창은 국가의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사림 성장의 발단 요인은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지 않음' 있었다. 땅바닥에 굴러 다니던

    왕의 권위를 완전히 박살내 버린 것이 '인조'이다

    송시열는 사림의 권위가 권력으로 변질되는 단계를 대표한 인물이다.

 

  (서민의 생활)

 - 왜란 후 호구 파악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호구보다 파악이 쉬운 농지를 부과 대상으로 

   하는 대동법이 제안되었다. 대동법은 중세 체제를 벗어나는 발전의 열쇠이면서 전통적 명분의 포기라는 

   이면성을 가진 갈림길이었다. 조선 정부는 대동법조차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개항기를 맞았다.

 

 - 임진란 이후 충격에 따른 파괴를 수습해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노선이 산당(山黨)었다면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질서를 벗어나가자는 노선이 한당(漢黨)이었다. 산당의 원리주의 노선이 득세함으로써 

   조선이 적절한 발전의 길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 유교적 정치 원리는 경쟁이 격화되었던 춘추전국 시대에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국 시대까지 현실 정치에서 큰 힘을 쓰지 못하던 유교가 한나라가 안정된 후에 통치의 중심 원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제국의 질서가 경쟁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신권과 왕권의 힘겨루기)

  - 사림의 권위를 확고히 세운 이가 조광조이다.

    그가 '도학 정치'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왕권의 쇄신을 꾀하다가 '기묘사화'절된 이후 

    그의 뒤를 잇는 정치 이념 탐구는 재야 사림의 당당한 과제가 되었다. 지배 집단이 권력 투쟁에 

    매몰되면서 정치와 학문이 모두 선명성 경쟁에 매달리게 되었다. 학문에서도 실용적 경세론보다 시비에 

    집착하는 정통론이 일세를 풍미했다.


  -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림의 권위가 자라나면서도 왕의 권위를 보좌하는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왜란을 겪는 동안 왕의 권위가 급격하게 하락한 결과 광해군 때는 왕이 사림의 권위에 의존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숙종이 키운 왕권은 권위가 아닌 권력일 뿐이었고, 그 권력도 왕권의 기반을 키우는 건설적 노력이 아닌 

    신하 집단들의 이간질이라는 파괴적 노력으로 얻은 부실한 것이었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가장 

    미약한 왕권을 물려받은 임금의 하나였다. 숙종 말년에 영조 초년에 걸친 최악의 당쟁 양상은 다른 

    무엇보다 숙종이 정치를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든 탓이었다.

 

  (정조의 권도정치)

  - 세도정치의 주체가 세도가였던 것과 달리 정조의 권도정치는 왕이 주체였다.

    19세기의 권력자는 부패를 억누르려 애쓰기는커녕 권력 유지와 확대에 오히려 부패를 이용하게 되었으니 

    총체적 난국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학의 좌절)

  - 실학 형성의 배경으로 외래적 요인과 내재적 요인으로 구분해서 이야기하는데, '외래적 요인'이라면 

    청나라의 고증학이나 중국을 통해 소개된 서학에 자극 받은 측면을 이야기하고, '내재적 요인'이라면 

    조선 국내에 제반 변화, 특히 사회 경제적 여건의 변화에 의해 촉발된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 실학(수사학)의 학풍은 정통론과 명분론에 매달린 주류 성리학의 퇴행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이데올로기의 모색 노력이었다.

 

2. 어떻게 조선은 쓰러져갔는가?

  - 19세기 후반에 일본을 경유해 한국을 덮친 서양 근대문명은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한국보다 덩치가 큰 중국조차 그 위세 앞에서 1840년대 경부터는 자세가 흔들리고 1860년 경부터는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위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조선이 아무리 

    굳건한 체제를 지키고 있었더라도 정체성의 큰 훼손과 그에 따른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망국의 두 단계)

  - 천하 체계의 붕괴가 완전히 확인된 계기는 청일전쟁(1894~95)이었다

    이 체제의 붕괴는 개별 국가의 쇠퇴와 멸망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존재 양식을 청산하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공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존재 양식도 이로써 단절을 맞게 되는데

    여기에 조선 망국의 큰 의미가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것이 한 단계이고 나머지는 새로운 생태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실패 즉, 좌절이 또 다른 단계였다.

 

  (실종된 왕권)

  - 이조원의 옥사는 국왕에게 조차 세도 정치에 대항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 준 사례이다

    또한 왕실의 예법은커녕 양반다운 교육도 받지 못한 '강화도령(철종)'을 왕위에 앉힌 것은 똑똑하고 

    힘 있는 왕을 귀찮아 한 당시 세도가의 취향을 보여 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렇듯 세도 정치의 폐해가 그 정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 권력 투쟁이 정적의 목숨을 노리는 사태는 조선 전기부터 간간이 있었으나 이것이 권력 투쟁의 일반적 

    양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숙종 때의 일이었다.

 

  (대원군의 몸부림)

  - 대원군은 국가의 기본 질서를 세우기 위해 서원철폐를 감행한다 한편으로는 당시 기득권 층으로 많은 

    인재를 거느린 '안동 김씨', '풍양 조씨'에 대항하기 위해 '전주 이씨'를 종친 우대라는 명분으로 관직에 

    대거 끌어들였다. 특히 노론 명문가의 하나인 '여흥 민씨'를 외척으로 힘을 키워 주었다. 그 결과 대원군의 

    처남이면서 민비 집안으로 입양되어 민비의 오라버니가 되고 대원군 실각 후 권력을 민승호가 쥐게 된다.


  - 대원군 실패의 원인 한가 중요한 문제점이 왕이 '경연'을 하지 않은 것이다

    '경연'은 스킨 쉽을 통해 군신간의 신뢰와 충성을 강화하는 것은 부수적 효과다. 왕세자의 경우는 경연의 

    축소판인 '서연'을 군왕 교육의 중심으로 잡는다.

 

  (임오군란, 박영효, 김홍집)

  - 대원군은 민씨의 허수아비가 된 것이다. 임오군란(1892)까지 계속된 민씨 세도기에 조선 국가 체제의 

    부패는 극에 달했었다.


  - 군대를 주둔시켜 무력으로 조선 정부를 통제하고 국왕의 아버지를 황제가 심문하겠다고 데려간 것은 

    전통적 관계의 포기였다. 조선과의 '특수 관계'를 전략적 이점을 이용할 생각 , 그 특수 관계의 본질적 

    가치를 도외시한 조치였다.

    내적으로는 국왕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하는 상황이었다.


  - 박영효는 친일파 중에서도 '저질 친일파'의 행적을 남겼는데 1884년 이후 박영효의 행적 중에서 

    갑신정변보다 더 화끈한 친일 행위를 찾을 수 없다. 갑신정변은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게 된 조선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례이다.

 

  - 박영효의 행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과 조선의 관계'보다 '일본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앞웠다는 

    점이다.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달아난 박영효를 대신해 김홍집이 아관 파천 때 '친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청일 전쟁 후 갑오개혁의 진행 속에 김홍집이 친일 행적을 한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의 친일은 

    주제성 있는 친일이었다.

    즉, 청일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쫓겨 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주도권을 대세로 받아 들였다. 일본이 

    요구한 '개혁' 수행에 김홍집이 앞장 선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을미사변)

  - 1864~73년 세도 정치의 틀을 따르면서도 극단적 쇄국 정책과 함께 전례없이 강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 

    대원군 집권은 위기에 대한 첫 국가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 1891년 이후 민씨 세력 수령으로서 당대 으뜸의 탐관오리로 명성을 날린 민영준(후에 '민영휘로 개명)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민영준은 원세개의 조정을 받아 동학혁명 진압을 위한 청나라 출병을 요청을 

    주도하여고, 청일 전쟁의 도화선을 제공한 장본인으로서, 나중에는 일본 쪽에 붙어 합방 후 작위까지 

    받는다. 청일 전쟁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서 최대의 경쟁자를 물리쳤다.

  

  (왕 노릇을 거부한 고종)

  - 미국 공사 '알렌'은 "내 일찌기 구만리를 돌아다녔지만 상하 4천년에 한국 같은 이는 처음 보는 

    인종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 갑오개혁과 아관파천을 거치는 동안 조선의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정통과 관료의 비중이 계속 

    떨어져 갔다. '개화 관료'라 하여 과거를 거치지 않고 외국어나 기술을 갖고 채용된 사람들 그리고 

    왕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바치는 친위 세력의 비중이 커졌다. 왕 자신이 전통적 덕목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변화가 빠르게 일어났고, 전통적 덕목을 대치할 근대적 덕목이 갖춰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긴장이 줄어드는 '도덕적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었다.


  - 아관파천은 조선의 조정이 고종의 수준에 맞춰 하향 평준화를 이루는 결정적 계기였다.

  

3. 어떻게 조선은 사라져갔는가?

  19세기 후반 산업화의 확장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경쟁 열기가 전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승패의 

  결정적 열쇠는 근대국가의 효율성에 있었다.

  독일처럼 급조된 국가라도 근대적 효율성을 갖추면 강자가 되었고, 러시아처럼 오래된 국가라도 그러지 

  못하면 약자가 되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오래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닥쳤다

  식민지가 되었다는 '결과'보다 식민지가 되던 '과정'을 더 세심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나 지금이고 사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일차적 요인은 힘 있는 사람들의 행동양식이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극단적 정통론에 집착해 사회의 생산성과 건강을 해친 것이 바로  '독단' '독선

  때문이었으며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고종의 인품에 관한 것으로 고종은 술수와 책략에 사족을 못쓰는 

  임금으로 평가하고 있다.

 

  (외세 줄 서기)

  -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부가 전복되고 중요 인물 몇이 살해 당한 후 고종의 자의적 통치를 견제할 수 있는 

    국내 정치의 매커니즘이 사라졌다. 고종의 절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은 외세뿐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개인적인 야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독립협회를 이용했다가 나중에는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 대한제국의 건립은 권력 사유화의 절정이었다.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궁내부가 비대해진 것이 그 단적인 징표였다.

 

  (중국과 일본의 행보)

  - 중국은 1840년에 서양 열강으로부터 본토 침략을 당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개항 6년 후인 1882년부터 

    외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에는 그처럼 강한 외세의 작용이 없었다

    특히 개항에서 유신에 이르는 14년간 일본은 거의 아무런 외부 위협을 겪지았다. 또 한가지 일본이 

    개화에 유리했던 점은 중국과 조선 같은 중앙집권 체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내는 

    혼란스러운 과정에 외세의 과도한 작용이 없었던 것이 일본 성공의 결정적 조건이었다.

 

  (의병의 출현)

  - 순수한 농민들의 봉기는 '의병'보다는 '민란'이나 '농민 항쟁'으로 규정되기 쉽다

    지도층이 주도하는 항쟁이라야 '의병'으로서의 명분을 명확히 표현하고 또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병이란 위기에 처한 체제 지도층의 대응 방식이다.


  - 우리 사회에서 의병의 역사적 의미가 충분이 인식되지 못하는 이유 

    첫째, 의병의 존재가 국면 전개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했고 

    둘째 의병 운동의 위정척사 사상이 시대 변화의 방향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

 

  (고종의 마지막 짝사랑 러시아)

  - 만주에서 러시아가 약간의 우선권을 가지는 대신 조선은 완전히 일본에게 맡긴다는 '신사 협정' 1896 

    2월 아관파천 당시 일본 정부에서도 러시아 정부에서도 양국 간의 절충점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 고종의 대한제국은 중립화를 통해 일본의 야욕을 봉쇄한다는 환상을 오랫동안 추구했다

    그 환상을 실현시켜줄 주체로 어느 나라보다 러시아를 쳐다 봤다. 본에게 요긴한 한국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대신 만주에서 일본의 양보를 얻는 것이 대한 제국에 얽매이는 것보다 러시아의 국익에 더 

    유리한 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은 고종의 개인적 환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 타)

  - 일본이 짧은 시간 내에 열강의 대열에 올라 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데 유리한 

    위치 덕분이었다. 중국 침략은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자라나기 위한 필연의 길이었다

  

  -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와 미국에 의지해 일본의 영향력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려 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을미사변이, 다시 이에 대한 반발로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는 고종의 노력에 주권 수호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권 수호를 하더라도 합당한 방법이 있고 그렇지 못한 방법이 있다. 전형적인 고종의 수법 

    한 가지는 의정부 대신들을 자주 갈아 치우는 것이었다. 본은 대한제국의 정책 결정이 황제가 아닌 

    의정부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질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대신을 자주 바꿈으로써 의정부의 활동이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신들이 자기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 왕조로서의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고 국가가 망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의 하나가 권력의 사유화다.

 

책 속에서 읽는 상식들

- 향초(herb)는 원재료를 거의 그대로 쓰는 것인데, 향료는 재료를 말려서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가루로 빻아 쓰는 것이 보통이다.


-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의사 한 명을 '데지마'에 배치해는데, 이 의사가 일본 란카쿠(蘭學)의 촉매가 되었다.

  란카쿠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은 2년간 체류했던 '카스파르 샴배르거'이며 큰 열매를 맺은 사람은 '필리프 

  폰 지볼트'이다


- 천하 체계를 가르켜 '사대주의'라는 말이 많이 쓰여 왔는데, 이것은 천하 체제의 전복을 꾀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천하 체제의 한 측면만을 악의적으로 폄훼한 것이다

  '사대(事大)'는 약소국이 강대국을 대하는 원리로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대하는 '자소(字小)'의 원리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맹자] '양혜왕 편'에 그 원리가 설명되어 있다.

  【 인()이 아니고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섬길 수 없나니, 그런 까닭으로 탕임금이 갈() 섬기고.....

    (중략).....큰 것이 작은 것을 섬김은 하늘을 기쁘게 함이요,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은 하늘을     

    두려워함이니, 하늘을 기쁘게 하면 지킬 것이요, 하늘을 두려워하면 나라를 지킬 것입니다】


-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가장 큰 이견은 조공 빈도에 있었다. 3년에 한 번씩 오라고 명나라에서는 거듭거듭 

  일렀지만 조선에서는 1년에 세 번씩 가겠다고 뻗댔다. 결국 1410년부터 1년에 세 차례 조공이 상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궁극적인 이유는 '조공 관계의 의리"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을 축으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예절의 관계에서 힘의 관계로 넘어가게 된다.

 

- 임진란 이후 충격에 따른 파괴를 수습해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노선이 산당(山黨)이었다면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질서를 벗어나가자는 노선이 한당(漢黨)이었다


- 유원형, 이익에서 후기 실학의 태두 정약용이 이르는 학통은 실학 발전의 가장 두드러진 흐름이었다

  이을호는 이들의 학품을 수사학(洙泗學)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는 각각 공자와 맹자가 살던 곳의 

  '강 이름'이니 송대 이후의 성리학을 뛰어넘는 원시 유학의 모색이라는 뜻이다.


-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을 맺을 때 의정부 8대신 중 확고히 반대한 것은 '한규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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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강준민 지음 / 두란노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10


눈에 뵈지도 않는 '코로나'라는 괴물로 인해 모두가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날을 어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속에 이 작품을 선택해 보았습니다. 

분명, 작금의 고난은 우리를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않았던 시련 속으로 가두고 있지만 언젠가 웃으며 이 고난도 추억 속의 한 장면으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날을 상상하며 힘을 냈으면 합니다.

나의 경우 지난 1월에 해외에 나와 오도가도 못하는 속에서 언어도 잘 안 통하는 세상에서 나름의 인내 

속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그 한계를 슬슬 느끼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도 어찌하겠습니까? 이겨내야지요.


웬만해서는 여기에 특정 사안에 대해 개인적 의견을 올리지 않는 게 이 싸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나의 평소 

소신인데 작금의 국내 사건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어 잠시 잠깐 의견을 올리고자 합니다.


국내에서는 이름과 사고치는 방식만 달리한 새로운 '제2의 최순실 여사'가 탄생되고 있고 또 이를 보면서 

어떤 이유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냄새가 난다' - 그 분의 콧수염이 더 냄새가 날 듯합니다 - 는 

이야기로 제2의 최순실 여사를 옹호하려는 사람을 보면서 한심하다 못해 불쌍한 생각만 들 뿐입니다.

어찌되었건 "공과 사는 구분되어야 하고 공은 공대로 평가되어야 하지만 과에 대해서는 분명 책임이 있다면 

응분의 댓가를 치루게 해야 하는 게 정의로운 사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돈으로 자식을 피아노 연주자로 만들면 무엇하며, 선량이 된다고 한들 제대로 일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이런 사건을 들여다 보고 듣다보면 답답하고 힘들다는 생각 뿐입니다. 

세상이 무섭지도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가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인내하고 사랑해야죠......진실은 승리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즐거운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기가 막힌 일 하여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모든 면을 두루 접하면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게 일상적인 평균적인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러 감정 중 상처로 남을 수 있는 '자괴감과 '실망감'에 빠졌을 때 우리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성경 '롯기의 말씀을 예화로 목사님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그 대처 방안을 제시하고 계시다.


[우리 생애에 흉년이 찾아 왔다고 생각되는 시기를 어떻게 하면 이를 잘 극복할 수 있는 지]

 

에 대해 강의한 작품이다.

 

먼저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는 데, 은혜를 베푸시기 전 우리를 크게 흔드신다

'흔든다는 것'은 바로 환난을 의미하고, 고난을 의미하며, 시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고통과 환난 그리고 시련은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도구]인데, 도구로서의 '고통'은 삶에 찌들어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도록 하는 '확성기'

쓰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혹 자신이 처한 어려움이 극에 달해 더 이상 뭔가를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극에 달한 사람들은 이를 단순히 '실패'라 정의하여 [정지 표시]로 인식하지 말고, 그 순간을 

[방향 전환 표시]로 받아들이려는 자각이 정말 필요한 생각이라고 역설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초첨 맞추기]를 잘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우리가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 바뀐다고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보다'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데 그 증거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고 

하신다. , 하나님은 사람들을 만나실 때마다 가장 많이 물으시는 질문이

첫째, 무엇을 원하느냐?

둘째,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시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강조하고 계신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먼저 '문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신다.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문제를 두려워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문제를 이해하도록 힘쓰며 문제 속에서 해결책을 

발견하고 문제 속에서 비전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주문하고 계시다.


고통과 현실적 곤란한 문제에 직면한 사람은 그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일탈을 꿈꾸듯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듯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행동하려 하는 게 일반적인 인간의 성향인데, 기독인들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되며 아무리 어려워도 '말씀의 집'[교회]를 떠나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도피적인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또 줄기차게 [기도] [예배]드려야 할 것을 강조

하고 계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받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단순한 문제로 인식하지 말고 자신에게 닥친 '환경의 변화'로 인식

하고 대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강조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롯 [유다] 외에는 모두 '갈릴리 출신'들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유다 지방 사람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서 변화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에 갈릴리 사람들은 개방적인 성향의 사람들로 그들은 변화를 좋아하고 변화에 적응할 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가 갈릴리 출신들이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들은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항시 긍정적인 표현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전능하신 하나님 때문에 잘 될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또한 로마서(8 28)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려 선을 이루신다“


는 굳은 신념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단코 자신이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의 역경이 어떠하던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게 되는 데 그러면 우리의 인생도 반드시 역전이 될 것이고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인격을 창조해 내며 우리가 믿음을 붙잡고 있으면 믿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결국 역전의 

승리자로 만든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좋은 문구들

 

- 베들레헴은 원래 '떡집'이라는 뜻이고, 에브라다는 '풍요로운 수확'이라는 뜻. 유다는 '찬송'이라는 뜻. 

 

- 삶에 있어서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이해되어져야만 할 뿐이다. (퀴리 부인)

 

-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러스킨)

 

- 선택은 순간이지만 결과는 영원하다.(코마스 칼라일)

 

- '헌신'이란 본인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을 버리는 것이다.

 

- 힘이 있다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힘을 바로 사용하는 것이 위대한 것이다.

 

- 친절은 열정이나 능변이나 학식보다도 더 많은 죄인을 회심시켰다. (프레드릭 페이버)

 

- 한마디의 친절한 말이 석 달 겨울을 따뜻하게 한다. (일본 속담)

 

- 당신을 거쳐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더욱 좋아지고 행복해져서 떠나게 하라

  당신 얼굴에 친절이, 눈에도 친절이, 따뜻한 인사 속에서도 친절이 서려 있게 하라. (마더 테레사)

 

- 때로 인생은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그 상처를 치료하면 우리는 더욱 더 강해진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실'이라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다

  '성실'이라는 그릇에 담기지 않은 성공은 위험하다.

 

- 기도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토마스 그린)

 

- 외모의 아름다움은 눈만을 즐겁게 하지만 상냥한 태도는 영혼을 매료시킨다.(볼테르)

 

- 못생긴 여자는 없다. 단지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크리스찬 디오르)

 

- 실패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실망할 것이다. (비버리 실스)

 

- 천재는 계속해서 열정적인 자에게 붙는 별명이다.(괴테)

 

-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 13:20)

 

- 가정이란 히브리어로 '메누카'인데 이 뜻은 '안식의 터전'이라는 말이다.

 

- 인격이란 단어 'persona'라는 뜻은 라틴어로 '가면'이라는 단어 'persona'에서 유래된 말이다.

 

- 인격이란 책임 능력이다. (임마누엘 칸트)

 

♥ 오탈자 찾기

 

110쪽 맨 아래 줄의 마지막 단어와 111쪽 맨 첫 줄 첫 단어가 중복되었음.

 

: 물 댄 ---> 글이 중복되어서 빠져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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