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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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이런 작품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사 보아야 할 작품이라고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솔직히 처음 작품을 접했을 때에는 뭐가 뭔지 주인공이 누구인지, 등장 인물과 그것을 담담히 

진술하고 있는 주인공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몇 장을 넘기면 앞 페이지에서 언급된 촌수 관계가 

헷갈려 도저히 진도를 나갈 수 없어 책 읽기를 포기하기를 서너 차례

요번에는 아예 옆에 흰 종이를 놓고 가계도를 그려 가며 헷갈리지 않고 읽으려 노력에 노력을 

기우렸다.

(뒷 편에 실린 심사위원들의 소회를 읽어 보니 대다수의 심사위원분들 역시 나와 같은 혼란 속에

작품을 읽었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작품을 접한 초기에 나의 머리 나쁜 것만 한탄했었다. 참 억울하다)


작품은 소단위별로 화자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어 특정한 주인공은 없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래도 굳이 주인공을 들라면 김태겸의 아내 '묘연'과 그의 아들 '희우' 그리고 '난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사대부가의 여인' '하녀'의 동병상린적 보살핌 그리고 '사대부가의 손자와 후실 소생의 딸

사이의 기구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라 해석하고 싶다.


따라서 작품을 보면 4개의 큰 축으로 이루어진 사랑 이야기로 해석하고 싶다.

첫째 사대부가의 딸(묘연)과 후실 딸(하연)과의 애틋한 동병상린적 보살핌

둘째 최 약국의 전처(후인)의 딸(향이)에 대한 여문의 사랑

셋째 후인(최 약국 전처)과 후평(일하는 사람)의 사랑

넷째 희우(묘연의 아들)와 난이(하연의 딸)의 사랑

 

뭔 놈의 문학 작품을 이리도 자근자근 씹어서 해석하나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잘게 부수기가 수월치 않다

내가 독후감을 쓰려 이렇게 네 부류의 사랑으로 작품의 내용을 해석하고 있으나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는 내용은 "후실 딸인 하연이와 그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을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대목(31)

 

[어머니와 선이(하연의 모친)가 동무이자 자매였듯이 나와 하연도 자매이자 동무였다

거의 나 혼자 말하고 대부분을 나 혼자 결정하곤 했지만 '하연'은 십 오 년 동안 기꺼이 내 

그림자가 되어주었다. 어머니도 선이를 보듯 '하연'을 보듬었다

내 이름의 ''자를 똑같이 돌려 '하연'이라 이름짓겠다 끝까지 우긴 것도 어머니였다.]


만 보더라도 사대부가의 딸(묘연)이 하연에 대해 갖는 정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정이 더욱 공고해져서 표출된 것이 바로 하연의 해산 장소에 관한 것이다.

하연이 몸을 풀기 위해 찾아 간 곳이 다름 아닌 바로 묘연이 시집 간 시댁이었다.

- 어머니인 '선이'는 죽었음 -

친 자매라도 사돈댁을 찾아가 몸을 푼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터인데 '하연'은 스스럼 

없이 찾아갔고 '묘연'은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하연'이 낳은 아이(난이)를 집 안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거두어 키워

주기까지 한다. 그들 사이는 친 자매 이상의 정을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하연의 딸인 '난이'가 성장하면서 묘연의 아들 '희우'와의 금지된 사랑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고 있지만 이를 탓하거나 징계치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아들을 다른 

곳으로 장가를 보내면서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대목에서는 묘연과 하연은 묘연의 아버지로부터 

받았을 상처를 치유해 주려 노력하는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세월인데 감히 후실의 딸이 사대부가의 아들을 넘보려 한 것을 용서하고 또 미천한 여인의 

몸에서 낳은 아이까지 키워 주겠는가,

 

또 하나의 사랑은 '여문' '향이'에 대한 사랑이다.

여문의 근원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기술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향이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 마음 속으로 향이를 흠모하던 청년이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향이는 최 약국 전처의 자식인데 출산하는 과정에서 잘못되어 한 쪽다리가 불구로 태어난다.

이를 동네 청년인 여문이 흠모하기 시작하는데 여문이 향이를 어느 정도 흠모했는지 

'자신도 향이와 같이 불구가 되기를 간절히 비는' 대목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문의 향이에 대한 사랑은 일반적 사랑의 도를 넘는 순진 무구한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최 약국의 '후인'과 그 약국에서 일하는 '후평'의 사랑이 일어난 이유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후인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형제의 정에 굶주려 있던 후평은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싸여 있던 최 약국에게 더 이상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자신이 낳은 자식마저도 아들이 아닌 불구의 딸이었기에 아내로서, 여인으로서 가장으로

부터 인간다운 대접이나 오롯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할 것이다

그 순간에 그 모든 과정을 알고 있던 나이 어린 후평은 주인집 처자인 후인을 지극 정성으로 

보필했을 것이고 어느 순간 한 사내로 다가 갔을 것이다. 그런 후평을 후인이 굳이 마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그들의 후반부 사랑이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결말은 보이지 않고 있으나 자신이 

낳은 향이에 대한 이야기(자살)와 남편의 죽음(여문이 살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아마도 

자책감에 빠져 뻔한 결말로 흐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마지막으로 '희우'에 대한 '난이'의 사랑은 전형적인 젊은이들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고 보여 

진다. 서로가 흠모하고 사랑으로 발전해 가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 두자.

난이는 희우를 떠나려 한다. 그런 희우도 난이에게 굳이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위치를 잘 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그녀는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의 주변에 몸을 

숨기다 우연한 기회에 이 소식을 희우가 듣게된다.

하지만 또다시 헤어지고 만다. 단기 바람 결에 그녀가 어디쯤 있을 것이라는 소식만을 들은 채 

서로가 헤어지게 된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작품에서는 상처 받은 사랑, 일방적인 사랑, 표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랑, 해서는 안 되는 

사랑 등이 전개되고 있다.

살면서 사랑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사랑으로 인해 열병과도 같은 속앓이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공통적으로 찾았을 것이 괴로움에 사무쳐 밤길을 거닐다 마주한 ""이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해 본다.

, 사랑으로 인해 상처 받고, 힘들어서 또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상대는 왜 몰라주는 지를 

괴로워하면서, 애끓는 사랑이기에 또 넘을 수 없는 사랑이기에 이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존재는 야심한 밤, 중천에 떠 있을 '' 밖에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또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단어 중에 ''의 옆에 '먹다'라는 단어를 붙였을까?

먹는다는 것은 사물이나 그 어떤 형상의 존재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위에서 언급한 작품 속에 나타난 4가지의 사랑은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는 

,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 그런 사랑이었다.

따라서 작품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달이 스러지다', '달이 슬픔에 젖다' , '내 마음 달과 같이'

등의 제목으로 변경해서 2~3일 붙여 보고 작품의 의미를 재 해석하며 제목 연구를 해 보았는데 '달을 먹다'라는 제목 이외에는 적당한 제목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럴 정도로 작품의 제목은 함축성 있는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제목을 초기에 어찌 지으려 했던지 간에 "달을 먹다"라고 지은 것은 아주 

현명한 작명이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나 역시 한 때 혈기 방장하고, 사랑의 열병으로 인해 달을 보며 볼 수 없었던 상대 여인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그런 하소연을 한 적이 있었기에 처음 작품을 고를 때 작품의 제목이 하도 

요상해서 그저 그러려니 했었는데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뒤에 작품 제목을 다시 한 번되새겨 

아주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도 그냥 스쳐지나 가는 바람처럼 다가왔다 사라져 간 사랑이 있다면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첫사랑이라면..................

 

 

읽고, 느끼고, 생각하며 나를 돌아보자

 

- 吉人醉 善心露 躁人醉 悍氣布(길인취 선심로 조인취 한기포)

  : 좋은 사람은 술에 취하면 착한 마음이 나타나고 조급한 사람은 술에 취하면 사나운 기운이 다.


- 우리 가락 중에 계면조(界面調)라는 것이 있는데, 슬프고 슬픈 가락인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유행하였는데, 계면조란 ‘눈물이 흘러 얼굴을 둘로 가른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 의영고(義盈庫)란 ‘종 팔품직’으로 왕실과 종묘, 왕릉 제사에 소비되는 기름이며 꿀, 황랍, 채소

  후추 등의 물품을 관리하는 곳 


- 미선나무의 열매는 선녀들이 들고 다닌다는 전설이 있다. 미선나무는 아름다울 미와 착할 

  선의 나무로 오해를 받는데 실은 미선(尾扇)이고 둥근 부채를 의미한다.


- 정유절목(丁酉節目)이란 임금이 즉위한 후 재주 있는 사람은 서얼을 따지지 않고 들여 

  쓰겠다는 공식적으로 천명한 규정.


- 패랭이 꽃을 '천국화'라고도 불렀으며, '산자고'는 앉은뱅이 꽃이다.


- 견우와 직녀가 만나 나누는 비를 [쇄루우]라는 운격 있는 이름으로 불렀다 


- 해마다 조정에서는 여름이면 반빙()이라는 얼음을 나누어 주었는데 배포선은 여러 관사와 

  종친 및 문무관의 당상관, 내시부의 당상관, 칠 십 세 이상의 퇴직 당상관이 그 대상이고 

  할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 그리고 감옥의 죄수들도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 솔숲에 이는 바람을 솔잎을 스치고 지날 때 그 세기에 따라 구분해 놓았는데,

  솔솔 불기만 하는 바람은 거문고 소리 같다고 하여 [슬성(瑟聲)] 잔잔한 바람은 울림 ()자를 

  써서 [송운(松韻)], 약한 바람이 스치면서 내는 '쉬이익' 소리는 퉁소 소리 같다고 퉁소 뢰()

  를 써서 송뢰()]로 표기했고, [송도(松濤)]는 큰 물결과 같이 '솨아'하는 소리가 파도 소리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승정원의 정칠품 주서(注書)는 왕과 신하들이 만나는 자리에 동석해 거기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일일이 기록하는 직책으로 당하관이기는 하나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한다는 

  의미에서 요직이다.


- 초계문신(抄啓文臣)이란 임금이 지대한 관심으로 직접 관리하겠다고 나선 재능 있는 젊은 

  인재들을 일컫는 말이다.


-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 알아채지 못하는 자기만의 암호로 자신의 상처를 꾸준히 드러내게 

  마련이다.


- 어리석은 침묵은 보이지 않는 금 긋기에 불과하고 그 금 위에서 숱한 마음이 다치거나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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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의 딸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1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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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 5


누구나 다 똑같이 부여된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을 살아간다
대개의 인간들은 바쁘면서도 열정적으로 또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간에 주어진 자신의 
삶을 정말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열하고도 열심히만 살았지 자신의 삶이 정말 참 된 삶인지 아니면 
어떤 방향으로 가고는 있지 않은지 대해 어떤 계기가 발생하지 않는 한 절대 뒤돌아 보거나 
스스로를 평가해 보지 않고 살아가는 게 일반적인 인간들의 행태라 생각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유일하게 '사고'를 한다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진중한 검토나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렇게 해야 만이 자신이 죽어서 관 뚜껑이 닫히고 죽어서 어떤 특정한 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라고 외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작품은 바로 치열하게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는 되돌아보지 않게 "재 점검"하라는 의미에서 만든 작품이라 생각하는데 작품을 접해 본 사람들이라면 나의 이런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각 단원들마다 소 주제를 갖고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에 관해 사고하고 언급하면서 진정한   

'참 삶'이 무엇인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작가가 오랜 시간 동안 깊은 성찰 끝에 얻은 자기의 

주관을 구체화해 만들어 낸 작품이라는 생각이 깊게 든다.

내가 이 작품을 읽고 나름대로 주제 문장을 찾아 본다면

[삶은 늘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뿐이지.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작가는 우리가 삶의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본인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하며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달아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가장 슬픈 것은 삶의 주체자인 본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또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참 슬픔'이라 말하고 있다. 삶의 자세와 종교에 대해 가장 마음에 드는 

내용은


[차츰 우리는 우리가 여행자라는 사실을 잊고 생존 그 자체에 몰두하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여행의 목적을 잊어 버리고 여행지에 집착한다면 그 집착이 사라질 때까지 

 언제까지나 다시 그 장소에 태어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지구에는 

 (종교)]라는 제도가 태어 났다. 종교란 결국 우리가 [여행자]라는 사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겠는가?]


[종교(religion)라는 말의 어원은 '조각나고 흩어진 것들을 한 데로 모으는 일' "명상"잃어

버린 종교는 맹신에 빠진다. 애시당초 종교는 명상을 통해 생겨난 것인데 명상을 하지 않고 

종교를 접한다는 것은 근본을 잊어 버리고 가지를 붙드는 것이리라.]


나는 이 두 대목이 해당 작품에서 가장 통찰력 있고 독자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게 만든 내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남의 기준에 맞도록 끝없이 가지치기를 당했기 때문에 마음에 

병에 시달리고 무언가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다.] 


이 대목은 오늘날 황금만능주의, 학벌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고 있는 동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시사점을 던져 준 대목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런 주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비 애벌레'의 예를 들면서


[시간은 필요하다. 우리들 자신 속의 애벌레를 고요히 지켜보라. 그것이 거쳐 가야할 수많은 

시간들에 대해 한숨짓긴 해도 그것은 필요한 일이다. 자연이 일깨워 주는 가장 큰 것은 바로 

기다림의 필요성이다. ]


이라고 주장하면서 참을성 없고 조급증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참다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작가는 "사랑"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고 있는데.

[사랑에는 묘한 속성이 있다. 그것은 마치 불사조가 자신을 불로 태워서 죽어 버리고 그 재에서 

다시 소생하듯이 사랑은 죽음을 거칠수록 더욱 큰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랑의 시작을 

두려워 하지 않듯이 사랑의 죽음 또한 두려워하지 말라고 삶은 나에게 가르쳤다.] 


라는 이야기로 사랑의 참 의미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 또 너무 난해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잠시잠깐 잊고 있던 화두를

던져서 내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일깨워 주려 한 작품이었다.

  

읽고, 느끼고, 생각하며 나를 돌아보자

 

- 명상이란 결국 내가 사라져서 자연과 존재와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기도 역시 어떤 

  의미에선 마찬가지다. 그것은 내가 사라져서 신이 내 안에 들어오는 일이다.

 

- 고요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보인다. (성철 스님)

 

- 신은 내가 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 먼 나라를 여행하고 온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된다 (, 가스통 바슐라르)

 

- 마지막 날을 것처럼 오늘을 맞이하자. (크리슈나무르타)

 

- 위대한 사람과 하찮은 사람은 없다. 다만 위대한 일과 하찮은 일이 있을 뿐. 위대한 사람은 

  하찮은 일까지도 위대한 일로 만든다. 그가 하는 모든 하찮은 행동, 모든 하찮은 몸짓에서 

  그의 위대함이 흘러 나온다. (오쇼 라즈니쉬, [장자. 도를 말하다])

 

- 부처도 가장 큰 고통을 애별린(愛別隣)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그만큼 

  큰 고통이다.

 

- 누가 우리의 삶을 증언해 줄 것인가? 예술인가, 혁명인가? 아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러나 사랑은 침묵이다. 우리는 모두 남 모르게 죽어간다. (알베를 까뮈)

 

- 운명의 펜은 절대로 철자법이 틀리지 않는다. (13세기 회교 신비가)

 

- 불교에서는 우주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가지 차원으로 분류하고 있다.

  [욕계]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말한다

  [색계]란 각자의 꿈에 나타나는 빛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말한다

  [무색계]란 모든 사람의 이념 속에 있는 절대 정신의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

 

- 사람들은 스스로 나누어 놓고서는 그 분별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단죄한다.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 우리를 삶에서 지쳐 쓰러지게 하는 것은 고독이나 가난이 아니라 남 모르게 간직한 비밀


-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삶 역시도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삶은 곧 죽음으로 가는 여행이기 때문.

 

-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종교는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소멸될 

  수 밖에 없는 육체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하는 것이다.

 

- 영혼이 먼저 있고, 종교는 그 영혼의 비밀을 알기 위한 창문이다. 무엇보다 진정한 종교란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 삶을 비관하는 사람이 지난 행복했던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듯 이제 비가 며칠째 내린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뜨거웠던 태양을 기억하지 못한다

   저 비의 구름 위로 올라가면 태양이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속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곳에는 다시 우리가 들어갈 또 다른 세계가 있음에도 우리는 곧잘 그 사실을 잊는다

   그리고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리라 생각한다.

 

- 천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은 천국으로 향하는 바로 그것이다. (갈매기의 꿈, 리차드 바크)


- 아무리 작은 미련이 남더라도, 그 미련은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씨앗이 된다.(부처)


- 짐승들은 밖의 것에서 두려움을,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것 때문에 두려워한다

 

- 삶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방황이고, 하나는 여행이다. 내면의 방황이 끝날 때 

  삶의 진정한 여행이 시작된다.

 

  [뱀 발]

  ‘참...작품 제목 잘 지었다’는 느낌 밖에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유는 전혀 작품 제목과 내용이 어울리지 않는 그런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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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청목정선세계문학 80
아더 밀러 지음, 유희명 옮김 / 청목(청목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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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본 작품은 ‘세일즈맨의 죽음’, ‘세일럼가의 마녀들’ 그리고 ‘꿀맛’이라는 단편 세 개를 모아놓은 작품집으로 

지난 98년 처음 읽은 후 그 줄거리라든지 내용이 머리 속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어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는데, 세 작품 모두 다시 읽었음에도 후회가 없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특히, 마지막 작품이었던 ‘꿀 맛’은 1900년대 초반에 쓰여진 작품이지만 당시의 문제점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으로 – 세일럼가의 마녀들도 마찬가지 -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작품으로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세일즈맨의 죽음]

30년 가까이 근무하던 직장을 퇴직하고 순수한 마음만 갖고 ‘새 출발’ 해 보려 여러 회사를 기웃거려 보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퇴직자들 중 한 사람’ 혹은 큰 회사에 다녔던 사람으로서 뭔지 모르게 내가 

다니려고 하는 회사의 구성원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 같은 사람으로만 여길 뿐 차고 넘치는 퇴직자 속에 있는

한 사람이라고 바라보는 시각 외에는 전에 내가 다녔던 회사에서 쌓은 지식이나 기술(?)은 그냥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퇴직 전 나만이 특화되어 있다는 능력은 사회가 인정해 주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기업에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냥 그런 것이다.

그런 저런 사정을 모른채 자신만만던 나는 한 번 두 번 면접에서 좌절을 맛보고 나니 이제는 길가에서 나를 

보고 어쩌다 놀래서 짖는 개들을 보게 되면 ‘저 녀석조차도 나를 무시하나 같은 자조섞인 한 숨이 나오기도

하여 씁쓸한 기분이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열심히 뛰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 일에 쉽게 무너져 버릴 나였다면 회사 다니면서 벌써 무슨 사단이 나도 벌써 났을 것이지만 아직은 

그런 점에 있어서 나의 멘탈은 강해서 절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있다.

이유는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내처럼 격려와 응원을 해 주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아내는 무너져가는 남편을 음으로 양으로 지지해 주고 격려하며 힘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었지만 

주인공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역경을 헤쳐 나가려 하고 있었는데, 주인공이 자신의 부인이 보내는 응원과 

격려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행동에 옮겼어도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작품 주인공은 힘들었을 것이다. - 거기다 아들 녀석들이 영 정신을 못차리는 상태라 더 힘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주인공의 그런 심정에 공감은 가지만 작품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죽었는지 묘사되어 있지 않았지만 

중간 과정을 보면 그의 죽음이 일상적인 죽임이 아닌 그 어떤 죽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누구든지 ‘그런 죽음을 생각했다면 그런 정신 자세로 죽기 살기로 뭔가를 해 보면 살 수 있는 게 아니야’라고 

쉽게 이야기들을 할 것이다. 그것은 본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나는 아내라는 응원군 말고 또 나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신앙’이다.

나는 오늘도 내 책상 앞에 적혀 있는 성경 구절을 읽고 또 읽으며 나의 마음을 다지고 있다. 분명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것도 차고 넘치게 말입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1)

2.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4:13)

3.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23:10)

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4:13~14)

5.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이런 문구를 항시 가슴에 담고 살아가고 있다. 나의 새벽이 열릴 때까지 말이다.


퇴직!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회사가 아닌 이상 아니 자신의 회사라 할지라도 한 번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단어이다. 작품 속 주인공 ‘윌리 로먼’에게 쓸쓸한 애도를 보내지만 그렇다고 죽긴 왜 죽나!!!

 

상기의 글은 퇴직 직후 써 놓았던 글인데,

시간이 흘러 어렵게 얻은 직장에서 자리를 잡았다가 개인적, 회사적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또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대기업에서30, 중소기업 두 곳에서 5년 이렇게 지냈지만 대기업 30년 동안 경험한 내용

보다 중소기업 5년 동안 마주한 경험이 더 많았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중소기업에서의 시간을 나의 귀중한 소득으로 이야기 해 본다면, 

우리나라 현실에서 중소기업이 정체 혹은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중소기업의 자수성가형 CEO들은 펄펄 끓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자신이 

삶아 죽을 때까지 절대 타인의 이야기나 충고를 듣지 않는 공통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모든 중소기업이 다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데 천만의 말씀이다

100% 그렇다

비근한 예로 중소기업에서 출발해 자수성가해 대기업 수준의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가 있는지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것이다

내가 이 정도 자수성가했는데’, ‘너 같은 인간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회사를 이렇게 일구었는데’, ‘니가 

알면 얼마나 알아? 어디서 개 풀 뜯어먹는 이야기야라는 식의 아집과 독선으로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런 CEO주변 측근들은 이런 CEO를 더욱 부채질하며 중국 희대의 간신 역아와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CEO자신이 삼고초려해 영입한 사람이라도 절대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의 

기분에 역행하는 발언을 하면 완전 개 무시하거나 그 길로 내 보내고는 한다

더욱 웃긴 것은 부하나 핵심 측근들의 이야기는 뒷전이고 정확한 자료 혹은 근거에 의한 이야기 보다는 

어디서 좀 세상 돌아가는 방귀를 좀 뀌는 인간들 이야기나 무속인 이야기는 철썩같이 믿는다는 것이며 

조금 기업이 잘 된다 싶으면 영업과 인맥관리를 이유로 필들로 나가 회사는 완전 뒷전이고 엉뚱한 사업

확장을 이유로 헛튼 짓거리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웃겨도 한 참 웃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CEO들 옆에 아첨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CEO들은 모른다

자신의 목에 그들의 빨대가 꽂혀 있는 것을, 아주 심각한 것은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최 측근과 일가족에 의해 저질러지는 각종 비행 및 부조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으며 그들 주위에 있는 주변인들만 탓한다

는 우연한 기회에 그런 모순된 CEO의 모습에 대해 직언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의 사업이 실력에 의한 것인지 운에 의한 것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셔야 하고, 목에 빨대를 꽂고 있는 

 사람들과 멀리하셔라

그러면 니가 알면 얼마나 아냐?’는 식이다. 듣지를 않는다.

그래서 나는 보따리를 쌀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금은 잘 나가고 있지만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상 그 기업들은 분명히 빠른 시간 안에 수명을 

다 할 것이다. 그게 올바른 세상 아니겠는가?


지금도 회사를 다니지만 회사를 다닐만큼 다녔고 사람도 누구 못지 않게 만나고 대해 보았기 때문에 회사 및 

사회에서 기업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각종 산전, 수전, 공중전, 화학전, 세균전, 동굴전을 비롯해 지하전 등을 

숱하게 겪어봐 어느 기업이고 회사 손잡이만 봐도 회사 사정을 금방 파악하는데 다시 말해 척 보면 비데오요 

안 들어도 오디오라는 것이다

방구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

우리의 중소기업 CEO들 대다수가 거의 망상 수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보면 정확하다.

절재적으로 자신들의 실수는 인정하지 않는다

무슨 일만 터지면 정부가, 정권이, 아무개 지도자가 문제이고 박 모 정권과 이 모 정권 때문이라고 외친다

한심스런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중소기업체 사장들은 오늘도 멋진 옷 걸치고 골프장에서 우리나라 경제 상황과 코로나의 여파를 논하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반성은 쏙 빼놓은 채 남 눈찔러 피눈물 받아먹을 궁리와 어떻게 하면  국가의 눈먼 돈

받아 먹을 궁리에 잔머리 쓰기에 바쁜 게 현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다 나와보니 세상이, 자신이 어찌 보이겠으며 이꼴저꼴 보기 싫어 할 수 

없이 자영업에 뛰어드는게 아니겠는가?

당연히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이유 중 하나가 이런데 원인이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세일럼가의 마녀들]

미국 역사에 있어 가장 오점으로 남아 있는 여러 사건 중 1692년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실제 있었던

‘마녀재판’을 소재로 다룬 작품으로 작품 말미에 있는 해설에서 ‘집단적인 공포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조작해 낼 수 있는 거대한 조직의 횡포와 거기에 희생되는 개인의 양심, 인격과 존엄성의 문제가 

다뤄지고 있다’고 아주 어려운 이야기로 작품을 평가하고 있다.

굳이 이런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옛날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벌어졌던 마녀 판이 작금을 사는 

우리 사회에도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너무도 그 사례는 많기 때문에 나의 눈과 손을 바쁘게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툭하면 터져 나오는 우리 사회의 ‘마녀재판식’ 여론 몰이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조 모씨일가족 사건과 

정대협사건은 그런 사건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 는 지금은 상대를 향한 예리한 칼날일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 반드시! ! 틀림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 올 비수 혹은 형언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철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꿀 맛]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녀의 이야기는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1900년 초반의 당시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모습인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성 관념과 결혼관이 바뀐 요즘 세상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경박한 

삶의 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어떤 관점에서 본 작품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작품으로부터 무너져 버린 우리의 

‘공교육’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 작품이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고 좋은 학교를 나와 공직에 나왔으니 실제 학교에서 대다수의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잘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교육 정책과 아이들의 관심도는 항시 엇 박자를 만들고 있는 것이고 이도 저도 아닌 참 교육자를 

자처하시는 우리의 일부 멋진 선생님들은 ‘교육자 이전에 우리도 노동자’라는 의식 속에서 머리 싸매고 

광장으로, 길거리로 뛰쳐나가 아이들이야 학교에 관심이 있든, 과목에 관심이 없든간에 우선 나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보자는 식으로 행동하고 이들을 관리 감독해야 할 학교의 최고 어른이 되시는 분들은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해서라도 유지해 보려고 그런 교육자님들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라고 침묵 모드로 일관하셨던 게 바로 어제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정한 스승이시라면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학생들이 집에 머물며 공부할 때 학교에 나오셔서 깊은 반성과 

함께 백년지대계를 확실히 세우시는 계획을 잘 다듬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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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
정재찬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권유도 8


세상에 태어나 작품을 읽다 울기는 처음이다.

그 이유가 궁금하신 분들이 직접 책을 사서 읽었으면 합니다.

내가 눈물지으며 책장을 넘기던 순간의 느낌을 나만 간직하고 있고 싶어 해당 내용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겠습니.

 

작품을 읽고 고심하면서 며칠을 보내다 어떤 방식으로 정리를 해야 작품이 던져주는 의미를 나름 잘 전달 

전달의 대상은 먼 훗날의 '내 스스로'가 될 수도 있고, '나의 자식들'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대상은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모 신문의 신앙칼럼을 읽으면서 여기서

부터 얻은 깨달음이 작품의 메시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 여기에 옮겨봅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인간을 비웃으며 하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불행이 닥쳤다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그 불행이 권리의 침해로 느껴질 때 분노한단다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시간을 느닷없이 빼앗겨 버리는 것만큼 화내기 쉬운 상황은 없지

한적한 저녁 시간을 보내길 고대했는데 뜻하지 않는 사람이 불쑥 찾아오거나 하면 인간은 화를 쉽게 내지

?

자기 시간은 그야말로 자기 것인데 억울하게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는 열심을 다해 인간이 마치 자신이 하루 24시간의 합법적인 소유자로 생각하도록 하려무나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시간은 그들의 것이 아니지. 순전히 선물로 주어진 것인데, 그들은 그걸 몰라

세상에. 만약 시간이 인간들 것이라면 해나 달도 저희 소지품이게. 인간이 시간을 자기를 만든 이의 뜻에 

따라 써야 할 처지라는 걸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악마들이 할 일이지.


그렇습니다. 시간이 얼핏 내 것으로 보였지만 시간은 내 것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착각입니다. 시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허락하신 시간을 받아 그분이 맡기신 일에 쓸 뿐입니다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이 우리 것이 아니듯, 시간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두로에서 갈릴리로 직진하게 하지 않으시고 한참을 돌아가게 하셨을까요.

그 아까운 시간을 말입니다. 그것은 ‘에바다’(열리라)라는 기적의 시간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길을 우회하는 것에 어떤 불평도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늘 하나님의 타이밍에 자신의 스케줄을 

맞추시곤 했습니다. 하늘 아버지가 시간의 주인임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과거를 저축할 수도 없고, 현재를 붙잡을 수도 없고, 미래를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본래 내가 전유할 수 있는 시간이란 것은 한 순간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비록 내 인생에 멀리 돌아가게 하시는 것 같은 일들이 있을지라도, 그렇게 돌아가게 하셨던 길이 나중에 

알고 보면 제일 좋은 길, 가장 지름길인 것을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 직로는 하나님의 눈에는 미로이고, 인간의 눈에 미로처럼 보이는 것이 그분의 눈에는 직로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은 꼭 필요해서 우리를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분이 정하신 시간에 사명을 만나게 하시려는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신뢰하는 자는 

에바다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송용원 은혜와 선물교회 목사, 국민일보 20200516)


내가 왜 이 글을 작품을 읽은 결론으로 선정했는지 내가 무엇이라 이야기를 해도 이를 듣거나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마다 작품을 읽고, 느끼며 받아들이는 포인트가 모두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나의 것이 맞고, 네 방식이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종교관과 다른 이들은 또 달리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의 의견을 존중할 따름이다.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인생의 주체자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 역전을 꿈꾸며 아둥바둥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종국에는 절대자께서 예비하고 계신 그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며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야기할 것입니다.

“절대자께서 인간들의 모든 길을 다 예비하셨다면 뭐하러 아둥바둥 사느냐? 가만 있으면 좋던 싫던 간에 

그 분이 만들어 놓은 길로 가는 데?” 라고 말입니다.

나의 견지에서 보면 그런 분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밥은 뭐하러 먹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똥이 되어 몸 밖으로 나오는데

어찌되었던 나는 작품을 통해 얻은 나만의 깨달음을 위의 글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위와 같은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작품에서 마주한 에 대한 문구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 문구는 내가 위에서 작품의 결론으로 이야기한 하나님의 시간표와 함께 엮어서 나름 깊이있게

생각을 하다 보면 큰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꿈은 단순한 명사를 지칭하는 '부자'가 아닌 '남을 도울 줄 아는 부자'가 되어야 하듯 

 형용사가 되어야 합니다.(P51)”

 

[생 업]

- 밥은 진저리 나고, 밥 먹기는 넌더리라고, 그런데 그 밥을 위해 질려도 밥을 지어야 하고, 지겨워도 밥벌이를

  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이 서러운 사이클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훈님이 답합니다. 대책이 없다고(P 17)

- 모든 꽃 길은 그 밑에 흙 길을 깔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흙 길이 곧 꽃 길이다.(P 28)


[노 동]

- 건강한 직장생활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워라밸', 곧 일(work)과 삶(life)균형(balance)의 균형에

  있습니다(P37) 오늘날 일어나는 워라밸 요구의 본질은 우리 삶에 쾌락을 허하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P 39)

- 먹고 살려고 내 몸 속의 피와 땀과 눈물을 내줍니다. 귀한 소금을 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귀한 소금을 받아 그걸로 몸을 만듭니다.(P 44)

- 정직한 노동의 본질은 창조의 기쁨과 상통합니다.(P 48)

- 모든 것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한 것, 어차피 일도 인생이고 삶도 인생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P 59)

 

[돌 봄]

- 아이를 키우며 자란 건 다름 아닌 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부모님은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늙어버렸네요 인생은 그렇게 돌봄을 죽주고 돌봄을 받은 것이 아닐지요(P61)

- 평생 부모에게 줄 행복을 자녀는 어린 시절에 이미 다 준 셈이고, 부모다 남은 생애 그 빚을 갚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P 68)

- 아이는 취급 설명서와 오지 않는다.(p 75)

- 발효는 기다림의 결과이듯, 사랑도 기다림의 미학이다.(p 77) 사랑하기 때문에, 차라리 소금을 내 가슴팍 

  상처에 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굳게 미믿고 기다려야 합니다.(p 78)

- 사람은 변한다는 믿음이다. 그걸 믿지 못하면서 사람을 가르치려드는 것은 위선이거나 사기다.(p 78)

 

[부 모]

- 돌아보니 인생은 나를 돌봐준 이와 내가 돌볼 이로 이루어진 돌봄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P105)

 

[마 음]

- 결심이란, 살아온 나에 대한 부정이었고, 살아갈 나에 관한 긍정이었다.(P135)

- 우리 웬만한 건 너무 세게 결심하지 맙시다. 반성은 하되 필요 이상으로 가혹해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 마음의 지하실에 가끔은 신성한 공기를 불어넣어줘야 한다.(P141)

- 행복하려면 자기 자신을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좀 더 객관적인 시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P152)

- 목표가 이끄는 삶, 그래서 계획과 전략을 세우고, 매일 결심과 각오를 새로이 하면서 사는 인생도

  훌륭하지만 그저 과정에 충실하고 결과에 감사한 삶이라면 가히 족하고 남습니다.(P154)

 

[교 육]

- '세렌디피피(serendipity)라는 말은 의도하지 않았는데고 뜻밖에 혹은 운 좋게 뭔가를 발견하게 됐을 때 

   쓰는 말(P162)

- 관찰을 잘하면 우연히 얻은 정보들 사이에서 진실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P163)

- 관찰이란 세계의 숨겨진 질서, 감춰진 비밀을 바로 보는 일이다.(P170)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P181)

- 관찰은 창의를 낳고 창의는 다시 더 큰 사랑을 낳게 된다.(P181)

 

[공 부]

- 오생야유애 이지야무애(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우리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P185)

- 중년의 뇌는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도록 노력하기 때문에 감정에 대한 통제력이 증가되어 

  훨씬 침착하고 낙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다.(P196)

- 세월은 안으로만 새기고, 생각은 여전히 푸르른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 늙음은 젊음을 나이테처럼 감싸 

  안고 더욱 크고 푸른 나무가 되어 쉴 만한 그늘을 드리우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P198)

 

[열 애]

- 사랑은 남이 만들어주는 물건이 아닙니다. 내가 공을 들여 길들고 길들여지는 인내의 과정이다.(P216)

- 사랑은 속도전이 아닙니다. 서서히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입니다.(P217)

- 타이밍보다 더 중요한 것이 대화의 목적과 성격이다.(,P218)

- 구속될 것을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책임을 동반합니다.(P220)

-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P221)

- 마음은, 영혼은 채우는 겁니다. 채우는데 뭘로 채울까가 중요한 겁니다. 얼마나 선한 것, 얼마나  귀한 것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으로 채울까. 그런 것들로 채워진 삶은,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P222)

 

[동 행]

- 사랑은 자유이지만, 자기가 지닌 교환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교환할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에만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비애가 성립되고 만다.

   사랑할 대상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P233)

- 행복한 결혼 생활의 비결은 대장장이처럼 장인의 책무처럼, 정성을 다하며 몰입하는 일을 거듭할 때만이 

  얻을 수 있는 비급(秘芨)인 것이다.(P241)

 

[인사이더]

- 선행은 의무와 강요에서가 아니라 공감과 소통에서 오고, 공감과 소통은 경험의 공유에서 온다.(P253)

- 리플리 증후군이란 가짜를 만들어 놓고 자기 스스로 그것이 진짜라 믿는 것 (P262)

   , 자신의 뜻대로 꾸며낸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뜻하는 용어다,(P262)

- 성찰은 자기 변혁의 필요조건이다.(P268)

- 진짜 정직한 것은 현재의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까지, 나의 수많은 분신, 나의 수많은 페르소나까지 

  나 자신이라고 믿으며 사랑하는 것이다.(P273)

- 세상의 인사이더들을 닮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똑같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거면 내가 왜 존재해야 합니까? 그럴 양이면 신께서 그 수많은 아름다움을 다 만드시진 않았겠지요

  삶의 기준은 나 자신입니다.(P275)

[아웃사이더]

- 원심력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 구심력도 없어 버티지 못하고 사정없이 밀려난 이들에 대해서는 배려와 

  연대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아웃사이더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 힘도 없이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되돌아보니 인생이 아름다웠다 말하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인생의 굴곡을 견딜 수 있는 배후를 만들어 줘야지요

  뒤를 돌아봤을 때 흐뭇하기 이를 데 없는 저 든든한 배후들, 쇼트트랙 선수들이 훈련할 때 허리에 거는 

  고무벨트 같은 그 배후 말입니다.(P290)

-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말하고,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말합니다.(P292)

 

[가진 것]

- 소유나 사용의 관점이 아니라 상실의 관점에서 보면 가치는 달라진다.(P301)

 

[잃은 것]

-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롱랑바르트, P340)

- 애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멜랑콜리라고 부른다. 이는 상실한 대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해서 그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상실감 혹은 복수심을 자기 자신에게 투영하는 겁니다.(P341)


작품을 읽다 보면 곳곳에 금과옥조 같은 저자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 적시 적소에 인용되고 있는 

시는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그 모두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없는 각박한 현실의 무게가 아쉬울 따름이지만 그래도 오늘

나는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문구 하나만이라도 부여잡고 힘차게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읽다 보면 곳곳에 금과옥조 같은 저자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 적시 적소에 인용되고 있는 

시는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그 모두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없는 각박한 현실의 무게가 아쉬울 따름이지만 그래도 오늘 나는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문구 하나만이라도 부여잡고 힘차게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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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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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5월은 가정의 달이요, 부모에 대한 효를 되짚어 보는 그런 달이지만 매년 5월이 되면 어버이 날에 과거 

내가 나의 모친에게 고리오 영감의 딸보다 나은 행동을 했었던가를 돌아보고는 한다


내가 작품을 읽는 이유는 혹시라도 나의 자식이 당시의 상황을 알게 되어 나의 노년 생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보인 행동일 것이다.

굳이 핑계를 대어 본다면 모친의 병은 당시 의학의 한계로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오로지 를 가장한 립 서비스 수준으로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모친은 자식들의 곁을 홀연히 떠나셨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상태에서 그냥 자식들 곁을 떠나시는 모습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어느 불효자가

스스로 저질렀던 불효에 대한 반성의 탈을 쓰고 작품을 접하는 것이지 진정한 반성의 의미와 후회의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모친을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반성으로 

나는 최선을 다 했고, 어쩔 수 없었다라는 변명 아닌 변명과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면책성 근거 

타인들의 비난이 두려워 - 를 마련하기 위해 보여 주기식 이중적인 행동을 보인 치졸한 행동이라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작품은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내리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작품이 만들어진 그 시대와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는 작품이었음에도 현재를 사는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 

작품으로 우리 문학과 비교를 해 본다면 아마도 유럽판 '김 약국의 딸들'(박경리)같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중년 가장들의 슬픈 이야기인 '아버지'(김정현)같은 작품이었다고 생각되었으며 또 다른 측면으로는 애절한

아버지의 정을 이야기한 '시고기'(조창현)와 같은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

 

주인공 '장 조아솅 고리오(제면 직공)'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두 딸

(‘레스토 부인뉘싱겐 부인’)이 있다.

그는 여느 아버지들처럼 딸들의 요구가 있을 때 자신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든 말든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 

없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다 해 주는 그런 평범한 아버지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노년에 홀로 사시는 아버지의 건강과 생활비에 대한 

걱정과 근심보다는 자기 자신과 관련된 사소한 문제 - 애정 및 금전 - 로 아버지를 끊임 없이 흔들어 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리오 영감의 딸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경제적 무능력 상태에 빠져 어려워할 때는 

물론이고 외로움에 고통 받을 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남 대하듯 하다 쓸쓸히 돌아가시게 한다.

 

자식이 뭐길래,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부모, 자식간의 연을 맺어 부모는 항시 자식에 대해 '채무자'가 

되어야 하고, 자식은 부모에 대해 언제까지나 영원한 '채권자'로 군림하며 살아야 하는지..... 책을 덮으며 

살아 생전 모친께서 내게 항시 들려 주시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부모는 열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지만 열 자식은 한 부모를 잘 모실 수 없다]

 

라는 이야기였다.

모친께서 이런 소리를 하실 때마다 '에이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하고 외쳐 보았지만 세월이 흘러 

나도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보는 나이가 된 지금, 나의 어머님이 지청구 비슷하게 외치던 그 말씀이 

구구절절 옳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현재의 나의 자식들이 고리오 영감네 딸들처럼 내게 못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고 있지만 

나는 그 변화의 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존의 효 방식에 미련이 남아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며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이를 인정해야 한다

연일 언론에 나오는 기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노인은 스스로 벌어서 살아야지 자식에게 의존해 노년을 의탁해서는 안 된다라는 요지의 기사가

그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남들 자식은 몰라도 절대 내 자식은 안 그럴걸요?”

글쎄세상일 누가 알 수 있겠나. 어린 자식이 태어나 자라면서 나는 커서 부모에게 불효할 것을 다짐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작품 속 고리오의 딸들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생활이, 환경과 처한 여건이 그리고 그녀들에게 직면한 경제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작품을 통해 배은망덕의 표본처럼 그려지고 있는 고리오의 딸들만 비난할 것이 아니라 고리오 영감도

그 딸들도 동일한 선상에서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자식을 고리오 영감의 딸처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또 스스로가 경제적 무능력자가 되지 않기 위해

주인공 고리오 영감은 무엇을 준비했고, 자식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는지에 대해 묻고 싶다.

 

나의 자식들은 한 때 둥지 속의 새끼들처럼 입만 벌린 채 나의 손길과 눈길에 의존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런 자식들은 어느새 자신의 길을 찾고자 둥지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한 녀석은 벌써 나의 둥지를 떠났으며 또 한 녀석을 채비를 마쳤고, 나머지 한 녀석 역시 조만간 자신의 

생활을 위해, 삶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들은 내가 그러했듯이 삶의 지친 어깨를 스스로 다독이며 또 내가 그랬듯이 자신의 새끼를 위해 힘찬 

날개짓을 하며 그렇게 부모가 되어갈 것이고, 나는 또 이 자리를 어느 순간 조용히 비우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활 양식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더라도 모두가 고리오 영감이 걸었던 길을, 삶을 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고리오 영감,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며 따랐던 자식같은 하숙생이 그의 곁을 지키는 

가운데 자식들의 외면 속에 임종을 맞는다.

나는 고리오 영감이 죽던 날의 집안 분위기와 딸들이 남에게 하듯 내뱉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읽고 또

읽었다. 정말 이들이 고리오 영감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사랑으로 키워 온 딸년들이었을까 하는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마구 일어났지만 요양원 침상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던 나의 모친 생각과 오버랩되면서 나도 

그런 자식의 한 부류였다는 점에 더 이상의 비난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부모들은 자신만은 효녀와 효자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지,

고리오 영감의 자식들과 같은 인간 말종들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고리오 영감도 젊은 시절, 아이들의 심성을 위해 끊임없는 가정 교육을 시켰을 것이며 착하게, 인간답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던져 가르치고 또 가르쳤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작품을 덮으며 자식과의 사랑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고 우리의 자녀들에 대해 가정 교육을 어떤 방식으로 

시켜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리오 영감 입장에서는 자신의 그 모든 행동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아마도 또다시

그녀들의 부모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여도 부모라면 의당 동일한 길을 갈 것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성과 단어가 존재하는 한 이 땅에 고리오 영감은 영원히 지속적으로 

나올 것이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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