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의 유토피아
김영종 지음, 김용철 그림 / 사계절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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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3

 

작품은 1, 2부로 나뉘어져 1부는 예술부문에 대한 개인적 고찰과 예술이 살아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인적 소견을, 2부에서는 이 사회에 고착된 부조리한

관념과 현상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인적 소견에 대한 저자의 힘찬 외침(?)’

수록한 작품이다.

1부의 내용은 예술에 대한 관심만 있으면 누구나 알고 있고, 쉬운 이야기를 정말

어렵고도 힘들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문장 분석력이 떨어져 조그만

비틀어서 주장하거나 심오한 단어를 사용하면 금방 제풀에 지쳐 독서를 포기하게

만드는 나와 같이 지적 수준이 낮은 우매한 사람들이 책 값이 아까워 어쩔 수 없이

동일한 내용을 두, 세 번씩 읽지 않으면 책 값 본전이 생각나게 만드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1부의 결론이 되는 문구를 찾아보면 아마도 P92쪽에 나오는

한국의 대학(예술)은 미켈란젤로 시대 이상으로 우상을 섬기는 기관이고, 거기에

 빌붙어 먹고사는 자들은 우상의 위패를 모시는 제관들에 불과하다

로 축약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슨 근거가 있어 저자의 그런 주장에 동의하는 게 아니고 입시철만 되면 언론에서

떠드는 예술분야 입시와 관련된 기사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본 것 같아 저자의 그런

주장에 쉽게 동의했을 수도 있지만, 가까이는 나의 자식 중 한 놈이 예술 방면에 관심을

갖고 관련 입시학원을 다니면서 기계적으로 그리는 모습을 보고 또 그림의 공식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곁에서 봤었기 때문에 그 문장을 끄집어 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본격적으로 이야기흘 하고자 하는 내용은 1부 일부와 2부에서 저자께서 주장하고

계시는 내용에 대해 일견 동의하는 면도 있었으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상당수 있어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저자께서 소리높여 주장해 관심 있게 읽고 또 읽었던 유언비어의 사회학이라는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 말은 의미이므로 자연히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서 살 수 밖에 없는데, 의미란 다름

  아닌 가상이다. 가상에는 근거가 있을 수 없다.(P154)

- 팩트를 말하는 목소리는 재미없고 무미건조하다, 합리성의 매커니즘을 추종한 나머지

  생물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며 결국 세상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인간들로

  넘쳐나고 있다.(P157)

- 말의 자연성을 합리성의 매커니즘으로 방해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P161)

는 대목을 읽으면서 느낀 소감은 한마디로 

그래서 우리의 국회 의원들이 그렇게 막말을 잘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특정 사안이

 벌어지면 아무 근거가 없어도 생각나는대로 막 씨부려도 된다

라는 생각을 잠시 잠깐 갖게 되는데, 나의 이런 해석과 유추가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더 이상한 말도 있다.

- 사람들은 보도의 형식을 믿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지, 내용에 대한 지식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P165)

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우리의 능력 있고 권위 있는 언론사들은 그동안 보도의 내용은 별로였지만 보도의

형식으로 인해 권위있고 신뢰할 수 있는 보도기관이 되었다는 것으로 나는 해석하고

싶은데 맞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나의 해석이 잘못된 것일까?

앞으로 보도의 형식이 정론지 못지않게 잘 갖추어진 가짜 뉴스를 구독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확 들었다.

 

더욱 이해 못 할 주장은 또 있고 더 이상하다.

- 헛소리가 세상 안으로 들어와 대접받으면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된다. 나아가 기적이

  일어나 경전이 될 경우에는 오히려 바른 소리의 절대기준으로 등극해 황금률이

  되기도 한다(P174)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 헛소리가 영원히 헛소리로 판명되었을 때 최초 헛소리를 유포해 사회가, 국가가

혼란에 빠져 더 큰 손실을 가져왔을 때 누가 책임질 것인가?

(천안함 북침설 진위 여부를 따지기 위해 국제적인 군사 조사단이 우리 함정의

 특장점을 샅샅이 훓고 지나가 국방 관련 정보가 엄청 유출되었음에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음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쓰셨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그렇게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아닌가?

 

저자의 주장이 극에 달하는 내용은 또 있다.

- 현재성을 사멸시키는 것이 바로 합리성의 매카니즘인 반면, 현재성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유언비어. 유언비어는 즉각적으로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진실이 힘을 잃어서 결국 진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현자는

  유언비어다.(P176)

이쯤되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지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 아니 저자께서 저술하신 작품 211쪽 중간쯤을 읽어보면

언어 조작술이야말로 이들의 성공비결이었다

라는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라는 글에서 상대를 통박하고 계신 글 귀에 눈이

멈춰서 버리고 말았는데 누가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어서 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해당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이 분이 쓴 작품 내용이 모두 혹시 유언비어

모아 놓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양식이 있는 분이라면 책을 쓸 정도의 학식을 갖추신 분이라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저자께서는

난 그런 것 모르겠고, 말의 생물성을 담보하기 위해 재미만 있으면 아무 이야기나

 근거가 없더라도 심지어 그것이 유언비어라도 막 해도 된다

라는 뜻으로 나는 이해했는데 맞는 이야기일까?

 

저자의 주장이 잘못되었으니 논박하자는 나같은 수준 낮은 독자하고는 논박하지도

않겠지만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사회, 국가적인 폐해가

예상될 경우에 대한 대비책도 갖고 이야기를 해 주어야지 선동적(?)으로 막 이야기하면

말하는 사람은 그런 행태를 따르는 집단으로부터는 추앙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이 지적 수준이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생각없이 따라 행동했다가는 아주 곤란을

겪을 것이 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나의 생각이 틀린 것인가?

그래서 저자의 주장에 동감을 못 하겠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문구는

- 민주정부 10년 동안, 정권이 민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는 덕분에 민족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친일파 이승만, 일본군 장교 박정희의 콤플렉스)

  게다가 민주정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데 앞장섰다.(P218)

- 적반하장으로 MB정권과 뉴라이트는 그 공을 가로채서 선진화라는 단어를 마치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양 채택했다.(P220)

더욱 재미난 문구는 

- 선진화의 허구를 정면으로 돌파해야만 하는데 과연 정면돌파란 무엇일까?

  이 글의 주제도 아니려니와 내 능력을 벗어난다.(P224)

 

저자는 자기 주장만 실컷 이야기 백 번 천 번 양보를 해서 자신의 저서이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고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순간에는 무책임하게

꼬리 자르기식 으로 나는 모르니 너희들이 방법을 이야기해 다오라는 식으로

문제점만 제기하고 빠져 나가면 안 된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현재성을 사멸시키는 것이 바로 합리성의 매카니즘인 반면, 현재성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유언비어다. 유언비어는 즉각적으로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진실이 힘을 잃어서 결국 진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현자는

유언비어다

라고 주장하셨으니 그렇게도 '유언비어'를 신봉하시는 분이라면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라도 진실이 되었던, 오답이 되었던 간에 결론까지 제시하고 빠져야지 왜 그렇게

도마뱀 꼬리 자르기식으로 일방적으로 내리시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나의 결론은 이렇다.

더 이상 다른 소주제로 언급된 여러 이야기에 대한 느낌을 정리하고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책 값이 아깝다는 생각과 함께 나아가서는 시간 낭비고, 이런 글을

쓰는 나의 손가락만 혹사시키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작품에 대한 소회나 비평을

줄이며 결론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 나와 우리 모두는 특정 사안을 포함한 모든 부문에 있어서 저자의 주장처럼 성기

관망파가 아닌 직접 섹스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

 

하여간 작품 제목 너희들의 유토피아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너희가 누구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추신) 앞 전에 읽었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에서 해당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좋은 측면으로 언급되어 꼭 읽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접했는데 아쉬움이 크게

        남는 작품이었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아쉽고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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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비해
이종수 지음 / 이요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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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천 권유도 6

 

작품은 정말 문학을 사랑하고,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를 사랑하는 열독가들에게 큰 아쉬움으로

다가 온 그런 부류였다.

 

내가 왜 그렇게 작품을 평가하는지 그 이유를 작품을 다 읽은 내가 던지는 물음에서

찾고자 한다. 한가지 묻겠다.

 

자준이 정경과 인수와 함께 절재의 집으로 찾아가 훗날을 어떻게 장담할 것인지를 물었다

 

작품 속에서 따온 한 구절인데 위의 글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는 작품을 접하며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하여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3

이상을 허비했다. 위의 문장에 등장하고 있는 자준한명회, ‘정경권람, ‘인수

'박팽년그리고 '절재김종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다시 위의 문장을 해석해 읽는다면

한명회가 권람과 박팽년과 함께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훗날을 어떻게 장담할 것인지

물었다는 뜻이다.

 

본 작품의 작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사를 전공한 전문 작가라고는 볼 수

없다고는 하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지 말아야 할 기본적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서문에 주요 인물의 호칭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확실히 명기해 두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 어쨌든 나는 서문의 앞단에 병기를 해 놓았던 내용을 무시했기 때문에 혼란스럽게 작품을

읽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

 

아무튼 작품은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과 둘째인 수양대군 사이의 보이지 않는 권력 다툼의

이야기와 숙부와 조카간의 권력 분쟁에 대해 작가의 상상력 속에 펼쳐진 그런 내용이었기 때문에

세세한 작품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알고들 있어 여기서는 별도로 하지 않겠으나 작품을 읽으며

나의 뇌리를 지속적으로 흔들었던 것은 작품 전반에 걸쳐 극적 긴장감이나 복선이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그냥 밋밋한 이야기 책이었다는 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고 평하고 싶다.

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3류 애로물같은 내용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작품을 읽으면서 다음 장에는 뭐가 있겠지 어던 반전이 숨어

있겠지 하다 기대감이 있는 게 사실인데 본 작품은 책을 다 읽어 버린 현재도 어떤 아쉬움 같은

것이 짙게 배어나는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고 표현하면 정확할 것이다.

또 하나의 취약점 내지는 아쉬움을 들라고 한다면 소 단위별로 작품을 전개함에 있어 그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체자가 불분명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초지일관 제3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던지 아니면 수양이면 수양, 안평이면 안평

이도 저도 아니면 대신들 중 특정인 한사람(가공의 인물이어도 좋을 듯 하였다)의 시각으로

작품의 전체를 끌고가던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 잘모르겠으나 세종의 동생인

성녕대군 부부인 댁에 있던 염비를 화자로 하여 이야기를 끌고 갔어야지 중구 난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작품을 읽다 보면 어떤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본 작품인지가 궁금해지기

까지 해서 솔직히 헷갈렸던 작품이다.

- 이 역시 나의 사고력이 부족해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하지만 작가의 배려도 아쉬운 대목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작가의 의도는 안평대군몽유도원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면서 주변인들의 이야기로

포장하려고 했었던 같은데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었듯이 본 작품에는 작가가 의도했던 여러

요소는 있었으나 나의 관점으로 볼 때는 몽유도원도가 없었던 같았던 작품이라고 밖에는 달리

평할 게 없었다.

 

작품 제목 속에 등장하고 있는 비해(匪懈)’라는 당호는 아버지 세종께서 지어주신 것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뜻에서 내린 것이라는 의미로 작품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당호(堂號)란 성명 대신에 그 사람이 머무는 거처의 이름으로써 인명을 대신하여 부르는

호칭으로 신사임당에서 사임당이나 여유당정약용에서 사임당, 여유당은 당호를 의미

한다고 보면 된다. 당호는 대부분 ‘-으로 끝나지만, 최한기의 당호 태연재(泰然)처럼 거처

뜻하는 한자어(‘-’)로 끝나거나 간혹 그러한 형식을 따르지 않더라도 거처의 이름이 당호로서

쓰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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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홍신 세계문학 9
앙드레 말로 지음, 박종학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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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추천 권유도 6

 

내가 독서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한 30여 년 전 초기에 읽었던 작품으로 본 작품을 처음 접한

당시, 어떤 느낌으로 작품의 내용과 주제를 이해했었는지 기억조차 아스라한 그런 작품이었는데,

작품을 책장에서 마주할 때마다 빛바랜 작품 겉표지만큼 그 무엇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는

했었다. 책장에서 작품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면 나는 꼭

너는 어떤 작품인데 왜 여기에 꽂혀 있냐?’

당시 나는 어떤 느낌으로 저 작품을 읽었었지?’

등등의 질문을 해 보지만 항상 동일한 대답인 나도 몰라였다.

그러던 중 고전을 반복해 읽게 되면 나름의 재미와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들어 다시 도전하게 되었으나 솔직히 책장을 덮은 지금, 아무런 감흥도, 느낌도 없는 그런 작품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생각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을 뿐이다.

 

작품은 중국 혁명을 무대로 1927년 실권을 장악한 장개석의 국민당이 공산주의자에 대한

숙청에 나서자, 이에 저항하여 일종의 쿠데타가 일어나지만 결국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작품은 이런 배경을 갖고 전개되고 있었다.

작품이 진행되는 속에 몇몇 유형의 인간이 등장한다.

허무주의에 젖은 고독한 테러리스트 ’, 착실하게 경력을 쌓은 러시아인 직업 혁명가 카토프

그와 반대로 반혁명 세력에 속하는 페랄케니히’, 마르크스 사회학자이자 아편중독자

지조르와 그의 자식인 혁명가 기요그리고 그의 아내 메이.

이들이 펼치는 저항 운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 각종 서평이나 출판사가 제시하고 있는 분석 내용을 그대로 따온 인물평인데, 내가 볼 때는

이 역시 동의할 수 없는 분석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의 견해로는 작품 속 인물들은 그저 그런

평범한 인물들이었고 혁명을 완수시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 혼란의 시기에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은 테러에

실패하고 감옥에서의 심리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작품의 의미를 더 살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

 

작품이 갖는 의미가 불후의 명작이라는 평가가 하도 많아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 작품 행간에

숨겨진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 노력했으나 솔직히 가슴에 와 닿는 측면이 거의 없었던 그런

작품이다

- 이 작품 역시 시대와 환경이 많이 다른 지금의 판단 기준으로 작품을 살펴봐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작품 맨 뒷장에 소개되고 있는 일부 문장을 인용해 본 작품을 평가해 본다면

[작품은 혁명과 전쟁, 테러리즘이 만연한 세계 속에 여러 유형의 인간을 던짐으로써 인간 존재가

갖는 한계 상황과 행동의 의미, 삶과 죽음의 차이, 동지애, 인간의 가치 등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

작품이다. 작품을 접한 독자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있다]

나의 견해로는 작품의 뒷부분에 나오고 있는 주인공들이 감옥에서 나누고 있는 말과 행동에 대해

그리고 기요의 아내 메이가 남기고 있는 이야기만을 별도로 구성해 보면 하나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었다.

 

작품을 읽으며 나는 생뚱맞게도 작금의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어느

권력기관의 인물과 금전 권력의 최정상에서 형제간에 보이지 말아야 할 추악한 분쟁 이야기를

들으며 또 고고도 방어 미사일(일명 : 싸드)’를 두고 벌이는 정신나간 오피니언 리더들의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사문난적같은 패악질을 보면서

그들에게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들이라면 진정한 인간 조건이 무엇인지를 한 수 가르쳐 주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게 밀려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상을 살아온 나의 견해로 위와 같은 구역질나는 삶을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한마디 충고를 해 준다면 오늘날 이런 근원적인 부패의 문제는 바로

가정 교육이 무너졌기 때문이며 또 다른 원인 하나는 바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 가진 자들의 어이없는 패악질과 반대를 위한 반대의 몰염치적 군중 심리를 이용하는

자칭 식자(?)라는 인간들이 벌이는 수준 이하의 행동을 보면 여러 신문칼럼이 공통으로

단 한 줄로 명쾌하게 우리 스스로를 질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남들과의 싸움은 등신, 우리끼리 싸움은 귀신

라는 문구인데 나는 1000% 동감한다.

그럼 이런 일이 왜 발생했을까?

나의 견해로는 이 모든 것이 개발연대를 치열하게 살아왔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알게

모르게 강조했던 어떻게 해서든 이기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도 안 되는 교육을 시켜

왔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싶다.

 

가끔 매스컴을 통해 중국인 요우커들이 해외여행을 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각종 기행과

추태를 부려 중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스스로 깍아 먹고 있다는 해외 토픽을 접하고는

하는데, 이런 기사를 접한 어느 중국인이 나름대로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는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투쟁적으로 자란 부모세대들이 자녀 교육을 잘못시켜 저 모양

이라는 단순 명쾌한 분석으로 요우커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있는데,

작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폐 모습 - 대기업의 갑질, 방산 비리, 원전 비리,

법조 비리, 세정제 파동 등 - 도 요우커들이 해외에서 벌이는 그런 모습과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철저히 무너진 가정 교육환경 속에서 자란 인물이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어린 시절 가정교육을 통해 정의가 무엇이고 이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듣고, 보고,

배운 게 없다보니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가지려 욕심을 부리다 보니 오늘날과 같은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작금 벌어지고 있는 국가의 안전이 걸린 문제와 연관된 싸드문제만 해도 그렇다.

제주 해군기지의 강정마을 사건, 찬안함 사건, 세월호 사건과도 같은 일만 벌어졌다

하면 듣보잡단체들과 인간들이 득달같이 나타나 앞장서서 사사건건 파당과 지역과

이념을 앞세워 짓밟고, 헐뜯고, 헤집어서 국난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나라가 됐으며

또 어느 교육 공무원이란 작자는 국민을 개, 돼지라는 표현했는데 그런 개, 돼지들이

내는 세금으로 월급을 꼬박꼬박 받는 자기는 개, 돼지에 붙어사는 기생충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나 씨부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과거의 비리는 가짜 고춧가루, 불량 냉면, 가짜 두부, 저울과 되박 순박한 눈속임 등과

같이 먹고 사는 것에 기초한 애교 수준의 비리가 주를 이루었다면 작금의 비리는 어떤가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갖고 해 쳐 먹으려니 문제가 단단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긴 이야기를 해 봐야 내 입과 손가락만 아플 뿐이다.

더 이상 이런 사건이 나오지 않는 그런 사회, 이 난국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또 그런 세상 속의 인간이라면 어떤 조건을 구비해야 하는지를 나의 자손들에게 정말

차분히 가르쳐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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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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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시는 쓰는 사람이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다

 

우연히 접한 신문 칼럼에 어느 인문학 연구모임에서 이 작품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모임도 만들어 탐독과 토론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작품을 택해 읽게 되었는데, 솔직히 그 깊이와 감흥이랄까 작품에 대한

색다른 느낌이 기대와는 달리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책 뒤편에 있는 작품 해설까지 철저히 읽으며 작품이 던지고 있는 주제성이나 문학사적 가치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을 해 보았으나 아직도 왜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처럼 문학에 관심이 있는

후세들이 높이 평가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이 작품은 여러 작품 중 그냥 단순한 한 작품에 불과했다.

- 과거 위대한 갯츠비를 읽고도 같은 이야기를 해서 나중에 무지 후회했지만 나중에 그런

  실수를 반복한다 할지라도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 -

 

출판사가 제공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 보면

[작품은 어느 무명 저널리스트의 회고로 시작한다. 1970년대 초 칠레의 작은 어촌마을

이슬라 네그라라는 곳에는 외딴 지역에 살고 있는 파블로 네루다라는 인물에게 우편물을 전달

하는 것이 유일한 업무인 젊은 우체부 마리오 히메네스가 있다.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스를 보고 첫눈에 반한 배달부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소녀를 위한

()를 써달라고 조른다.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메타포를 가르쳐주고 베아트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한다. 마침내 결혼하게 된 마리오와 베아트리스. 이후 네루다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

되어 마을을 떠난 후에도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간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네루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마리오는 목숨을 걸고 그를 찾아가 곁을

지킨다.

작가는 마리오의 개인적인 삶과 칠레의 냉혹한 정치사 사이에서 절묘한 평행선을 만들어 낸다.

작가의 표현대로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는이 이야기는 칠레 민중들에게

바치는 헌사인 동시에 사랑과 시와 문학을 이야기하는 감동적인 노래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어느 대목이 칠레 국민의 감정과 냉혹한 칠레의 정치사를

이야기하고 있는지 말이다.

내가 문학사적으로 보았을 때 고전이라고 분류되는 작품을 읽으며 항상 주장했듯이 어떤 작품

이던간에 그 작품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 사회적 KEY요소를 철저히 이해하지 않고

작품을 읽게 되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작품은 아무런 의미 없이 다가선다는 것을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작품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어떤 특정한 ()’에 대한 정밀한 이해와 분석

없이는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는 작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 작품으로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런 시들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나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본 작품에 대해 별반 감흥을

얻지를 못했다.

앞전에 남미 작가들 작품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가리), ‘백년 동안의 고독

(G. 마르케스)‘ 등도 솔직히 이런 범주의 작품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내가 남미의 정치, 역사적 이해도가 높아진 다음 본 작품을 다시 접하게 된다면

그 때가서 심사숙고하며 읽어볼 생각이다. 작품을 읽으며 나름 타인에 비해 많은 독서를 해

왔다고 자부는 했지만 하여간 남미 작가의 작품만 접하면 내가 그간 가졌던 그런 모든 생각은

가장 큰 자만이었음을 스스로 느끼고는 한다. 좀 더 자중해야겠다.

그리고 무식해서 미안 - 작품과 저자에게 - 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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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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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5

   

가슴 속 추억은 추억일 뿐

 

작가께서 살아오신 지난하고 어려웠던 시대를 소재로 작품은 일기장처럼 무덤덤하게 전개하고

있는데 작가와 같이 대 작가분들이 더 이상 이런 주제를 축으로 하는 작품을 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나온 이문구의 관촌수필’,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김원일의 마당 깊은

혹은 늘 푸른 소나무(10)’,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같은 작품으로 부모님들의 어려웠던

시기의 이야기는 충분하다고 여겨져서이다.

- 나도 어느 정도 작품 속 배경이 되고 있는 생활을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

또 다른 측면은 어렵고 힘든 시절의 이야기가 신세대 독자들에게 얼마나 호소력 있게 다가 설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이런 작품으로는 그런 세월을 살아오신 일부 기성세대들

입맛을 맞추고 그런 독자들에게 과거의 삶을 회상하게 해 줄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신규 독서

인구를 새롭게 창출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요즘의 젊은이들이나 학생들에게 부모 세대가 경험했던 어렵고 가난했던 주제를 갖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 본들 어느 영화의 한 대목으로 이해할 뿐이지 그게 얼마 전 우리들이 살아왔던

세상 이야기라는 점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독서 인구의 저변을 넓히려면 이런 류의 작품보다는 좀 더 참신한 소재가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

- 실제적 역사 이야기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진다. 우리 부모들이 겪은 가난과

  어려움을 역사의 한 범주로 넣어 판단한다면 할 이야기는 없겠으나 단순한 가난과 어려움만을

  극화시키는 이야기로는 취업문제, 내집 문제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세대에게 공감을 못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내가 그랬고 당신이 그랬듯이 내 앞의 현실이 지난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부모세대의 고난 역시 해결책이 아닌 쓸데없는 잔소리로만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 

 

초등학교 시절 서울의 중심부에 살았었지만 정말 점심시간만 되면 도시락 대신 수돗가에서

허기를 채우던 친구들이 있었으며, 한 학급 학생수가 거의 90명이다 보니 휴식 시간에 화장실

가는 게 데모 군중 속을 뚫고 다니는 듯 했었던 시절이 있었으며 채변 봉투와 쥐꼬리를 의무적

으로 제출하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엔 다른 동네로 이사해서 동네 또래 친구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정작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나와 이웃집 친구 외에는 없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하나 밖에 없는

외길로 거기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학생, 좌로 방향을 틀면 연탄 공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언제나 나와 친구만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동네의 또래 친구들은 전부 좌향좌하여 공장으로

출근하는 그런 동네였고 삼일이 멀다하고 동네 사람끼리 머리채를 잡고 싸움이 벌어지던 그런

동네였다.

고등학교 시절은 대학만이 살 길이라는 일념 속에 다른 것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추억이나 기억이 별로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동네에 아이들이 무지 많았던 기억과 함께 서울 변두리다 보니 집집마다 시골에서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해 뭔가 이뤄보겠다고 힘차게 살아가던 어느 작품의 주인공과도 같은 봉순이 언니들도 상당히 많이

보이던 시대이기도 했었다.

학교에서는 선배와 선생님들로부터 툭하면 얻어맞은 기억 밖에는 없다.

- 당시 학교에서의 구타는 일상화 된 행사와도 같은 시기였으며 학생들에게 행해지던 구타가

  당연시되던 시대로 기억되는데 지금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했었고 ROTC를 거쳐 대기업에 입사해 결혼도 할 수

있었고 자식들도 두었다. 그리고 어언 30년이 흘러 정년퇴직하고 한 권의 책도 썼으며 경쟁력

있는 유망 중소기업에서 제2의 길을 걸었으나 그것도 잠시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고 나가라고 해서 지금은 집에서 책과 글 쓰기 그리고 잠깐잠깐 운동하며 소일 거리를 찾고 있는 이 시대의

평범함을 가장한 베부른 실직 가장이다.

내가 살아온 궤적을 작품과 같은 방식으로 풀어 보니 작품 내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조용히 입가에 미소만 지어질 뿐이다.

하지만 작품 행간에 숨어 있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절절한 애환은 작가가 아니고는 또 작품 속 주인공이 아니고서는 절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은 이를 긍정의 힘으로 승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어느 작가분께서 황 선생님을 황구라라고 칭하시면 그 분의 창작에 대한 열의를 잘 표현해

주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분이 동료 작가들로부터 그렇게 불리웠던 이유는 아마도 이 땅에 살면서 누구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북으로, 남으로 다니시며 정말로 많이 체험하고, 들으시면서 집필

하셨던 손님’, ‘개밥바라기별’, ‘여울물 소리등과 같은 작품을 통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를 극복하는 해법을 제시하려 노력하시다 얻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추억과 그 추억 속에 옹심이처럼 박혀있는 눈물겨운 고난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의 그 모든 것을 어렵고도 힘든 추억으로만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그리 바람직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음은 물론 남은 인생을 그런 과거에 얽매어 산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서두에 작가와 같은 대 작가님은 본 작품의 주제와 같은 내용의 작품을 앞으로 저술하지

말아달라고 주장한 이유는 더 이상 이런 작품을 통해 부모세대가 사셨던 어렵고 힘든 시대를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부모 세대가 겪으셨을 고통으로 인해 유, 무형으로 제약받을 수 밖에

없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이를 떨쳐 일어나자는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 부모 세대가 겪었을 그런 어려움이 이 땅에서 재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또 우리 모두의 희망과 꿈을 그리고 모두가 잘 어우러져 사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자는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지 이런 작품이 식상하다

던가 의미가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시 말해 좀 더 적극적인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런 책이고 작품이라면 한 사고 안 읽으면 되는데 뭔 외침인지 모르겠다.....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고 했으니 그렇게 살면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해 보지만 선생의 작품에 자꾸 손이가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항시 이런 작품을 접하면 느끼는 좀 생뚱맞은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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