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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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은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우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욕의 역사 한 페이지를 기록

하게 한 100년이 되는 그런 해였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경술국치"를 단순히 친일파들에 의해 일본에 나라를 팔아 먹은 날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지, 그런 사건이 왜 생겼고, 그 때 우리의 위정자들은 무엇을 했으며, 우리에게는 진정 문제가 

없었는지 등에 대한 자기반성은 철저히 외면한 채 모든 것이 '다 네 탓이다!'라는 자세로 우리의 굴욕사를 

해석해 왔고 자위해 왔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당시를 반성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고 있는 가운데 본 작품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조선의 망국사에 대해 개인적으로 여러 의문이 있어 접하게 되었다.

망국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저자는 이런 말씀을 작품 중간(127)에 하고 있다.

 

[실패를 반성하는 자세 자체에 반성할 만한 하나의 추세가 있다.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그 원인만 아니었다면 실패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낙관적 성향이다.

특정한 원인만 없었다면 성공이 당연한 것이었다고 보는 환원주의적 관점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잘못된 일을 반성함에도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데는 특별히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반성에도 자아비판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작용한다. 반성에 인색한 자세는 실패를 

극복하지 못한 자세이기도 하다. 실패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은 과거의 허물을 부끄러워는 할지언정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투철한 반성은 실패 극복의 조건이면서 또한 극복의 증거이도 한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서 전통은 자산이면서 부채이기도 한 것이다. 부채의 측면이 부담스러워서 전통을 

부정하는 사회는 스스로 종속 변수의 위치를 찾아 주변적 존재가 된다. 부채의 측면도 기꺼이 짊어지고 

앞길을 찾아 나가는 사회가 역사의 주체가 된다.]

 

아마도 상기의 글은 본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을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치욕적 역사적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문외한들에게 많은 관점과 지식 그리고 시대적 흐름에 대한 

이해를 제고시켜 주고 있는데 단원 하나하나가 무슨 역사 논문인 듯한 착각이 들게 하였으나,

일부 대목에 있어서는 자칫 저자가 친일, 친미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느낌과 함께 조선 왕조 최고의 비운의 

임금으로 평가되고 있는 [고종]에 대한 과한 폄하성 발언은 사건의 사실 여부를 떠나 내게는 그렇게 개운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작품을 다 읽은 지금, 수 백 년에 걸쳐 융성해 왔던 한반도의 마지막 왕조인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첫째, 임진왜란으로 인해 기본적인 국가 기강이 와해 되었고

둘째, 한반도를 둘러 싼 주변 국가들의 급진적인 변화에 둔감하였으며

셋째, 변화를 거부하고 외면한 기득권 세력의 짧은 안목

등의 요소가 시대적, 환경적 요인과 어우러져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작품 후반부에 저자께서는 강력하게 [고종]의 근시안적이고도 치졸한 행태에 대해 힐난을 하고 있는데

나는 솔직히 저자의 그런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다.

[고종]을 현대 지도자적 자질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절대적으로 결함도 많고 좀 부족한 임금일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국가를 그렇게 내 팽게치는 수준으로 관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역사는 어디를 보아도 임금이 권좌에 오른 순간부터 최고의 사부를 붙여서 왕의 신분에 걸 맞는 교육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책임지도록 성군이 되는 교육을 했으면 했지 임금이 사리사욕을 채우도록 교육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고종]을 거의 시정 잡배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반론의 증거가 바로 [고종] 자신이 주도했던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

저자가 주장하시는 그런 수준의 임금이었다면 차라리 일본이나 러시아 등 기타 열강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받치고 안락한 노후를 보장 받았을 것이다


작품을 읽으며 [고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기득권 세력인 외척들이 활개치는 조정에서 좀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고 고르고 고른 마누라 일파가 오히려 

더 난리를 치니 속이 뒤집어 졌을 것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외척들의 온갖 비리에 대해 정보를 얻었으나 

더 이상 [고종]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궁궐 내에는 여러 권력들이 얽히고 설킨 채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고종] 혼자만의 힘으로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고종]은 자신과 나라가 처한 상황에 몹시 힘들었을 것이고 애틋한 부부간의 정도 남아 

있지 않았음은 물론 마누라도 싫었을 것이다. 그러다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마누라(민비)가 죽자, 그간 마음에 두고 있던 상궁을 곁에 두고 조금이라도 안위를 받으며 생활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종]은 한 사람의 개인이기 이전에 나라의 얼굴이라는 생각에서 스스로 이를 타파할 자구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서구의 개화문명을 들고 들어오는 세력에 맞서 신 문물을 조금이라도 배웠음직한 인력을 과거를 

통해서 뽑지 않고 인물 천거 방식으로 뽑아서 신문명 세력들과 대응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기득권들의 천거에 의해 신규 인력들이 궁궐에 들어와 보니 [고종] '지는 해'요 서양 열강과 기득권은 

'뜨는 해'라는 것쯤은 금방 파악하였을 것이고,

천거된 인력들은 기득권층과 이해관계로 뭉쳤을 것이다

[고종]에게 힘이 되어 달라고 뽑아 놓은 놈들을 중용해 보니 외국 편이 되어 헛소리만 삑삑거리기만 하고 

도대체 도움이 되지를 않고 오히려 기득권층에 달라 붙어 호가 호위하는 모습에 정말로 역겨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고종]은 정말 답답했을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줄 집단과 후원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망연 자실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권위가, 지시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또 사사건건 제약을 거는 집단을 향해 경고의 

의미로 국가를 상징하는 '옥쇄'도 내 던졌던 것이다. 그것도 안 통하자 [고종] 최후의 수단으로 세상과 

주변의 인맥들과 싸우기 보다는 그들 속에서 우선 살아 남아야겠다는 선택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종]의 주위에 있던 일단의 무리들은 [고종]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과 술수에 능한 놈들이 나타나 [고종]을 

돕는 척하고 온갖 교설을 부려 [고종]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였을 것이다

어느 날 야비한 기득권 층 속에서 살아 보겠다고 비굴하게 변한 자신을 돌아 본 [고종] 이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자성 속에 정면 돌파를 추진하게 된다.

그래서 [고종]은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의 열강들에게 진정으로 도와 줄 것을 요청하며 '헤이그'에 밀사까지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나 열강들은 아시아의 소국인 조선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만주로의 진출을 

꿈꾸던 러시아와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일본에 의해 망국의 길로 접어 들고 만다.

 (작품을 근간으로 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 식으로 정리한 것임)

 

저자께서 작품을 쓰실 때 모든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작품을 쓰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몇 가지의 사실과 증거를 갖고 '그럴 것이다'라는 주장을 포함해 유추한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몇몇 사항에서 왕으로서의 행동답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종]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 솔직히 기분이 별로 

안 좋다. – 나는 이씨도, 왕가의 자손도 아닌 그냥 단순한 평민 출신의 후손임 -

 

그렇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계백 장군'께는 정말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인터넷 어디를 뒤져도 계백 장군의 출생년도 및 살아 생전의 

공과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는데 '황산벌 전투'만 갖고 현대적 '명랑화' -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를 읽은

분들은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 를 너무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계백 장군이 전장에 출전하기 전에

행한 행동과 관창에게 보여 준 행동을 임의적으로 해석해서 나도 이런 이야기를 꾸며 보았다.

 

황산벌 싸움에 나서기 직전 계백장군이 자신의 가족을 도륙 했는데 사실은 계백 장군 역시 당시 의자왕에 버금가는 바람둥이였다고 한다. 백제가 멸망하면 자신의 부인이 다른 놈의 처첩으로 가는 게 싫어서 부인을 

죽이고 전쟁터로 나갔는데, 첫 전투에서 부하들이 생포해 온라의 젊은 군사(관창)를 조사하다 보니 목에 

걸고 있던 '옥 구슬'이 자신이 한 창 젊은 시절래 신라로 넘어 가 놀 때 어느 젊은 처자와 짧은 사랑을 

나누고 올 때 주었던 사랑의 증표임을 알고는 당시 그 여인을 생각해 그 놈을 풀어 주었다

이 놈은 자신이 왜 풀려 나는지 영문도 모른 채 풀려 났다가 전후 사정을 들은 자신의 사령관에게 작살나게 

혼난 후 '너 여기서 맞아 죽을래 싸우다 죽을래'라는 협박에 못 이겨 계백의 진영에 재차 진격했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어떤가?

계백의 가족 살해 현장에, 관창과의 전투 현장에 없었던 입장에서는 당시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몇몇 가지의 정황을 가지고 모든 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종]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채, 역사적 몇몇 사실만을 갖고 해당되는 사람과 사건에 대해 일방적

평가를 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도 한 나라의 임금을 말이다.

 

분명 [고종]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는 여러 군데 있었다.

그 실수를 악용해 결정타를 날린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을사 오적'이었고 '시대적 상황' 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이 한 권의 작품으로 우리 조선의 흥망사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소견이다 시간을 두고두고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역사적 진실이기 때문에 심층적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고종]만이 나빴다는 이야기는 비록 역사에 문외한이고 이씨 조선 문중과 전혀 관계

없는 나이지만 좀 받아 들이기가 어려워 이렇게 강변 아닌 강변을 저자께 드려 보는 바이다.

 

어쨌든 작품으로 돌아 와서 '조선 망국사'의 배경을 논하기 전에 또 그 원인을 이야기하기 전에 동 시대 

주변국의 상황을 간략하게 나마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일부 내용은 축약해서 또 일부 내용은 

2~3개 단원을 묶어서 여기에 내용을 요약해 본다.

 

[중국의 상황]

- 15세기 말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16세기 초 인도양과 남 중국해까지 유럽인의 항해 활동이 

  확장된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런 현상의 밑바탕에는 16세기 초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그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데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개혁적 측면을 대표하는 단체가 [예수회] 였는데, 1540년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새로운 사업인 '교육' '해외 선교'사업을 활발히 펼쳐 나가게 되는데

  예수회 창시자의 한 사람인 포르투칼인인 '사비에르'는 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아시아 선교 사업의 길을 

  연다. 사비에르는 아시아 선교 사업의 궁극적 무대를 중국으로 보았고 그 후계자들은 이를 이어받아 

  중국 선교를 지상 과제로 삼는데 사비에르 사후 포르투칼이 마카오에 항구적 거점을 가지게 되면서 중국 

  진출을 위한 선교사들의 전진기지가 된다.


- 1583 '마테오 리치'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중국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교회 입장에서 보면 중국 선교의 개척자였고,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과 동아시아 문명간 접촉의 

  수준을 일거에 끌어 올린 거인이었다.

  마테오 리치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서라도 지배 계층을 포섭하는 것이 궁극적 성공을 바라볼 

  길이라는 전략을 세워 사회 주류를 선교 대상으로 삼았고, 종교적 진리를방적으로 주장하기보다 

  기독교와 맺어진 유럽 문명의 훌륭한 점이 중국 지식층의 인정을 받게 하는 작업에 매진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중국에서 벌어진 아편 전쟁(1840 ~ 42)은 서세동점의 불가항력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상황]

- 명나라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을 불신해서 교역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본은 유럽인의 중개무역을 계속 

  필요로 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사상에 영향을 끼치는 기독교 선교는 용납 수 없었다.

- 1600년대 들어 일본에 모습을 나타낸 네델란드인과 영국인들이 포루투칼인의 역할을 넘겨 받게 되고 

  막부의 통제 편의를 위해 외국 무역 주체를 단일화하는 과정에서 영국의 양보로 외국과의 접촉 대상은 

  네덜란드로 단일화되면서 이후 200여 년 동안 일본의 서양인 접촉을 독점하게 된다.

-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근대화의 성공에 자부심이 넘칠 때, 란카쿠(蘭學,서양학문) 전통을 성공의 

  중요한 이유로 내세웠다.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이 1890년대 이후 격화되는 데는 만주로의 진출을 꿈꾸던 

  러시아가 일본을 거들어 준 데 그 원인이 있다.

 

[조선의 상황]


1. 어떻게 조선은 시들어 갔는가?

 - 15~16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는 유교 정치 질서가 적합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왕조 아래 한국 사회가 누린 안정과 번영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많지 않은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조선의 망국은 그 사이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느 사회의 변화에서도 전통을 등지는 개화는 '자기 부정'이라는 정체성의 질곡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개화의 성공은 바로 식민지를 향해  가는 길이다.

 

  (외교권의 난맥상)


  - 한 세기 가까이 몽골의 지배기를 거치면서 고려라는 왕조는 크게 망가졌다.

    왕조 교체를 단순히 임금의 성만 바꾸는 것으로는 안 될 정도로 망가져 나라를 새로 만들 정도의 큰 

    변화가 요구되었다. 고려가 망가진 첫 번째 이유는 안보를 원나라에 의지해 오랫동안 도외시했고 

    원나라에 더 이상 의존하지 못하게 된 '공민왕' 때에야 본격적인 개혁이 추진된 되다가 기득권의 반발로 

    좌절되고 만다.

 

  -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궁극적인 이유는 '조공 관계의 의리"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을 축으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예절의 관계에서 힘의 관계로 넘어가게 된다.

 

  (세력화된 사림)

  - 학자로서의 '송시열'의 업적은 어떠한지 몰라도,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까운 인간 관계까지 번복한 

    그의 행적을 보면 정치가로서는 극심한 파벌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의 지식층은 현재의 권력에 매몰되어 미래에 대한 준비를 너무 적게 하고 있었다


  - '훈구'와 '척신'은 왕권에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왕권과 거리를 가진 사림의 팽창은 국가의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사림 성장의 발단 요인은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지 않음' 있었다. 땅바닥에 굴러 다니던

    왕의 권위를 완전히 박살내 버린 것이 '인조'이다

    송시열는 사림의 권위가 권력으로 변질되는 단계를 대표한 인물이다.

 

  (서민의 생활)

 - 왜란 후 호구 파악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호구보다 파악이 쉬운 농지를 부과 대상으로 

   하는 대동법이 제안되었다. 대동법은 중세 체제를 벗어나는 발전의 열쇠이면서 전통적 명분의 포기라는 

   이면성을 가진 갈림길이었다. 조선 정부는 대동법조차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개항기를 맞았다.

 

 - 임진란 이후 충격에 따른 파괴를 수습해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노선이 산당(山黨)었다면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질서를 벗어나가자는 노선이 한당(漢黨)이었다. 산당의 원리주의 노선이 득세함으로써 

   조선이 적절한 발전의 길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 유교적 정치 원리는 경쟁이 격화되었던 춘추전국 시대에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국 시대까지 현실 정치에서 큰 힘을 쓰지 못하던 유교가 한나라가 안정된 후에 통치의 중심 원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제국의 질서가 경쟁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신권과 왕권의 힘겨루기)

  - 사림의 권위를 확고히 세운 이가 조광조이다.

    그가 '도학 정치'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왕권의 쇄신을 꾀하다가 '기묘사화'절된 이후 

    그의 뒤를 잇는 정치 이념 탐구는 재야 사림의 당당한 과제가 되었다. 지배 집단이 권력 투쟁에 

    매몰되면서 정치와 학문이 모두 선명성 경쟁에 매달리게 되었다. 학문에서도 실용적 경세론보다 시비에 

    집착하는 정통론이 일세를 풍미했다.


  -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림의 권위가 자라나면서도 왕의 권위를 보좌하는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왜란을 겪는 동안 왕의 권위가 급격하게 하락한 결과 광해군 때는 왕이 사림의 권위에 의존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숙종이 키운 왕권은 권위가 아닌 권력일 뿐이었고, 그 권력도 왕권의 기반을 키우는 건설적 노력이 아닌 

    신하 집단들의 이간질이라는 파괴적 노력으로 얻은 부실한 것이었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가장 

    미약한 왕권을 물려받은 임금의 하나였다. 숙종 말년에 영조 초년에 걸친 최악의 당쟁 양상은 다른 

    무엇보다 숙종이 정치를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든 탓이었다.

 

  (정조의 권도정치)

  - 세도정치의 주체가 세도가였던 것과 달리 정조의 권도정치는 왕이 주체였다.

    19세기의 권력자는 부패를 억누르려 애쓰기는커녕 권력 유지와 확대에 오히려 부패를 이용하게 되었으니 

    총체적 난국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학의 좌절)

  - 실학 형성의 배경으로 외래적 요인과 내재적 요인으로 구분해서 이야기하는데, '외래적 요인'이라면 

    청나라의 고증학이나 중국을 통해 소개된 서학에 자극 받은 측면을 이야기하고, '내재적 요인'이라면 

    조선 국내에 제반 변화, 특히 사회 경제적 여건의 변화에 의해 촉발된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 실학(수사학)의 학풍은 정통론과 명분론에 매달린 주류 성리학의 퇴행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이데올로기의 모색 노력이었다.

 

2. 어떻게 조선은 쓰러져갔는가?

  - 19세기 후반에 일본을 경유해 한국을 덮친 서양 근대문명은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한국보다 덩치가 큰 중국조차 그 위세 앞에서 1840년대 경부터는 자세가 흔들리고 1860년 경부터는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위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조선이 아무리 

    굳건한 체제를 지키고 있었더라도 정체성의 큰 훼손과 그에 따른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망국의 두 단계)

  - 천하 체계의 붕괴가 완전히 확인된 계기는 청일전쟁(1894~95)이었다

    이 체제의 붕괴는 개별 국가의 쇠퇴와 멸망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존재 양식을 청산하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공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존재 양식도 이로써 단절을 맞게 되는데

    여기에 조선 망국의 큰 의미가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것이 한 단계이고 나머지는 새로운 생태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실패 즉, 좌절이 또 다른 단계였다.

 

  (실종된 왕권)

  - 이조원의 옥사는 국왕에게 조차 세도 정치에 대항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 준 사례이다

    또한 왕실의 예법은커녕 양반다운 교육도 받지 못한 '강화도령(철종)'을 왕위에 앉힌 것은 똑똑하고 

    힘 있는 왕을 귀찮아 한 당시 세도가의 취향을 보여 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렇듯 세도 정치의 폐해가 그 정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 권력 투쟁이 정적의 목숨을 노리는 사태는 조선 전기부터 간간이 있었으나 이것이 권력 투쟁의 일반적 

    양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숙종 때의 일이었다.

 

  (대원군의 몸부림)

  - 대원군은 국가의 기본 질서를 세우기 위해 서원철폐를 감행한다 한편으로는 당시 기득권 층으로 많은 

    인재를 거느린 '안동 김씨', '풍양 조씨'에 대항하기 위해 '전주 이씨'를 종친 우대라는 명분으로 관직에 

    대거 끌어들였다. 특히 노론 명문가의 하나인 '여흥 민씨'를 외척으로 힘을 키워 주었다. 그 결과 대원군의 

    처남이면서 민비 집안으로 입양되어 민비의 오라버니가 되고 대원군 실각 후 권력을 민승호가 쥐게 된다.


  - 대원군 실패의 원인 한가 중요한 문제점이 왕이 '경연'을 하지 않은 것이다

    '경연'은 스킨 쉽을 통해 군신간의 신뢰와 충성을 강화하는 것은 부수적 효과다. 왕세자의 경우는 경연의 

    축소판인 '서연'을 군왕 교육의 중심으로 잡는다.

 

  (임오군란, 박영효, 김홍집)

  - 대원군은 민씨의 허수아비가 된 것이다. 임오군란(1892)까지 계속된 민씨 세도기에 조선 국가 체제의 

    부패는 극에 달했었다.


  - 군대를 주둔시켜 무력으로 조선 정부를 통제하고 국왕의 아버지를 황제가 심문하겠다고 데려간 것은 

    전통적 관계의 포기였다. 조선과의 '특수 관계'를 전략적 이점을 이용할 생각 , 그 특수 관계의 본질적 

    가치를 도외시한 조치였다.

    내적으로는 국왕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하는 상황이었다.


  - 박영효는 친일파 중에서도 '저질 친일파'의 행적을 남겼는데 1884년 이후 박영효의 행적 중에서 

    갑신정변보다 더 화끈한 친일 행위를 찾을 수 없다. 갑신정변은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게 된 조선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례이다.

 

  - 박영효의 행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과 조선의 관계'보다 '일본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앞웠다는 

    점이다.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달아난 박영효를 대신해 김홍집이 아관 파천 때 '친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청일 전쟁 후 갑오개혁의 진행 속에 김홍집이 친일 행적을 한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의 친일은 

    주제성 있는 친일이었다.

    즉, 청일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쫓겨 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주도권을 대세로 받아 들였다. 일본이 

    요구한 '개혁' 수행에 김홍집이 앞장 선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을미사변)

  - 1864~73년 세도 정치의 틀을 따르면서도 극단적 쇄국 정책과 함께 전례없이 강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 

    대원군 집권은 위기에 대한 첫 국가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 1891년 이후 민씨 세력 수령으로서 당대 으뜸의 탐관오리로 명성을 날린 민영준(후에 '민영휘로 개명)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민영준은 원세개의 조정을 받아 동학혁명 진압을 위한 청나라 출병을 요청을 

    주도하여고, 청일 전쟁의 도화선을 제공한 장본인으로서, 나중에는 일본 쪽에 붙어 합방 후 작위까지 

    받는다. 청일 전쟁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서 최대의 경쟁자를 물리쳤다.

  

  (왕 노릇을 거부한 고종)

  - 미국 공사 '알렌'은 "내 일찌기 구만리를 돌아다녔지만 상하 4천년에 한국 같은 이는 처음 보는 

    인종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 갑오개혁과 아관파천을 거치는 동안 조선의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정통과 관료의 비중이 계속 

    떨어져 갔다. '개화 관료'라 하여 과거를 거치지 않고 외국어나 기술을 갖고 채용된 사람들 그리고 

    왕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바치는 친위 세력의 비중이 커졌다. 왕 자신이 전통적 덕목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변화가 빠르게 일어났고, 전통적 덕목을 대치할 근대적 덕목이 갖춰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긴장이 줄어드는 '도덕적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었다.


  - 아관파천은 조선의 조정이 고종의 수준에 맞춰 하향 평준화를 이루는 결정적 계기였다.

  

3. 어떻게 조선은 사라져갔는가?

  19세기 후반 산업화의 확장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경쟁 열기가 전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승패의 

  결정적 열쇠는 근대국가의 효율성에 있었다.

  독일처럼 급조된 국가라도 근대적 효율성을 갖추면 강자가 되었고, 러시아처럼 오래된 국가라도 그러지 

  못하면 약자가 되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오래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닥쳤다

  식민지가 되었다는 '결과'보다 식민지가 되던 '과정'을 더 세심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나 지금이고 사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일차적 요인은 힘 있는 사람들의 행동양식이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극단적 정통론에 집착해 사회의 생산성과 건강을 해친 것이 바로  '독단' '독선

  때문이었으며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고종의 인품에 관한 것으로 고종은 술수와 책략에 사족을 못쓰는 

  임금으로 평가하고 있다.

 

  (외세 줄 서기)

  -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부가 전복되고 중요 인물 몇이 살해 당한 후 고종의 자의적 통치를 견제할 수 있는 

    국내 정치의 매커니즘이 사라졌다. 고종의 절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은 외세뿐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개인적인 야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독립협회를 이용했다가 나중에는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 대한제국의 건립은 권력 사유화의 절정이었다.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궁내부가 비대해진 것이 그 단적인 징표였다.

 

  (중국과 일본의 행보)

  - 중국은 1840년에 서양 열강으로부터 본토 침략을 당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개항 6년 후인 1882년부터 

    외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에는 그처럼 강한 외세의 작용이 없었다

    특히 개항에서 유신에 이르는 14년간 일본은 거의 아무런 외부 위협을 겪지았다. 또 한가지 일본이 

    개화에 유리했던 점은 중국과 조선 같은 중앙집권 체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내는 

    혼란스러운 과정에 외세의 과도한 작용이 없었던 것이 일본 성공의 결정적 조건이었다.

 

  (의병의 출현)

  - 순수한 농민들의 봉기는 '의병'보다는 '민란'이나 '농민 항쟁'으로 규정되기 쉽다

    지도층이 주도하는 항쟁이라야 '의병'으로서의 명분을 명확히 표현하고 또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병이란 위기에 처한 체제 지도층의 대응 방식이다.


  - 우리 사회에서 의병의 역사적 의미가 충분이 인식되지 못하는 이유 

    첫째, 의병의 존재가 국면 전개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했고 

    둘째 의병 운동의 위정척사 사상이 시대 변화의 방향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

 

  (고종의 마지막 짝사랑 러시아)

  - 만주에서 러시아가 약간의 우선권을 가지는 대신 조선은 완전히 일본에게 맡긴다는 '신사 협정' 1896 

    2월 아관파천 당시 일본 정부에서도 러시아 정부에서도 양국 간의 절충점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 고종의 대한제국은 중립화를 통해 일본의 야욕을 봉쇄한다는 환상을 오랫동안 추구했다

    그 환상을 실현시켜줄 주체로 어느 나라보다 러시아를 쳐다 봤다. 본에게 요긴한 한국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대신 만주에서 일본의 양보를 얻는 것이 대한 제국에 얽매이는 것보다 러시아의 국익에 더 

    유리한 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은 고종의 개인적 환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 타)

  - 일본이 짧은 시간 내에 열강의 대열에 올라 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데 유리한 

    위치 덕분이었다. 중국 침략은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자라나기 위한 필연의 길이었다

  

  -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와 미국에 의지해 일본의 영향력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려 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을미사변이, 다시 이에 대한 반발로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는 고종의 노력에 주권 수호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권 수호를 하더라도 합당한 방법이 있고 그렇지 못한 방법이 있다. 전형적인 고종의 수법 

    한 가지는 의정부 대신들을 자주 갈아 치우는 것이었다. 본은 대한제국의 정책 결정이 황제가 아닌 

    의정부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질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대신을 자주 바꿈으로써 의정부의 활동이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신들이 자기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 왕조로서의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고 국가가 망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의 하나가 권력의 사유화다.

 

책 속에서 읽는 상식들

- 향초(herb)는 원재료를 거의 그대로 쓰는 것인데, 향료는 재료를 말려서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가루로 빻아 쓰는 것이 보통이다.


-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의사 한 명을 '데지마'에 배치해는데, 이 의사가 일본 란카쿠(蘭學)의 촉매가 되었다.

  란카쿠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은 2년간 체류했던 '카스파르 샴배르거'이며 큰 열매를 맺은 사람은 '필리프 

  폰 지볼트'이다


- 천하 체계를 가르켜 '사대주의'라는 말이 많이 쓰여 왔는데, 이것은 천하 체제의 전복을 꾀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천하 체제의 한 측면만을 악의적으로 폄훼한 것이다

  '사대(事大)'는 약소국이 강대국을 대하는 원리로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대하는 '자소(字小)'의 원리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맹자] '양혜왕 편'에 그 원리가 설명되어 있다.

  【 인()이 아니고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섬길 수 없나니, 그런 까닭으로 탕임금이 갈() 섬기고.....

    (중략).....큰 것이 작은 것을 섬김은 하늘을 기쁘게 함이요,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은 하늘을     

    두려워함이니, 하늘을 기쁘게 하면 지킬 것이요, 하늘을 두려워하면 나라를 지킬 것입니다】


-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가장 큰 이견은 조공 빈도에 있었다. 3년에 한 번씩 오라고 명나라에서는 거듭거듭 

  일렀지만 조선에서는 1년에 세 번씩 가겠다고 뻗댔다. 결국 1410년부터 1년에 세 차례 조공이 상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궁극적인 이유는 '조공 관계의 의리"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을 축으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예절의 관계에서 힘의 관계로 넘어가게 된다.

 

- 임진란 이후 충격에 따른 파괴를 수습해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노선이 산당(山黨)이었다면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질서를 벗어나가자는 노선이 한당(漢黨)이었다


- 유원형, 이익에서 후기 실학의 태두 정약용이 이르는 학통은 실학 발전의 가장 두드러진 흐름이었다

  이을호는 이들의 학품을 수사학(洙泗學)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는 각각 공자와 맹자가 살던 곳의 

  '강 이름'이니 송대 이후의 성리학을 뛰어넘는 원시 유학의 모색이라는 뜻이다.


-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을 맺을 때 의정부 8대신 중 확고히 반대한 것은 '한규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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