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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추천 권유도 5
“‘추사 김정희’하면
정상적인 학업을 마친 사람들이라면 한국의 대표적 서예가 신라 김생,
고려 탄연, 조선 안평대군, 추사 김정희를 4대 명필로 꼽고 있는데, 추사 김정희하면
‘세한도’와 ‘추사체’의 창시자였으며 금석학의 최고봉이셨다”라는 기본적인 상식만을
이야기할 것이고
또 그런 게 정상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위와 같이 우리 역사를 학교에서 배운 상식에 기반을 두고 누군가 역사적 인물에 대해 그분은 이런 점과
저런
점이 훌륭한 분이라고 주장하면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알고 있는 지식이 일천한 상태
에서는 그에 동조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기가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작품을 열기 전까지 ’추사‘라고 하면 그냥 단순하게 ’세한도‘와 서예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추사체‘를 만드신 분이라는 수준 정도로만 알았지 그분이
어떤 분이었고,
무엇을 남긴 족적은 무엇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나 역시 전혀 알지 못하였다.
해당 작품은 나의 그 분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한 몫에 해결해 준 작품이다.
- 그렇다고 내가 역사를 공부하거나 서예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도 그런 분야에 평소 관심이 많아 도전한
것은 아니다 -
’추사‘는 글씨는 물론 차(茶)와 역사, 역사
지리학은 물론 서화, 시, 문장 등 다방면에
뛰어난 한 마디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소유한 능력자‘이셨다.
따라서 추사 선생에 관해 작품에서
얻어 들은 정보를 근거로 그 분의 삶과 업적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려
노력하였지만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러 문화사적 업적에 대해서는 예술적 지식이나
미학적 시각이
일천한 내가 무엇을 파악할 수 있었겠으며 느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술적인 부분은 제외하고
일반적인 사실에 근거한 분석에 집중하며 나름정리해 보려 노력하였다.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들은
네이버나 다른 검색 도구를 이용하면 더욱 더 많은 그 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겨우 작품을 통해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으로 주마간산식 정리를 했을 뿐이다.
작품을 통해 나름 추사 김정희 선생을 파악해 보니
1) ‘있는 집 자손’이었다. 즉, ‘금수저’였다.
34세에 대과에 합격해 출세의 길에 들어선 이유도 있지만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추사의 12촌
대고모가 된다. 즉, 추사의 증조 할아버지(김한신)가 영조대왕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한 가문의
음덕에
힘입어 출세 가도를 걸으나, 암행어사로 활동하던 시기에 잘못된 인연으로(비인현감 ‘김우명’의
비리 보고) 그와의 끈질긴 악연으로 노년까지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
참고로 외가 쪽도 노론의 대가(大家)인 '기계
유씨' 집안으로 석파(이하응, 대원군)는 영조의 현손으로
남연군의 아들인데, 남연군의 양어머니 남양 홍씨가 추사 양어머니 (김노영의 아내)의
친동생으로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과는 이종사촌, 석파 이하응에게 추사는 5촌 아저씨다.
2) 출생이 남달랐다. 모친이
임신한지 24개월만, 바로 밑 동생은 18개월만에, 막내 동생은 12개월 만에
태어났다고 한다.
---> 해당 인물을 영웅내지는 신묘한 능력을 지닌 인간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그런 전설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약간은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항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을 읽어보면 안다)
3) 성격으로 인해 상당히 힘든 삶을 살았을 것으로 보이며
* 나의 견해로는 이 분의 이런 성격으로 인해 후세에 세세히 그 분의 업적에 대한 대중적인 지명도가
낮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바이다.
- 위에서 언급한 끈질긴 악연의 김우명의 상소에 언급되고
있지만 추사를 ‘요사스런 자식’이라고 하면서
‘항상 반론을 가지고서’ 세상을 살아간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말끝마다 ‘그건 그렇지 않다’라며 남을 사갈시
하고
궁지로 몰아붙였던 추사에게는 독선적인 태도가 있었다고
한다
- 추사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관용의 미덕이 부족했고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히 따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을 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추사의
남다른 개성과 자신감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지만 자신의 부친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임금 행차 길에 격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그의 그런 행동도 어떤 댓가도 없이 무위가 되었는데 그런 의미를
잘 생각해 보면 추사의 대인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4) 재능은 주어진 것보다 갈고 닦은 자에게 부여된 신의 선물이다
- 추사는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는데, 젊은 시절 써 놓았던 글이 완벽하지 않다고 하여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이
쓴 글을 모아 불질렀다고 하며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서신들은 운 좋게 남아 있어 전해지고 있는 평범한
글들이라도 한다.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항을 차치하고 개인적인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이 인간 김정희의 속내를 더 쉽게
알 수 있는 사항이라는 생각을 갖고 정리해 본다.
-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추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추사가 활동하던
시대의
조선의 시대 환경적인 분위기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1) 조선시대 성리학은 주로 송나라 성리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발전했다.
명나라 양명학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이 받아들였을 뿐 적극 수용하기는커녕 오히려 배격했다.
2) 조선의 지식인들은 외부 정보에 어두웠고 청조 문화는 18세기 크게 발전했고 고증학이라는 신사조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고 별 관심도 없었다.
일례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캐치플레이즈로 내걸고 고증학을 일으킨 청조학의 개조 고염무의 '일지록
(日知錄)'이
출간된 지 80년이 지나도록 이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 실사구시란 구호는 ‘한서(漢書)’에 나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가 연원이다.
추사는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나라, 송나라로 나눌 필요 없이, 심기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
하게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 하면서 오직 이 실사구시 하나로
학문이 길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추사가 활동할 당시 조선은 성리학의 매너리즘에 빠져 공리공론으로
겉돌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곧 조선 후기에 나타난 실학사상의 한 줄기였다.
4) 조선 후기 실학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
厚生)의 대단히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으로 중국과 관계 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학문의 신경향
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상적 기류가 청나라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고증학'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체계화
되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5) 이덕무를 비롯한 조선의 실학자들은 청나라 고증학에서 사상적
동질성으로 발견하고 깊은 자극을
받았다. 박제가는 이런 사상적 경향을 스스로 북학(北學)이라고 했는데, '북학’이란 '맹자'에
나오는
표현으로 이상보다는 현실, 관념보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6) 북학파의 선봉은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 그 뒤를 이어
초정 박제가가 이어가고 있었으며 청나라와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높은 차원으로 완성한 사람이 추사다.
- 추사의 일생은 보통 5단계로
나누어 이야기한다고 한다.
1) 1786~1809년(1~24세) : 출생에서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청년 수업기
2) 1809~1819년(24~34세) : 대과에 합격되기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3) 1819~1840년(34~55세) : 관직에 있는 21년간의 중년기
4) 1840~1849년(55~64세) : 8년 3개월간의 제주 유배기
5) 1849~1856년(64~71세) : 유배 해제 후 서거까지 8년간의 만년기
- 추사가 청조학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제가의
힘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중국을 왕래하며 사귄 지인들을
추사에게 소개하면서 중국의 저명한 인물들(조강, 서송, 완원, 옹방강
등)과의
교류에 물꼬를 트게하고 있다.
추사(24세)가 연경에서 청조 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있어 절대적 공로자이다 당시 제일인자인 '완원'
(46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 중의 행운으로 완원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세워
자신의 아호를
완당(阮堂)이라 할 정도였다.
'옹방강' 역시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이며 스스로 경학의 대가로 자부하는 연경 학계의 대가로 자부
하는
연경학계의 원로로 건륭 당시 4대 명필로 불리울 정도로 명필이었으며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가
있었다.
특히 직접 운영하는 '석문석루'는 희귀 금석문과 진적이 많아 추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옹방강의 아들(옹수곤)까지 연결된 인연을 갖기도
한다
추사를 좋아했던 헌종이 기거하던 창덕궁 낙선재에 ‘옹방강’ 글씨의 주련과 ‘섭지선’ - 그는 추사가 연경
학계와 교류하는 데 가장 중요한 채널이었다 - 이
쓴 현판이 걸린 데에는 이런 인연이 있다.
- 연경에서 돌아온 추사는 자신이 앞으로 추구할 학예의 길이
‘경학’과 더불어 ‘고증학’ 과 ‘금석학’에 있다는
확신을 세우고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을 우리 현실에
적용, 거기서 이룩한 성과를 연경 학계에
전하는 등
조선 학계는 물론 중국 학계에도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조선 서화계에 새 바람을 불어 넣었고 한편으론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품과 예술사조를 불어 넣었는데 이를 ‘완당바람’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 추사는 안동 김씨(김홍근)이 대사헌이 되지만 10년 전 사건인 ‘윤상도 사건’이 빌미가 되어 안동 김씨의
집요한
공격으로 유배(제주도)를 가나, 그 곳에서 여전히 연경 학계의 새로운 동향과 신간서적을
접하고
있었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제주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 정성으로
중국에서 책들을 구해준 ’우선
이상적‘에게 보답으로 그련 준 그림이다.
1차 제주도 유배가 끝나고 또다시 헌종의 급사로 정치권이
정쟁에 휩쓸리면서 추사의 절친인 ’권돈인‘이
유배되면서
그 배후에 ’추사‘가 있다는 안동 김씨의 모함을 받아 또다시 유배의 길을
떠나는데 그 당시의
나이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예순여섯이었으며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 <세한도>는
추사 마음 속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 (文氣)가 생명으로
화법
만이 아니라 필법과 묵법의 서법까지 보아야 제 가치를 알 수 있다.
즉,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으며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 과정에 서린 추서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 추사는 그때그때의 상황과 심정, 서정에 따라 새로 아호를 짓고 그것으로 낙관하곤 했는데 그 숫자는
무려 200개나 된다고 하며 어떤 아호로 낙관하였느냐에 따라 추사 작품의 편년에 근거가 되고
있다.
작품을 정리하며 드는 생각은 유명인물이든, 영웅이든 간에 한 위대한 인물이 성공하기까지는 반드시 주위에
그 사람을 만드는데 크게 조력한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대표적인 예로 과거에 출판되어 적어도 3번 이상은 읽었던 ‘짧은 갈채 긴 험로”(이덕희 著, 학고재, 학부형이라면 추천 권유도 9, 직장인 상사 추천 권유도 8, 부하는 7 )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뒷 이야기를 살펴보면
“구스타프 말러(카리스마적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타고난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세기적
쇼맨), 프란츠 리스트(피아니스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 (작곡가),
아르투르 루빈슈타인(피아니스), 니콜로 파가니니(바이올린), 예후디 메뉴인(바이올린, 엔리코 카루소(테너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배우, 예술가), 마리아
칼라스(소프라노)” 등 총 12분의 예술적 업적이 뛰어나 유명
예술인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스승, 친구, 부모’ 등과 같은 조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본
작품도 추사에게 그런 조력자가 두드러지게
많이 있었다는 점이
나타나고 있다. 결과론적으로 혼자 똑똑하다고
해서 어떤 분야의 반열에 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에서 얻은 잡지식
-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형(流刑)은 죄인을 먼 곳에 유배하여 격리 수용하는
형벌로 죄질과 죄인의 신분, 유배 장소에 따라 배(配), 적(謫, 귀향갈 적), 찬(竄, 숨을 찬), 방(放),
천(遷), 사(徙, 옮길 사) 등 이름도, 형식도 다양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시행된
것은 천사(遷徙), 부처(付處), 안치(安置) 세 가지였다.
1) 천사(遷徙) : 고향에서 천 리 밖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
2) 부처(付處) : 중도부처의 준말로 유배에 처한 죄인을 정상을 참작하여 귀양지로 가는 도중의
한 곳에서 지내게
하는 형벌
3) 안치(安置) : 주거를 제한하는 형벌
* 본향 안치 : 죄질이
가벼운 자를 고향에 안치하는 것
* 주군 안치 : 일정한
지역을 지정하는 안치하는 것
* 사장 안치 : 개인
별장에 안치하는 것
* 자원처안치: 스스로
유배지를 택하는 안치
* 절도안치 :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안치
* 위리안치 : 천극(栫棘) 죄인이라고
해서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서 살게 하는 안치
- ’구륵본‘이란 비문의 글씨를 탁본하는 대신 글자의 테두리를
정확히 옮겨 그리고 바탕을 먹으로
칠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