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들의 책사 - 조선시대 편
신연우.신영란 지음 / 생각하는백성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 3

작품은 13분의 왕과 함께 국사를 논했던(?) 충신 혹은 악인들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태조 : 정도전과 정몽주], [태종 : 하륜과 이숙번], [세종 : 황희와 맹사성], [세조 : 한명회

와 신숙주], [성종 : 김종직], [중종 : 조광조], [명종 : 문정왕후와 정난정], [선조 : 이이],

[인조 : 최명길과 소현세자], [영조 : 박문수], [정조 : 홍국영과 채제공], [순조 : 정순왕후]

[고종 :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작품에서 언급된 개개인에 대한 업적 및 일부 이상한 인간들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 정리하게 되면 아마도 개인당 하루 정도의 시간을 주어도 다 정리가 안 될

것이다. 나는 이 중 세 분과 관련된 잘 몰랐던 사실과 이면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작품에 대한 소회를 정리하고자 한다.

 

   1. 두문불출(杜門不出)과 황희정승(黃喜政丞)

 

고려가 무너지고 이씨조선이 건국되는데 고려의 많은 유생들은 이신벌군(以臣伐君,

신하가 임금을 치다)'에 분개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 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길수는

없다)’정절을 내세우며 고향을 등진다.

이들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杜門洞)에 모여서 일체 외부로 나오지 않고

살았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이성계는 인재를 널리 모집하지만 인재다운 인재를

구하지 못하게 되자 그 연유를 확인해 본 결과, 인재라고 여겨지는 인물들 대개가 전부

두문동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많은 대신

들를 보냈으나 끝내 그들이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자 태조는 산에 불을 지르고 두문동을 불태워 버린다고 겁박하지만 그들은 내려오길 거부하고 불에 타 숨지고 만다.

그 때 숨진 유생들이 72명이라 하여 "두문동 72"이란 말이 생겨난다.

당시 많은 선비들은 두문동의 인재들처럼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이름은

은거의 상징이 되었고 두문동이라 칭하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생겨났으며 이후 집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사마천의 사기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이성계는 모든 정성을 다해 회유하고 설득하였으나 끝까지 두문불출한 개성 유생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향후 100년간 개성

유생은 과거를 못보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개성 유생들은 생계를 위해 장사를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훗날 그 유명한 "개성상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황희(黃喜)라는 유생도 고려가 멸망하자 처음에는 두문동에 은둔하며 지냈는데

자신들의 이런 행동을 누군가 살아남아서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내부 논의 끝에 두문동

동료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두문동에서 나왔으며 야인생활을 하던 황희는 동료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태종때부터 세종, 문종까지

3대에 걸쳐 왕들을 보좌하는 명재상이 된다.

그는 좌천 2, 파직 3, 귀양살이 4년이나 되었던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세상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질시 속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태종이 등극한 후 형조, 예조, 병조, 이조 의 정랑을

거쳐 도승지의 전신인 지신사가 된 43세경부터 자기 소신을 펼치기 시작 했고 그 후

공조,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태종과 함께한 18년 다시 세종과 함께한

27,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18년이나 하면서 <경세육전>,<국조오례>등을

편찬하여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내치에 힘써 태평성세를 이룩함으로써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등 위업을 달성할수 있게 하였다.

세종 31(1449) 87세에 60여 년간의 관직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3년 후 90세로 한양의 석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종대왕이 문병왔는데 재상을 20년 넘게 지낸 90세 노인이 초가

삼칸집 멍석자리 위에 누워있어 이를 본 세종대왕이 깜짝 놀라 이럴수가 있느냐고 하자

그는 태연하게

늙은사람 등 긁는 데는 멍석자리가 십상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정도에게 들려줄 이야기이지만 오늘을 사는 소위 말하는 리더들은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2. 맹사성(孟思誠)

조선 초기의 문신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후세인들은 맹고불이라 하면 검은 소 등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노인을 연상할

정도로 친근한 존재였다.

성격이 소탈했던 그는 외출할 때면 소 타기를 즐겼고 손수 악기를 만들어 연주했다.

집에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복장을 갖추고 예의를 다해 맞이했으며, 손님에게는

반드시 상석을 내줄 정도로 겸손했다. 실록에서는 그를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조정의 큰일이나 관직에서 일을 처리할 때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황희는 세종 시대의 수많은 업적이 전해지지만 맹사성은 상대적으로 그 업적이

확실하게 기록되지 않았고, 야사를 통해 청백리로서의 소박한 삶과 진솔한 인품만이

부각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음률에 대한 지식과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강호사시가통한 문학적 재능은 성군 세종이 그를 왜 중용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는 공민왕 9맹희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렸을 정도의 효자라고 한다.

그는 정몽주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지만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를 사수하려던 최영의 사돈이었던 그의 집안에 모진 풍파가 몰려왔고 할아버지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일원으로 은거하다 불타 죽었고, 함께 두문동에 머물던 아버지(맹희도)는 충청도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고 아산에 있는 최영의 집에 금곡서원을 세워

유학전파에 몰두하는 한편 아들 맹사성에게 출사를 종용한다.              

 

그는 원칙주의자인 허조와 일벌레 황희사이에서 원만하게 사안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수많은 인재들이 등장하여 새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과학입국의 미래를 다져

나가던 그 시기에 신료들의 개성과 자율 속에서 드러내기 쉬운 아집과 독선을 조율해주는 따뜻한 존재였다.

세종은 즉위 이후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황희와 맹사성, 윤회 등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나누어 담당하게 했다. 성격이 분명하고 강직한 황희에게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부드럽고 섬세한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사교성이 뛰어난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다. 과거를 통한 인재 등용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시켰다.

맹사성은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에 종사했고 평생 임금의 뜻에 따라 조용히 소임을 다했지만 마냥 예스맨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이 말년에 소헌왕후와 영응대군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궐내에 내불당을 설치하려 하자 조선이 유교 국가임을 내세우며 신료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하지만 세종이

권도를 내세우며 완강하게 내불당 건립을 밀어붙이자 임금의 친위세력이던 집현전

학사들까지 끌어들여 맞섰던 인물이다.

 

세종은 우의정 맹사성에게 예악의 정비를 총괄하게 하여 세종 12년에는 제사 아악보와

조회 아악보를 완성하는 등 각종 악보를 만듦으로써 조선의 공식의례음악을 완성시켰다. 또한 세종은 아악의 정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정확하게 연주할 우리의 악기 제작을 독려한 결과 1423(세종 5) 정양과 남급의 노력에 힘입어 금, , 대쟁, , 봉소 등의 악기가 만들어졌다.

이듬해에는 화, , 피리, , 지 아쟁,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도 완성되었다.

세종대에 여진족으로 인해 국경이 혼란스럽자 맹사성으로 하여금 정벌 작전을 주도적

으로 기획하도록 했다. 최윤덕을 중심으로 한 정벌을 완수한다.

맹사성은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지만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엄격했는데 일찍이 김종서의 자질을 알아본 그는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따져 묻고,

방종을 경계함으로써 북방의 사자로 조련시켰으며 이후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해

자신의 뒤를 이어받을 정승으로 추천하기까지 했다.

 

76세의 고령으로 조정에서 물러난 맹사성은 향리 온양에서 노후를 보냈다. 청백리답게

말년은 소박했다. 바깥 출입은 언제나처럼 소를 타거나 걸어 다녔고, 식량은 조정에서

지급하는 녹미(祿米)로 만족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람 정승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노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3. 최명길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했으며 병조좌랑으로 국내 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 사신 일행과의 접촉 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 년 간 복상(服喪)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로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며 그후 이조

참판,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 국력의 나약함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후금과의 강화를

역설하여 화의를 성립시키나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는다.

또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 인조의 생부, 뒤에 元宗으로 추존) 합부(合祔:

신주를 한 사당에 모셔 놓고 한 곳에서 제사지냄)에 따른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우참찬·부제학·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에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할 즈음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지만 조선에서는 절화(絶和: 화의를 단절함)가 높아지는데 그는 당장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면 몇 년 간은 무사할 수 있으니 원망을

불러 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 지적한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고 강화론을 계속 펼친다.

이 해 겨울 이조판서가 되어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지만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한다.

이 때 진행 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 할 정도로 사리명분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청군이 물러간 뒤,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전력을 기우리며 한편 청나라에 사신으

가서 세폐(歲幣: 매년 공물로서 바치는 폐물)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막지만 임경업(林慶業) 등이 명나라와의 내통하고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곤욕을 치르는 등 책임을 스스로 다하다 1645년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陽明學)을 독수(獨修: 혼자서 은밀히 공부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우 장유나, 계자(系子) 후량(後亮) 및 손자 석정(錫鼎) 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 지천집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2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내가 후손들이 오늘도 우러러보는 여러 분의 책사들을 작품이 소개했음에도 굳이 세 분만 여기에

옮겼는지 우리의 위정자들께서는 깊이 숙고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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