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인가 정철인가 - 기축옥사의 기억과 당쟁론 너머의 역사담론 8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 8.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추국(推鞫)의 실행 주체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한 작품으

당심(黨心)에 기초한 당쟁론을 통하여 해당 사건을 볼 것인지,

아니면 반역으로 촉발된 왕조 시대의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인지에 따라

기축옥사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따라서 송강 위관 때 15905월설 = 선조 23년설 = 경인년설

          서애 위관 때 15915월설 = 선조 24년설 = 신묘년설

                                                                이 점에 대한 논쟁을 다룬 작품이다.

 

송강 정철을 독철(毒澈)’이니 간철(奸澈)’로 불리게 한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인

기축옥사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아보면

  

[1589년 동인 권력을 송두리째 흔든 정여립 모반 사건동인이 물러나고 서인

 권력 중심부인 조정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해당 사건을 서인인 정철

 책임자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동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정치적

 사건이다.

 사건의 핵심인 정철은 1589년 과거 급제 후, 노수신의 추천으로 활동하는데 김효원

 (동인)과 심의겸(서인) 사이에 인사 문제가 발생했을 당시 동인(김효원)의 편을 들었던

 일로 동인으로 분류된다.

 정여립은 동인에 들어가 자신의 스승격인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을 헐뜯는데 이로

 인해 선조 임금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 오래 있지는 못한다. 또한 정여립은 서인 측에서

 그를 비난하자 낙향하여 별장에 은둔하여 학문을 강론한다는 미명하에 사람을 모은 후

 당시 변승복 · 박연령 등과 같은 정치 불만 세력을 포섭한다.

 얼마 뒤에 그는 당대에 떠돌던 목자(木子)는 망하고 전읍(奠邑)은 흥한다는 정감록

 나오는 참언을 옥판에 새겨 승려 의연으로 하여금 지리산의 석굴 속에 감추게 하고 

 자신이 우연히 이것을 얻은 것처럼 꾸미고 의연에게 각 지방을 다니면서 왕의 기운은

 전라도에 있고, 전주의 남문 밖에 있다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거기는 바로 정여립이

 출생지.

 마침내 정여립은 반란을 결심하고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모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서울로 진격하지만 사전에 승려 의암의 밀고와 정여립의 제자인 조구의 자백으로

 역모는 사전에 발각되자 정여립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함으로서 사건은 종식된다.

 선조는 사건의 진상조사를 정철에게 맡겨 조사 과정에서 동인 사람들이 다수 제거

 되었는데 3년여 동안 1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기축옥사라고 한다.]

   

상기 사항은 네이버에 나와 있는 사항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정철이 선조의 명을 받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동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다.

 

작품은 정말 정철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느냐에 대한 의심에서

두 역사학자의 논쟁(저자 : 1590년 선조 23, 상대 1591년 선조 24)을 다루고 있다.

 

정철이 주도가 되어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상대자(이덕일 선생)의 주장은

정철이 정여립의 옥사 때 위관(수사 책임자)을 맡아 수많은 동인들을 죽였다

유성룡이 위관을 맡아 이발의 노모와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김장생의 기록은 날조다

등으로 확정적으로 정철의 소행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저자는

선조 244~5월 경 추국의 위관은 유성룡이었고, 5월 어느 무렵에 위관이 다시

이양원으로 바뀌었다. 이때 정철은 이 해 윤3월에 이미 파직을 당한 상태였는데, 선조가

근교가 아닌 강계로 유배갔으니 정철이 추관을 맡을 수가 없었다

또한 김장생이 쓴 송강행록을 보더라도

정철이 유성룡에게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공은 어찌죽였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점을 들어서 정철이 아닌 유성룡의 행위로 보았지만 김장생의 송강행록을 조작이라고

하여 해당 자료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본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송강 정철과 서애 유성룡에 대한 이야기는 본 작품의

내용과 연관성이 적어 여기서는 제외하겠다.

 

왜 이런 논란이 아직도 있는가는 바로 기축옥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서인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임진년 이전의 사초가 춘추관승정원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사건과 관련된 심문, 판결 등이 적힌 자료가 전란 중에 당시의 사관들이 도망가면서

모두 없애 버려기 때문이라고 하며 후일 기자헌, 이이첨 등이 대신하여 자료를

만들었으나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료중 대표적인 사례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서

왜곡이 가장 심하다고 하며 선조실록의 사론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수정한 인물이 40

인데 북인 몇몇을 빼곤 모두 평가절하되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 이이첨본(선조실록)과 이식본(선조수정실록)을 비교해 보면 이식본에서 보완된 주제

하나가 바로 기축옥사관련 기록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정리해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양원이 위관일 때라고, 광해군

일기 (증초본)에 실린 사관의 말에 따르면 서애가 위관일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단 정철은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을 읽은 나는 누구의 주장이 맞다고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입장으로(내가 손을

들어 준들 누가 인정을 하겠는가?) 그냥 학자들의 신념에 찬 각각의 주장을 받아들여 혼자 느끼고 혼자 생각하며 추후 발굴될 사료가 있다면 그것을 기초로 나의 생각을

고쳐가면 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데 일단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송강 정철

선생이 약간은 억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후일 역사적 자료가 더 많이 나와 오늘의 이 분란을 잠재우기만을 바랄 뿐이다.

작품에서 얻은 지식들

 

- 노론-소론이라는 용어는 1682년 숙종 8년 무렵 송시열과 윤증의 인간관이 갈라지며

  처음 등장한 용어라고 한다.

 

- 임진년 당시 몽진하던 선조에게 백사 이항복은 의주로 나아가 있다가 머물러 있다가

  팔도가 모두 함락되면 곧바로 중국 조정으로 가서 호소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유성룡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대가가 만약 우리 동방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기만

  한다면 조선 땅은 우리의 차지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라고 반대하고 있다.(P 123~124)

  ---> 선조에게 이 땅을 떠나라고 건의한 백사의 후손 중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정치인이 있다. 누구일까요? 

- 조선에서는 징역형이 없었고 이라는 것은 형을 받을 혐의자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오늘날로 치면 구치소와 같은 개념이다.

  장기간 옥에 갇히는 경우는 조사 과정이 길어지면서 가둬지게 되는 것으로 징역형이

  아닌 심문대기 상태이다.

 

- 조선시대에 날씨가 더워지는 여름, 추워지는 겨울에는 옥에 갇힌 사람들을 조사하여

  풀어주었는데, 이를 소결(疏決)이라고 했다.  

 

- 피의자가 자백을 하기 전에 죽어서는 안되는데 이를 물고(物故)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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