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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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정신은 정신 그 자체이며, 분석과 형식이 결합된 기적입니다. 문학 정신은 온갖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해력을 일깨워 주어, 어리석은 가치 판단과 신념을 약화, 해소시키며, 인류의 교화, 수놔 및 향상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문학 정신은 최고의 도덕적 세련성과 민감성을 유발하면서, 광적으로 만드는 대신에 회의, 정의 및 인내의 정신을 함양시켜 줍니다. 문학의 정화 작용과 순화 작용, 인식과 언어를 통한 열정의 억제, 이해와 용서, 사랑으로 이끄는 길인 문학, 언어가 지닌 구원의 힘, 무릇 인간 정신의 가장 고상한 션상인 문학적 정신, 완전한 인간이자 성자인 문사." 이렇게 찬란한 어조로 세템브리니는 문학을 옹호하는 송가(頌歌)를 계속 늘어놓았다. 아, 하지만 상대방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보존과 생명을 편들고 천사의 탈을 쓴 해체의 정신에 반대하면서, 천사의 송가를 신랄하고도 멋지게 반박하여 방해할 줄 알았다. "세템브리니 씨가 목소리를 떨면서 말한 놀라운 결합이란 사기이자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학 정신이 탐구와 분류의 원리에 형식을 결합시키려 한다고 자랑하지만 그 형식은 기만적이고 사기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하고 성숙하며 자연스러운 형식, 생명의 형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인간 개선자는 인류의 정화와 순화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지만, 사실 그가 노리는 것은 생명을 거세하고 빈혈에 허덕이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습니다, 정신이며 열정적인 이론은 생명을 능멸할 뿐이며, 열정을 파괴하려고 하는 자는 무(無), 순전한 무를 원하는 자입니다. 물론 순전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어쨌든 무에 덧붙일 수 있는 형용사는 사실 '순전한' 이라는 형용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 진보와 자유주의, 그리고 시민적 혁명의 문사인 세템브리니 씨의 본령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보란 순전한 허무주의이며, 자유주의적인 시민은 엄밀히 말하면 전적으로 무와 악마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보란 악마적이고 절대자에 반하는 것을 신봉하고, 죽음과 다름없는 평화주의를 대단하도고 경건하게 여기면서, 보수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에서 절대자, 즉 신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주의는 결코 경건하지 않으며, 생명을 파괴하는 중죄인으로, 생명의 종교 재판, 엄중한 비밀 재판에 회부하여 호된 맛을 보여 줘야 할 겁니다."(347∼348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군인으로 용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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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 병과 건강, 정신과 자연, 이런 것이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 그런 게 과연 문제가 되는지 묻고 싶어. 아니야,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어느 것이 고귀한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죽음의 모험은 삶 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러한 모험이 없으면 삶이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인간의 상태가 신비스러운 공동체와 미덥지 못한 개별 존재 사이에 있듯이, 신의 아들인 인간의 본성은 그 한가운데, 모험과 이성의 한가운데에 있어. 이 돌기둥 아래서 바라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우아하고 정중하게, 친절하고 공손하게 자기 자신을 대해야 해. 인간만이 고귀한 존재며, 대립은 고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인간은 대립을 다스리는 주인이고, 대립이란 인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대립보다 더 고귀한 거야. 인간은 죽음에 종속시키기에는 참으로 고귀한 두뇌의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죽음보다 고귀한 존재야. 마찬가지로 인간은 삶에 종속시키기에는 참으로 고귀한 정신의 경건함을 가졌기 때문에 삶보다도 고귀하다. 이렇게 나는 하나의 시를, 인간에 관한 꿈결 같은 시를 지었다. 나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며, 선하게 살고자 한다. 나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지 않으련다! 착한 마음씨와 인간애의 본질은 이런 것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나의 위대한 힘이다. 죽음 앞에서는 우리는 모자를 벗고, 발끝으로 걸으며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간다. 죽음은 과거 위엄을 나타내는 장식 깃을 달고 있으며, 인간 자신은 죽음에 경의를 표하며 엄숙하게 검은 옷을 입는다. 이성은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성이란 덕에 지나지 않지만, 죽음은 자유이자 방종한 모험이고, 무형식이자 색욕이기 때문이다. 나의 꿈에 의하면 죽음은 색욕이지 사랑은 아니다. 죽음과 사랑 ㅡ 이것은 배합이 맞지 않으며, 얼토당토않은 잘못된 운이다! 사랑은 죽음에 대립하고 있으며,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한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선한 생각을 갖게 한다. 형식도 오로지 사랑과 착한 마음씨에서 생기는 것이고, 분별력 있고 우호적인 공동체와 인간의 아름다운 나라의 형식과 예의바름은 피의 향연을 조용히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 이렇게 나는 선명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했다! 나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죽음을 성실하게 대하겠지만,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지배한다면, 그 성실성은 악의와 음산한 육욕과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기로 하자.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기로 하자. 이것으로 나는 꿈을 끝까지 다 꾸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나는 이 말을 찾고 있었다. 히페가 내 마음속에 나타난 장소와 발코니에서, 그 어디에서도 말이다. 눈 덮인 산 속에 들어온 것도 그 말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여 나는 결국 찾아내고 말았다. 내가 그것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내 꿈이 더없이 선명하게 제시해 주었다. 그렇다, 그 말을 찾은 나는 환희에 사로잡혀 몸이 완전히 따뜻해졌다. 내 심장은 세차게 고동치고 있으며, 왜 그런지 알고 있다. 가슴이 뛰는 것은 신체의 손톱이 자란다고 하는 단순히 생리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유, 행복한 기분 때문이다. 내 꿈의 말은 포도주나 흑백주보다 더 달콤한 음로수다. 그 음료수는 사랑이나 생명처럼 나의 혈관을 타고 흘러 나를 잠과 꿈에서 깨어나게 한다. 잠과 꿈에 빠지면 내 젊은 목숨이 치명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아, 일어나라! 눈을 뜨라! 너의 다리와 팔이 여기 눈 속에 빠져 있다! 다리를 끌어당기고 일어나라! 자, 보렴, 날씨가 얼마나 좋은가를!(293∼295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눈>

 

(나의 생각)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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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꽃눈이 진짜 눈으로 덮여 버려 크로커스 다음에 핀 푸른 앵초와 노랗고 붉은 앵초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다. 봄은 이곳의 겨울을 제압하고 뚫고 나아가기 위해 얼마나 악전고투를 했던가! 봄은 이곳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 수도 없이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그러다가 하얀 눈보라와 살을 에는 추위 그리고 난방 장치와 함께 다시 겨울이 찾아오는 것이다. 5월 초(우리가 눈꽃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벌써 어느덧 5월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발코니에서 평지의 고향에 보낼 엽서를 쓰는 일은 말도 못하게 고통스러웠고, 11월의 습한 강추위 때처럼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얼마 안 되는 활엽수들은 평지에 자라는 1월의 나무들처럼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연일 비가 내렸고, 일주일이나 계속 쏟아졌다. 이곳과 같은 편안한 접이식 침대가 없었더라면 자옥한 구름 속에서 축축하고 굳은 얼굴로 여러 시간 동안 야외에서 안정 요양을 한다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밖에서 소리 없이 내리는 비는 봄비가 분명해서, 비가 오랫동안 계속해서 내릴수록 그러한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봄비에 거의 모든 눈이 봄눈 녹듯 사라져, 흰눈은 이제 어디서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군데군데 회색으로 더럽혀져 얼음이 된 눈이 있을 뿐, 이제야말로 정말 풀밭이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만날 흰눈만 보다가 녹색의 풀밭을 보니 눈이 얼마나 즐거웠던가!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녹색이었고, 섬세함과 사랑스러운 부드러움이라는 면에서 새로운 녹색이 풀밭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낙엽속의 어린 침엽수였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규정된 산책을 하는 도중에 그것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볼에 문지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의 부드러움과 신선함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식물학자가 되어도 좋겠어." 젊은이는 자신의 길동무에게 말했다. "이 산 위에서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다 보니 식물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 이봐, 저기 산비탈에 보이는 저것은 용담이야. 그리고 여기 이것은 작고 노란 제비꽃의 일종인데 나도 처음 보는 거야. 이것은 미나리아재비인데 평지에서 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이것은 꽃잎이 여러 겹으로 겹쳐 피는 것이 주목할 만해. 이것은 특히 매력적인 식물로, 게다가 자웅동체야. 여기에 많은 화분 주머니와 몇 개의 씨방이 보이지. 내가 알기로는 그게 수술과 암술일 거야. 이런저런 식물학과 관련된 흥미로운 책을 사서 생명 분야와 이런 학문 분야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어. 그래, 이제 온 세상이 그야말로 울긋불긋해졌어!"(44∼46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변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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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천만에요." 베렌스가 대답했다. "그런 생각을 할 여자가 아니지요. 첫째로는 게을러서 그렇고, 둘째로는 대체 어떻게 글을 쓴단 말입니까? 나는 러시아어를 읽을 줄 모릅니다. 정 부득이할 경우에는 엉터리로 어떻게 해 낼 수는 있겠지만, 러시아 말은 전혀 읽을 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리고 그 새끼 고양이는 프랑스어나 표준 독일어도 귀엽게 야옹야옹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막상 글로 쓰려고 하면 당황해 어쩔 줄 말라 하겠지요. 그 정서법이라는 게, 이보시오! 그래요, 그러니 우리 서로를 위로하도록 합시다, 젊은이! 그녀는 늘 잊을 만하면 다시 돌아옵니다. 이미 말했듯이 그건 기법의 문제이자 기질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걸핏하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 어떤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처음부터 장기간 머물지요. 당신의 사촌이 지금 떠나려고 한다면 그가 다시 장엄하게 입성하는 것을 당신이 여기서 체험하기 쉬울 거라고 그에게 좀 말해 주십시오."(26∼27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변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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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다. 실체가 없으면서 전능한 것이다. 현상계(現象界)의 하나의 조건으로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물체와 그것의 운동과 결부되고 혼합된 하나의 운동이다. 그러면 운동이 없으면 시간도 없는 걸까? 뭐든 물어 보라! 시간은 공간이 행하는 기능의 하나인가? 또는 그 반대일까? 또는 두 개가 동일한 것일까? 얼마든지 물어 보라! 시간은 활동적이고, 동사적인 속성을 갖고 있어, 그것은 '낳는' 힘을 지닌다. 그러면 시간은 무엇을 낳을까? 변화를 낳는 것이다! 지금이 당시가 아니고, 이곳이 저곳이 아닌 것은, 이 두 개 사이에 운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재는 운동은 순환적이고, 자체적으로 완결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운동과 변화는 거의 정지와 정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당시는 부단히 현재 속에, 저곳은 이곳 속에 쉬지 않고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한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이라는 개념은 아무리 필사적인 노력을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생각'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분명 이게 사리에 맞을 거리는 믿음에서, 딱히 옳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거라는 믿음에서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을 확실하게 정한다는 것은 한정된 것과 유한한 것을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부정하고, 상대적으로 그것을 영(零)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닐까? 거리, 운동, 변화 같은 개념들이나, 또는 우주 속의 한정된 물체라는 존재가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이라는 임시적인 가정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좌우간 얼마든지 물어 보라!

  

한스 카스토르프는 머릿속에서 이런 것을, 이와 유사한 것을 물어 보았다. 그의 머리는 이 위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에 적합한 본성을 드러냈다. 그 후로 점잖지 못하지만 강력한 욕구를 충족하고 난 후 어쩌면 특히 이런 것에 예민해지고, 이것저것 따지는 데 대담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질문을 자기 자신과 선량한 요아힘에게 했고, 아득히 먼 옛날부터 눈에 잔뜩 뒤덮여 있는 골짜기에게도 했지만,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그럴듯한 대답을 기대할 수 없었다.(9∼10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변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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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9-02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스 만의 이야기가 일전에 oren님께서 말씀하신 베르그송의 시간과도 연계되지 않을까 조심럽게 추측해 봅니다...

oren 2017-09-02 14:00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마의 산』 속에 나오는 ‘시간과 공간 이야기‘를 들으면 흡사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베르그송이 직접 영문으로 번역한 책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을 ‘복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9-0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렇군요.. 후에 <마의 산>을 읽기 전 베르그송에 대해 미리 공부해야겠습니다. oren님 덕분에 학습 계획을 세우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9-02 23:56   좋아요 1 | URL
철학자 베르그송은 여러모로 참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철학 사상도 몹시 흥미롭지만, 그가 구사하는 문장도 여간 매혹적인 게 아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