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대우고전총서 29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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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사랑의 열정에 대한 비판(1058∼1287행)

 

이것이 우리의 베누스다. 그리고 여기서 아모르라는 이름이,

여기서 처음 베누스의 저 달콤함이 방울져

가슴속으로 듣고, 또 냉기 어린 근심이 뒤따른다.

왜냐하면 그대가 사랑하는 대상이 떠나있다 해도, 저 이의 영상이

곁에 머물고, 달콤한 이름이 귓전에 멤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영상들을 피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또 사랑을 키우는 것들을

겁주어 그대로부터 쫓아내고 다른 데로 마음을 돌리며,

모아진 액체를 아무 몸에나 쏘아 보내고

가두지 않는 것이, 그리고 일단 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섰다면,

근심과 특정의 괴로움을 자신을 위해 보존하는 것이.

왜냐하면 속 상처가 활성을 얻고, 자양분을 받아 깊어지며,

날이 갈수록 그 광기가 확장되고, 그 처참함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가 새로운 타격으로 첫 상처를 흩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전에 사람 사이를 떠도는 베누스로써 새로운 그것을 치료하지 않는다면,

혹은 정신의 운동을 다른 것으로 돌릴 수 없다면.

(335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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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대우고전총서 29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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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물리적 근원

 

우리가 앞에 말한 것, 그 씨앗은 우리 속에서

들끓는다, 성년의 나이가 처음 사지를 굳혔을 때.

저마다 다른 것이 다른 것을 격동시키고 들쑤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만이 사람으로부터 나와 사람의 씨앗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자리들로부터 내보내지자마자,

사지와 지체들을 통해 온몸으로부터 떠나서,

힘줄의 정해진 자리로 모여서 곧장

몸의 생식하는 부분 자체를 자극한다.

그 장소는 씨앗으로 인해 흥분되어 부풀고, 맹렬한 욕망이

지향하는 곳을 향해 그것을 쏘아 보낼 욕구가 생긴다.

[이것은 수많은 씨앗으로 부푼 장소를 자극하여 들쑤신다.]

그리고 그것은 저 육체를 좇는다, 그 때문에 정신이 사랑으로 상처입은 그 육체를.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부상을 입은 쪽으로 쓰러지며, 피도

우리가 타격을 당한 바로 그 방향으로 뿜어나가고,

접근전이라면 붉은 핏줄기는 적을 맞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베누스의 무기에 타격을 받은 사람은,

소년이 여성적인 몸매로 그를 맞혔든,

여인이 온몸으로 사랑을 던졌든,

타격이 비롯된 곳, 거기로 향하고 결합을 행하고자

육체로부터 육체로 액체를 이끌어 쏘아 보내고자 한다.

왜냐하면 말없는 욕망이 쾌락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333∼334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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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대우고전총서 29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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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생활과 꿈의 관계

 

거의 모든 사람이 열심히 거기 묶여서 집착하는 것,

또는 이전에 우리가 오래 시간을 썼던 그런 일,

그리고 마찬가지로 마음을 더 많이 쏟아부었던 일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잠잘 때 이것들을 만나는 듯하다.

변호사는 변론을 행하고 법을 비교하며,

장군은 싸우고 전투에 맞서나가고,

뱃사람은 바람과 밀고 당기는 전쟁을 치르고,

우리 또한 이 일을 행하여 항상 사물들의 본성을

탐구하며, 발견된 것을 조국의 언어로써 밝히는 듯 말이다.

이와 같이 다른 탐구, 다른 분야 기술들도 일반적으로, 잠잘 때

사람들의 정신을 헛것으로 붙드는 듯 보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연속해서 여러 날 동안 놀이에

끊이지 않는 관심을 쏟았다면,

그 사람이 감각으로는 그것을 보기를 벌써 그쳤다 해도,

그의 정신 속에 통로들이 열린 채로 남아있어서

거기로 사물들의 같은 영상들이 들어올 수 있는 걸 우리는 자주 본다.

그래서 여러 날 동안 저 같은 것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심지어 깨어있을 때조차, 뛰어오르는 이들을,

부드러운 사지를 움직이는 이들을 보는 듯 생각되며,

키타라의 맑은 노래를, 이야기하는 현(絃)들을

귀로 듣고, 같은 모임을 보며,

무대의 여러 장식들은 동시에 빛나는 것같이 보인다.

열정과 즐거움은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어떤 일에 몰두해 버릇했는지도,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진정으로 그대는 보리라, 강한 말들이 사지를 눕혀 쉴 때,

자면서도 땀을 흘리고, 계속 헐떡이며

마치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를 두고 온 힘을 다하듯,

혹은 마치 출발대가 열리자 <뛰쳐나가기를 원하듯> 하는 것을.

또 사냥꾼들의 개들 역시 자주 안온한 휴식 중에도

갑작스레 다리를 휘젓고, 돌연 짖는 소리를

발하며, 되풀이되풀이 코로 공기를 킁킁댄다,

마치 들짐승들의 자취를 발견해 따라붙듯이.

그리고 자주, 깨어나 사슴들의 헛된 영상을

쫓는다, 마치 도주에 진력하는 그들을 포착하는 듯,

착각을 떨치고 제 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반면, 집안에서 길들여진 강아지들의 재롱스런 자손들은

몸을 흔들며 바닥으로부터 벌떡 일어난다.

[그러면서도 갑작스레 다리들을 휘젓고, 돌연 짖는 소리를

발하며, 되풀이되풀이 코로 공기를 킁킁댄다,

마치 들짐승들의 자취를 발견해 따라붙듯이.

그리고 자주, 깨어나 헛된 것들을 쫓는다.]

마치 모르는 형태와 얼굴을 보았을 때같이.

그리고 씨앗들 각각이 더 거칠면, 그 거친 만큼

자는 동안에도 그것이 더 크게 요동치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다양한 새들은 도주하며 밤 시간에

갑작스레 깃을 쳐 신들의 숲을 소란케 한다,

부드러운 잠 속에서 매들이 싸움을, 전투를

일으키며 날아 뒤쫓는 것으로 보이게 되면.

나아가, 큰 움직임으로써 큰 것들을 내놓는 인간들의 정신은,

자주 자면서 똑같은 것을 이루고 행한다.

그들은 왕들을 쳐부순다, 잡힌다, 전투에 뛰어든다,

고함을 지른다, 마치 도살되는 듯, 고통에 신음을 발하며,

마치 표범의, 혹은 사나운 사자의 이빨에

물어뜯기듯, 큰 비명으로 모든 곳을 채운다.

많은 이들이 자는 동안 큰 주제들에 대해 담론하며,

또 아주 자주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한 증인이 되었다.

많은 이가 죽음을 만난다. 많은 이가, 마치 높은 산으로부터

땅으로 온몸으로 곤두박질치는 사람이 그러하듯

겁에 질리고, 마치 이성을 앗긴 듯 잠으로부터

자신으로 거의 돌아오지 못한다, 육체의 혼란에 뒤흔들려서.

마찬가지로 목마른 이는 강이나 쾌적한 샘 가까이

앉아서, 거의 강물을 몽땅 목구멍으로 집어삼킨다.

순진한 이들은 자주 잠에 묶인 채, 자신들이

호수나 얕은 단지 가까이서 옷을 쳐들었다고 믿으면,

몸 전체로부터 걸러진 액체를 쏟아낸다,

화려하게 빛나는 바뷜로니아 산 침구가 젖어드는데.

그리고 청춘기의 물길에 처음으로 씨앗들이 흘러드는

이들에게, 성숙한 날 자체가 지체들에 그 씨앗들을 생기게 하면,

영상들이 바깥 각각의 몸으로부터 닥쳐온다,

빛나는 용모와 아름다운 색을 전해 알리며.

그리고 이것은 수많은 씨앗으로 부푼 장소를 자극하여 들쑤신다,

자주 마치 모든 것이 뒤집어진 듯 거대한 흐름의

물결을 쏟아붓고 옷을 더럽히도록.

(329∼333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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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기억 대우고전총서 17
앙리 베르그손 지음, 박종원 옮김 / 아카넷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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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어떤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달리 소통할 수 없는, 두 상이한 세계

 

그러나 만일 실재에 대한 이 최초의 세분이 직접적 직관에 답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근본적인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분할을 더 멀리 밀고 감으로써 사물들에 더욱 근접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생명적 운동(욕구의 충족을 의미-역자)을 연장하는 것이고 진정한 인식에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체를 그것과 동일한 본성의 부분들로 해체시키는 이 조야한 작용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다. 즉 우리는 왜 이 분할이 멈출 것인지도, 어떻게 이 분할이 무한히 계속될 것인지도 생각할 수 없다고 곧 느끼게 된다. 이 분할 작용은 실로 유용한 행동의 일상적인 형식을 순수 인식의 영역으로 부당하게 이전한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물질의 단순한 속성들은 입자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결코 입자들에 의해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사람들은 물체가 행하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을 물체 자체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미립자들에까지 추척할 것이다. 화학의 목표가 바로 그러하다. 화학은 물질보다는 물체를 연구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화학이 물질의 일반적 속성을 지니는 원자에서 멈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리학자의 시선 아래서 원자의 물질성은 점점 더 해체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원자를 액체나 기체보다는 고체로서 표상할 어떤 이유도 없으며, 원자들의 상호작용을 아주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충돌에 의해 표상할 어떤 이유도 없다. 왜 우리는 충돌을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고체들은 우리가 가장 명백하게 힘을 행사하는 물체들이어서 외부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야기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접촉은 우리 신체가 다른 물체들에 작용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단순한 실험들만 참조해도 어떤 실제적 접촉도 없이 서로 밀어내는 두 물체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 고체성은 절대적으로 뚜렷한 물질의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고체성과 충돌은 그것들의 외관상의 명백성을 실천적 삶의 습관들과 필요성으로부터 빌려 온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은 사물들의 근거에 관해 어떤 빛도 던져주지 않는다.

 

게다가 과학이 모든 반론들 위에 놓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물질의 모든 부분들이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물체를 구성한다고 가정된 분자들은 인력과 반발력을 행사한다. 중력의 영향은 행성 사이의 공간을 통해 펼쳐진다. 따라서 원자들 사이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더 이상 물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힘에 속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원자들 사이에 평행하게 이어져 있는 선들을 상상하고 그것들이 점점 더 얇아져서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믿게 될 때까지 그것들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야한 이미지가 무엇에 소용될 수 있겠는가? 삶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아마도 일상적 경험에서는 불활성적인inertes 사물들과 그것들이 공간 속에서 행하는 작용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물을 접촉할 수 있을 정확한 지점에 그것의 자리를 고정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사물의 촉지할 수 있는palpable 윤곽은 우리에게 그것의 실제적 한계가 된다. 그 때 우리는 사물의 작용에서 그것으로부터 분리되고, 그것과 다른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본다. 그러나 물질의 이론은 바로 우리의 욕구에 전적으로 상대적인 이 일상적인 이미지들 아래서 실재를 재발견하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선적으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이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힘과 물질이 물리학자가 그 효과들을 깊이 탐구함에 따라 서로 접근하고 다시 결합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힘이 물질화되고, 원자가 관념화되며, 이 두 항들이 하나의 공통적 경계로 수렴하고, 이렇게 해서 우주가 자신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을 본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원자에 대해서 말할 것이고, 심지어 원자는 그것을 고립시킨 우리 정신에 대해 그 개체성을 보존할 것이다. 그러나 원자의 고체성과 관성은 운동들이나 역선(力線)들로 용해될 것이며, 그것들의 상호 연대성이 우주적 연속성을 회복할 것이다. 물질의 구성 안으로 가장 깊게 파고 들어간 19세기의 두 물리학자인 톰슨과 패러데이도, 비록 아주 다른 관점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했음에 틀림없다. 패러데이에게 원자는 하나의 <힘들의 중심>이다. 이 말이 의미한 것은 원자들의 개별성이란 공간을 통해 방사되는 무한한 역선들이 교차하는 수학적인 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각 원자는, 그의 표현을 빌리면, <중력이 전개되는 공간 전체>를 점유하며, <모든 원자들은 상호침투한다>. 톰슨은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관념들에 위치하여 완벽하고 연속적이며 동질적이고 압축불가능한 어떤 유체를 가정하고 그것이 공간을 채우고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우리가 원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 연속성 속에서 소용돌이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속성들을 자신의 형태와 존재에 빚지고, 따라서 자신의 개체성을 자신의 운동에 빚지고 있는 불변적인 형태의 고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쪽 가설에서 우리는 물질의 궁극적 요소들에 접근함에 따라 우리 지각이 표면에 세워 놓은 불연속성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심리학적 분석은 우리에게 이미 이 불연속성이 우리의 욕구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다. 모든 자연 철학이 마침내 불연속성이 물질의 일반적인 속성들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인즉, 소용돌이와 역선들은 물리학자의 정신 속에서는 계산을 도식화할 목적으로 마련된 편리한 형태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철학은 왜 이 상징들이 다른 상징들보다 더욱 편리하고, 더 멀리 나아갈 것을 허용하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 상징들에 상응하는 개념들이 실재의 표상을 찾게 해 주는 적어도 하나의 방향을 우리에게 지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상징들 위에서 작업하면서 경험과 다시 결합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상징들이 지시하는 방향은 의심스럽지 않다. 그것들은 구체척 연장을 가로질러 가면서 우리에게 긴장tension 또는 에너지의 변양, 교란perturbations, 변화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런 사실들에 의해서 이 상징들은 우리가 처음 운동에 관해 제공했던 순수하게 심리적인 분석과 다시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적 분석은 우리에게 운동을 대상들의 관계 위에 우연처럼 덧붙여지는 단순한 변화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실재성으로, 말하자면 독립적인 실재성으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과학도 의식도 결코 다음의 명제에 혐오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지속과 긴장

 

Ⅳ. 실재적 운동은 한 사물의 이동이라기보다는 한 상태의 이동이다.

 

이 네 가지 명제들을 공식화하면서 우리는 사실 단지 사람들이 서로 대립시킨 두 항들, 즉 성질이나 감각 그리고 운동 사이의 간격을 점진적으로 다시 좁혔을 뿐이다. 처음에 그 거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성질ㅇ느 서로간에 이질적이고, 운동은 동질적이다. 본질상 불가분적인 감각은 측정을 벗어난다. 언제나 가분적인 운동은 방향과 속도의 계산가능한 차이에 의해 구분된다. 사람들은 성질을 감각의 형태로 의식 속에 놓기를 좋아한다. 반면에 운동은 공간 속에서 우리와 독립적으로 실행된다. 이 운동은 자신들로 구성되며 운동만을 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운동을 접촉할 수 없는 우리의 의식은 어떤 신비로운 과정에 의해서 그것들을 감각으로 번역할 것이고, 그 다음에 이 감각은 공간 속에 투사되어 자신들이 번역하는 운동을 아무도 모르는 방법으로 뒤엎으러 올 것이다. 거기서부터 어떤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달리 소통할 수 없는, 두 상이한 세계가 비롯되는데,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공간 속의 운동의 세계이고, 다른 편으로는 감각을 갖는 의식이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 자신이 이전에 제시한 바 있듯이 한편으로는 질과 다른 편으로는 순수 양 사이에서 차이는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실재적 운동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단지 양의 차이만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내적으로 진동하는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르르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순간들로 분절하는, 질 자체가 아닌지를 아는 일이다.(332∼339쪽)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제4장 이미지들의 한정과 고정에 관하여>

 

 

 

 

우주적인 변화를 응축하고 있는 것

 

일 초의 공간 속에서 적색 빛ㅡ가장 긴 파장을 가지며 따라서 파동vibration의 빈도가 가장 적은 빛ㅡ은 400조(兆)의 잇따르는 파동들을 완성한다. 이 수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자 하는가? 우리 의식이 그것을 세기 위해서는 또는 적어도 그것들의 순차성succession을 명시적으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그 파동들을 서로간에 충분히 벌려 놓아야 할 것이가. 그리고 사람들은 이 잇따름이 며칠, 몇 달 또는 몇 년을 점유하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그런데 엑스너Exner에 따르면, 우리가 의식하는 텅 빈 시간의 가장 짧은 간격은 천분의 이(2/1,000) 초와 동등하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짧은 여러 간격들을 연이어 지각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무한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인정해 보자. 한마디로 아주 순간적인 400조의 파동들의 행렬을 목격하는 어떤 의식을 상상해 보자. 이 파동들은 단지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필요한 2/1,000초에 의해서만 서로 분리된다. 단순 계산으로도 이 작용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2만 5000년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초 동안 우리에게 체험된 이 적색 빛의 감각이 우리 지속 속에서 가능한 가장 경제적인 시간으로 펼쳐진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우리 역사의 250세기 이상을 점유할 현상들의 잇따름에 상응한다.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서 우리의 고유한 지속과 시간 일반을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 의식이 지각하는 지속, 우리의 지속 속에 주어진 한 간격은 제한된 수의 의식적 현상들만을 포함할 수 있다. 이 [지속의] 내용이 증가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무한히 가분적인 시간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지속인가?

 

…… 따라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 간간이 던지는 시선은 단지 무수한 반복들과 내적인 진화들의 결과들만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자체에 의해 이 결과들은 불연속적이 되고, 우리는 그것들의 연속성을 우리가 공간 속의 <대상들>에 부여하는 상대적 운동들에 의해서 회복한다. 변화는 도처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심층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변화를 여기저기 위치시키지만 그것은 표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해서 그것들의 질에 관해서는 안정적이고, 그것들의 위치에 관해서는 움직이는 물체들을 구성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단순한 장소의 변화는 자신 안에 우주적인 변화를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343∼349쪽)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제4장 이미지들의 한정과 고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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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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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가 주는 긴장감은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

 

나는 리얼리즘에 관한 한 플로베르는 일말의 의혹도 가지지 않았던 작가이며, 그 누구보다 적합한 증인으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현대 소설이 자기의 희극적 장치를 밖으로 덜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은 소설에 의해 공격받고 있는 이상이 자신이 맞서고 있는 현실로부터 거의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긴장은 매우 느슨하다. 즉 이상은 아주 낮은 높이에서 떨어진다. 따라서 19세기 소설은 얼마 가지 않아 읽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은 최소한도의 시적 역동성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알퐁스 도데나 모파상의 작품이 우리 손에 "굴러 들어올 때" 불과 15년 전에 느낄 수 있었던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돈키호테』가 주는 긴장감은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188∼189쪽)

 

 

 

리얼리즘을 증오하기 때문

 

19세기의 이상은 리얼리즘이었다. "팩트, 오로지 팩트만이 중요해"라고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 나오는 주인공은 외친다. 콩트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관념이 아니라 팩트를 주창한다. 보바리 부인은 M.오메와 같은 공기, 즉 콩트 철학의 분위기를 호흡한다. 플로베르는 소설을 쓰는 동안 『실증 철학 강좌』를 읽고 나서 이렇게 쓴다.

 

"이 작품은 매우 심오한 광대극이다. 이를 납득하려면 작품이 요약된 서문만 읽어 보면 된다. 여기에는 사회 이론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적 취향을 통해 연극을 공격하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샘물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워낙 난폭한 성정을 가지고 있어서 설령 자기 자신이 이상화될지라도 이상적인 것을 참지 못한다. 또한 19세기는 영웅적인 방식으로 모든 영웅주의에 반기를 드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실증주의를 선포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이런 노력이 다시 한 번 현실의 가혹한 시련을 통과하도록 했다. 이와 관련해 플로베르는 굉장히 뼈대 있는 말을 흘린다."사람들은 내가 사실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그것을 증오한다. 내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리얼리즘을 증오하기 때문이다."(189∼190쪽)

 

 

 

핍진성 비판

 

19세기 초반 몇십 년 동안의 생물학 분야는 결정론에 기반을 둔 자연 과학에 의해 정복당했다. 다윈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줄이었던 '생기(lo vitl)'를 물리적 필연성 내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다. 생명은 이제 물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생리학은 기계 역학으로 축소된다.

 

스스로 활동하면서 독립적인 개체처럼 보였던 인체는 마치 태피스트리 그림 속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환경 속의 부속물로 편입된다. 이제 활동하는 것은 인체가 아니라 인체 내의 환경이다. 우리의 행위는 타율적인 반작용일 뿐이다. 자유도 없고, 고유성도 사라진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환경에 적응시킨다는 뜻이다. 적응한다는 말은 물질적 환경이 우리 내부를 꿰뚫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는 것을 방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응은 순응이며 굴복이다. 다윈은 지구상에서 영웅들을 쫓아냈다.

 

이와 함께 '실험 소설'의 시간이 도래한다. 에밀 졸라는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클로드 베르나르에게서 시를 배웠다. 베르나르는 항상 사람에 대해 우리에게 얘기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자기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자기가 사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설은 환경을 재현하는 길을 모색한다. 환경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주인공이 된다.

 

사람들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예술은 이제 한 가지 규칙에만 복종한다. 그것은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이다. 그렇다면 비극에는 내부적으로 그 같은 독립적인 핍진성이 없다는 말인가? 비극에는 미적인 진리(vero)도 없고 아름다움과의 유사성(similitude)도 없는가? 실증주의에 따르면 그 대답은 "없다"이다. 아름다움이란 핍진성이 있다는 말이고, 진실한 것은 오로지 물리학에만 존재한다. 이제 소설은 생리학을 추구한다.

 

어느 날 밤 부바르와 페퀴셰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핍진성과 결정론에 모든 영광을 바치면서 시를 매장한다.(190∼191쪽)

 

 

 

불충분하면서도 명료한 것

 

훌리안 마리아스는 지금까지 전개된 철학적 논의가 이제부터 논의될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위한 준비였다고 말한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돈키호테』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이 다루고 있는 철학적 문제를 깨우치려 한다. "풍자적인 어투의 이 변변찮은 소설"은 동시에 심층적 의미가 있는 책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심층성이 있는 예술 작품으로서 『돈키호테』는 실재의 '깨침'이고 섬광과도 같이 삶을 명료하게 해준다. 그 내용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삶에 대해 무엇을 '암시'하는가? "우리에게 말없이 진리를 가르쳐 주려는 사람은 그냥 간단한 몸짓으로 그것을 암시한다." 예술 작품에서는 특히 이 원칙이 중요하다. 그 때문에 주석이나 해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반면에 "민족주의적 감성을 통해 이 작품에 쏟아졌던 모든 찬사들"이나 "세르반테스의 생애에 대한 모든 현학적인 연구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셸링, 하이네, 투르게네프 등 외국의 문호들에 의한 "순간적이고 불충분한" 생각이 '깨달음'을 준다. 뛰어난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들이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읽고 촌철살인의 글을 남긴 예는 많다. 예를 들면 1837년의 『돈키호테』독일어 번역본에 실린 하이네의 서문이 있고, 셸링이 『예술 철학』(1859)에 남긴 명철한 고찰이 있다. 1802년에 셸링이 쓴 글에 의하면 지금까지 두 개의 소설만 있는데, 세르밭네스의 『돈키호테』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가 그것이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신화적 인물'이 되었고 풍차의 모험 이야기는 '진정한 신화'이자 신화적 전설이 되었다. 『돈키호테』를 '풍자'로 해석한 뛰어난 비평과, 이 작품을 두 부부능로 날카롭게 구별한 작업을 보자. 이들에게 『돈키호테』는 "신성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우리처럼 운명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글들은 불충분하면서도 명료한 것이다.(268∼269쪽)

 

 

 

돈키호테는 근대적 고뇌에 사로잡힌 고독한 그리스도의 슬픈 패러디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책에서 『돈키호테』가 아니라 돈키호테 주의를 다룬다고 말한다. 즉 이 책은 『돈키호테』의 해설이나 분석이 아닌 돈키호테주의를 보여 주려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돈키호테를 창조한 세르반테스주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르테가에게 돈키호테는 근대적 고뇌에 사로잡힌 고독한 그리스도의 슬픈 패러디다. 그리고 "과거의 사상적 빈곤, 현재의 천박함 그리고 미래의 신랄한 적대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을 때마다 그들 사이로 돈키호테가 강림한다"고 말한다. 훌리안 마리아스의 해설대로, 이 문장은 작가가 스페인의 환경이라는 시점에서 이 책의 주제를 정당화하는 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공유하는 연결 고리이자 스페인이 맞을 운명의 열쇠인 돈키호테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환경을 이해하는 동시에 새로운 스페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오르테가는 스페인이라는 '상황'에서 세르반테스가 어떻게 사물에 접근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문체를 창조했는지 연구한다. 이는 『돈키호테』가 피상적이라는 편견을 깨고 '소설로서의 심층'을 보여 줌으로써 스페인에 고질적으로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받아 온 개념을 정립하려는 노력이다. 따라서 『돈키호테 성찰』에서 『돈키호테』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 작품은 세르반테스 시대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명료하게 보기 위한 것이다.(349∼350쪽)

 

 - 「해설」, <돈키호테에게 스페인의 길을 묻다> 중에서

 

 

 

오르테가는 돈키호테에 스페인의 운명을 투사한다.

 

오르테가는 예술의 본질적인 주제는 인간이며, 궁극적인 미학적 주제라 할 수 있는 장르는 인간성의 흐름을 포착하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시대는 인간에 대한 특정 해석을 낳으며 특정 장르를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오르테가에 의하면, 문학 장르는 그 시대의 감수성을 표현하며 그 시대의 운명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설은 서사시라는 장르와 상반된다. 서사시의 주제는 연대기적 시간, 즉 현재와 연결되는 시간이 아니라 관념화된 '절대 시간'이다. 그러므로 서사시적 영웅 역시 시간을 초월한 폐쇄적이고 관념적인 과거에 속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점차 합리적인 사고를 하면서 자신의 기반이 되었던 세계관이 무너지자 서사시는 신화를 버리고 새롭게 방향 설정을 하는데, 여기서 탄생한 것이 모험을 찾아 나서는 중세의 기사도 이야기이다. 오르테가가 "서사시라는 고목 줄기에서 마지막으로 피어난 위대한 싹"이라고 표현한 기사도 이야기 작가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흥미로운 모험담을 만들어 내는 것, 즉 스토리텔링이었다. 하지만 서사시나 기사도 이야기와 달리 소설은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소설은 그것이 말해지는 방식에 더 비중을 둔다. 즉 소설은 내용보다는 형식을,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를 더 중시하고, 과거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기술하는 근대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글쓰기 자체를 주제로 삼은 『돈키호테』는 최초의 근대소설이다.

 

오르테가는 계속해서 서사시, 비극, 희극, 희비극 그리고 소설 장르를 통해 영웅의 의미를 고찰한다. 근대 이후의 영웅은 서사시의 초인적인 영웅이나 비극의 고결한 영웅과는 달리, 주어진 현실에 저항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오르테가의 말대로 영웅은 "관습이나 전통, 한마디로 말해 생물학적 본능이 강요하는 행동 방식을 반복하는 것을 거부"한다.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환경을 이겨 내고 유일무이한 '자기 자신'이 되려는 염원을 가진 자이다. 따라서 영웅은 환경과 싸우면서 세계를 의미화한다. 그러나 현실은 영웅을 속물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으로 축소하여 희극적 인물로 전락시키려 한다. 서사시적 세계와 달리 누구든 내면에 영웅의 잔재를 품고 있는 인간의 삶은 불투명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연속이다. 이런 의미에서 돈키호테는 새롭게 탄생한 근대의 영웅이다. 그는 피상적이고 표층적인 근대적 인식론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인 풍차를 향해 돌격하고 마에세 페드로의 인형들가 싸운다. 비록 놀림의 대상이 되는 비극적 삶이지만 그는 자신을 둘러싼 물질성과 속물성에 맞서 이상을 찾고, 근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심층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는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험에 뛰어들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진정한 '나'가 된다. 오르테가는 돈키호테에 스페인의 운명을 투사한다.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세계를 만든 돈키호테처럼, 세이렌이 유혹하는 치명적인 과거의 노랫소리에 맞서, 그리고 지구상에서 영웅들을 멸종시키고 삶을 한낱 사물로 축소시켜 버린 다윈의 결정론에 맞서 스페인이 역사의 전설을 힘차게 부르길 소망하는 것이다. 근대성을 재흡수하는 이 지점에서 새로운 스페인의 설계는 시작될 것이다.(352∼354쪽)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작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훌륭한 철학자이지만 위대한 교사는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 글을 이해하기 힘든 엘리트 철학자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정권 치하에 귀국하여 침묵을 지켰다는 이유로 그의 사상은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폄하되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신체적으로 병환에 시달린 오르테가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 때문에 더욱 불운한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뛰어난 철학자이자 작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또한 프랑코 사후에 제정된 1978년의 스페인 민주 헌법이 오르테가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오르테가의 사상은 조국인 스페인에서보다 국제적으로 더 명성을 떨쳤으며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등의 위대한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카뮈는 오르테가에 매료되어 『돈키호테 성찰』과 『대중의 반역』을 필독서로 꼽았고, 그를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작가일 것이다"라고 극찬한다. 멕시코의 힐 비예가스(Gil Villegas)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오르테가와 루카치를 하이데거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한 오르테가와 평생 인간적·학문적으로 가까웠던 쿠르티우스 역시 오르테가를 높이 평가하면서 독일 문화와 프랑스 문화를 조화시키고 보완하여 확장시킨 독창성에 그의 업적이 있다고 평가한다. 이 밖에 오르테가가 라틴아메리카의 지성계에 끼친 영향도 지대해서 옥타비오 파스, 엔리케스 우레냐(1884∼1946), 카르펜티에르(Alejo Carpentier, 1904∼1980) 등 대륙 최고의 지식인들은 오르테가의 글이 자신들에게 지적인 환경이 되어 왔다는 헌사를 바친다. 이는 오르테가가 20세기 전반기 스페인어권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다는 점을 재확인시킨다.(354∼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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