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여름이 저무는 때

 

바야흐로 1년 중 여름이 저무는 때였다. 올해의 수확량이 이미 결정된 시기, 이듬해의 파종에 대한 걱정이 시작되고 풀베기가 다가오는 시기, 호밀마다 이삭이 패고 바람이 불 때마다 회색빛 도는 초록색 호밀이 채 영글지 않은 가벼운 이삭을 흔들며 물결치는 시기, 초록색 귀리와 그 사이에 점점이 흩어져 덤불을 이룬 누런 풀이 늦갈이 밭을 따라 들쑥날쑥 펼쳐져 있는 시기, 철 이른 메밀이 무성하게 자라 땅을 뒤덮은 시기, 가축들에게 짓밟혀 쟁기 날도 들지 않는 길이 난 휴한지를 절반가량 갈아엎어 놓은 시기, 밭으로 옮긴 꾸덕꾸덕한 거름 더미의 냄새가 달콤한 풀 냄새와 어우러져 노을 속으로 퍼지는 시기, 아래쪽의 무성한 풀받이 낫을 기다리며 끝없는 바다를 이루고 그 사이로 땅에서 뽑힌 쾡이밥 줄기의 거무스름한 무더기가 군데군데 쌓여 있는 시기였다.(18쪽)

 

(나의 생각)

바야흐로 코앞에 닥칠 8월 하순쯤이 그런 계절이 아닐까 싶은데, 올 여름은 도대체 저물 기미조차 보이지 않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2권』

 

 

  

 

 

가장 덜떨어진 아이조차 위선자를 알아보고

 

아이들은 레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언제 그를 보았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를 대할 때 수줍음과 혐오가 뒤섞인 기묘한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위선적인 어른을 대할 때면 흔히 그런 감정을 드러냈는데, 그 때문에 걸핏하면 호된 벌을 받곤 했다. 위선은 통찰력이 뛰어난 가장 현명한 사람까지도 어떻게든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경우에는 가장 덜떨어진 아이조차 위선자를 알아보고 외면해 버린다. 설사 그 사람이 아무리 교묘하게 위장한다 해도 말이다. 레빈의 결점이 어떤 것이든, 그에게는 위선의 기미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기들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발견한 그런 다정함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71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2권』

 

 

 

 

삶의 수수께끼가 풀릴 가능성

 

마차의 한구석에서는 노파가 졸고 있었고, 창가에는 이제 막 잠에서 깬 듯한 젊은 아가씨가 두 손으로 하얀 두건에 달린 작은 리본을 붙잡고 앉아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맑은 얼굴의 그녀, 레빈과는 거리가 먼 우아하고 복잡한 내적인 삶으로 꽉 찬 듯한 그녀, 그녀가 그의 너머로 아침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광경이 사라진 바로 그 순간, 진실한 두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러자 놀라움과 기쁨이 그녀의 얼굴을 환하게 빛냈다.

 

그가 착각했을 리 없다. 그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에게 있어 삶의 모든 빛과 의미를 집중시킬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기차역에서 예르구쇼보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그 불면의 밤에 레빈의 마음을 휘저어 놓은 모든 것, 그가 내린 모든 결심,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는 농사꾼의 딸과 결혼을 하려 했던 자신의 공상을 떠올리며 혐오감을 느꼈다. 요사이 그를 그토록 괴롭게 짓누르던 삶의 수수께끼가 풀릴 가능성은 오직 그곳에, 맞은편 길로 빠르게 멀어져 가는 그 마차 안에 있었던 것이다.(91∼92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2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하느님! 날 용서해 주세요.

 

거의 1년 동안 브론스키의 삶에서 이전의 모든 욕망을 대신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 안나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끔찍한 것, 하지만 그만큼 더 황홀한 행복의 꿈이었던 것, 그 희망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그녀 앞에 선 그는 창백한 얼굴로 아래턱을 덜덜 떨며 그녀에게 안심하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안나! 안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나, 제발!"

 

……

 

"하느님! 날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흐느껴 울며 그의 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 댔다.(325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나중에, 나중에.

 

"다 끝났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에겐 이제 아무것도 없어. 당신뿐이야. 잊지 말아요."

 

"나의 생명인 당신을 어떻게 잊겠어? 이 행복한 순간을 위해……."

 

"행복이라니?" 그녀는 증오와 공포를 드러냈다. 그리고 공포는 어느새 그에게로 전해졌다. "제발, 아무 말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그에게서 물러났다.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말아요."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고는 그에게 낯선 차가운 절망의 표정으로 그를 떠났다. 그녀는 이 순간 새로운 삶으로 가는 이 입구 앞에서 자신이 느낀 수치와 기쁨과 공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고, 부정확한 말로 그 감정들을 저속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도,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녀는 이런 복잡한 감정을 표현할 만한 말을 찾지 못했고, 자신의 영혼에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깊이 숙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생각도 찾지 못했다.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아냐, 지금은 이 문제를 생각할 수 없어. 나중에, 내 마음이 좀 더 진정된 다음에.'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기 위한 마음의 평화는 결코 오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나,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난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공포가 엄습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곤 했다.

 

"나중에, 나중에." 그녀는 말했다. "내 마음이 좀 더 진정된 다음에."(327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그녀나 나나 모든 걸 버리고

 

'그래, 예전에 그녀는 불행하지만 당당하고 침착했어. 그런데 지금 그녀는 비록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침착함과 품위를 잃었어. 그래, 이런 건 이제 그만 끝내야 해.' 그는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자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이런 거짓을 끝내야 할 뿐 아니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나 나나 모든 걸 버리고 우리의 사랑만을 간직한 채 어딘가로 숨어 버려야 해.'(399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그녀의 바람이 아니라는 것

 

"난 오늘 당신을 만날 줄 알고 일부러 이곳에 왔어요. 내가 온 건 당신에게 이런 일을 끝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예요. 난 지금까지 누구 앞에서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는데, 당신은 나에게 어떤 죄의식을 느끼게 해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새로운 정신적 아름다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게 뭡니까?" 그가 솔직하고도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모스크바에 가서 키티에게 용서를 구하는 거예요." 그녀가 이렇게 말한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서 작은 불꽃이 깜박였다.

 

"당신은 내가 그렇게 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알았다. 그녀가 한 말은 스스로에게 강요한 말이지, 그녀의 바람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의 말대로,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내 마음이 평온해지도록 해 주세요."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당신은 정말로 모르십니까? 내게는 당신이 삶의 전부라는 걸. 난 평온이란 걸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 사랑……, 그렇습니다. 난 당신과 나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게는 당신과 내가 하나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에게든 당신에게든 평온 따윈 있을 것 같지 않군요. 내 눈에는 절망과 불행, 아니면 행복, 그것도 커다란 행복의 가능성만 보일 뿐입니다. 그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요?" 그는 입술만 움직여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304∼305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인생과 대면한 것

 

그는 불신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내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질투란 수치스러운 감정이고 아내를 믿어야 한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비논리적이고 납득할 수 없는 무언가에 직면했음을 느끼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인생과 대면한 것이다. 그의 아내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맞닥뜨린 것이다. 그에겐 이런 것이 무의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이것이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삶의 반영을 다루는 공무 분야에서 전 생애를 보냈다. 그래서 그는 삶 자체와 부딪칠 때마다 매번 그것을 회피했다. 이제 그는 낭떠러지 위에 놓인 다리를 침착하게 걸어가던 사람이 문득 그 다리는 허물어졌고 그 아래에 깊은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음직한 그런 감정을 맛보고 있었다. 이 심해는 삶 자체였으며 다리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살아온 인공적인 삶이었다. 그의 아내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이러한 의혹 앞에서 전율했다.(311∼312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집으로 돌아왔다가 문이 잠긴 걸 본 남자가 느꼈음직한

 

"안나, 당신에게 경고해 둘 말이 있어." 그가 말했다.

 

"경고요?" 그녀가 말했다. "무슨……?"

 

그녀가 너무나 꾸밈없고 명랑한 모습으로 그를 쳐다보았기에, 남편만큼 그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말이 지닌 울림이나 의미에서 부자연스러운 점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잘 아는 그에게는, 그가 5분만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그녀가 이것을 알아채고 왜냐고 묻는다는 것을 잘 아는 그에게는, 그녀가 자신이 느낀 기쁨과 즐거움과 슬픔을 그에게 곧바로 털어놓는다는 것을 잘 아는 그에게는, 지금처럼 그의 상태를 헤아리려 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말 한마디 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이 많은 것을 의미했다. 그는 그녀의 영혼의 깊은 곳, 예전에는 늘 그에게 열려 있었던 그 심연이 그의 앞에서 굳게 닫힌 것을 보았다. 게다가 그는 그녀의 말투에서 그녀가 이것을 전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요. 닫혔어요. 그래야 마땅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지금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가 문이 잠긴 걸 본 남자가 느꼈음직한 그런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아냐, 아마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거여.'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생각했다.(317∼318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어째서 떠나느냐고요?

 

하지만 이제는 그를 만난 첫 순간부터 기쁨에 찬 자신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로서는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마치 그에게서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그녀가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라는 고백을 듣기라도 한 듯, 그녀는 그 이유를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당신이 이 기차에 타고 있는 줄 몰랐어요. 어째서 모스크바를 떠나시나요?" 그녀가 기둥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기쁨과 생기가 빛나고 있었다.

 

"어째서 떠나느냐고요?"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되물었다. "당신도 알잖습니까. 당신이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 떠난다는 걸." 그가 말했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227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아, 어쩜!

 

기차가 페테르부르크 역에 정차하여 그녀가 객차 밖으로 나온 순간, 가장 먼저 그녀의 주의를 끈 얼굴은 남편의 얼굴이었다. '아, 어쩜! 저이의 귀는 어째서 저렇게 생긴 걸까?' 그녀는 차갑고 당당한 그의 모습, 특히 지금 자신에게 충격을 준 귀의 연골ㅡ둥근 모자의 가장자리를 떠받친ㅡ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발견한 그는 버릇대로 입술을 다문 채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 지친 듯한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를 맞으러 다가왔다. 그의 완강하고 피로한 시선과 부딪힌 순간, 어떤 불쾌한 감정이 그녀의 심장을 조이는 듯했다. 마치 그녀가 그의 다른 모습을 기대하기라도 한 듯……. 특히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를 만난 순간 스스로에게 느낀 불만이었다.(229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차르라도 된 것처럼

 

브론스키는 아무것도,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차르라도 된 것처럼 느꼈다. 그가 안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ㅡ 그는 아직 그것을 확신하지 못했다 ㅡ 그녀가 자기에게 불러 일으킨 인상이 행복과 자신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는 알지 못했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그의 모든 힘이 하나로 모여 무서운 에너지를 발산하며 하나의 행복한 목적을 향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때문에 그는 행복했다. 그는 그저 자신이 그녀에게 진실을 말했다는 것, 자신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 이제 자신은 그녀를 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서 삶의 모든 행복과 삶의 유일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232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무섭고 잔혹한 무언가가 있었다

 

안나가 웃으면, 그 미소가 그에게 전해졌다. 그녀가 생각에 잠기면 그도 진지해졌다.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키티의 눈동자를 안나의 얼굴로 끌어당겼다. 단순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팔찌를 낀 풍만한 팔도 매력적이고, 진주 목걸이에 감긴 단단한 목도 매력적이고, 흩어진 곱슬머리도 매력적이고, 자그마한 손과 발의 가볍고 우아한 동작도 매력적이고, 생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얼굴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에는 무섭고 잔혹한 무언가가 있었다.

 

키티는 이전보다 더욱 그녀에게 매혹되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고통스러웠다. 키티는 산산이 부서진 자신을 느꼈고, 그녀의 표정이 이를 드러냈다. 마주르카를 추다 그녀와 마주친 브론스키는 그녀를 한분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는 변해 있었다.(184쪽)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라스카는 계속 레빈의 손 밑으로 머리를 들이댔다. 그가 라스카를 쓰다듬어 주자, 라스카는 그의 발치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뒷다리에 머리를 얹었다. 그러고는 이제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는 표시로 살짝 입을 벌리고 입맛을 다시더니 노쇠한 이빨 주위에 끈적이는 입술을 착 갖다 붙이고 행복한 평온에 잠겼다. 레빈은 이 마지막 동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게 바로 내 모습이야!' 그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저게 내 모습이야! 괜찮아 ……. 모든 게 좋아.'(213쪽)

 

(나의 생각)

톨스토이가 묘사하는 대상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마치 '동영상을 직접 눈 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애완견 사냥개인 라스카를 묘사한 장면들을 마주칠 때마다 톨스토이의 묘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기차가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그녀는 모스크바에서의 기억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모든 것이 좋았고 유쾌했다. 그녀는 무도회를 떠올리고, 브론스키를 떠올리고, 사랑에 빠진 그의 순종적인 얼굴을 떠올리고, 그와의 모든 관계를 떠올렸다. 수치스러워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바로 이 부분의 기억에서 수치심은 더욱 강해졌다. 그녀가 브론스키를 떠올린 순간, 마치 어떤 내면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따뜻해. 아주 따뜻해, 타는 듯이 뜨거워.'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그녀는 고쳐 앉으며 스스로에게 단호히 물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난 이것을 직시하는 게 두려운 걸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과연 나와 저 풋내기 장교 사이에 단순한 지인 관계를 뛰어넘을 어떤 다른 관계가 있다는 건가? 아니, 그런 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그녀는 경멸 섞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도무지 글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유리창 표면을 따라 페이퍼 나이프를 움직였다. 그러고는 매끄럽고 차가운 유리에 뺨을 갖다 대고 있다가, 불현듯 원인 모를 기쁨에 사로잡혀 자칫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경이 줄감개에 조인 현처럼 점점 더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눈동자가 더욱더 크게 벌어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신경질적으로 움직이고, 가슴속의 무언가가 숨을 막고, 이 흔들리는 어둠 속의 모든 형상과 소리가 그녀의 마음에 매우 또렷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고 느꼈다. 기차가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아니면 아예 멈췄는지, 그런 것에 대한 의혹의 순간이 끊임없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 (222∼223쪽)

 

(나의 생각)

때로는 소설이 영화보다 더 선명하게 눈 앞에 그려질 때도 있다. 등장 인물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음까지도 작가 덕분에 훤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톨스토이가 왜 리얼리즘 소설의 대가인지를 드러내는 장면은 『안나 카레니나』 속에 너무나 많이 담겨져 있어서 일일이 지적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1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