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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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그는 납작하고 매끄러운 금시계를 손에 쥐고는 그의 이름 머리글자가 새겨진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는 일이 간혹 있었다. 사기로 된 문자판 위에는 검고 붉은 아라비아 숫자가 두 줄로 빙 둘러 새겨져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화려하게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된 두 개의 금바늘이 제각기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가느다란 초침은 특히 작은 원 주위를 똑딱거리며 분주히 움직였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몇 분간이라도 시간의 흐름을 막고 멈추게 하여, 시간의 꼬리를 잡기 위해 초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초침은 차례로 다가와 맞닿았다가 스쳐 지나가기를 반복하는 숫자에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히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초침은 목표며 눈금이며 부호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60이라는 숫자가 있는 곳에 일순간 멈추어 서든가,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여기서 무언가 임무를 완수했다는 신호를 조금이라도 보내 주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초침은 아무런 숫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 곳과 마찬가지로 60이라는 숫자가 있는 곳을 황급히 지나쳐 버렸다. 이런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초침에게는 도중의 숫자나 구분이 단지 밑에 있는 것에 불과해서, 초침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계속 움직이고 또 움직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한스 카스토르프는 글라스휘텐제 시계를 다시 조끼 주머니에 집어넣고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387∼388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 * *

 

(나의 생각)

 

이 대목을 읽으니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속에 나오는 <문자반> 이 떠오른다.

 

괘종시계 문자반 위에서 바늘들은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점성가가 그리는 황도대(黃道帶) 역시 문자반처럼 생겼다. 호로스코프(占星), 그것은 시계다. 점성가의 예언을 믿건 말건, 호로스코프는 인생의 은유이며, 인생의 은유로서 위대한 지혜를 내포한다.

 

(중략)

 

달리 얘기해 보자. 루벤스 인생의 문자반이 중세의 거대한 괘종시계, 예를 들면 프라하의 그 괘종시계, 예전에 내가 수천 번도 더 지나쳤던 비에이빌 광장의 그 괘종시계 위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시계가 울면 문자반에서 작은 창문 하나가 열린다. 거기에서 인형, 말하자면 몇 시냐고 묻는 일곱 살 난 소녀가 나온다. 그러고 나서 그 바늘이 매우 느리게, 여러 해가 걸려 다음 숫자에 이르면 종이 울리고 그 작은 창문이 다시 열리며 거기에서 다른 인형 하나가, "당신이 젊었을 때 ……." 라고 말하던 그 젊은 부인이 나온다.(435∼439쪽)

 

 - 밀란 쿤데라, 『불멸』, <6부 문자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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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이러한 감각과 정신의 기만은 도를 더해 갔다. 시간이란 그것을 체험하는 주관적 감각이 약해지거나 없어지더라도, 활동적이고 '변화를 낳는' 한에는 객관적인 현실성을 갖고 있다. 벽의 선반에 놓인 밀봉된 식료품 병조림이 시간의 바깥에 있는지는 ㅡ 그러므로 한스 카스토르프가 언젠가 이런 문제를 언급한 것은 단지 젊은이다운 넘치는 혈기 때문이었다 ㅡ 전문적인 사상가가 생각할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는 잠자는 7인의 성인에게도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열두 살 난 한 소녀가 어는 날 잠에 빠져 13년 동안이나 깨어나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그녀는 열두 살 난 소녀로 머무르지 않고 성숙한 여인으로 꽃피어 났다는 사례를 한 의사는 증언하고 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는가. 망자(亡者)는 죽어 버려 시간의 축복을 받은 자이다. 그는 시간을 얼마든지 갖고 있는데, 즉 개인적으로 보면 그는 시간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의 손톱과 머리칼이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 하지만 이런 망측한 허튼소리는 되풀이하지 않기로 하자. 요아힘이 언젠가 그와 관련된 말을 하자, 한스 카스토르프는 당시만 해도 평지인답게 이를 못마땅해했다. 한스 카스토르프의 손톱과 머리칼도 자랐는데, 유난히도 빨리 자랐다. 그는 자주 도르프 네거리의 이발소 의자에 앉아, 하얀 천을 두르고 귀밑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깎았다. 사실 그는 늘 그곳에 앉아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의자에 앉아 시간의 작용으로 길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깎아 주는 상냥하고 숙달된 이발사와 잡담을 나눌 때나, 또는 자기 방의 발코니 문 옆에 서서 아름다운 비단 가방에서 꺼낸 작은 가위나 줄로 자신의 손톱을 다듬을 때, 호기심어린 흥겨움이 섞인 일종의 두려움과 아울러 예의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이는 황홀과 현혹이라는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는 현기증이었다. 그리하여 '아직'과 '다시'를 더는 구별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섞여 뒤범벅이 되면 시간이 없는 언제나와 영원이 되는 것이다.(386∼387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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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은 이론적인 계절 구분은 별도로 하더라도, 눈과 추위로 보아 사실 벌써 오래전부터 겨울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이곳은 늘 겨울이나 다름없었고 간간이 해가 내리쬐는 여름 날씨가 끼어 있을 뿐이었다. 이런 날씨에는 푸른 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짙어져 거의 거무스름한 색을 띠었다. 그러므로 여름에도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눈을 제쳐 놓는다면 겨울에도 여름 같은 날이 끼어 있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사계절을 뒤섞어 뒤범벅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러한 뒤죽박죽에 대해 죽은 요아힘과 얼마나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일대 혼란은 계절의 구분을 앗아가 버려, 그로 인해 일년을 지루할 정도로 짧게 하거나, 또는 짧다 할 정도로 지루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언젠가 요아힘이 더는 참지 못하고 내뱉은 것처럼, 도무지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실 이러한 뒤죽박죽으로 섞이고 혼합된 것은 '아직'과 '벌써 다시'라는 감정이나 의식 상태였는데, 이는 가장 혼란스럽고 복잡다단하며 어리둥절하게 하는 체험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 위에 도착한 첫 날에 이러한 것을 맛보는 체험을 하고 비도덕적인 애착을 느꼈다. 즉 밝은 줄무늬 벽지를 바른 식당에서, 하루에 다섯 번의 엄청난 식사를 할 때 처음으로 이러한 종류의 현기증 같은 것에 사로잡혔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비교적 순진무구했다고 할 수 있었다.(385∼386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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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을, 순전히 시간 그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짓이다. '시간이 지나갔고, 시간이 경과했으며, 시간이 흘러갔다.' 건전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결코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음이나 화음을 한 시간 동안 미친 듯이 계속 울려 대고는 이를 음악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야기는 시간을 채우고, 시간을 '품위 있게 메우며', 시간을 '잘게 나누고', 시간에 '내용을 부여하여', 언제나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음악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인이 된 요아힘이 어떤 기회에 입 밖에 낸 말, 망자가 된 사람의 말을 추억하는 의미에서 슬프고도 경건한 기분으로 인용해 본 것이다. 아득히 오래전에 잊힌 이 말이,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는가를 독자가 과연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의 삶의 기본 요소이듯이, 시간은 이야기의 기본 요소이다. 시간이 공간 내의 물체와 결부되어 있듯이, 시간은 이야기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간은 시간을 재고 나누며, 시간을 짧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값지게도 하는 음악의 기본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방금 말했듯이 음악은 이야기와 유사하다. 이야기도 음악과 마찬가지로 (조형 예술 작품처럼 단번에 눈에 들어오며, 물체로서만 시간에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연속적으로만, 시간이 경과해야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하더라도 이야기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야기와 음악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것도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음악의 시간적 요소는 단 한 가지뿐으로, 그것은 인간의 지상의 시간을 잘라내 구분 짓는 일이다. 구분된 부분에 음악이 흘러 들어가, 그것을 말할 수 없이 고상하게 드높이는 것이다. 반면에 이야기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간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이야기 자신의 시간, 이야기가 진행되고 나타나는 데 필요한 음악적이고 현실적인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서술 시점과 관련되는 이야기의 내용에 따른 시간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아주 달라서, 이야기의 허구적인 시간이 음악적 시간과 거의, 아니 꼭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 아주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다. 「5분 왈츠」라는 음악 작품은 5분간 지속되는 곳이다. 이런 점에서 시간에 대한 그 왈츠 곡의 관계는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내용 시간이 5분인 이야기, 그 5분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나름대로 극단적으로 세세하게 이야기한다면 5분의 천 배도 걸릴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허구적인 내용 시간 5분에 비해 그 시간이 무척 지루하겠지만, 아주 짧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야기의 내용 시간이 엄청 길게 지속되는 바람에 이야기를 대폭 줄여서 말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가 '줄여서' 말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환상적인 요소, 아주 명확히 말하면 여기에 분명히 관련되는 어떤 병적인 요소를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야기가 연금술적인 마술이나 시간을 초월하는 시점을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들은 현실적인 경험의 어떤 비정상적인 사례나 분명히 초감각적인 것을 나타내 주는 사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 아편 복용자의 수기를 살펴 보기로 하자. 아편에 취한 자는 황홀경에 빠져 있는 짧은 시간 동안에 온갖 환상을 두루 겪는다고 한다. 그 환상의 시간적 범위는 10년, 30년, 아니 60년에 달하거나, 또는 심지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넘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환상의 허구적인 시공간은 실제로 이야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엄청 초과하여, 시간 체험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마약인 하시시 복용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에 도취된 자의 뇌에서 '망가진 시계의 태엽마냥 무언가가 제거되기라도' 한 것처럼 눈부신 속도로 온갖 상념이 밀려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아편 복용자의 환상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시간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간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기본 요소인 시간이 이야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지나친 말이긴 해도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생각은, 처음에 그래 보였던 것과는 달리 결코 이치에 어긋나는 시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대 소설'이라는 명칭에는 독특하게 몽상적인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다. 사실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정말 시간을 이야기하려는 생각이 있음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는 사이에 고인이 된, 명예를 중히 여기는 요아힘이 언젠가 대화 중에 음악과 시간에 대해 불쑥 꺼낸 말이 (아닌 게 아니라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착실한 요아힘의 본성에 맞지 않으므로, 그의 본질이 어떤 연금술적인 고양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언제 적 이야기인가를, 우리 주위에 모인 독자들이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를 언뜻 언급한 적이 있었다. 사실 현재 그것을 독자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다지 화내지 않을 것이다.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만족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는 모든 독자가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체험에 동참하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관심사인데, 정작 한스카스토르프 자신은 앞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도 벌써 아득히 오래 전에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시대 소설'이면서 '시간 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379∼382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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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의 죽음은 우리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우리가 이제 제대로 인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떤 재기 있는 현자가 한 말은 어쨌든 정신적으로 전적으로 타당하다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가 존재하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어떠한 현실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와 하등 관련이 없으며 기껏해야 우주와 자연하고만 약간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모든 생물체들은 죽음을 아주 태연하고 무관심하며 무책임하게, 이기적으로 천진난만하게 바라본다.(360∼361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군인으로 용감하게>

 

(내 생각)

 

이 대목에서 작가가 말한 '어떤 재기 있는 현자'는 아마도 몽테뉴가 아니었을까 싶다. 토마스 만이 '몽테뉴'를 얼마만큼 좋아했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마의 산』에는 '몽테뉴의 사상'이 꽤나 깊게 침윤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혹시라도 토마스 만이 말한 '어떤 재기 있는 현자'가 '몽테뉴'가 아니라면, 그는 틀림없이 '쇼펜하우어'다. 쇼펜하우어가 쓴 글 가운데 이와 닮은 글이 여럿 있다는 것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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