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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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비평이 할 일

 

비평이 작가에 대해, 심지어 작품의 세부 사항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작가에게는 없으나 그를 완성시키는 모든 요소를 모으고 가능한 한 그에게 가장 호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비평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36쪽)

 

 

근대적 고뇌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고딕풍의 그리스도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마치 모든 신호를 잡아내는 안테나처럼 작품 중심에 우뚝 서서 독점적인 주목을 받는 바람에 작품의 다른 부분이 피해를 입었고 결국 돈키호테 자신도 피해를 입고 말았다. 분명히 말하건대, 약간의 사랑과 또 다른 약간의 겸손만 있다면 ㅡ 두 개가 아예 모두 없다면 불가능하지만 ㅡ 『그리스도의 이름들에 대하여』를 솜씨 있게 패러디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신학적 열망에 가득 찬 루이스 데 레온 수사가 플레차 농장에서 써 내려 간 중세 로마네스크 상징주의의 걸작이다. 그리고 '돈키호테의 이름들에 대하여'라는 이름의 작품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 볼 때 돈키호테는 신성하고 고독한 그리스도의 슬픈 패러디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근대적 고뇌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고딕풍의 그리스도이다. 그는 순수성과 의지를 상실하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찾아 방황하는 고통 속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우리 동네의 희화화된 그리스도이다. 과거의 사상적 빈곤, 현재의 천박함 그리고 미래의 신랄한 적대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을 때마다 그들 사이로 돈키호테가 강림한다. 기이한 그의 용모에서 발산되는 열기는 그들의 갈라진 마음들을 조화시키고 영적인 끈으로 묶어 놓고 민족주의자로 바꾸어 버리며, 개인적인 비탄을 넘어 민족의 집단적 고통으로 승화시킨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의 복음서」18:20)

(36∼37쪽)

 

 

『돈키호테』정도의 걸작은 예리고의 성처럼 접근해야 한다.

 

자연의 비밀들이 가차 없이 드러나고 있다. 우주의 숲에서 조준을 마친 과학자는 사냥꾼처럼 문제를 향해 곧바로 달려든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과 마찬가지로 플라톤에게도 학자라는 존재는 사냥을 떠나는 사람, 즉 엽사(獵師, venator이다. 만일 그가 무기와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사냥은 분명 성공한다. 즉 새로운 진리가 마치 화살을 맞은 새처럼 그의 발치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천재적인 예술 작품은 지식의 공격을 받아도 이런 식으로 자기 비밀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것은 강압적으로 굴복하는 것에 저항하며, 자기가 원하는 상대에게만 자신을 허락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극한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선 학문적 진실과 비슷하지만, 사냥꾼처럼 목표물을 향해 곧바로 달려드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기에 굴복하지 않고, 굳이 한다면 성찰 의식에 굴복한다. 『돈키호테』정도의 걸작은 예리고의 성처럼 접근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넓게 동심원을 그리면서 서서히 압박해 들어가야 하며 마치 천상의 나팔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해야 한다.(38∼39쪽)

 

 

관심의 넓은 동심원일 뿐

 

한 권의 책을 쓴 끈기 있는 양반 세르반테스는 3세기 전부터 이상향의 초원에 자리잡고 앉아서 우수에 젖은 시선을 주위에 뿌리며 자신을 이해할 자손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글로 이어질 이 성찰의 글들이 『돈키호테』가 간직하고 있는 최후의 비밀을 범하려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것은 불멸의 작품에 운명적으로 매혹된 생각이, 멀리서 조급함 없이 그려내고 있는 관심의 넓은 동심원일 뿐이다.(39쪽)

 

 

덧없는 어느 봄날의 오후

 

이 웅대한 잿빛 건축물은 빽빽이 들어선 숲을 망토처럼 두르고 있어 계절이 변함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겨울에는 구릿빛, 가을에는 황금빛, 여름에는 짙은 녹색으로 변화하며, 봄은 마치 수도사의 완고한 영혼을 통과하는 에로틱한 영상처럼 강렬하고 재빠르게 획 지나가 버린다. 숲속 나무들은 순식간에 밝고 신선한 초록색으로 단장한 나뭇잎으로 뒤덮인다. 대지는 에메랄드빛 풀 아래로 모습을 감추는데, 그 풀 역시 하루는 노란색으로, 다른 날은 라벤더의 자줏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지극한 고요함이 지배하는 장소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침묵은 결코 아니다. 사물들이 돌아가면서 완벽하게 입을 다물지만 소리가 멈추어 버린 그 자리는 또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길 기다리고, 그때서야 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 관자놀이의 피가 맥박 치는 소리, 우리의 허파 속으로 스며들자마자 부지런히 달아나는 공기의 부글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최후의 박동이 될 것처럼 느껴지고, 뒤를 잇는 새로운 구원의 박동은 항상 우연한 것일 뿐 다음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냥 장식적이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는 침묵이 차라리 더 좋다. 바로 여기가 그런 곳이다. 맑은 물이 재잘거리며 정처 없이 흘러 가고 녹음 사이로는 검은 방울새, 분홍 방울새, 개똥지빠귀 그리고 때때로 아름다운 꾀꼬리에 이르기까지 작은 새들이 지저귄다.

 

덧없는 어느 봄날의 오후, 에레리아를 방문한 나의 머릿속에서 사색이 펼쳐진다.(45∼46쪽)

 

 

독일에도 나무들 때문에 숲이 보이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다.

 

하나의 숲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나무가 있어야 할까? 하나의 도시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집들이 있어야 할까?

 

푸아티에의 농부는 이렇게 노래했다.

 

지붕들이 너무 높아

거리를 내다보는 데 방해가 되네.

 

독일에도 나무들 때문에 숲이 보이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다. 숲과 도시는 본질적으로 깊이를 간직한 두 개의 사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을 때는 표면으로 나서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47쪽)

 

 

어쨌든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 하지 않겠어?

 

이 세계에는 동등하게 존중받고, 똑같이 세상에 필요한 여러 운명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좋은 교훈이 있다. 드러나는 순간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상실하는 사물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모습을 감추거나 간과된 상태에서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들도 있다. 부차적인 지위에 있으면서도 완전한 자아 확장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고의 지위에 앉으려고 발버둥 치느라 자신의 모든 덕을 폐기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 거기엔 머리는 별로 안 좋지만 도덕적 감수성이 뛰어난 소년이 등장한다. 그는 학교에서 항상 꼴찌를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 하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것은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훌륭한 사례가 된다. 고귀한 정신은 첫째가는 자리뿐 아니라 마지막 자리에도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첫째와 꼴찌 모두 세상에 똑같이 필요하고, 서로에게도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51쪽)

 

 

무정한 죄

 

어떤 사람들은 심층의 사물에게 표층의 사물처럼 나타나라고 요구하면서 그것의 진정한 깊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명료함(clacidad)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표층이 보여 주는 특수한 형태의 명료함에만 집착한다. 그들은 표층 아래 숨어 있는 것이 심층의 본질이고, 그것이 표층 밑에서 맥박 치다가 표층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내 생각에는, 각각의 사물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고유한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죄악인데,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나는 이를 가리켜 '무정(無情)한 죄'라 부르겠다. 우리들의 나쁜 성향과 맹목성을 통해 세계를 축소하고 실재를 왜곡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부분들을 상상 속에서 없애 버리는 것만큼 의롭지 못한 것은 없다.

 

이는 심층적인 것에 대해 표층적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길 요구할 때 발생한다. 하지만 사물의 이치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만 자신을 드러내는 사물들이 있는 것이다.(5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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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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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세상에 내려온 신성한 건축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스페인 사람들의 심성은 언제부터인가 증오로 가득 차게 되었고 거기 웅크려 있으면서 세상에 대해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 어쨌거나 증오는 가치들을 말살하는 길로 이끄는 질환이다. 무언가를 증오할 때 우리는 그 무언가와 우리 마음 사이에 거대한 강철 용수철을 집어넣고 사물과 우리 영혼 사이의 일시적인 융화마저도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증오의 용수철에 의해 접촉되는 사물의 부분만 알게 되고 다른 부분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잊히면서 점차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스페인 사람들에게 우주는 점점 더 경직되고, 건조하고, 천박하고, 황량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의심 많고 회피적인 태도로 인생 여정을 지나면서 마치 메마르고 굶주린 개처럼 험악한 표정으로 삶을 바라본다.

 

이와는 반대로, 사랑은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사물과 연결시킨다. 우리 스스로 한번 자문해 보자. 만일 한 사물이 사랑받는 존재가 될 때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한 여인을 사랑할 때, 학문을 사랑할 때, 조국을 사랑할 때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사랑하는 그것이 우리에게 뭔가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랑받는 존재는 우리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비치는 존재이다. 필수 불가결한 것이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우리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빠진 삶은 인정할 수 없는 것, 우리 자신의 일부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다른 사물들을 우리 안에 빨아들이고 융합하면서 우리의 개체를 확장시킨다. 이러한 결속과 교감은 사랑받는 존재의 본성에 우리가 보다 깊숙이 들어가게 해 준다. 우리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은 자신의 모든 가치를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때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 역시 다른 사물의 일부이며 그것을 필요로 하고 그것에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받는 존재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은 우리에게도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랑은 굳건하고 본질적인 구조 아래 사물과 사물을 연결시키고 그 모두를 우리와 연결시킨다. 플라톤에 따르면 사랑은 "우주 안의 모든 것이 분리되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에 내려온 신성한 건축가이다.(13∼14쪽)

 

 

원한은 열등감의 분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이해하고자 하는 이런 열망을 가리켜 '사랑의 광기'라고 부른다. 나는 비록 사물을 이해하려는 힘이 모든 사랑의 원형이나 기원 혹은 절정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의 필수적인 징후는 된다고 믿는다. 나는 적군이나 적의 깃발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친구나 국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관찰해 보건대, 적어도 우리 스페인 사람들은 진실을 요구하는 데에 마음을 열기보다는 도덕적인 교리에 근거해 더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바람직한 개혁과 교정보다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 위해 항상 판단력을 곤두세우면서 우리의 의지를 소진한다. 아마도 우리는 이 세상이 주는 큰 몫을 포기하면서 삶을 단순화하기 위해 도덕률을 하나의 무기처럼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이미 특정한 도덕적 행위가 원한의 한 형태이자 산물임을 날카롭게 간파한 바 있다.

 

이러한 원한의 산물이 우리의 공감을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원한은 열등감의 분출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현실에서 제거할 수 없는 사람을 상상 속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한을 품었던 대상은 우리의 환상 안에서 시체와 같은 창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그를 죽이고 말살한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 건재하고 평온한 그의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시체는 더욱 다루기 힘들고 우리 능력보다 더 강력하게 비쳐지며, 그 존재 자체가 우리의 허약한 조건을 비웃고 깔보는 인격화된 화신이 된다.(16∼17쪽)

 

 

이해한다는 것과 단순히 안다는 것의 뉘앙스 차이

 

이런 의미에서, 나는 철학이 사랑에 대한 보편 학문이라고 간주한다. 그것은 지적 세계에서 상호 연관된 완전체를 지향하는 가장 강력한 충동을 의미한다. 철학 안에서는 이해한다는 것과 단순히 안다는 것의 뉘앙스 차이가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는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사물에 대한 모든 지식은 사실상 불가해하며 이론의 도움을 빌려야만 해명될 수 있다.

 

관념적으로 말할 때, 철학은 정보나 박식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박식을 경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보가 담긴 지식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학문의 한 방법이었다. 그것이 흥했던 시대도 있었다.  ……

 

결국 사실들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 박식은 학문의 주변부를 차지할 뿐이다. 반면 철학은 순수한 종합으로서 학문의 중심부를 구성한다. 축적 과정에서 자의적으로 수집된 자료들은 한 무더기이지만 각각의 자료는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따로 놀게 된다. 반면, 종합이 이루어지면 각각의 사실들은 잘 소화된 음식처럼 흡수되고 본질적인 활력만 남게 된다.(20∼21쪽)

 

 

  

환경

 

환경(circunstancia)! 그것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말 없는 사물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와 매우 가까운 곳에서 겸손하고 간절한 표정으로 마치 자기들이 바치는 것들을 우리가 받아 주기를 기다리면서 조용히 얼굴을 내미는 듯하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너무 소박하기만 한 자기들 선물을 부끄러워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 사이를 활보하면서도 그 존재를 간과한 채 멀리 윤곽만 보이는 도시를 정복하기 위해 기획된 거창한 사업에만 눈길을 빼앗기고 있다. 마치 날쌔고 우직한 투창처럼 영광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영웅 옆에서 겸손하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존재감도 없이 남몰래 그를 사모하며 따라다니는 소녀 이야기처럼 나를 감동시키는 책은 드물다. 그녀의 백옥 같은 몸속의 심장은 영웅을 위한 검붉은 불덩이가 되어 타오르고, 영웅의 영광을 기리는 향이 피어오른다. 우리는 영웅에게 한마디라도 해 주고 싶다. 열정에 불타면서 그 발치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을 향해 단 한 번이라도 눈길을 보내라고 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가 바로 이 영웅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주변의 겸허한 사랑을 향유하고 있다.(24∼25쪽)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일 뿐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 유역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자기 주변 환경을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반대로 그 의미를 축소시켜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한 사물이 세상의 전부이거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는 환상을 품지 않게 되면, 그 사물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못하면서 자신의 근본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이처럼 경직되고 유치한 관념론은 우리 의식에서 근절되어야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부분들뿐이다. 전체는 부분들을 추상화한 것이고 부분들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좋은 것들이 있지 않다면 더 좋은 것이라곤 있을 수 없으며, 전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통해서만 후자는 최상급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병사들이 없는데 어떻게 대장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세계의 궁극적 존재가 물질이나 정신처럼 확정적인 어떤 사물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일 뿐이라는 확신을 언제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신은 관점이며 분류 체계일 뿐이다. 사탄이 범한 죄는 관점의 오류였다.

 

그렇다면 시점(point of view)들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각각의 단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정확할수록 관점은 더욱 완벽해진다. 상위 가치들에 대한 직관적 통찰은 그보다 하위인 것들과의 접촉을 값지게 만들고, 가까이 있는 소소한 것들에 대한 사랑은 숭고한 것의 현실감과 효율성을 우리 가슴에 제공한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큰 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28∼29쪽)

 

 

"들어와, 들어와! 여기에도 신들이 있다고."

 

결국 지구상에서 신성한 신경망이 하나라도 지나가지 않는 사물은 없다. 문제는 그 신경에 도달하여 그것의 반응을 일으키는 일이 어렵다는 점이다. 자기가 있는 부엌에 들어오기를 주저하는 친구들에게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들어와, 들어와! 여기에도 신들이 있다고." 괴테는 식물학과 지질학 탐사 여행 중에 야코비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풀과 돌 속에서 신성을 찾고 있네." 한편 루소는 카나리아 새장에 풀을 키웠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언급한 파브르는 자기 책상 다리에 붙어 살고 있는 미세한 벌레들에 대한 책을 쓴다.

 

정신의 행위라 할 수 있는 영웅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삶의 일부 내용만 해당되는 특별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표면 바로 아래 어디서나 영웅이 탄생할 수 있으며, 누구든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을 힘껏 차기만 해도 샘물이 솟아나길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웅 모세가 보기에는 모든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날 수 있다.(30∼31쪽)

 

 

술 한잔이 가져다주는 기분 좋은 느낌

 

사실, 염세주의의 심연에 도달하여 우주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긍정적인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의 시선은 일상의 소소한 사물들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죽어 가는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아주 사소한 일들을 기억해 내는 것과 같다. 그때 우리는 이 지구상에 우리의 삶을 붙들어 매 주는 것이 위대한 일이나 커다란 즐거움 혹은 거창한 야심이 아니라 한겨울에 화롯불 옆에서 따스한 가정의 온기를 느끼는 순간, 술 한잔이 가져다주는 기분 좋은 느낌, 사랑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얌전한 한 아가씨가 총총히 걸어가는 모습 그리고 위트 있는 친구가 건네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나는 절망에 빠져 나무에 목을 매러 갔던 사람이 자기 목에 줄을 거는 순간 나무둥치에 핀 장미꽃 향기를 맡고 자살을 포기했다는 얘기가 무척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고상한 삶을 위해 현대인이 성찰하고 깨달아야 할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적 충동의 경우처럼, 수없이 감추고 숨기려 해도 마침내 인생 행로에서 승리를 거두는 수많은 어둠의 세력처럼 그것을 취급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감추기를 강요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인간 이하의 성질도 인간 안에서 지속된다. 그것이 지속되는 의미는 무엇일까? 셰익스피어가 한 희곡 작품에서, 마치 자신의 소네트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지는 듯한 친밀하고 다정하고 진지한 말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감정을 접하고 우리가 취해야 할 로고스, 즉 확실한 자세는 무엇일까?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남이 들으면 아니 될 일이지만,

자부심을 느끼던 위엄에 찬

내 태도조차도

이제 덤을 붙여서라도, 공중에

속절없이 나부끼는 깃털 장식과 바꾸고 싶다.

 

이것은 부적절한 욕망이 아니던가? 게다가 ……!(31∼33쪽)

 

(나의 생각)

 

셰익스피어의 희극 작품에서 다루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는 결혼이다. 그런데 유독『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라는 작품만은 그 이전의 작품들, 가령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좋으실 대로』,『십이야』등과는 사뭇 다르게 분위기가 그리 밝지 못하다. 그 주된 이유는 셰익스피어가 이 희극의 핵심 주제를 다른 작품에서 다루었던 '사랑과 결혼'이 아니라 '욕정과 욕정의 억압'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에는 자로』 는 세익스피어의 전통적인 희극에서 가장 멀어진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오르테가가 『돈키호테 성찰』에서 인용하고 싶었던 '부적절한 욕망'을 두고『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에서 인용한 대사는 너무나 짧아서 실상 '저자의 생각'을 온전히 제대로 포착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조금이나마 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나오는 '안젤로의 대사'를 조금 더 길게 인용해 보면 이렇다.(이사벨라는 '수감된 오빠'를 구하기 위해 감옥을 찾아왔는데, '공작 대행'인 안젤로는 그녀의 오빠를 풀어 주는 대가로 이사벨라에게 '성 상납'을 요구한다.)

 

뭐야? 뭐? 이게 그녀 허물인가, 내 것인가?

유혹하고 받는 자, 누구 죄가 더 크지, 하?

그녀는 아니지, 유혹도 안 했고, 바로 나야,

햇볕을 받으며 오랑캐꽃 곁에 누워

활기찬 계절에 꽃처럼 못 피고

사체처럼 썩고 있지. 여자의 정숙함이

가벼움보다도 우리의 관능을 더 크게

자극할 수 있는 걸까? 쓰레기장도 많은데

우리가 그 성소를 허물고 거기에다

뒷간을 만들고 싶을까? 오, 퉤, 퉤, 퉤!

어쩌려고, 혹은 넌 무엇이냐, 안젤로?

그녀를 착하게 만드는 것 때문에

흑심을 품느냐? 오, 그 오빠를 살려 줘라!

(중략)

두 배의 정력과 재주와

본능을 다 가진 창녀조차 내 평정을 한 번도

흔들 수 없었는데 고결한 이 아가씬

날 완전히 정복했다. 남자들이 빠졌을 때

지금까지 난 웃었고 왜 저럴까 했었지.

 - 『잣대엔 잣대로』, <2막 2장 164∼188행>

 

 

 

선조들의 땅!

 

칸트는 『인류학』에서 스페인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데 그 말이 얼마나 심오하고 정확한지 나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이다. 칸트에 따르면, 터키 사람들은 여행할 때 방문하는 나라의 특징적인 결점에 따라 그 나라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그 방법을 사용하여 칸트는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든다. 1. 유행의 땅(프랑스) 2. 못된 기질의 땅(영국) 3. 선조들의 땅(스페인) 4. 과시의 땅(이탈리아) 5. 직함의 땅(독일) 6. 양반들의 땅(폴란드)

 

선조들의 땅! 결국 스페인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이 시대를 사는 스페인 사람들의 자유로운 재산도 아니다. 이 땅에 살았던 과거의 사람들이 지금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우리를 억압하는 죽음의 과두 정치를 형성하고 있다. 아이스킬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신들』에서 하인은 이렇게 말한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33쪽)

 

 

"죽은 자에게 죽음이란 곧 삶이다."

 

간결한 표현을 위해 역설적인 문장을 하나 써 보겠다. "죽은 자에게 죽음이란 곧 삶이다." 이미 소멸해 버린 사물의 영역인 과거를 지배하는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우리의 혈관을 열고 뽑아낸 피를 죽은 자의 빈 혈관에 주입하는 일이다. 과거를 마치 삶의 한 방식으로 다루는 이런 행위는 반동주의자라면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반동주의자는 과거를 죽음의 상태 그대로 삶의 영역에서 빼내어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는 옥좌에 앉힌다. 셀티베로족이 고대에 죽음을 숭배했던 유일한 부족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거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이러한 무능력함이야말로 진정한 반동주의의 특성이다. 반면, 새로운 것에 대한 반감은 다른 민족의 심리적 기질들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기차로 여행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로시니가 흥겨운 소리를 내는 방울 마차를 타고 유럽을 돌아다닌 것을 반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작 심각한 것은 다른 데 있다. 즉 우리가 오염된 영혼의 범주를 가지고 있어서, 마치 독기를 내뿜는 호수 위를 날아가는 새들처럼 과거가 우리의 기억 속으로 떨어지면서 죽는 것이다.(34쪽)

 

 

독서가 완성되면서 작품 역시 완성된다.

 

나는 문학 작품들을 나쁜 작품과 좋은 작품으로 분류하면서 딱지를 매기는 것이 비평의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갈수록 판결을 내리는 데 흥미를 잃어 가고 있다. 나는 사물을 재판하는 대신 그들의 애인이 되고 싶다.

 

나는 비평에서 선택된 작품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려는 지극한 노력을 본다. 그것은 독자들을 작품에서 벗어나 작가에게 데려간 다음, 결국 자잘한 일화들 속에 작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생트뵈브의 방식과는 정반대이다. 비평은 전기가 아니고, 작품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 독립된 작업으로 정당화되지도 못한다. 이는 평범한 독자가 작품에서 강렬하고 명확한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정서적이고 이념적인 도구들을 이용해 비평가가 자신의 작업에서 안내해 주어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비평은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지향해야 하고, 작가를 교정하기보다는 독자에게 보다 완전한 시각 기관을 갖추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독서가 완성되면서 작품 역시 완성된다.(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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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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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중세의 학자들은 시간이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고, 인과 관계 속에서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되는 시간의 경과는 우리의 감각 기관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사물의 진정한 본질은 영원한 현재라고 설명했다.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을 한 학자는 영원의 쓴맛을 약하게 입술에 느끼며 해변을 산책하던 중이었을까?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휴가의 특전에 관해 말하고 있고, 건장한 남자라면 따스한 모래 속에 누워 있는 것에 금방 싫증을 내고 말듯이, 도덕적인 인간이라면 금방 싫증을 내고 말 여가 중의 공상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인식 방법과 형식에 비판을 가하고 그것의 온전한 타당성을 의문시하는 것은, 이성의 경계선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결부되어 있다면 불합리하고 파렴치하며 모순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성이 그러한 경계선을 넘어선다면 이성은 자신의 본래적인 과제를 소홀히 한다는 누명을 쓰게 될 것이다.(392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어떤 날씨건 낮과 밤의 어떤 시간이건, 나는 그 시점을 최대한 선용하고 나의 지팡이에도 새겨놓으려고 했다.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개의 영원이 만나는 바로 이 현재의 순간에 서서 줄을 타듯이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28∼29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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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9-02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의 산>을 읽기 위해서는 중세 스콜라 철학도 공부해야겠군요. 많은 사전 공부가 필요한 작품임을 oren님 덕분에 알게 됩니다.^^:

oren 2017-09-03 00:13   좋아요 1 | URL
『마의 산』에는 온갖 철학 사상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서, 작가가 독자들을 일부러 ‘마의 산‘ 속에 붙잡아 두고서 끊임없이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서 괴테, 바그너,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영향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정작 문제는 작가가 과연 무슨 의도로 ‘그런 사상들‘을 작품 속에서 여러 등장인물들을 통해 끊임없이 부각시키고 있는지를 제대로 포착하기가 힘들다는 점에 있는 듯합니다.
* * *
토마스 만은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서문에서 그랬듯이 시도동기적인 암시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을 두 번 읽으라고 요구한다. 이는 소설의 줄거리보다 시도동기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암시를 내포한다. 그럴 적에 사실적인 외부 묘사는 가상으로 드러나고 그 배후에 제2의 차원이 드러난다. 심층 세계에는 알레고리 구조가 자리 잡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줄거리가 사실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점이 토마스 만의 뛰어난 작품 기법이다. - 홍성광, <작품 해설> 중에서

2017-09-08 0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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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8 1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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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8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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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1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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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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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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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17: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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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1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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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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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이 세상에는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단조로운 모양으로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섞이고 뒤범벅이 되어 어느 정도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어떤 생활 상태, 풍경적인 상황이 있다(우리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경우를 '풍경'이라고 말해도 된다면). 하여간 휴가 중이라면 그런 마력에 빨려 들어가도 그럭저럭 보아 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해변의 산책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데,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를 떠올릴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애착을 느끼곤 했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스 카스토르프는 길을 잃고 눈 속을 헤매 다닐 때 고향의 모래 언덕을 떠올리고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가 이러한 기묘한 망아(忘我)의 기분을 여기서 끌어들인다 해도 독자는 자신의 경험과 추억으로 이에 동감하고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여러분은 걸어가고 또 걸어간다. 여러분은 시간으로부터, 시간은 여러분으로부터 사라져 버려, 여러분은 산책을 하다가 결코 제 시각에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 바다여, 우리는 그대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대를 생각하며 그리워한다. 지금까지 남몰래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그대는 분명히 큰 소리로 불려 나온 것처럼 우리의 이야기 속에 등장해야 한다.' 파도 소리가 솨솨 하는 황량한 바다, 칙칙한 연회색 하늘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고, 비릿한 습기가 사방을 가득 채우며, 짭짤한 소금 맛이 우리의 입술에 착 달라붙는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화롭게, 아무런 심술 없이 이 공간을 지나가는 바람, 우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마비시켜 주는 이러한 위대하고 광활하며 온화한 바람에 귀를 감싸인 채, 해초와 조그만 조개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폭신폭신한 모래 위를 걷고 또 걸어간다. 우리는 모래 위를 한없이 거닐며, 너울거리며 밀려왔다가는 다시 물러가는 흰 포말이 혀를 내밀고 우리의 발을 핥으려는 것을 본다. 파도는 부서져 흰 거품을 일으키면서 밝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는, 평평한 해변에 비단처럼 쫙 깔린다. 이렇듯 여기저기에, 저쪽 모래사장에서, 이렇듯 혼란스럽게 사방에서 들려오며 부드럽게 솨솨 하는 굉음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깊은 안도감에 빠지며, 알다시피 망각에 빠진다. 영원의 품에 안겨, 우리 그만 눈을 감도록 하자! 아니, 보라, 저기 거품이 이는 회색과 녹색의 광활한 바다, 아마득한 수평선까지의 거리가 엄청나게 줄어들어 소실되어 버린 것 같은 저 바다에 돛단배 한 척이 떠 있다. 저곳에? 저곳이란 무슨 말인가? 저곳은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울까? 여러분은 알지 못하리라. 여러분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어 머리가 아찔해질 것이다. 이 배가 해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배 자체가 물체로서 크기가 얼마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작고 가까울까, 아니면 크고 멀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여러분의 눈빛은 흐려지고 만다. 여러분 속의 어떤 기관이나 감각도 그 공간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걷고 또 걸어간다. 벌써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얼마나 멀리 걸었을까?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걷고 또 걸어도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고, 저곳은 이곳과 마찬가지며, 아까는 지금과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단조로운 공간 속에서는 시간이 없어져 버리고, 가도 가도 똑같다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움직임은 더 이상 움직임이 아닌 것이며, 움직임이 더 이상 움직임이 아닌 곳에서는 시간도 없다. (389∼391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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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젊은 모험가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들을 평지의 성실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현기증이 날 만큼의 동일성이라는 척도가 점점 커져 갔다. 좀 관대하게 말한다면 오늘의 지금을 어제, 그저께, 그끄저께의 지금과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달걀처럼 다 똑같아 보였다. 그리하여 지금 현재는 한 달 전, 일년 전의 현재와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뭉뚱그려 영원한 현재로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직' 과 '다시' 와 '장차' 라는 윤리와 관련되는 의식적인 구분이 행해지는 한에는, '오늘' 을 과거와 미래와 구분지어 생각하는 관계 개념인 '어제' 와 '내일' 의 의미를 확대하여 좀 더 커다란 상황에 적용시키고 싶은 유혹이 슬며시 생겨난다. 지극히 미세한 시간 단위를 토대로 하여 살아가는 '짧은' 일생에서 볼 때, 분망하게 움직이는 우리의 초침을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는 시침처럼 생각하는 생물체가 좀 더 작은 혹성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공간에 시간이 엄청나게 큰 폭으로 흐르고 있어서, '방금' , '조금 뒤에' , '어제' 와 '내일' 이라는 구분 개념이 그들의 체험에 엄청나게 확대된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는 생물체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러한 상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관대한 상대주의의 정신으로 판단해 볼 때, 그리고 '고장이 다르면 풍속도 다르다' 라는 명제에 따라 보건대, 이는 정당하고 건전하며 존중할 만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구상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 게다가 하루, 일주일, 한 달, 한 학기라는 시간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인생에서 많은 변화와 진보를 가져다주는 연령의 사람이 어느 날 '일년 전'을 '어제' 로, '일년 후' 를 '내일' 로 말하는 악습에 빠진다든가, 또는 간혹 그러한 기분에 젖는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건 의심의 여지 없이 '과오와 혼란' 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고, 따라서 지극히 우려스럽다고 말해야겠다.(388∼389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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