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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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긋기)

 

마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음악을 들려주는 오페라 대본과 같은 것

 

우리가 그리스 비극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일은 피하자.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인문학조차도 그리스 비극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이해력을 우리에게 전수하지 못했다. 아마 그리스 비극만큼 순전히 역사적이면서도 중립적인 주제들이 뒤섞인 작품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는 비극이 당시 아테네에서 종교 의례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비극 작품은 무대 위보다는 관객들의 마음속에서 더 생생하게 실현되었다. 당시에는 문학 외적인 면, 즉 종교적 분위기가 무대와 관객을 사로잡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은 마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음악을 들려주는 오페라 대본과 같은 것이다. 혹은 종교적 주제의 그림이 있는 테피스트리에서 다양한 색깔의 실만 있는 뒷면만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지금 고대 그리스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아테네인들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일을 해낼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을 못해 낸다면 그리스 비극은 사전도 없는 외국어로 쓰인 책과 다름없을 것이다.(173∼174쪽)

 

 

 

신학 시인(神學詩人, teopoet)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이 영웅들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붙인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는 언제 이렇게 하는가? 아이스킬로스는 시학과 신학 사이의 모호한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쓴다. 그가 다루는 방대한 주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고르라면 미학적, 형이상학적 그리고 윤리적인 것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신학 시인(神學詩人, teopoet)이라 부르고 싶다. 그를 고뇌에 빠지게 했던 문제들로는 선과 악, 자유, 정의, 우주의 질서, 만물의 원인 등이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초월적인 문제들을 점진적으로 다루기 위한 시리즈였다. 따라서 그의 영감은 차라리 종교 개혁의 추동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글 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도 바울이나 루터 쪽을 더 닮았다. 그는 믿음을 통해 민중 종교를 극복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민중 종교란 한 시대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이었다면 이러한 충동이 시를 쓰는 쪽으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종교가 사제의 영향을 덜 받는 반면에 환경의 영향을 더 받고 더 유연했기 때문에 신학적 관심이 시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 관심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조명받을 수 있었다.(174∼175쪽)

 

 

 

영웅이 비극적 운명을 겪는 것도 스스로가 원해서이다

 

나는 고전적인 이론들이야말로 지나친 단순화의 희생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영웅들의 행위를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일반 관객들의 마음속에 영웅주의가 불어넣은 효과를 이용해 그 이론들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척 화려하지만 실속은 없는 행위들만 일어나는 그러한 층위의 삶을 보통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그는 생기 넘치고 충만한 상태도 알지 못한다. 그는 필요한 일만 하고 근근이 살아가면서 남들이 억지로 시킬 때만 행동에 나선다. 그는 항상 떠밀려 살고 있으며, 그의 행위는 반사 작용일 뿐이다. 그는 자기 관심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선 나서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그에게는 모험의 의지가 가득한 사람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고, 비극의 주인공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던 일의 후유증을 겪으며 사서 고생하는 사람일 뿐이다.

 

결국 비극의 기원은 숙명과는 거리가 멀고, 영웅이 비극적 운명을 겪는 것도 스스로가 원해서이다. 그러므로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비극의 인물들은 언제나 허구적이다. 모든 고통은 영웅이 관념적 역할, 즉 자신이 선택한 상상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또 다른 배역을 맡아 연기하면서 나중의 배역을 더 진지하게 연기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전적인 자유 의지는 비극적 과정의 근원이 되어 사건을 진행시킨다. 이러한 '의지의 행위'는 그것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일련의 새로운 실재들, 즉 비극적 질서를 창조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기본 욕구 외에는 더 바라는 게 없고 그 욕구란 것도 그냥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들에게는 이 '의지의 행위'가 당연히 허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176∼177쪽)

 

 

 

눈을 높여야 하고 고양되어야 한다

 

비극은 우리의 일상 수준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기에 맞춰 눈을 높여야 하고 고양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만일 현존하는 것 가운데 비슷한 것을 찾으려면 우리는 눈을 들어 역사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을 봐야 한다.(178쪽)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평범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야심에 찬 사람이기 때문

 

비극은 위대한 행위를 지향한다는 점이 우리 마음에 전제되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허세일 뿐이다. 비극은 바로 우리 발밑에서 작품을 시작하게 하여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수동적으로 작품 속에 끌고 들어가는 리얼리즘의 명료성과 핍진성을 부과하지 않는다. 마치 영웅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운명으로 택하듯, 비극을 즐기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어느 정도 그것을 원해야 한다. 그럴 때 그것은 우리에게 위축된 형태로나마 남아 있던 영웅성을 사로잡으러 온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내면적으로 조금씩 영웅의 잔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영웅의 행보에 올라타기만 하면, 우리는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힘과 상승 충동이 내면 깊은 곳에서 고동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역시 초인적인 긴장을 걸머지고 영웅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주위의 모든 것이 거대해지면서 한층 고결한 존엄성을 띠게 되는 것을 놀라움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무대 위의 비극은 현실 속의 영웅을 발견하고 경탄하게끔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준다. 그렇기에 사람의 심리를 조금 알았던 나폴레옹은 프랑크푸르트에 머물고 있을 때 자신의 진중 극단이 항복한 여러 국왕 앞에서 희극을 공연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탈마로 하여금 라신과 코르네유 비극의 주인공만 연기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내면에 품고 있는 영웅의 흔적 주위에는 천박한 본능을 가진 무리들이 배회하며 소동을 일으킨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내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본능적으로 커다란 불신을 품는다. 우리는 누가 세속적 차원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세속을 초월하려 하는 대담한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그 이유를 따지고 나선다.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평범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야심에 찬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웅의 길은 이렇게 야심을 품으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리 천박한 사람도 잘난 사람보다 우리를 화게 하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영웅이 직면한 위험은 불행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불행은 딛고 일어서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숭고함과 웃음거리는 백지 한 장 차이다"라는 경구는 영웅을 진정으로 위협하는 위험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영웅이 넘치는 위대함과 최고의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되는대로 생겨 먹은" 보통 사람들처럼 되기 싫다는 자신의 우월성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면 그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새로운 예술, 새로운 과학, 새로운 정치를 시험하는 개혁가는 평생을 적대적이고 부패한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 환경은 영웅에게 사기꾼은 아니라 할지라도 허깨비 같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환경, 즉 전통, 통념, 관습, 기성세대의 방식, 민족적 풍습, 전형 등 한마디로 말해 광범위하게 형성된 타성을 거부할 때 영웅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땅속 깊은 지각을 형성하고 있다. 영웅은 생각을 통해 두껍고 부담되는 이 단층을 폭파시켜야 한다. 불현듯 그의 환상 속에 나타난 이 생각은 공기 입자보다도 가벼운 미립자이다. 타성과 자기 보존의 본능은 그것을 참을 수 없어 복수에 나선다. 이리하여 그 대항마로서 리얼리즘을 보내고 영웅을 우스꽝스럽게 포장해 버린다.

 

영웅의 면모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의지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비극적 인간은 그 몸의 반이 현실 바깥으로 나가 있다. 그러므로 그의 발을 잡아 그 몸 전체를 현실로 돌려보내는 것만으로 그는 희극적 인물로 전락한다. 고귀한 영웅의 이야기는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으며 어렵사리 현실 세계의 타성을 딛고 일어난다. 그것은 포부를 통해 영위되며, 미래는 그것을 증거하게 된다. 희극성(vis comica)은 영웅의 순수한 물질적 측면만 강조할 뿐이다. 현실은 픽션을 통해 전개되고 자기 존재를 우리에게 부과하면서 비극적 역할을 재흡수한다.

 

영웅은 이 역할을 자기 일부로 받아들이고 아예 자신을 그것과 섞어 버린다. 그리고 영웅은 현실에 의해 재흡수되면서 그의 야심찬 의도는 자신의 몸에 굳어지고 물질화된다. 결국 우리는 그의 역할을 우스꽝스러운 변장, 즉 천박한 존재가 쓰고 다니는 가면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179∼181쪽)

 

 

 

희극은 비극을 딛고 살아간다

 

영웅은 시대를 앞서가면서 미래에 기대를 건다. 그의 태도는 유토피아적 의미를 갖는다. 그는 지금의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말한다. 그래서 여성 페미니즘 운동가는 여자들이 더 이상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없을 그날을 희구한다. 그러나 희극 작가는 페미니스트들의 이상 대신 현재 그 이상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근대 여성을 내세운다. 미래의 환경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어떤 것이 현재에 얼어붙어 주춤거릴 때 그것은 가장 사소한 생존 기능조차 잃어버리게 되고, 이를 보는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사람들은 날아가던 관념의 새가 썩은 물이 내뿜는 독기를 맡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유익한 웃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웅 한 명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백명의 사기꾼들을 징벌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소설이 서사시를 딛고 살아가는 것처럼, 희극은 비극을 딛고 살아간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볼 때, 희극은 고대 그리스에서 새로운 신들을 도입하고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 내려는 비극 작가와 철학자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어났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민중 전통의 이름으로, '우리 선조들'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스러운 관습의 이름으로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인물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에, 에우리피데스가 문학 작품에 담았던 내용을 같은 이름의 두 등장인물에게 반영한다.(181∼182쪽)

 

 

 

비극에서 희극으로 가는 사이의 거리

 

희극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문학 장르이다.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 상태와 이미 되어 있다고 믿는 상태 사이의 거리가 비극에서 희극으로 가는 사이의 거리이다. 그것은 숭고미와 익살미 사이의 통로이다. 영웅 캐릭터가 의지의 단계에서 지각의 단계로 이행하면서 비극이 퇴화하고 붕괴한 결과인 희극의 등장을 야기한다. 신기루는 그냥 신기루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돈키호테에게도 일어나는데, 모험의 의지를 천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돈키호테가 스스로를 모험가라고 굳게 확신할 때이다. 불멸의 소설은 단순한 희극으로 전락할 지경에 처한다. 앞서 말했듯이, 소설과 순수한 희극은 단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돈키호테』를 처음 읽은 독자들에게는 이런 형태의 소설이 새로운 문학 형식으로 비쳤을 것이다. 아베야네다판 서문에서 작가는 두 번에 걸쳐 이와 관련된 언급을 한다. 서문 첫머리에서 "『돈키호테』는 작품 전체가 희극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는 아베야네다는 계속해서 이렇게 덧붙인다. "세르반테스는 『갈라테아』와 산문 희극들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가 쓴 소설이라곤 이것들이 거의 유일하니까 말이다." 세르반테스 시대의 모든 극작품을 지칭하는 장르의 이름이 희극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실 이 문장들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182∼183쪽)

 

 

 

 

플라톤이 여기서 소설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

 

소설의 상위 레벨은 비극이다. 음악의 여신 뮤즈는 희극으로 전락하는 비극성을 따라 비극으로부터 하강한다. 이러한 비극적 행로는 불가피한 것이다. 비극은 소설의 일부를 형성해야 한다. 설사 그 경계를 이루는 것이 섬세한 테두리선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나는 페르단도 데 로하스가 『셀레스티나』를 쓰면서 불렀던 희비극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희비극이다. 이 장르의 발전은 『셀레스티나』에 와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마침내 『돈키호테』에 이르러서야 숙성되어 만개한다.

 

물론 비극적 요소는 크게 확장되면서 심지어 희극적 부분과 대등한 정도의 공간과 가치를 소설 내에서 차지하기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차지하는 정도와 변동의 폭은 정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가능하다.

 

비극과 희극의 종합으로서 소설은 언젠가 플라톤이 특별한 해석 없이 암시했던 신기한 희망이 실현된 결과이다. 그것은 이른 새벽의 향연에서였다. 디오니소스의 액체에 잔뜩 취한 손님들이 무질서하게 잠들어 있다. 아리스토데모스가 "아침 닭이 울 때"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 보니 소크라테스, 아가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것 같다. 그는 이들이 어려운 주제의 대화에 빠져 있는 소리를 들었다고 믿는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젊은 비극 작가인 아가톤과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에 꼿꼿이 맞서 비극과 희극의 시인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이 대목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해석이 없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독창적인 영혼을 가진 플라톤이 여기서 소설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이다. 희미한 여명 속에 소크라테스가 향연에서 취했던 태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영웅이자 광인이었던 돈키호테와 마주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185∼186쪽)

 

 

 

『일리아스』와 『돈키호테』

 

스페인 사상에서 애국으로 통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해 놓은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정작 스페인이 이룬 위대한 업적들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해진다. 별로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열광적인 찬사가 쏟아지고, 정작 모든 에너지를 바쳐 찬사를 보내야 할 곳에는 그러한 반응이 전혀 없는 것이다.

 

모든 서사시가 안으로는 마치 과일의 씨처럼 『일리아스』를 품고 있는 것처럼, 모든 소설 역시 안으로는 종이의 줄무늬 세공처럼 『돈키호테』를 품고 있다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책이 아직까지 없다.(187쪽)

 

 

 

치마 입은 돈키호테

 

플로베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책 읽는 법조차 몰랐지만 이미 가슴으로 알고 있던 『돈키호테』에서 나의 모든 근원을 발견했다." 보바리 부인은 영혼에 최소한의 비극성을 지니고 있는 치마 입은 돈키호테이다. 보바리 부인은 낭만주의 소설의 독자이면서 반세기 이상 유럽을 떠돌았던 부르주아적 이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가련한 이상이여! 부질없는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여, 실증주의적 낭만주의여!

 

플로베르는 소설 예술이 비판적 의도와 희극적 동력을 가진 장르임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보바리 부인』을 집필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판을 지향한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은 나의 능력을 더욱 붇돋아 준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비판적이고 더 나아가 해부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아! 근대 사회에 부족한 것은 그리스도도, 워싱턴도, 소크라테스도, 볼테르도 아니라 바로 아리스토파네스이다."(187∼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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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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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긋기)

 

이것이 인생이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모험담은 억압적이고 견고한 현실을 유리처럼 깨 버린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것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며 새로운 것이다. 각각의 모험은 세계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서 유일무이한 과정이다. 그러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우리는 삶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의 경계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가능성들이 운신할 수 있는 경계의 폭을 깨닫는 데에는 아무리 늦어도 30년이면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이 실재를 평가하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 발에 매여 있는 줄의 길이가 몇 미터인지 재 보는 것과 같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인생이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쳇바퀴인 거야?" 바로 여기에 모든 사람에 대한 위험한 시간이 도사린다.

 

이 대목에서 가바르니의 재미있는 그림이 생각난다. 그것은 조그만 구멍을 통해 세계를 보여 주는 만화경 옆에 서 있는 교활한 늙은이를 그린 것이다. 그 늙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겐 이미지를 보여 줘야 해. 실재는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거든." 가바르니는 미학적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파리의 작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살았다. 그는 모험담에 쉽게 넘어가는 대중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실제로 약한 인종들이 상상력이라는 강력한 약을 우리가 존재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도망치도록 해 주는 악덕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던 것이다.(145∼146쪽)

 

 

 

실재가 시에 침투하여 모험을 더 높은 미학적 잠재력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변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초월하거나 포기한 덕분에 시적인 것을 논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현 실재'란 말은 곧 '시적이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여기까지가 바로 시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최대한 확장한 경계였다.

 

여관과 산초와 마부와 불한당 마에세 페드로가 어떻게 시적일 수 있겠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시적이지 않다. 인형극 무대와 대조적으로, 그들은 시적인 것에 대한 공식적인 도발을 의미한다. 세르벤테스는 모든 모험을 부인하는 산초의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막상 산초가 모험을 통과해야 할 때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산초의 역할이다. 이렇게 우리는 시의 분야를 실재하는 것 위로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을지 보지 못한다. 상상적인 것이 그 자체로 시적인 것이라면 실재는 그 자체로 시적인 것과 대립한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 봐라(Hic Rhodos, hic salta)". 실재야말로 미학이 자신의 시각을 예리하게 다듬어야 하는 장소이다. 순진하고 현학적인 연구자들이 상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정당화하고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더 많아진 것이 바로 실재적 경향이다. 그것은 바로 미학의 초석이 된다.

 

실제로 돈키호테의 위대한 행위가 우리를 인도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돈키호테를 과연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저쪽에 혹은 이쪽에? 둘 중 어느 한 곳만 지정한다면 잘못된 일이 될 것이다. 돈키호테는 두 세계가 만나 경사각을 이루는 교차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만일 돈키호테가 온전히 실재에 속한다고 말하면 우리가 반대할 일은 없다. 우리는 다만 돈키호테와 함께 그의 길들이지 않은 의지가 실재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의지는 하나의 목표를 관념처럼 지향하는데 그것은 바로 모험이다. 실재의 돈키호테는 진정으로 모험을 희구한다. 스스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법사들이 나의 행운을 빼앗아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용기와 정신만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나도 쉽게 관객의 자리에서 무대 속으로 뛰어든다. 플라톤의 말대로 인간의 본성이 대개 그렇듯, 그는 두 세계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조금 전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실재가 시에 침투하여 모험을 더 높은 미학적 잠재력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 사실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실재가 상상의 대륙을 품기 위해 문을 열고 그것을 떠받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달빛 아래의 여관은 찌는 듯이 무더운 라만차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한 척의 배가 되고 그 안에는 샤를마뉴 대제와 용맹한 그의 열두 기사들, 산수에냐의 마르실리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멜리센드라가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사도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은 돈키호테의 환상 속에서 실재가 되고 이를 통해 그는 의심할 나위 없는 존재감을 즐기고 있다. 그러므로 리얼리즘 소설이 황당무계한 기사도 소설에 반대하여 태어났다고 하지만 사실 내적으로는 봉인된 모험을 품고 있는 것이다.(151∼153쪽)

 

 

 

신기루의 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은 대지의 절망적인 건조함

 

한여름 라만차 지방에는 불덩이 같은 태양이 작열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대지는 종종 신기루 현상을 일으킨다. 우리가 보는 물은 진짜 물이 아니지만, 그 근원을 생각해 보면 뭔가 진짜 같은 것도 있다. 그 척박한 근원, 즉 신기루의 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은 대지의 절망적인 건조함이다.

 

비슷한 현상을 우리는 두 가지 방향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것이다. 즉 태양이 만들어 내는 물은 진짜 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반어법적이고 비스듬한 시선이다. 우리는 그것을 신기루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생생한 물의 모습을 통해, 그런 척 위장하고 있는 대지의 건조함을 본다. 모험 소설, 모험담, 서사시 등은 상상적이고 의미심장한 사물을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반면에 리얼리즘 소설은 두 번째 방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것은 첫 번째 방법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리얼리즘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기 위해 신기루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돈키호테』가 기사도 이야기에 반대해서 쓰인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에도 기사도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말이다. 문학 장르로서 소설은 본질적으로 그런 현태의 영양 흡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설명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현재적인 실재가 어떻게 시적 실체로 변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서만 본다면, 그것은 결코 스스로 시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신화적 영역의 권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화의 파괴로서, 신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반어법적으로 취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실재는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며 정적이고 말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동력을 가지면서 관념적 수정체 같은 세계를 상대로 도발을 감행하는 능동적인 힘으로 변모한다. 이 수정체의 환상이 일단 깨지면 그것은 무지개 빛깔의 가루가 되었다가 점점 색깔이 바래면서 마침내 거무스름한 흙더미가 된다. 우리는 모든 소설에서 이러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실재는 시적이지 않고 예술 작품에 들어오지도 못한다. 단지 관념적인 것을 다시 흠수하는 몸짓이나 운동일 뿐이다.(155∼157쪽)

 

 

 

풍차

 

몬티엘 평원은 이제 우리에게 열기로 가득하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물이 마치 하나의 견본처럼 늘어서 있다. 돈키호테, 산초와 함께 이 평원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는 사물들에 두 개의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사물들의 '의미', 즉 그것들을 해석할 때 드러나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들의 '물질성', 즉 모든 해석에 앞서서 그리고 그것을 초월해서 사물들을 구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실체이다.

 

마치 창공의 혈관 하나가 칼에 찔린 듯 핏빛으로 물든 석양의 지평선 위에 크립타나의 제분소 풍차가 우뚝 서서 일몰을 더욱 장엄하게 만든다. 이 풍차들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의미'로서, 그것들은 거인들이다.돈키호테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비정상적인 것은 모든 인류에게 지금까지 정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거인들이 실제로는 거인이 아니라고 치자.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어떤가? 다시 말해 일반적인 거인들은 어떤지를 묻는 것이다. 사람은 거인이라는 존재를 어디에서 끄집어낸 것일까? 그것은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의 현실에서도 없는데 말이다. 그것이 언제 존재했든 간에 인간이 처음으로 거인들을 생각했던 계기는 세르반테스의 작품에 나오는 장면과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것이 거인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관념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거인이 되곤 했던 것이다. 풍차를 돌리는 날개에는 브리아레오스의 팔들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우리가 만약 그러한 연상 작용의 충동에 빠져 풍차의 날개가 그리는 회전 운동에 빨려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거인을 만날 것이다.

 

정신의 다른 모든 표현과 마찬가지로 정의와 진리 역시 물질적으로 발생하는 신기루이다. 사물의 관념적 측면인 문화는 우리의 마음을 전이시킬 수 있는 별도의 자족적 세계로 자리 잡으려 한다. 이것은 하나의 환상이다. 그리고 단지 환상으로 간주되고, 대지 위의 신기루로 간주될 때만 문화는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158∼159쪽)

 

 

 

문화는 기억과 언약이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며 꿈꾸는 미래이다.

 

간단히 말해, 문화 그리고 고귀하고 명료하며 고상한 모든 것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시적 리얼리즘의 의미이다. 세르반테스는 이 모든 것이 문화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픽션이다. 마치 여관이 인형극 무대를 둘러싸고 있듯이 야만적이고 거칠고 소리 없고 무의미한 사물의 실재가 문화를 둘러싸고 있다. 실재가 그런 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고 거기에 있다. 즉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자기 충족적이다. 그것의 힘과 유일한 의미는 단순한 현존에 뿌리박고 있다. 문화는 기억과 언약이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며 꿈꾸는 미래이다.

 

그러나 실재는 단순하고도 냉정하게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존이고 퇴적물이며 무기력이다. 그것은 질료이다.(162∼163쪽)

 

 

 

영웅

 

우리는 지금까지 희극성의 진정한 면모를 제법 일관되게 바라보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신기루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고 쓰고 있을 때, 희극(comedia)이라는 단어는 마치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펜 끝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우리는 다 타버리고 그루터기만 남은 공터에 서린 신기루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희극 사이에 뭔지는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유사성이 있음을 느낀다.

 

이야기는 이제 우리를 이 주제로 이끌어 간다. 우리는 여관방과 마에세 페드로의 인형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놓고 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돈키호테의 의지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주인공으로부터 행운을 빼앗아 갈 수는 있겠지만, 그의 노력과 용기를 빼앗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의 모험은 뒤죽박죽 끓어오르는 두뇌에서 나온 수증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모험을 향한 주인공의 의지는 실재하는 것이고 진실한 것이다. 모험은 물질적 질서가 흐트러진 것으로, 다소 비현실적이다. 모험을 향한 의지에서, 그 노력과 용기에서 우리는 기이한 두 개의 본성을 만나게 된다. 그 두 요소는 상반된 세계에 속해 있다. 즉 의지는 실재하지만, 의지의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서사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자신이 꿈꾸는 욕망과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 반면에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인간은 현실을 개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역시 그러한 현실의 일부분이 아닌가? 그는 현실 덕에 살고 있고, 그 결과물이 아닌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모험으로 투사만 된 것이 어떻게 척박한 현실을 지배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과의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 주변이 조금 색다르게 돌아가기를 열망한다. 즉 그들은 관습이나 전통, 한마디로 말해 생물학적 본능이 강요하는 행동 방식을 반복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영웅이 된다는 것은 다수 가운데 유일한 사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을 거부하고, 상황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틀에 박힌 행위를 거부한다면, 우리 행위의 원인을 우리 안에서, 오로지 우리 안에서만 찾게 된다. 영웅의 의지는 조상의 것도 아니고 사회의 것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염원을 가리켜 영웅성이라 한다.

 

나는 실질적이거나 적극적인 영웅의 이러한 고유성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다고 믿는다. 그의 삶은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것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다. 그가 하는 하나하나의 행동은 먼저 관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식의 행위를 발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삶은 영원한 고통이며, 관습에 굴복하고 질료의 포로가 되어 있는 자신의 일부를 끊임없이 잘라 내는 것이다.(167∼169쪽)

 

 

한 시대의 진정한 문학은 그 시대의 인간 감성이 남겨 놓은 총체적인 고백이다

 

나는 이 짧은 글을 시작할 때 제시했던 것을 계속 주장할 필요는 없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시와 예술이 궁극적으로 인간, 오로지 인간적인 것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시의 주제가 과거냐 현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풍경은 항상 인간의 배경으로만 그려진다. 그렇게 보면, 모든 예술 형식은 결국 인간에 의해 인간의 해석이 바뀌는 데에서 자신의 기원을 찾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느끼는 인간관에 대해 말해 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예술을 추구하는지 말해 줄 수 있다.

 

모든 문학 장르가,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이렇게 인간을 해석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를 열어 주는 물길이라고 할 때 특정 시대가 특정 장르를 선호하는 현상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시대의 진정한 문학은 그 시대의 인간 감성이 남겨 놓은 총체적인 고백이다.

 

그렇다면 영웅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영웅이 때에 따라 직선적으로 혹은 기울어져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직선적으로 보일 때 우리의 시선은 영웅을 비극적이라 할 수 있는 미학적 대상으로 변모시켰다. 반면 기울어져 보일 때 영웅은 희극적이라 불리는 미학적 대상으로 변모한다.

 

유머와 희극에 푹 빠져서 도저히 비극적 감수성을 갖기 힘든 시대가 있었다. 특히 부르주아의 시대이자 민주주의 그리고 실증주의 시대였던 19세기는 너무 심하게 희극에 기울어 있었다.

 

서사시와 소설 사이에 존재했던 상호 관계는 우리 시대에 비극과 희극의 관계로 반복되고 있다.(171∼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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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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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아! 만일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낸다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헤맨 지 350년 후에 국가의 전통을 좇으라고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빈정거림이 아닌가? 전통이라! 스페인에서 전통이라는 것의 실상을 알아보면 그것은 스페인의 잠재적 가능성을 서서히 없애 버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따를 수 없다. 내게 스페인은 극히 드문 경우에만 실현되었던 드높은 소망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전통을 따를 수 없다. 아니, 욓려 그 반대이다. 우리는 전통을 거슬러 가야 하고, 전통을 초월해서 가야 한다.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전통의 잔해 사이에서 우리 인종 최고의 본질과, 스페인적인 가치 기준과 혼돈에 맞서 떨고 있는 스페인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스페인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스페인이 아니라 그것의 실패작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무기력한 전통의 스페인, 그동안 늘 그래 왔던 스페인의 모습을 불살라 버린다면 남은 재를 체로 걸러 내어 보석처럼 영롱한 광채가 빛나는 스페인, 잘될 수 있었던 스페인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미신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스페인이 과거에 고정되어 있다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해 온 꼬임에 넘어가면 안 된다. 지중해를 항해하던 뱃사람들은 세이렌이 유혹하는 치명적인 노랫소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단 하나의 방법만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그에 맞서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스페인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사람들 역시 거꾸로 스페인 역사의 전설을 힘차게 불러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빈약해진 우리 인종의 심장이 순수하고 강렬하게 뛰기 시작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경험 가운데 하나가, 아니 가장 본질적인 경험이 바로 세르반테스이다. 바로 여기에 스페인적인 충만함이 있다.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우리가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단어가 여기 있다. 아! 만일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낸다면, 사물에 접근하는 세르반테스의 방식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해 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정신적인 봉우리들에는 시적 문체가 철학, 도덕, 과학 그리고 정치를 함께 아우르는 단단한 연대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날 누군가 와서 세르반테스 문체의 면모를 밝혀 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지침에 따라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새로운 삶에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용기와 재능이 있다면 정말 순수하게 우리는 새로운 스페인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109∼110쪽) 

 

 

 

마치 우주의 심장인 것처럼

 

황혼 녘의 하늘색이 모든 풍경을 도배하고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그들의 연약한 목구멍에 걸려 잠들어 버렸다. 나는 물줄기가 흘러가는 개천에서 벗어나 절대 적막의 세계에 접어들었다. 그때 나의 가슴은 마치 배우가 극적인 마지막 대사를 읊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사물의 깊숙한 바닥에서 빠져나왔다. 쿵 …… 쿵 …… 리드미컬한 망치질이 시작되었고 그 덕분에 대지의 감정이 내 기운 속으로 스며들었다. 높은 하늘의 별 하나가 규칙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우주의 심장인 것처럼, 내 별의 쌍둥이 형제인 것처럼, 그리고 경이로움 자체인 세계에 대한 놀라움과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나의 별인 것처럼.(111쪽)

 

 

문학 장르

 

형식과 내용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서 시적 내용은 추상적 규칙의 제한을 의식하지 않고 매우 자유롭게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과 내용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마치 불에서 열기가 나오듯 형식은 내용에서 나온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비유는 정확하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형식은 신체 기관이고 내용은 그것을 창조하는 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문학 장르는 시적 기능으로서, 미학적 생성을 끌어당기고 있는 방향이다.

 

내용 혹은 주제와 그 형식 혹은 표현 장치의 구분을 거부하는 최근의 경향은 그것의 현학적인 구분 못지않게 쓸모없는 일이다. 사실 그것은 하나의 도로와 그 도로의 방향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은 것이다. 방향을 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했던 목표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날아가는 돌은 공중의 궤도를 그리는 곡선을 이미 내부적으로 예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곡선은 최초의 추진력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개시키고 완성시킨다.(117쪽)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

 

결국 비극이란 어떤 근본적인 시적 주제의 확장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극성의 확장이다. 그렇다면 형식에 있는 것이든 내용에 있는 것이든 똑같은 것이다. 다만 내용상으로 하나의 성향이나 단순한 의도였던 것이 형식을 통해 분명하게 전개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사물이 각기 다른 순간에 있다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듯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나는 고대 시학에서 말하는 바와 반대로, 문학 장르라는 것이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근본적인 주제이며 진정한 미학적 범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서사시는 시적 형식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확장되고 발현되는 과정에서 완성에 이르는 본질적인 시적 내용의 이름이다. 서정시 역시 극이나 소설의 형태로 번역될 수 있는 관습적인 언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내용인 동시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118쪽)

 

 

 

시대 자체가 해석이다

 

어떻든 간에 예술의 본질적 주제는 언제나 인간이다. 그리고 상호 배타적이고 필연적인 동시에 궁극적인 미학적 주제로 인식되는 장르는 인간성의 중요한 흐름을 포착하는 폭넓은 시각이 된다. 각 시대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해석을 낳는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시대가 해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시대 자체가 해석이다. 따라서 각 시대는 특정한 장르를 선호하게 된다.(118∼119쪽)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것

 

두 계열의 장르가 가진 예술적 의도는 매우 큰 대조를 보여 준다. 전자의 경우 등장인물과 그들의 행보 자체가 미적인 즐거움의 원천이다. 즉 작가는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반대로,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세속적 인물들이 망막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보여 주는 그 방식 자체가 우리에게 유일한 흥미를 끈다. 세르반테스가 분명 이러한 대조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 없는데, 이는 「개들이 본 세상」에 나오는 다음 대사에서도 알 수 있다.

 

너에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 인생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들으면 넌 아마도 내 말이 옳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다시 말해, 어떤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는가 하면, 다른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거야.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장황한 서론이나 말의 향연이 없어도 만족감을 주는 이야기들이 있고, 반면에 미사여구나 얼굴 표정, 몸짓 발짓 그리고 목소리를 바꿔 가며 말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거지. 아무리 내용이 사소하고 지루하고 따분하더라도 이렇게 얘기하면 재미가 있어지고 즐거움을 주는 거야.

 

그렇다면 소설이란 무엇인가?(124쪽)

 

 

 

서사시

 

만일 시인이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에게 고대 그리스인의 고통을 말해 달라고 한다면 그녀가 의존하는 것은 주관적 기억이 아니라 우주 안에 맥박이 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우주적 회상의 힘이다. 므네모시네는 개인의 회상이 아니라 근원적 힘의 회상이다.

 

전설과 우리 사이에 놓인 심원한 거리는 서사시적 대상들을 결코 썩지 않게 만든다. 그들이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와서 자기들에게 현재의 생생한 젊음을 부여하지 못하도록 막는 이유는 자기들 몸을 노화의 작용으로부터 막아 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노래가 보여 주는 영원한 신선함과 불멸의 순수한 향기는 청춘이 지속된다기보다는 노화가 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화가 정지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늙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물이 늙는 것은 매 시간이 흘러 우리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이것이 무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늙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 세를 떨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우리에게나 플라톤에게나 항상 같은 거리를 지키고 있다.(126∼127쪽)

 

 

 

『일리아스』와 『보바리 부인』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스페인 사람이 『일리아스』를 이해하려면 카스티야의 두 마을에 사는 젊은이들이 시골의 예쁜 처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을 떠올리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데 나는 그 말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바리 부인』을 읽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바람난 시골 여자를 상상해 보라고 우리에게 주문한다면 납득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맞는 말이다. 소설가는 우리가 추상적으로 이미 알고 있던 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데 성공할 때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을 덮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시골의 바람난 여자는 정말 이렇지. 시골 마를에선 정말 그렇더라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우리는 소설가를 만족시켜 왔다.(136쪽)

 

 

 

예술은 기술이고, 리얼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서사시의 주제가 있는 그대로 과거로서의 과거라면, 소설의 주제는 있는 그대로 현재로서의 현재이다. 만일 서사시의 인물이 창조된 존재이고 그 본성은 유일무이한 동시에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시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형적 존재로서 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미적이고 창조적인 요소나 분위기를 가진 신화에서 불러온 존재가 아니라, 작가와 독자가 실제로 살고 있는 거리나 물리적 세계 그리고 생생한 환경에서 취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 번째로 명료한 점을 알게 된다. 문학예술은 시의 전부가 아니며, 단지 제2의 시적 행위라는 사실이다. 예술은 기술이고, 리얼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때로 리얼리즘적인 것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고 모든 경우에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인 리얼리즘 선호가 규범화될 수는 없다. 우리는 외관에 환상을 가지지만 다른 시대에는 또 다른 선호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항상 우리와 같은 것을 원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헛된 환상이다. 이제 우리 마음을 넓게 열고 비록 우리와는 다르더라도 인간의 모든 것을 포착해 보자. 단조로운 획일성보다는 길들이기 힘든 다양성을 이 세상에서 더 선호해 보도록 하자.(137∼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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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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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성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짜 리얼리스트는 그리스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리얼리즘도 사물을 회상하는 것을 의미했다. 회상은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그것을 정화시키고 이상화시키며, 특히 그 과정에서 거친 부분을 제거한다. 하지만 아무리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감각에 직접 작용할 때에는 거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로마에서 시작된, 그리고 카르타고, 마르세유 혹은 말라가에서도 시작되었을지 모르는 지중해 예술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거친 생경함을 추구했던 것이다.

 

(중략)

 

한마디로 말해, 감각주의는 우리가 지중해 내해의 전형적인 성향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감각 기관들을 지탱하는 몸뚱이로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감촉을 느끼고, 맛보며, 신체적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티에의 말을 만복한다. "외부 세계는 우리만을 위해 존재한다."

 

외부 세계라! 그렇다면 바로 감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더 심층적인 영역에 있는 세계 역시 주체가 볼 때에는 외부 세계가 아니던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이 외부 세계일 뿐만 아니라 더욱 고도의 외부 세계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관념성이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얻어지는 데 반해 리얼리티, 즉 실재는 감각들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야수나 표범처럼 난폭하게 우리를 덮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외부의 침입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만들고, 우리 내면을 텅텅 비게 하며, 이로 인해 우리는 결국 사물의 무리들이 드나드는 통로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다. 감각의 지배는 이처럼 내면의 힘을 상실하게 만든다. 보는 것과 비교할 때 성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망막이 외부의 화살에 맞아 손상되는 순간, 우리 개개인의 내적 에너지가 그곳을 메움으로써 침입을 멈추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인상은 문명화된 질서 속에 사고의 형태로 종속되고 기록되며,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인격이라는 건축물을 형성하는 데 협조하며 들어온다.(81∼82쪽)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만일 사물이 홀로 고립되어 있는 상태 그대로의 것이라면 얼마나 하찮은 존재가 될까! 그것은 얼마나 빈약하고 쓸모없고 흐릿해질까! 각각의 사물에는 더 커질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비밀스러운 잠재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힘은 다른 사물 혹은 사물들이 관게를 맺으며 들어올 때 비로소 해방되어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은 다른 것들에 의해 풍요로워진다고 할 수 있고, 그것들은 마치 암수의 한 쌍처럼 서로를 갈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서로 사랑하여 공동체, 조직, 기구, 세계에서 결합하고 하나가 되기를 열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대자연'이라 부르는 그것은 모든 물질 요소가 들어가 있는 최고의 구조물이다. 고로 자연은 사랑의 작품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사물 속에 있던 다른 사물의 번식 혹은 창조와, 다른 사물 안에서 이미 예정되고 형성되어 있으며 실질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사물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험해 본 적이 있겠지만, 우리가 눈을 뜰 때 최초의 순간에는 대상들이 거칠게 우리의 시야를 통과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거품 풍선처럼 확장되고 늘어나다가 한 줄기 거친 바람에 의해 터져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씩 질서가 잡힌다. 우선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먼저 시각의 중심부에 들어오는 사물들, 조금 후에는 주변부를 차지하는 사물들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렇게 윤곽이 구별되고 초첨이 잡히는 것은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다시 말해 그것들 사이에 하나의 관계망을 설정하는 우리의 관심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면 초점이 잡힐 수도 없고 규정될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계속 주목한다면 이것의 초점은 더욱 뚜렷하게 잡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이 반영되고 연계되어 있는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것은 각걱의 사물을 우주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의 '심층'이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른 사물이 암시되면서 반영된다. 반영이란 한 사물이 다른 사물 안에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는 가장 가시적인 형식이다. 한 사물의 '의미'는 다른 사물과 '공존(coexistence)'하는 최상의 형식이고 이것이 심층의 차원이다. 한 사물의 '물질성'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우주의 잔여물이 쏟아지고 있는 신비의 그림자가 가진 '의미'를 필요로 한다.

 

사물들의 의미에 대해 한번 자문해 보자. 다시 말해 각각의 사물을 세계의 실질적인 중심이 되게 해 보자.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하나의 대상을 두고 우리가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그 대상이 우리에게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같은 표현이 아닐까? 그 우주에서는 모든 실들이 우리의 삶과 세계의 직물을 잣고 있다. 아! 물론이다. 물론이고말고. 사실 이런 생각은 매우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에로스'에서 사물들 사이를 엮어 주는 힘을 보았다. 그는 말하길, 그것은 결합시키는 힘이고 종합을 향한 열망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대로라면, 사물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은 '에로스'에 의해 유도된다. 성찰은 에로틱한 활동이고 개념은 사랑의 의식이다.

 

매력적인 아가씨가 땅을 찍어 누르는 하이힐을 신고 우리 곁을 지날 때 경험하는 근육의 경련이나 끓는 혈기를 철학적 감수성과 연관시키는 것이 조금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여성을 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철학을 하는 것 역시 이상하고 헷갈리고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외치는 니체의 말이 어떠면 옳을지도 모른다. "모두들 위험하게 살지어다."(84∼87쪽)

 

 

고대 그리스인들이 개념을 발명한 이유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로운 진동처럼 울리기 시작해 이내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로 확산된 관심사는 확실하고 견고한 것에 대한 갈망이었다. 이오니아, 아티카, 시칠리아, 그리스 등지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성찰하고 입증하고 노래하고 예언하고 꿈꿨던 문화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것, 덧없이 달아나지 않고 고정된 것, 불분명하지 않고 명확한 것이었다. 문화는 삶의 모든 국면이 아니라 확실하고 견고하며 명확한 순간을 말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삶의 즉흥성을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확실히 하려는 도구로서 개념을 발명한 것이다.(95쪽)

 

 

 

우리는 개념들을 가지고 본다.

 

명료성은 평온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우리 의식이 이미지들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포착된 대상이 우리를 피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위협 앞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 명료성은 우리에게 개념을 통해 주어진다. 이 명료성, 확실성, 이러한 소유의 충만함은 다른 유럽 작품들로부터 우리에게 잘 전해지며 스페인의 예술, 과학, 정치에는 일반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들이다. 모든 문화적 작업은 해명과 설명 혹은 주석을 통해 삶을 해석하는 것이다. 삶은 그 자체가 영원한 텍스트이고, 하느님이 설교하는 길가에서 불타고 있는 금작화( 金雀花)이다. 문화는, 그것이 예술이든 과학이든 정치든 간에 하나의 해설로 삶을 자체 내애서 굴절시키며 더 윤기 흐르게 하고 질서를 주는 방법이다. 따라서 문화적 작품은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부속된 문제적 성격을 결코 유지할 수 없다. 삶의 거친 격랑을 통제하기 위해 현인은 성찰하고 시인은 감동에 떨며 정치적 영웅은 자기 의지의 성문을 연다. 이 모든 노력의 결과가 우주의 문제점을 복사하는 데 그친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인간은 명료성을 추구하는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이러한 사명은 신에 의해 계시된 것이 아니고 외부의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부과된 것이 아니다. 그는 내부적으로 스스로 이를 수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을 구성하는 뿌리다.

 

그 가슴속에서 명료성에 대한 깊은 열망이 영속적으로 일어난다. 마치 괴테가 줄지어 선 높은 인간 봉우리들 가운데 자신의 자리를 만들면서 이렇게 노래했듯이 말이다.

 

나는 엄숙하게 선언한다. 어둠에서 명료성을 열망하는

저 사람들의 가문에 속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초봄의 어느 한낮에 죽음을 마잤을 때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최후의 소원을 말한다. 훌륭한 늙은 궁수의 마지막 화살이었다.

 

빛을 더 많은 빛을!

 

명료성은 삶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의 완성이다.

 

만일 개념의 도움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삶 내부의 명료성, 사물들 위를 비추는 빛이 개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각각의 새로운 개념은 이전에는 말이 없고 보이지도 않았던 세계의 한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개방되는 새로운 기관이다. 당신에게 사상(이데아)을 주는 사람은 당신의 삶을 증진시키고 당신 주변의 실재를 확장시켜 준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 본다는 플라톤의 의견은 글자 그대로 맞는 말이다. 우리는 개념들을 가지고 본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98∼100쪽)

 

 

 

스페인 문학에서 진정 이보다 더 심오한 작품은 없을 것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돈키호테』는 애매모호한 작품이다. 민족주의적 감성을 통해 이 작품에 쏟아졌던 모든 찬사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르반테스의 생애에 대한 모든 현학적인 연구들 역시 애매모호한 덩어리의 조그마한 부분조차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세르반테스는 무언가를 풍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풍자하는가? 탁 트인 라만차 평원 저 멀리에 홀로 서 있는 돈키호테의 삐쩍 마른 형상은 의문 부호처럼 굽어 있다. 이것은 마치 스페인의 비밀, 스페인 문화의 애매모호함을 지키고 있는 파수꾼 같다. 저 지하 감옥에서 이 가여운 세금 징수원은 무엇을 풍자하고 있는가? 그리고 풍자란 무엇인가? 풍자는 곧 부정하는 행위인가?

 

삶의 보편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힘이 이토록 큰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석하기 위한 지표나 실마리가 이토록 부족한 작품도 일찍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세르반테스와 비교할 때 셰익스피어는 이념가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작품의 이해를 도와주는 일련의 미세한 개념들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대위법을 빼놓지 않고 제공한다.

 

지난 세기 독일의 위대한 극작가인 헤벨은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지적한다. "나는 내 작업에서 특정한 사상적 배경을 항상 의식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그 배경으로부터 출발해 작품을 쓴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상적 배경은 경치를 보이지 않게 가로막는 산맥과 같은 것이다." 나는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이런 점이 있다고 믿는다. 그의 영감이 서린 문장에 들어 있는 일련의 개념들은 우리가 환상적인 시의 밀림을 지나는 동안 우리의 눈을 안내해 주는 매우 섬세한 기준과 같은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익스피어는 항상 자기 자신이 나서서 말한다.

 

세르반테스에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누군가 그를 리얼리스트라고 지칭한다면 이는 그가 단순한 인상에 머무르거나 일반적이고 이념적인 형식을 회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이 점이 세르반테스가 가진 최고의 재능은 아닐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스페인 문학에서 진정 이보다 더 심오한 작품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로 하여금 『돈키호테』에 매달리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 대체 스페인은 무엇입니까?" 라는 거대한 질문이다. 별들이 반짝이는 광대하고 우주적인 냉기 속에 무한한 과거와 끝없는 미래 사이에 끼인 채 지구상의 수많은 종족 중에서 길을 잃어버린 스페인, 유럽의 영성적인 언덕이자 유럽 대륙 영혼의 뱃머리와 같은 이 스페인은 대체 무엇인가?

 

스페인의 운명을 밝혀 줄 단어, 정직한 가슴과 섬세한 정신을 만족시켜 줄 확실한 단어, 광채 나는 하나의 단어는 어디 있을까?

 

자신의 길을 재촉하느라 교차로에서 멈추지 않는 민족, 자기 내면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민족, 자신의 운명을 정당화하고 역사적 사명을 명확히 되짚어 보는 영웅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민족은 불행하도다!

 

개인은 자신의 민족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주 내의 행로를 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떠도는 구름 속의 빗방울처럼 민족 안에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103∼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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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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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오렌지의 겉면과 이면을 눈앞에 동시에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하는 말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부가적인 설명 없이 넘어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눈앞에 직접 오렌지를 들이대는 식으로 모든 것을 명쾌하게 보여 달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만일 그들이 순전히 감각적인 기능을 통해 본 것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물론이고 아무도 오렌지를 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렌지는 둥그런 구체로서 겉면과 이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렌지의 겉면과 이면을 눈앞에 동시에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눈으로 오렌지의 한 부분을 본다. 그러나 이 과일의 전체 모습은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지 않으며, 더 많은 부분이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사물이 자신을 드러내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사물은 모두 나름의 질서 속에서 해명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해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3차원 역시 다른 두 차원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시각이라는 수동적 방법 외에 사물을 보는 방법이 없다면 그 사물 혹은 그것의 특질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53쪽)

 

 

 

표층 세계와 심층 세계

 

여기서 우리는 현존하는 어떤 사물들의 실질적인 특질은 바로 거리이며, 그 특질은 오로지 주체의 행위를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점을 알게 된다. 소리는 멀리 있지 않다. 단지 내가 그것을 멀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나무의 시각적 거리나, 숲의 심장부를 찾아가는 오솔길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거리의 깊이는 나의 협력을 통해 존재하는 것으로, 나의 정신이 하나의 감각과 다른 감각 사이에 설정하는 관계의 구조에서 탄생한다.

 

결국 눈과 귀를 그냥 열어 두기만 해도 우리에게 제공되는 현실의 전체적인 한 부분, 즉 순수 인상의 세계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명백한 세계(patent world)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인상들이 구조화되어 이루어진 배후 세계도 있는데, 명백한 세계와의 관계에서 볼 때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실재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 상위의 세계가 우리 앞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눈을 뜨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더 큰 노력의 행위가 수반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노력의 정도가 그 세계의 실재성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심층 세계는 표층 세계만큼 명백하다. 다만 더 많은 우리의 노력을 요구할 뿐이다.(56∼57쪽)

 

 

 

의지를 가진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

 

숲은 나에게 실재의 1차원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강렬한 방식으로 내게 부과되는 것으로서 색깔, 소리, 감각적 쾌감과 고통 같은 것들이다. 그 앞에서 나는 수동적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실재 뒤에 또 다른 실재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가 첫 번째 고개에 올랐을 때 더 높은 산들의 윤곽이 펼쳐지는 모습과 같다. 산들의 윤곽이 다른 산들의 윤곽과 중첩되어 있고, 갈수록 더 심층적이고 암시적인 실재의 새로운 차원들은 우리가 직접 산에 올라 자신에게 다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상위의 실재들은 수줍음을 잘 타서 마치 사냥감을 덮치듯 우리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들은 오직 한 가지 조건하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여 자기들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것들은 어느 정도 우리의 의지에 따라 살고 있는 셈이다. 학문, 예술, 정의, 예절, 종교는 배고픔이나 추위처럼 인간을 무자비하게 침범하는 실재의 범주들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로지 자신들에 대한 의지를 가진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59쪽)

 

 

 

관찰

 

신앙심 깊은 사람이 꽃이 만발한 들판이나 밤하늘의 천체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할 때 오렌지 하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은유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만일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것 외에 보는 방법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이 세계는 단지 반짝이는 점들의 무질서한 무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동적인 것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있으니, 보면서 해석하고 해석하면서 보는 것이다. 이를 관찰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이렇게 관찰되는 시각들을 위하여 하나의 신성한 단어를 찾아 냈는데, 바로 '이데아(idea)'이다. 그렇다면 오렌지의 3차원은 하나의 이데아이고, 신은 들판의 최상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59∼60쪽)

 

 

 

왜 우리가 빛바랜 색깔 앞에서 우울해지는지

 

빛바랜 색을 보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슨 색인가? 우리는 한때 더 진했던 푸른색을 염두에 둔 채 바로 눈앞에 있는 푸른색을 보고 있다. 이처럼 현재의 색깔을 한때 그러했던 과거의 것과 함께 보는 것은 거울을 통해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능동적 시각인데, 이것이 바로 '이데아'이다. 한 색깔의 퇴락 혹은 퇴색은 그것이 겪게 되는 새로운 가상의 성질로서 일시적 심층성과 같은 무언가를 부여한다. 굳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순간적으로 한눈에 그 색깔과 역사, 그것이 생생했던 시간과 현재의 쇠락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 안의 무언가가 곧바로 그 몰락과 쇠퇴의 운동을 반복하는데, 이는 왜 우리가 빛바랜 색깔 앞에서 우울해지는지를 설명해 준다.(60쪽)

 

 

 

전형적인 원근법 책

 

내 주위로 숲이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한 권의 책이 내 손에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밀림, 바로 『돈키호테』이다.

 

여기 심층성을 대표하는 또 다른 경우를 보고 있으니, 그것은 책이 가지고 있는, 이 위대한 책이 가지고 있는 심층성이다. 『돈키호테』는 전형적인 원근법 책이다.

 

스페인 역사에서 『돈키호테』의 깊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는데 역사책에는 왕정복고기(Restoration)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시기 동안 스페인의 심장은 가장 낮은 맥박 수를 기록하기에 이른다.(62쪽)

 

 

 

"장님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모든 사람이 그런 허위적인 가치에 만족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량의 세계에서는 최솟값이 측정 단위가 되지만 가치의 세계에서는 최댓값이 측정 단위가 된다. 사물은 가장 가치 있는 것과 비교될 때 비로소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진정한 최상의 가치들이 소멸되면서 그 뒤에 있던 차상의 가치들이 그 자리를 잇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최고와 최상의 것이 공백 상태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비록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옛 속담에서 말하듯, "장님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인 것이다. 자리의 순위는 날이 갈수록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물과 사람들에 의해 자동적으로 채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진정 강하고 뛰어나고 완전하며 심오한 것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왕정복고기에 사라지고 말았다. 스쳐 지나가는 비범한 천재성 앞에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능력도 퇴화되었다. 니체라면 이 시대가 가치 평가의 본능이 퇴보하는 국면에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위대한 것이 위대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순수한 것이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았으며, 완전함과 위대함의 특질이 마치 자외선처럼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후 평범하고 경박한 것들이 점차 득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언덕이 산으로 부풀려지고 누네스 데 으레세 같은 작가도 시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64∼65쪽)

 

 

 

스페인의 길

 

지중해 철학자와 게르만 철학자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는 우리가 지중해의 망막(網膜)과 게르만의 망막을 비교할 때 다시 한 번 동일하게 발견된다. 단, 이번 비교에서는 우리에게 더 우호적인 결정이 내려진다. 우리 지중해 사람들의 사고는 명료하지 않지만 시력만큼은 명료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신곡(神曲)』이라는 건축물을 구성하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알레고리의 복잡한 개념적 발판을 치워 버린다면 우리의 두 손에는 종종 11음절의 빈약한 육체 안에 갇혀 있는, 그러나 보석처럼 반짝이는 간결한 이미지들이 남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미지들을 위해 작품의 나머지 부분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영상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색깔과 풍경과 아침 시간의 장면을 시인이 포착한 것이다. 세르반테스 작품에서 이러한 시각적 힘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시각적 이미지는 너무나도 뚜렷해서, 굳이 사물을 묘사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순수한 색과 소리와 전체 몸뚱이가 서술 과정에 저절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이에 플로베르가 『돈키호테』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외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기술되어 있지 않은 스페인의 길들이 어쩌면 이토록 잘 보인다는 말인가!"(78∼79쪽)

 

 

눈앞에 보여야 한다는 것

 

만일 세르반테스를 읽다가 괴테를 읽으면, 우리는 두 시인이 창조한 세계들의 가치를 비교하기에 앞서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즉 괴테의 세계는 우리 눈앞에 즉각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사물과 등장인물들이 마치 자신의 기억이나 꿈에 나타나는 것처럼 멀리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떠돌아다닌다.

 

하나의 사물이 설사 지금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요건이 하나 빠져 있으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 보여야 한다는 것, 즉 현재성이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 맞서기 위해 칸트가 말한, "가능한 30탈러가 눈에 보이는 30탈러보다 못하지 않다"라는 유명한 구절은 철학적으로 정확하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게르만주의 스스로의 한계를 순진하게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중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그것의 현존, 그 현재성이다. 즉 우리는 사물에 앞서 사물의 생생한 감각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우리 라틴 사람들은 이를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라틴적 개념일 뿐 라틴적 시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명료하지 않은 용어이다. 이 리얼리즘이란 말은 무엇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가? 만일 우리가 사물과 그 사물의 외양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남방 예술의 정수는 우리의 이해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괴테 역시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사물을 추구한다. "내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눈이라는 신체 기관 덕분이다. 에머슨도 이렇게 덧붙인다. "괴테는 온몸을 집중해서 관찰한다."

 

아마 게르만 문화 내부로만 한정한다면 괴테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시각적 기질의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방의 우리 예술가와 대비할 때 사실 괴테는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눈을 통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에 정통한 눈을 가지고 있다"라는 키케로의 말도 있듯이, 무언가를 볼 때 순수 인상에 속하는 것은 지중해에 가면 그 무엇보다 강력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눈동자를 통해 사물의 표면을 보고 살피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우리 예술이 차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그러나 이를 리얼리즘이라고 부르지는 말자. 왜냐하면 그것은 사물이나 실체가 아니라 사물의 외관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명칭으로는 외양주의, 환영주의(幻影主義), 인상주의 등이 더 어울릴 것이다.(79∼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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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1-1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맑고 청명한 지중해성 기후와 춥고 어두운 북유럽의 기후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주는 듯합니다. 인간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랫만에 oren님 글을 보니 좋습니다^^:

oren 2017-11-18 17:36   좋아요 1 | URL
오랫만에 알라딘에 접속하니 조금은 낯선 느낌도 듭니다. 바깥 날씨는 어느새 겨울이 찾아온 듯 매서운데, 겨울호랑이 님의 댓글은 언제나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