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간을, 순전히 시간 그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짓이다. '시간이 지나갔고, 시간이 경과했으며, 시간이 흘러갔다.' 건전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결코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음이나 화음을 한 시간 동안 미친 듯이 계속 울려 대고는 이를 음악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야기는 시간을 채우고, 시간을 '품위 있게 메우며', 시간을 '잘게 나누고', 시간에 '내용을 부여하여', 언제나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음악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인이 된 요아힘이 어떤 기회에 입 밖에 낸 말, 망자가 된 사람의 말을 추억하는 의미에서 슬프고도 경건한 기분으로 인용해 본 것이다. 아득히 오래전에 잊힌 이 말이,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는가를 독자가 과연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의 삶의 기본 요소이듯이, 시간은 이야기의 기본 요소이다. 시간이 공간 내의 물체와 결부되어 있듯이, 시간은 이야기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간은 시간을 재고 나누며, 시간을 짧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값지게도 하는 음악의 기본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방금 말했듯이 음악은 이야기와 유사하다. 이야기도 음악과 마찬가지로 (조형 예술 작품처럼 단번에 눈에 들어오며, 물체로서만 시간에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연속적으로만, 시간이 경과해야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하더라도 이야기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야기와 음악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것도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음악의 시간적 요소는 단 한 가지뿐으로, 그것은 인간의 지상의 시간을 잘라내 구분 짓는 일이다. 구분된 부분에 음악이 흘러 들어가, 그것을 말할 수 없이 고상하게 드높이는 것이다. 반면에 이야기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간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이야기 자신의 시간, 이야기가 진행되고 나타나는 데 필요한 음악적이고 현실적인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서술 시점과 관련되는 이야기의 내용에 따른 시간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아주 달라서, 이야기의 허구적인 시간이 음악적 시간과 거의, 아니 꼭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 아주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다. 「5분 왈츠」라는 음악 작품은 5분간 지속되는 곳이다. 이런 점에서 시간에 대한 그 왈츠 곡의 관계는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내용 시간이 5분인 이야기, 그 5분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나름대로 극단적으로 세세하게 이야기한다면 5분의 천 배도 걸릴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허구적인 내용 시간 5분에 비해 그 시간이 무척 지루하겠지만, 아주 짧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야기의 내용 시간이 엄청 길게 지속되는 바람에 이야기를 대폭 줄여서 말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가 '줄여서' 말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환상적인 요소, 아주 명확히 말하면 여기에 분명히 관련되는 어떤 병적인 요소를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야기가 연금술적인 마술이나 시간을 초월하는 시점을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들은 현실적인 경험의 어떤 비정상적인 사례나 분명히 초감각적인 것을 나타내 주는 사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 아편 복용자의 수기를 살펴 보기로 하자. 아편에 취한 자는 황홀경에 빠져 있는 짧은 시간 동안에 온갖 환상을 두루 겪는다고 한다. 그 환상의 시간적 범위는 10년, 30년, 아니 60년에 달하거나, 또는 심지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넘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환상의 허구적인 시공간은 실제로 이야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엄청 초과하여, 시간 체험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마약인 하시시 복용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에 도취된 자의 뇌에서 '망가진 시계의 태엽마냥 무언가가 제거되기라도' 한 것처럼 눈부신 속도로 온갖 상념이 밀려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아편 복용자의 환상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시간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간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기본 요소인 시간이 이야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지나친 말이긴 해도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생각은, 처음에 그래 보였던 것과는 달리 결코 이치에 어긋나는 시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대 소설'이라는 명칭에는 독특하게 몽상적인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다. 사실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정말 시간을 이야기하려는 생각이 있음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는 사이에 고인이 된, 명예를 중히 여기는 요아힘이 언젠가 대화 중에 음악과 시간에 대해 불쑥 꺼낸 말이 (아닌 게 아니라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착실한 요아힘의 본성에 맞지 않으므로, 그의 본질이 어떤 연금술적인 고양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언제 적 이야기인가를, 우리 주위에 모인 독자들이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를 언뜻 언급한 적이 있었다. 사실 현재 그것을 독자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다지 화내지 않을 것이다.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만족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는 모든 독자가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체험에 동참하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관심사인데, 정작 한스카스토르프 자신은 앞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도 벌써 아득히 오래 전에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시대 소설'이면서 '시간 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379∼382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