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문학 고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첫째, 둘 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소설을 썼다는 점. 둘째, 두 작품 모두 그 어떤 작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분량의 소설이라는 점, 셋째, 읽기가 비교적 난해한 작품이어서 두 소설 모두 아무에게나 쉽게 읽히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

내가 여기에 재미있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면 그건 (물론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서로의 작품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적어도 프루스트가 죽었던 1922년 까지는 그랬다.

마침 1922년에 두 작가는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초연을 축하하는 파리의 저녁만찬에 함께 참석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두 사람이 만찬 주최자로부터 서로 소개를 받은 뒤에 벌어진 일에 대해 훗날 조이스가 친구에게 밝힌 내용이 걸작이다. 
 

우리의 대화는 "아니요"라는 말로만 이루어졌네. 프루스트는 나더러 아무개 공작을 아느냐고 묻더군. 내가 그랬지. "아니요." 여주인은 프루스트에게 『율리시스(Ulysses)』의 이런저런 대목을 읽어보았는지 물어보더군. 그러자 프루스트가 말했지. "아니요." 이런 식이었지.(154쪽)


나 역시 방금 대화를 나눈 저 두 사람의 소설을 읽어봤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도 "아니요."라는 대답밖에 내놓을 게 없다. 다만 거기에 덧붙여 뭔가 주절주절 잡다한 얘기를 더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순전히 알랭 드 보통이 쓴 책『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읽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낯설게만 느껴지던 프루스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건 앙리 베르그송의 책『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읽으면서부터다. 그 후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매하면서 우연히 알랭 드 보통의 이 책도 함께 주문했는데, 그건 내가 이 책에 대해 전혀 모른채 순전히 '즉흥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고 궁금해서 금새 후딱 읽어버렸다.(사실 며칠은 걸렸다. 다만 KTX를 기다리던 때, 그리고 KTX를 타고 엄청난 속도로 내달릴 때, 그리고 사무실에 앉아 일할 때, 그런 바쁜 틈만 골라서 말 그대로 '틈틈이' 읽었는데 금새 책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는 얘기다.) 근래에 읽은 책 가운데 이 책만큼 빨리 읽은 책도 없을 듯한데, 우연히 구입한 책이 이렇게 재치있고 세련되고 재미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 책에서 내가 느꼈던 가장 유쾌한 감정들은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이 남몰래 추구한 '진부하지 않음에의 열망' 때문이지 싶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우리의 주인공 '프루스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그야말로 '진부한 표현' 즉 클리셰[Cliché]에 대해서는 극도로 싫어했던 인물이 아닌가. 그가 뭇 소설가들을 거의 절망에 빠트릴 만큼 놀라운 문학적 표현들로 가득한 이 걸작소설을 쓸 수 있었던 배경도 어찌보면 '클리셰에 대한 특유의 예민한 거부감'을 타고난 데 힘입은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진부함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작품과 어쩌면 그보다 더한 삶을 살았던 프루스트에 대해 쓴 책이며, 알랭 드 보통의 남다른 글솜씨 덕분에 '신선하고, 흥미롭고, 유머러스하고, 생기넘치고, 매력적이고, 눈부시다'는 온갖 진부한 찬사들을 역설적으로 얻게 된 듯싶다.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쓰면서 조금이나마 클리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런데 나만큼 진부한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도 그런 진부함에서 벗어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어쨌든 내가 손쉽게 떠올린 생각 하나는 카메라 셔터를 좀 누르면서 글을 써보자는 것이다. 그건 물론 이 책을 쓴 알랭 드 보통의 방식(그림이 많이 포함된 글쓰기)을 얼마간 모방하는 일이고, 또 그의 책으로부터 직접 '이미지'를 불러내 온 것이긴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고 본다.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의 중심 주제는 '시간의 소실과 상실 뒤에 놓인 원인에 대한 탐색'이다. 그러나 프루스트가 자신의 책 제목을 두고 '오해받기 쉽다'고 말한 것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이던 시대의 추이를 추적하는 회고록'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어떻게 하면 '시간의 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래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 대해 쓴 소설을 기본 소재로 삼아 알랭 드 보통이 박학다식하고 장난스러울 정도로 아이러니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는 '음미하는 삶을 사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림 1> 한 문장

 

마치 뱀처럼 길게 늘어진 위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저건 '무려 4미터에 이르고, 웬만한 와인 병의 아랫부분을 17번은 충분히 감을 수 있을 정도'로 긴 '한 문장'이다. 프루스트 소설의 몇 가지 거북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문장 하나하나의 어마어마한 길이인데, 그걸 그림으로 그려 놓으니 마치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보아뱀 그림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기만 하다.

의사였던 프루스트의 동생이 말한 것처럼 "한 가지 슬픈 일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아프거나, 아니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기 전에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 말고도 우리는 또하나의 도전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저토록 긴 문장들을 마주 대하는 어려움 말이다.

프루스트는 왜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어떻게 뒤척이고 돌아눕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무려 30쪽이나 할애하는' 파격을 시도했을까. 그건 어떤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문장에서 단어의 적절한 개수를 규정하는 길이의 근본 법칙을 무시하는 것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들기에 관해서 무려 30쪽이나 쓰도록 프루스트를 인도한 정신'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생각보다 너무 만연되어 있고 뿌리가 깊다.

<그림 2> 기차시간표 

 


그는 일생의 마지막 8년 동안을 파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저 시간표를 마치 시골생활에 관한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읽고 즐겼다고 한다. '취향이 고상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시시하기 짝이 없을 이 인쇄물에는 그가 어린 시절 이래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 가득한 까닭에, 그에게는 훌륭한 철학책보다도 훨씬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자신은 할 '시간이 없음'을 이유로 들어 '바쁜' 사람들-그들의 일이 제아무리 어리석다고 하더라도-이 느끼는 자기만족'에 대항하라고.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프루스트의 삶은 한편으로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분별없는 극단적인 유대인 어머니의 문제("어머니에게 나는 항상 네 살짜리에 불과헀다"), 거북한 욕망(어릴 적부터의 동성애적 취향), 데이트의 문제들(여자친구들로부터의 숱한 퇴짜), 연극계 경력의 실패, 친구들의 몰이해(천재에게는 전형적인 문제), 그 밖의 신체적 고통(천식, 식단의 애로, 소화불량, 과민성 피부, 추위, 기침,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함, 이웃의 소음, 다른 질환들(감기,발열,시력 감퇴, 치통, 팔꿈치 통증, 현기증), 타인의 불신) 등등.

"행복은 몸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라는 그의 말에 담긴 암시로부터 생겨난 말은 '프루스트적 자극'이다.

가령 자동차가 잘 움직인다면, 무슨 이득을 바라고 우리가 굳이 그 기계의 복잡한 내부 작동에 관해서 배워야 할까? 연인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우리가 왜 굳이 인간의 배신행위의 역학에 관해서 숙고해야 할까? 우리의 모든 만남을 존중해야 한다면, 왜 우리가 사회생활의 굴욕에 관해서 조사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게 될까? 우직 슬픔 속에 빠졌을 때에야만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진실에 맞서고자 하는 프루스트적인 자극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이불 밑에서 울부짖을 때,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도 같을 때에야 비로소.(96쪽)


 

걸작의 창조라는 야심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보다 성공적으로 고통을 체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비록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행복의 추구에 관심을 기울여왔지만, 사실은 적절하고도 생산적으로 불행해지는 방법을 추구하는 쪽에 훨씬 더 큰 지혜가 놓여 있는 것만 같다. 불행의 끈덕진 반복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효과적인 접근방식이야말로 행복을 향한 모든 유토피아적 추구의 가치를 거뜬히 능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픔의 베테랑이던 프루스트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00쪽)


 "온전한 삶의 기술이란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개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 슬픔이 생각으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 슬픔은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그 능력 가운데 일부를 잃어버린다." 프루스트의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의 제4장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의 말미에서 주장하는 '교훈'은 이렇다.
 

타인이 얘기치 못한 그리고 상처가 되는 행동을 했을 경우, 단순히 안경을 닦는 것보다는 더한 뭔가로 반응하라는 것, 다시 말해서 그 행동을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비록 프루스트가 우리에게 경고한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진정한 삶을, 그러니까 보이는 세계 아래에 있는 현실 세계를 발견할 때, 우리는 마치 평범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감춰진 보물과 고문실, 또는 해골이 가득 찬 집에 들어갔을 때처럼 상당한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116쪽)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프루스트를 가장 짜증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클리셰의 문제였다. 

 

클리셰의 문제란, 그것들이 잘못된 생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매우 좋은 생각의 피상적인 연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해질녘에 해는 종종 불타는 듯하고, 달은 은은하게 마련이지만, 만약 우리가 해나 달을 볼 때마다 번번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결국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그 대상에 관해서 이야기되는 최초의 말이 아니라 최후의 말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클리셰가 유해하지 않은 경우는, 그것들이 표면만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떤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처럼 믿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제시했을 때뿐이다.(124쪽)



좋은 친구가 되는 법

프루스트가 죽고 난 뒤 (상당히 많았던) 그의 친구들은 한 목소리로 프루스트야말로 교우관계의 모범이었으며, 우정의 화신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는 '우정은 피상적인 노력'에 불과하며, "우리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혼자는 아니라고 믿게 만들려고 하는 거짓말'이라고 봤다. 그리고 대화 역시 쓸모없는 활동이라고 치부하며 "우리가 평생 동안 아야기를 한다고 해도, 어쩌면 단 일분의 공허함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프루스트는 실제로 우정을 비호하는 예찬 위주의 주장들에 도전했고, 그건 앞에서 언급했던 1922년에 있었던 '제임스 조이스와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두 사람은 그날 저녁식사 후에 택시에 올라탔는데, 동승한 내내 그들은 서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고, 프루스트의 아파트가 있는 아믈랭 거리에 도착하자, 프루스트는 동승했던 다른 만찬 주최자한테 "조이스씨께 이 택시로 집까지 모셔다 드려도 괜찮겠느냐고 여쭤봐주세요."라고 말을 건넸고, 택시는 부탁받은 대로 떠났으며, 그 이후 두 사람은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대화는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를 표현하는 장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 많은 한계를 지닌 셈이다. <저자와의 대화>를 너무 기대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인 셈이다.


<그림 3> 저자와의 대화



프루스트가 1913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권을 간행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작품이 그렇게 어머어마한 분량이 되리라고는 그 자신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건 잘 알려진 일화다. 그는 애당초 3부작이 될 것이라고 행각했지만 '말하고 싶은 새로운 것들을 상당수 발견'했고 결국에는 원래의 50만 단어가 100만 단어 하고도 25만 단어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일찍이 그가 완벽하다고 판단했던 요점들은 그가 들여다보자마자 다시 써달라고 또는 새로운 이미지나 은유를 이용하여 잘 다듬거나 더 발전시켜달라고 울부짖는' 듯했고, 그래서 결국 원고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림 4> 원고 ①




<그림 5> 원고 ②




프루스트는 친구와 사귀는 일과 독서 활동 모두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연관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우정을 독서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친구가 아주 많았던 그도 '우정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게 되면서 '독서 쪽에 핵심적인 이익이 있다'고 보았다.

<그림 6> 원래의 순수성 




<그림 7> 종이책과의 소통



눈을 뜨는 방법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바라봄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프루스트의 치료 개념에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불만이 각자의 삶에 본래적으로 결여되었던 무엇인가의 결과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각자의 삶을 적절하게 바라보기에 실패한 결과일 가능성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밝혀준다. (193∼194쪽)



<그림 8> 프루스트의 핵심적인 구분


<그림 9> 전혀 다른 이미지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기 때문




<그림 10> 미숙한 화가의 봄그림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우리가 프루스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행복'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너무나 빠지기 쉬운 '친숙한 것을 경멸하게 될 가능성'을 피하라는 것이다. (순전히 내 방식대로 진부하게 말하면) '결핍'을 겪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써 간절히 소망하던 온갖 다양한 대상들 혹은 목표들을 이루고 난 뒤에 우리가 그 친숙한 대상들로부터 '눈을 떼는 속도'는 참으로 놀랄 만하다. 하이데거式으로 말하자면 '호기심의 무정주성'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호기심의 무정주성(無定住性)

그러나 자유롭게 된 호기심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존재에 이르기 위하여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새로운 것을 찾는 이유는 그 새것에서 다시금 새로운 새것으로 뛰어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봄의 염려에서 중요한 것은, 파악하여 알면서 진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세계에 맡겨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호기심은 특이하게 가까운 것에는 머물지 않는 특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호기심은 또한 고찰하며 머무는 여가도 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것과 만나는 것을 계속 바꿈으로써 생기는 동요와 흥분을 찾는다. 호기심은 아무 데도 머무르지 않음으로 해서 부단히 산만함[부산함]의 가능성을 배려한다. 호기심은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고찰하는 것, 즉 타우마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호기심의 관심사항은 경이에 의해서 이해하지 못함에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은 앎을 배려하는데, 순전히 안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서이다. 호기심을 구성하는 두 계기, 즉 배려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부산함]은 이 현상의 세번째 본질성격의 기초를 부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정주성(無定住性)이라고 이름한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세계-내-존재의 이러한 양태는 일상적 현존재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뿌리 뽑히고 있는 그런 새로운 존재양식을 드러낸다.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中에서


어쩌면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친숙함 때문에 잊어버리거나 진짜로 잃어버린 소중한 대상들'을 찾을 수 있도록 환기해 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림 11> 창백한 모사품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참 동안이나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던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프루스트가 말하고 싶어했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소중한 대상들'을 떠올리게 하는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내가 그토록 애써 가지려 했던 그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나는 지금 얼마나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잊고 지내왔는지, 혹은 얼마나 당연시 여기며 살고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 대상들은 가령 (진부한 표현으로 되돌아와) 내차, 내집, 내방,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 나만의 서재, 일자리, 내 계좌의 잔고뿐만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소중한 대상들은 정작 나의 아내와 아이들,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늘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과 이웃들일 것이다.


<그림 12> 현존하는 어떤 것 




<그림 13> 거짓된 친숙함 




<그림 14> 음미와 부재간에 맺어진 관계




우리는 뭔가를 사기 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을 거듭해야 했던가에 따라 그것을 성취했을 때 뒤따르는 만족감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프루스트 역시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지연에 수반되는 이익'을 예시했다. 알베르틴과 게르망트 공작부인은 모두 패션에 관심이 있었고, 알베르틴은 돈이 없었고, 공작부인의 옷장에는 옷이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그 결과 알베르틴은 비록 옷은 더 적었을지 모르지만, 옷에 대한 이해나 음미나 사랑은 훨씬 더 컸다.

<그림 15> 부가 욕망을 성취시키는 속도



책을 내려놓는 방법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책을 내려놓는 방법'이다. 프루스트의 얘기를 먼저 들어보자.

······ 사람이 무엇을 스스로 느끼는지를 자각하게 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어떤 거장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스스로 재창조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런 심오한 노력에서는 우리가 그의 생각과 함께 빛 속으로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생각 그 자체이다.(246쪽)

알랭 드 보통의 생각은 어떤가. 그는 말한다. '책이 우리를 눈뜨게 해주고, 우리를 예민하게 만들고 , 우리의 지각 능력을 향상시켜줄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런 작용은 중지되고 만다. 이런 중지는 우연에 의한 것도, 가끔 그런 것도, 운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며, 다만 불가피한 것이고, 오히려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순전하고도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독서와 학문 전반에 '어딘가 속박된 차원'이 있다는 것이고 프루스트는 이 점을 제대로 인식했다. 그래서 좋은 책의 저자에게 '결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이 결국 독자들에게는 다만 '자극'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림 16> 자극에 불과한 것


이 말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부연 설명은 이렇다. '책이라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특정한 사물을 자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프루스트는 이런 대상에 대한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일 전체를 순순히 내팽개치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큰지를 인식했던 것'이라고. 따라서 우리는 책을 주의깊게 읽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독립성을 예속시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인 독자'가 될 수밖에 없고,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방문해야 할 곳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닐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272쪽)



십 년쯤 전에 가족과 함께 피렌체에 갔을 때 단테의 생가를 가본 적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사실 아무것도 보고 느낀 게 없었다. 정작 단테를 제대로 만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신곡』을 온전히 다 읽고 나서였다. 무려 100곡에 달하는 대서사시의 서곡인 제1곡을 펼치면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는 주인공 단테가 등장한다. 그런데 천국을 향한 머나먼 여정을 시작한 그에게는 다행히도 친절한 안내자 베르길리우스가 곁에 있었다. 그런데 그 서사시의 주인공인 단테는 '죽어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다닌 것이 아니다. 우리처럼 생생히 살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또다른 세계를 두루 여행한 것이다. 단테는 그걸 통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역시 프루스트가 창조해 낸 또다른 세계이다. 그가 만들어낸 낯선 세계로 불쑥 들어서기가 조금은 두려운 나같은 사람에겐 이 책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이 어둠 속 베르길리우스처럼 반갑기 그저없는 훌륭한 안내자인 셈이다. 나는 아직 프루스트의 소설 마지막 제7부「되찾은 시간」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까마득한 길을 내 앞에 남겨두고 있지만 이제 그리 머지않아 잃어버린 무엇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프루스트가 만든 가상의 마을 콩브레로 나볼 생각이다.

이쯤에서 책들을 다 내려놓고 다시 되돌아 보는 '나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이 책의 저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클리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위대한 소설가는 그들만의 언어로 우리가 무심결에 놓치고 마는 삶의 온갖 다양한 측면들을 끊임없이 부각시킨다. 그런 소설가들 가운데 프루스트는 분명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눈부신 역작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러나 내가 최근에 만난 철학자 베르그송은 '언어 예술'이 지니는 '통약 불가능한' 대목을 기어이 지적하고 만다. 그것이 철학자의 임무일 것이고 프루스트 또한 그점을 절실히 인식하면서 자신의 소설을 써나갔을 것이다. 결국, 도대체 낯선 단어인 Cliché와 incommensurable이라는 두 단어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 이처럼 우리들 각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으며, 그러한 미움과 그러한 사랑은 인격 전체를 반영한다. 그러나 언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동일한 말로 그런 상태를 지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랑, 증오, 그리고 영혼을 흔드는 수천의 감정들의 객관적이고 비개성적인 면만을 고정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가는 다수의 세부들을 병렬함으로써 감정과 관념들에 그들의 원시적이고 살아 있는 개성을 되돌려 주려고 애쓰는데, 우리는 그 감정과 관념들을 공공의 영역-언어가 그처럼 그것들을 내려가게 했던-으로부터 끌어내는 힘에 의해 그의 재능을 판단한다. 그러나 한 운동체의 두 위치 사이에 점들을 무수히 끼워 넣어도 지나간 공간을 결코 메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관념들을 서로 연계시키며 그 관념들이 상호 침투하지 않고 병치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느끼는 것을 완전히 번역하는 데 실패한다. 즉, 사유는 언어와 통약 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것으로 남는다.
  -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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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20-12-26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20-12-26 15:40   좋아요 0 | URL
아아... 감사합니다.^^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
새뮤얼 스마일스 지음, 공병호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3년 10월
절판


비즈니스맨들은 시간이 돈이라는 말을 곧잘 인용하지만 사실상 시간은 그 이상의 것이다. 시간의 올바른 활용은 자기 수양이요, 자기 발전이며, 인격 도야이다. 날마다 하찮은 일이나 게으름 속에 낭비하는 1시간을 진정한 자기 발전에 쏟아 붓는다면 무지한 사람도 몇 년 안에 현자가 되고 좋은 일자리를 얻으며, 죽음마저 값진 행동의 수확기로 만들 수 있다. 또한 날마다 15분을 자기 발전에 투자한다면 1년 안에 그 효과를 확실히 느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심하게 모아진 좋은 생각과 체험들은 별도의 그 어떤 저장 공간이 필요한 게 아니며,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어디든 데리고 다닐 수 있다.-263쪽

어떤 이들은 돈이 떨어지기 전까지 돈의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데 시간의 가치에 대해서도 그처럼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쓸데없는 데 시간을 보내다가 삶이 급속도로 피폐해지면 그때서야 시간의 현명한 활용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무기력하고 게으른 습관이 이미 그들의 골수까지 파고들어 스스로 몸에 익힌 악습을 끊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잃어버린 재산은 근면한 노동을 통해, 잃어버린 지식은 공부를 통해, 잃어버린 건강은 절제와 약을 통해 다시 되찾을 수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영영 되돌릴 수 없다.-263쪽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때를 놓치면 그것은 곧 불행의 기회가 된다."-229쪽

옥스퍼드 대학의 올 솔즈 칼리지에 있는 시계 문자판에는 다음과 같은 젊은이들을 위한 엄숙하며 인상적인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사라지는 시간은 우리의 책임이다.'-138쪽

시간은 인간에게 속한 영원의 작은 파편에 불과하다. 삶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초상화가 존 잭슨은 이렇게 말했다.

"지상의 보화를 탕진한다 해도 절약을 통해 과거에 저지른 낭비와 균형을 맞출 수 있다. 하지만 '내일의 시간으로 오늘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겠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138쪽

기회의 앞머리엔 털이 있지만 뒤는 대머리이다. 앞을 잡으면 잡을 수 있지만, 놓치면 제우스도 다시 잡지 못한다. - 라틴 문헌-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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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
새뮤얼 스마일스 지음, 공병호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3년 10월
절판


실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 있어서도 최고의 집단과 어울리고, 최고의 책들을 읽으며, 그 속에서 발견한 최고의 면모에 감탄하고 현명하게 모방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라 하겠다. 더들리 경은 이렇게 말했다.

"문학에 있어서 나는 최고만 상대하길 좋아한다. 그것들은 내가 오래 전부터 읽어 왔고, 그럼에도 좀더 친숙해지고 싶은 책들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책을 읽기보다는 오래된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십중팔구 더 유익하다고 생각한다."-347쪽

지적인 오락으로 정보를 얻는 데 길들여진 젊은이들은 노력과 수고를 통해 주어지는 것들을 거부한다. 이처럼 장난하듯이 지식과 학문을 배운 이들은 그 둘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지적인 유흥은 당사자의 정신과 인격을 철저히 무력화시킨다. 윌리엄 로버트슨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두서없이 잡다하게 읽는 습관은 마치 흡연처럼 정신을 무력화시키고 발육 정지의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최악의 무기력을 몰고 오는 최악의 게으름이다."

이러한 악습은 점차 성장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최소한 그것은 천박한 소견을 가져다주고 최악의 경우에는 꾸준한 노동의 기피를 유도하며, 저급하고 나약한 정신 상태를 조장한다.-309쪽

독서에 대한 벅스톤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읽기 시작한 책은 반드시 끝까지 다 읽고, 그 내용을 완전히 내 것으로 삼기 전까지 책을 다 읽은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249쪽

드류는 이렇게 회고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무지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무지를 깨달을수록 그걸 극복해야겠다는 결심 역시 더욱 더 강해졌다. 막노동을 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기에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시간이 있을 때마다 책을 읽었다. 나는 책을 앞에 놓고 밥을 먹었고 덕분에 한끼를 때울 때마다 대여석 페이지씩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 나는 로크의 《인간오성론》을 읽고 철학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 ······ 그것은 나를 혼수 상태에서 일깨웠고 이전의 비굴한 견해를 단호히 버리도록 만들었다."-121쪽

많이 알수록 겸허해지게 되어 있다. 언젠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이 담당 교수를 찾아가 '공부를 마쳤으니' 그의 곁을 떠나겠다고 말하자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지혜롭게 꾸짖었다.

"저런, 난 공부를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인데!"

많은 것들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 뿐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천박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자만할 수 있겠지만 현자는 '내가 아는 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라고 겸허하게 고백하거나 뉴턴처럼 자신은 그저 해변의 조개껍질을 줍고 있을 뿐이며 눈앞에 펼쳐진 진리의 대양은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고 선언하기 마련이다.
-116쪽

젊은이들에게 조언하건대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사귀어라.
책에서든 인생에서든 그것이야말로 가장 유익한 사귐이다.
올바른 대상에게 감탄하는 법을 배우라.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큰 즐거움이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들이 감탄한 것에 주목하라.
그들은 위대한 것에 감탄하는 반면 천박한 사람은
천박한 것에 감탄하고 그것을 숭배한다.
- W.M.새커리
-17쪽

올바른 독서 습관은 크나큰 즐거움과 자기 개선의 동반자가 되며, 적당히 강제력을 발휘하면 사람의 인품과 행실 전반에 걸쳐 지극히 유익한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자기 수양은 부귀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고상한 생각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을 수 있게 해준다. 언젠가 한 귀족이 현자에게 경멸조의 어투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은 그 모든 철학으로 대체 얻은 게 뭡니까?
그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내 안에 상류 사회를 넣어 갖고 다니게 되었지요."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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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0-1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바른 대상에게 감탄하는 법을 배우라." - 기억하고 싶은 말입니다.
저, 감탄 잘해요. ㅋㅋ

oren 2012-10-15 17:02   좋아요 0 | URL
감탄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정말 커다란 자산이지요. ㅎㅎ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
새뮤얼 스마일스 지음, 공병호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03년 10월
절판


부귀는 도덕적 가치의 증거가 될 수 없기에 그것의 화려함은 마치 반딧불이 개똥벌레의 모습을 비춰주듯 부자의 무가치함을 밝혀줄 뿐이다.-298쪽

수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자신을 내버리는 방식은 원숭이의 욕심을 연상시킨다. 알제리의 카바일 족(주로 알제리 북부의 해안 산악 지대에 사는 부족-역자주) 농부가 호리병을 나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놓고 그 안에 약간의 쌀을 넣어두었다. 호리병의 주둥이는 원숭이의 손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다. 원숭이는 밤에 나무로 와서 손을 집어넣고 쌀을 움켜쥔다. 쌀을 쥐고 있어서 손이 빠지질 않지만 원숭이에겐 쌀을 놓고 손을 뺄 지혜가 없다. 그렇게 해서 원숭이는 아침이 될 때까지 거기에 서 있다가 사람에게 잡히고 만다.-298쪽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젊은이는 삶이 너무 편해서 이내 거기에 질리게 된다. 그에겐 더 이상 바라고 원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루기 위해 발버둥칠 만한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시간이 남아 돌면서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사회에서 그의 위치는 부평초 같은 꼴이 될 뿐이다.

그의 유일한 노동은 시간 죽이기이니
참으로 비참하고 고달픈 노동이로다.
(제임스 톰슨의 《나태의 성》(1748년) 중에서)



-298-299쪽

하지만 정신이 똑바로 박힌 부자는 게으름을 나약한 마음가짐으로 알고 물리치게 마련이다. 재물의 소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인간에 비해 일에 대한 소명감을 더 많이 느끼게 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골(잠언 30장을 기록한 사람-역자주)의 완벽한 기도문은 어쩌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일 수 있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299쪽

인생의 최고 목적은 고결한 인격을 닦고 정신, 양심, 감정, 그리고 영혼을 가능한 한 최고조로 계발하는 데 있다. 이것이 진정한 목표이며, 이외의 것들은 그 수단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300쪽

따라서 가장 성공적인 인생은 최고의 쾌락, 최다의 재물, 최고의 권력이나 장소, 혹은 최고의 명예나 명성을 얻는 삶이 아니라, 최고의 인격을 닦고 자신이 맡은 일과 의무를 철저히 이행하는 삶이라 하겠다. 돈이 일종의 힘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성, 공공심, 도덕심 역시 힘일 뿐만 아니라 돈보다 훨씬 고귀한 것들이다.-300쪽

큰돈을 벌어 '상류 사회'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거기서 존경받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신적 자질과 품격, 예절, 그리고 올바른 심성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돈 많은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도 상류 사회에는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처럼 부유하지만 전혀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욕심쟁이들이며, 그들의 힘은 금고에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301쪽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피니언 리더들, 즉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꼭 부자가 아니더라도 한결같이 믿음직한 인격과 훌륭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 토머스 라이트와 같은 사람들은 세속적인 부귀는 별로 갖지 못했다 해도 훌륭한 인격과 올바르게 사용한 기회, 자신의 능력껏 선용한 인생을 만끽하면서 그저 세속적으로 성공했을 뿐인 욕심쟁이들을 한 치의 부러움 없는 눈길로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이다.-301쪽

정직하게 돈을 벌고, 알뜰하게 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제대로 사용되는 돈은 고결한 인격의 진정한 기반인 검약, 신중, 극기를 나타낸다. 돈은 아무런 가치나 효용성이 없는 물체들의 집합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수많은 대상들, 즉 음식, 의복, 가정에서의 만족, 개인적인 자존심, 자립심을 상징한다.-281쪽

시인 헨리 테일러(Henry Taylor)는 《인생 비망록》에서 이런 지혜의 말을 들려준다.

"돈을 벌고 쓰고, 빌리거나 빌려주며, 유산으로 남기는 기준과 방식이 올바르면 거의 완벽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276쪽

요컨대 한 사람의 인격은 수천 가지 미세한 영향력, 본보기, 인생과 독서, 친구와 이웃, 그리고 조상이 물려준 좋은 언행, 주변 환경 등을 통해 형성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은 스스로 자기 행복과 덕행의 능동적인 주체여야 한다. 남에게 아무리 많은 지혜와 미덕을 빚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스스로 돕는 자만이 성공한다.-50쪽

노년에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삶의 위안과 경제적 자립을 제공하는 것이 훨씬 명예롭고 추천할 만한 삶이다. 그냥 단순히 재산을 모으는 것은 편협하고 인색한 영혼들의 특징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매우 경계할 필요가 있는 '과도한 저축 습관'이 몸에 배이게 된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에는 단순한 절약이었던 것이 노년에는 탐욕으로 변질되고, 삶의 의무였던 것이 악습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이 모든 죄악의 뿌리는 돈 그 자체가 아닌 돈에 대한 애착이다. 그것은 영혼을 위축시키고 편협하게 만들며 관대한 삶과 행실에 대해서 마음 문을 닫게 만든다. 그러므로 월터 스콧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칼에 죽는 육체보다 돈에 죽는 영혼이 더 많다."-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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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0-14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이 스미스(Jon Pye Smith)는 제본공으로 아버지 밑에서 일할 때 자신이 읽은 책들을 발췌하거나 비평한 내용을 따로 자세히 기술해 놓곤 했다. 이처럼 불굴의 의지로 자료를 모으는 자세가 그를 평생 남다른 위인으로 만들어주었으니 전기 작가는 그를 '언제나 일하고, 항상 앞으로 전진하며, 늘 축적하는' 사람으로 표현했다. 그 기록들은 이후 리히터(Richter)의 '자료 출처'처럼 파이 스미스에게 정보의 보고로 사용됐다.

저명한 존 헌터도 동일한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기억력이 지닌 취약점을 보충한 것인데 평소 생각을 기록해 두는 습관의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하곤 했다.

"그것은 상인이 재고 조사를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없다면 무엇을 갖고 있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140쪽)

찬송가 작사가이자 유명한 종교 저술가인 린치(Thomas Toke Lynch)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현명한 습관은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 애쓰는 습관이다."(365쪽)

- 새뮤얼 스마일즈,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中에서

페크pek0501 2012-10-15 12:2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좋은 글을 만나면 옮겨 적는 노트가 있어요. 나중에 반복해서 읽으려고요.
주로 책이나 신문에서 옮겨 적는데, 습관처럼 되어 버렸어요.
이 노트에서 글감을 얻을 때도 있답니다.

"가장 현명한 습관은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 애쓰는 습관이다."(365쪽)

oren 2012-10-15 17:01   좋아요 0 | URL
'호리병의 주둥이를 이용한 원숭이 사냥법'은 가끔씩 다른 데서도 많이 인용하는 얘기인데, 저는 그 얘기를 2003년경 '어느 책'에선가 분명히 읽은 기억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도대체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더라구요. '알제리 부족'의 얘기를 찾기 위해 (그 얘기가 담겨 있으리라 짐작되는) 여러 권의 책을 일일이 다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구요. 그런데 정말 '우연히' 그 구절을 저 책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었어요. 정말 오랫동안 찾아볼려고 애썼던 '대목'이었는데 불과 몇십 분만에 그 대목을 이 책 속에서 찾을 수 있게 되어서 너무너무 기뻤답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하면 독서노트에 옮겨적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도 너무 많이 쌓이다보니 '찾기'가 너무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앞으로는 가급적 '검색'이 가능하고, '붙여넣기'까지 가능한 '디지털 방식'을 적극 활용할 생각이랍니다.
 
세상을 보는 지혜 동서문화사 월드북 27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밑줄긋기)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야말로 605

내가 스토아학파의 윤리학 정신을 이해한 것에 의하면, 그 근원은 다음과 같은 사상에서 나오고 있다. 이성은 인간의 커다란 특권이며, 간접적으로 계획적인 행동과 거기에서 생기는 결과에 의해 인생과 그 무거운 짐을 현저하게 가볍게 하는 것이지만, 이 이성은 또 직접적으로, 즉 단순한 인식에 의해 인생을 괴롭히고 있는 모든 종류의 고뇌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구출할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이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이성으로 무한한 사물이나 상태를 포괄하고 전망하면서도 현존에 의해 아주 잠시 동안, 불안한 인생의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심한 고통을 받는다거나 격한 욕구나 도피에서 생기는 큰 불안과 고뇌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은 이성의 장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성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인간은 틀림없이 이러한 고뇌를 초월하고 불사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안티스테네스는 "이성과 목을 맬 밧줄,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플루타르코스, 《스토아학파의 모순에 대하여》, 제14장)고 말했다. 그 의미는 인생에는 실로 많은 괴로운 일과 번거로운 것이 있기 때문에 사상을 정돈하여 이것들을 초월하거나, 인생을 버리는 것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결핍이나 고뇌는 직접 또는 사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결핍을 느끼게 하고 고통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하고 필연적인 조건이다. "가난함이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고통을 가져온다."(에픽테토스, 《단편》, 제25)


희망을 낳고 키우는 것은 기대나 요구 606

그뿐만 아니라 희망을 낳고 키우는 것은 기대나 요구라는 것이 경험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은 많은 사람, 또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피할 수 없는 악도 아니고, 도저히 수중에 넣을 수 없는 재물도 아니며, 인간이 피할 수 있는 것이나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 조금이라도 많으냐 적으냐 하는 문제이다. 또 절대적으로 수중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수중에 넣었을 때나 절대적으로 피하기 힘든 것을 피할 때만 우리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수중에 넣기 힘든 것을 손에 넣고 상대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것을 피할 때도 우리의 마음은 아주 평안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성에 이미 깃들어 있는 악과 그 개성이 단념해야만 하는 재물과는 상관 없이 고찰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러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희망도 만약 그것을 기르는 기대가 없다면 곧 소멸하고 더 이상 고통도 생기지 않는다.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세상과 인간을 몰랐다는 것
606

이 모든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행복은 오직 우리의 요구와 우리가 얻는 것 사이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관계는 둘 다의 양을 감소하는 것으로도 다른 쪽의 양을 증대하는 것으로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고통은 본래 우리가 욕망하고 기대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그런데 이 불균형은 확실히 인식에 존재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으며, 더 높은 식견이 생기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시포스는 "본성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한 경험에 따라 살아야 한다"(《스토바에오스 선집》, 제2권, 제7장, p.134)고 했는데, 그 의미는 세계 속에 있는 사물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가지고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어떤 일로 마음의 평정을 잃고 불행을 당해 실신하고 화를 내고 기가 꺽이는 일이 종종 있다. 그것은 사물이 자기의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그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세상과 인간을 몰랐다는 것, 무생물은 우연에 의해, 생물은 반대로 목적이나 악의에 의해, 어떠한 개인의 의지도 매사에 방해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의 인생은 이러한 상태를 일반적으로 알기 위해 그의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대체로 알고 있어도 하나하나에 관해 자세하게 재인식하지 않아서 이에 놀라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경우 판단력이 부족했거나 어느 한쪽이다.*

* "일반적인 개념을 개별적인 것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인간 악의 원인이므로"
   (에픽테토스의 《
논문집》, 제3권 26장)


큰 기쁨이라는 것도 오류와 망상이다
607

따라서 큰 기쁨이라는 것도 오류와 망상이다. 왜냐하면 희망이 성취된 만족은 결코 영속하는 것이 아니며, 소유와 행복이라는 것은 모두 우연에서 시간을 정하지 않고 빌려온 것이며, 따라서 다음 시간에는 다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은 이러한 망상의 소멸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고통도 망상도 불완전한 인식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현자에게는 고통도 항상 멀리 떨어져 있고 마음의 평정을 방해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것과 좌우할 수 없는 것 607

스토아학파의 이 정신과 목적에 따라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것과 좌우할 수 없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여 구별했다. 그리고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것은 절대로 기대해서는 안 되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통, 고뇌, 불안 등을 모면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출발하고, 또 이것을 지혜의 핵심으로 하여 쉴 새 없이 이에 마음을 집중한다. 그런데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의지뿐이다. 그리고 이 의지에서 서서히 덕론에 옮겨 간다. 즉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외부 세계가 행복과 불행을 규정한다고 하면, 우리 자신이 마음속으로 만족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 의지에서 생긴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은 전체적으로 볼 때 실제로 인간의 커다란 특권인 이성을 중요시하고 행복을 가져오는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중대하고 존경할 만한 시도이다.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일생을 보낼 수 있을까,
      채울 수 없는 욕망이 언제나 너를 혼란에 빠뜨려 괴롭히지 않도록,
      별로 이익이 되지 않은 일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희망을 갖지도 말라.
                                                         - 호라티우스, 《서간집》, 18의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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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 2012-05-3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보고갑니다^^

oren 2012-06-01 16:07   좋아요 0 | URL
DJ류연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