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 교감 완역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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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76호 난중일기(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공의 일기를 제대로 읽어 본 사람 역시 의외로 많지 않다. 公께서 초서체로 흘려 기록하는 바람에 오역도 많고 초고본, 전서본, 일기초 등 사료의 정비불비로 인해 많은 번역본이 두서 없이 출간되어 정확한 난중일기의 묘미를 느낄 수 없었다는 점도 있다. 특히 1595년 일기인 을미일기가 빠져있었던 관계로 일기전체에 대한 맥락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구국의 성웅으로 충앙하고 있지만 정작 공이 직접 남긴 일기 (어쩌면 실록이나 기타 기록보다 더 진솔하고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에 대한 후대인들의 완역에 대한 노력은 그리 깊어 보이질 않았다. 이번 노승석교수의 난중일기는 그동안 산재되었던 초고본과 전서본 그리고 기존에 빠져있었던 누락부분의 일기초을 통합하여 교감한 난중일기의 완역본이라데 그 의의가 있다. 특히 을미일기를 추록하여 완벽한 충무공의 난중일기가 재탄생하게 되어 무엇보다 기쁨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다이묘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왜는 명을 타도한다는 명분하에 1592년 4월 현해탄을 건너 부산 앞바다에 도달하고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한다. 이를 역사는 임진왜란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조선개국이후 200여년간 그야말로 평온한 시절를 보낸 조선으로서는 한마디로 아닌밤에 홍두깨였지만 왜는 철저한 준비끝에 감행했던 도발이었기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군왕이라는 자가 솔선수범하여 몽진하는 형국에서 신하들의 비겁함을 탓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토록 만반의 준비를 했던 왜의 전략중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전라좌수영의 수장 이순신을 간과했다는 것이고 이는 곧바로 옥포해전에서 부터 시작하여 칠전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까지 자그만치 5년간에 19차례 해전에서 전패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국 왜의 전략은 바다의 神인 이순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처음부터 새롭게 맞추어야 했고 결국 명의 참전을 불러오게 되면서 7년이라는 기나긴 원정을 하게 되면서 명분도 없고 성과도 없는 소모전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이러한 결과는 이후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커다란 반향을 가져오게 된다.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선조신록(수정실록포함), 유성룡의 징비록,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에 나와 있지만 그 내용이 그리 자세하지도 않고 전반적으로 전쟁을 통찰하는데 부족한 면이 있다. 실록은 정사라는 측면에서 특히 문신들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으로 전장의 치열한 기록을 알 수 없는 한계가 있고 징비록의 경우도 후방에서 겪고 보고 들었던 기록물이고 어우야담(유몽인의 경우 난중일기에 그의 암행어사로서의 허위보고와 편협한 사고의 대한 비판이 나옴)의 경우 그야말로 야담형식으로 민간의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런면에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임진년에서 부터 노량해전으로 戰死하기 이틀전인 무술년(1598년 11월 16일)까지 7년간의 방대한 기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대한 양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이 전쟁의 최일선에서 겪었던 생동감 있는 현장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전란을 통찰하는데 어떠한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승리한 해전을 거의 모두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전란중에 벌어졌던 행주대첩, 진주대첩등 다양한 육전에 대한 정보와 장수와 문신들의 활약상 그리고 그들의 치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또한 공의 일기에는 판옥선을 비롯한 전선의 제작과정과 둔전(병사가 직접 경작을 하여 군량미를 조달하는 방식)그리고 거북선과 정철총통을 비롯한 신무기의 개발과 개량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남겨져 있어 군수품관리와 전선보급 관리등에서 공만의 주도면밀함을 확인할 수 있다. 제하는 비록 일기라고 하지만 그야말로 7년전쟁을 세밀하게 다룬 전쟁사라고 해야 할 정도 전투전략, 적 정세파악, 국가의 전략, 인재의 배치 및 활용, 정규군과 의병의 활동등에서 카이사르의 내전기나 갈리아전쟁기보다 뛰어난 면을 보여주고 있는 기록물이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전쟁사로만 팍아해서는 그 의미를 십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난중일기에는 공 자신의 사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일기라는 자체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기록 하듯이 난중일기에는 공의 솔직담백한 내용들을 포함한 공의 모든것이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어느 누구라도 감추고 싶어하는 남녀간의 정사문제도 기록하므로서 정말 자신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그동안 원균과의 불화는 모두 인지하고 있지만 권율, 당시 암행어사로 파견된 유몽인, 윤두수, 윤근수, 이억기(전라우수사),기효근(남해현령),이일등의 인물평은 당시 조선군 전체의 분위기를 보는듯 해서 마음이 착찹해 질 뿐이다. 또한 일기를 통해서 본 공의 성격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자신의 오른팔 격이었던 순천부사(권준)과 사도첨사(김완),전라우수사(이억기)가 기한내에 작전지역에 도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냉정한 징계와 모함으로 백의종군하는 과정에서 백성이 준 음식을 받아온 종에 대한 질책에서 공과 사에 대한 확고 부동한 태도를 엿 볼 수 있다. 임진년 사천해전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은 이후 계속되는 신병와중에도 대필한 공문서의 글자모양이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처리하는 과정를 보면 공의 꼼꼼한 면을 확인할 수 있다. 부안의 첩과 동침한 여종에 대한 기록에서는 자신의 허울도 감추지 않는 솔직함을 볼 수 있다. 특히 원균을 비롯한 부하장수들의 술주정에 대한 힐책이 많이 보이는 점은 정신과 자세의 올바름을 강조하는 공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충무공의 전반적인 성격은 쉬이 범인들이 접근하기엔 상당히 어려운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례이다.

하지만 공의 이러한 성격이 오히려 관리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대변하고 있다. 진중에서 일반백성들과 병사들에 대한 배려는 장수로서 그리고 목민관으로서의 부족함이 한치도 없어 보인다. 최하층계층인 노비들의 이름과 승병들의 이름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이름 하나하나까지 거론하면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아픔을 자신의 아픔같이 감싸주는 모습에서는 그저 공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이다. 선조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이에 편승한 원균과 서인들의 중상모략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백의종군하고 모친의 죽음과 아들 면의 전사등 그야말로 안팍으로 괴로운 시기였지만  공은 일기가 끝나고 자신이 전사하는 노량해전까지도 단 한번도 임금에 대한 원망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듯이 정유년 9월의 일기에 송사 이강과 이약수전을 인용하면서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 주어 읽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비단 선조는 자신을 라이벌로 생각했더라도 신하인 공은 단 한번도 선조에 대한 충념을 버리지 않고 일기에 기록했듯이 목숨으로 섬김을 다했던 것이다. 

이렇듯 난중일기는 전란의 진행상황과 전투의 결과, 전략의 수립, 신무기 개발, 유성룡을 비롯한 중앙관직 인사들의 언행과 행보 권율,원균,곽재우,이일,이억기등 최전방일선에서 활동한 장수들의 활약상, 목년,갓동,철매,한경,돌쇠,해돌,금이, 중 해당등 이름 없는 민초들의 이름, 가장(개고기),사슴고기,연포탕,동아등 당시 애용했던 음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백과사전 같은 방대하면서도 다양하고 그러면서도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기록들을 담고 있는 개인의 일기이자 전쟁사이며 하나의 문화사이기도 한 소중한 유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후대에 5.16쿠테타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충무공을 신격화 하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난중일기만을 놓고 보더라도 공의 위대함은 이런 비판을 잠재우고도 남는다. 우리는 난중일기에서 공의 성웅적인 기질을 보는 것 보다 공역시 일개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은 희노애락을 갖고 살아갔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올바른 난중일기의 접근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새로게 보완되고 첨부되어 완역된 난중일기를 통해서 공의 진중에서의 일상과 목민관으로서 자세, 자식으로서 효, 부모로의서의 자애, 목숨을 건 전장에서 전우애 그리고 나아가 국가에 대한 충념을 다시한번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는 지금처럼 가치관의 아노미상태에 접어든 시대에 충무공이 던져주는 삶의 화두일 것이다.
 
安國家定社稷, 盡忠竭力, 死生以之(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자신이 기록한 일기의 이 말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도 충무공에게는 국가와 백성이 최우선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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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삼국지 - 위서 1
진수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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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삼국지연의>라는 작품은 아시아 그중에서도 동북아시아에서는 서구 그리스도문화권의 베스트셀러인 성경만큼이나 대중독자들에게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랑받아온 보기 드문 작품이다. 나관중 스스로가 칠실삼허라고 밝혔고 대부분의 독자층에게서 <삼국지연의>를 역사서로 인식하지 않고 있지만, 小說로서의 삼국지와 正史로서의 삼국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는 마치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서 성경과 역사적 사초로서의 성경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신주의자들과 다를바가 없을 정도로 소설과 정사인 역사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드는 몇몇의 아쉬운 장면들로 인해 오히려 소설을 역사로 믿고 싶어함일 것이다. 이 역시 경전을 역사로 믿고 싶어하는 맹목적인 믿음이나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엄연히 소설과 역사는 다른 것이고 우리가 소설속에서 예술적인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듯이 역사속에서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느낄수 있는 것이다. 

<삼국지>는 삼국시대를 마감하고 사마氏에 의해 불안정한 통일을 이룬 시점에서 촉나라 출신의 진수에 의해 완성되었다. 역시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기전체의 형식을 근간으로 위서,촉서,오서를 편찬했으나 사기처럼 테마를 형성한 열전이 아닌 인물들의 전을 나열식을 기술했다는 점에서 사기에 비해 그 깊은 다소 떨어지는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역사서로서 그 가치는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의 주축은 촉이자 촉의 창건자인 유비 그리고 그를 보필했던 제갈량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진수는 삼국의 정통을 조조의 위나라로 판단했다. 진수가 위를 정통으로 판단했던 것은 천하삼분지계는 위를 중심으로 그 역활을 해갔다는 점, 단적으로 강역을 비교해도 거의 2/3을 위가 통치했다는 점에서 촉이나 오를 번국으로 생각했다. 비단 자신이 촉출신이었지만 사관으로서 촉을 정통으로 보는 것은 불합리했다는 점에서 진수의 사관은 객관성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진수는 위서에서만 황제의 치세를 다루는 紀를 채택하여 조조를 비롯한 그 후예들을 황제로 인정했다.  

무엇보다 삼국지연의로 인해 가장 큰 피해자였던 조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소설과는 천양지차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영향으로 그동안 조조는 간웅에 가까운 평가가 독자들의 뇌리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지만 정사속의 조조는 난세을 극복한 유일한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러한 평가는 조조 주변에 모여든 인물들의 질이나 양에서부터 촉의 유비나 오의 손권과는 사실상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조조의 인적 경영은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장수를 받아들여 공을 세우게 하는 인용술은 조조가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비범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조의 이러한 인용술의 근간은 公과 私에 대한 엄격한 구분을 두어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자제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조조의 가장 큰 장점은 참모들의 진언을 들을 수 있는 열려있는 통치술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바로 사과하고 시정하여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철저한 자기관리에 있다는 점이 유비나 손권에 비해 뛰어난 재사와 장수들이 앞다투어 조조를 찾게 했던 비결이었다. 유비의 촉이나 손권의 오는 혈연과 지연등의 인맥구성의 사적인 시스템이 강했던 반면 조조는 철저한 인적시스템 관리를 기반으로한 네트워크를 확립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 오히려 위가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촉이나 오를 국경안에 기반을 두고 경영하는 국지적 기업에 비유한다면 조조의 위는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력과 인적자원을 확보한 다국적 기업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조조의 경영철학 1순위는 인재확보와 인재들의 적절한 이용이었다. 군주를 보좌했던 대표적으로 뛰어난 참모를 흔히 제갈량을 사례로 들지만 사실 촉에는 제갈량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참모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조조에게는 순욱,순유,가후,종요,화흠,왕량,정욱,곽가,동소등 그 수를 헤아릴 수 도 없이 많이 존재하였고 제각각만의 특유한 보좌를 했던 것이 위나라의 숨겨진 힘의 근간이었던 것이다. 둔전제를 입안하고 활성화하여 국가 살림을 확장했던 원환과 국연, 지금도 사형제 존폐를 두고 설왕설래하듯이 당시 사형제의 확대와 축소를 두고 쟁쟁한 설전을 벌였던 종요와 화흠등 조조에겐 이런 인적 네트워크가 확립된 인재풀이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魏는 이렇게 조조라는 군주와 지연이나 혈연적으로 무관한 외부 인적자원과 하후돈과 조인등을 대변되는 내부적 인적자원의 상충되는 시스템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조조를 중심으로 빈틈없이 돌아갔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가능토록 한 것은 조조만의 인용술과 경영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진수의 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조조는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었던 것이다. 조조는 66세인 220년 임종할 때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고대의 규정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 없다. 매장이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고 자신의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라" 라는 말을 유지로 남길 정도로 공과 사에 대한 구분을 철저하게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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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삼국지 - 위서 2
진수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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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가 삼국중에서 황제국으로 대접받은 이유는 촉이나 오에 비해서 강역의 크기나 인구의 수 경제적 번영등의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적인 면에서 두나라에 월등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위는 오나 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력한 소프트웨어가 존재했다. 다름 아닌 인적 관리시스템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조조라는 걸세출의 영웅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난세일수록 영웅의 주변으로 인물들이 모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맹장,책사들은 함부로 자신이 충정을 바치지 않는 법이다. 漢제국을 창립하는데 일등공신 역활을 한 장량은 군주를 자신이 가려서 삼는다고 했듯이 조조라는 인물을 보고 각지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그만큼 조조는 유비나 손권에 비해 인적 네트워크라는 막강한 파워를 바탕으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면적으로 보더라도 무신계통의 신하나 전략가인 책사들의 면모만을 보더라도 위나라는 그야말로 인재들이 넘쳐 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촉에 제갈량,방통,법정등의 전략가가 전부였다면 위에는 순욱,순유,가후,종요,화음,왕랑,정욱,곽가,동소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전략가들이 포진해 있었다. 또한 야전사령관들의 면모만 보더라도 하후돈,하후상,조인,조흥,장료,악진,우금,장합,서황,조엄등을 비롯한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장수들로 메워져 있었기에 제국의 창건이 가능했던 주요인이었다. 물론 이러한 인재풀의 네트워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던 뛰어난 감각을 가진 조조가 있었기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렇듯 조조의 위는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간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진수는 선봉대장격인 장료,악진,우금,장합,서황의 전을 상당히 후반부에 배치했을 정도로 열거 해야할 인재들이 그 만큼 많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다시금 국가경영에서 인재의 중요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번권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다양한 기예로 이름을 떨친 명인들을 모은 방기전과 한국사와 밀접하고 민감한 부분을 다룬 오환선비동이전이다. 우선 방기전은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명이 화타, 아악의 부흥자 두기, 관상가 주건평,꿈 해몽의 달인 주선과 점패 풀이의 명인 관노등의 전을 다루면서 사마천의 사기열전의 테마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격은 많이 떨어지는게 사실이다. 사마천이 각양각색의 인간중심의 열전을 편찬했다면 진서는 공식적인 개념에 충실했다고 보는 편이 어울릴 것이다. 이번 책에서 진서는 등애와 종회전을 통해서 인간의 간사함과 허탈함을 대리표현하고 있다. 촉의 멸망을 받아낸 장본인 등애는 결국 종회의 모함으로 모반이라는 대역의 죄를 뒤집어 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종회 역시 모반으로 생을 마감하는 부분에서 진수의 평은 사뭇 애간장을 녹이듯 간절한 표현을 쓰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삼국지의 위서가 우리에게 주목받는 이유중에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오환선비동이전중 동이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의 조선열전>과 반고의 한서지리지, 후한서등 중국 고대역사서에 간간이 등장하는 우리역사 부분은 서술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다소 무리가 따른다. 워낙 춘추필법에 의한 역사서술이 관례화되었기 때문에(특히 공소도와 관구검전에서 마치 고구려를 멸한 것 같은 침소봉대된 서술이 대표적이다)우리의 상고사를 다루고 있는 유일한 정사인 삼국사기등과 비견하여 꼼꼼히 들여다 봐야 할 것이다. 진수 역시 자신이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선대의 역사서의 내용들을 대폭적으로 수용하여 약간의 가감을 했을 정도이지만. 고구려,부여,동예,옥저,삼한등 우리의 상고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충분히 심사 숙고해야할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동이전에서 고구려와 부여를 비롯한 한민족의 기원이라 볼 수 있는 다양한 민족국가에 대한 개념이 중복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은 것은 다름아닌 동이의 강역이 상당했음을 은연중에 시사하는 것일 것이다. 지금 동북공정프로젝트라는 미명하에 자국의 역사로 편입한 우리 상고사를 그들의 선조인 진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분명히 못박고 있다는 점이 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이처럼 위서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면서도 우리에겐 더 중요한 우리 상고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도 읽어야 하는 중요한 사서중에 하나이다. 조조는 분명하게 위대한 난세의 영웅이었다. 단지 그의 경영전략이 대중들에게는 너무 야박한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보였기에 좀더 덜 떨어진 유비에게 동정의 눈길이 가게 된 것이고 결국 간웅으로 낙인찍히는 능욕을 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뿐이고 정사에서 평가되는 조조는 현대 다국적 기업의 CEO같은 존재였다. 빠른 판단과 실패를 인정하고 곧바로 새로운 전략을 만들어가는 조조만의 특유의 용인술은 당대나 지금이나 범접하기 힘든 조조만의 장점이었다. 결국 위나라도 사마씨의 손에 넘어가게 되지만 진과 한에 이어 그나마 제국 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던 국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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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비로소이다 - 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 너머의 역사책 3
임상혁 지음 / 너머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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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년(선조 19년) 나주 관아에 기이한 訴가 접수 되었다. 다름아닌 칠순의 노파가 자신은 양인이 아니라 노비라는 주장과 원고측은 노파가 노비가 아니라 양인이라는 소송이 들어왔다. 당시 나주 목사로 재임하고 있던 이는 학봉 김성일이었다. 일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게의 송사라는 것이 노비임을 부정하는 것이 태반사 일텐데 이번의 경우는 스스로 나서서 노비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니 송관인 김성일의 입장도 대략 난감했을 것이다.  

<나는 노비로서이다>는 다름아닌 조선시대의 집행되었던 법을 통해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사회문화를 엿 볼 수 있는 책이다. 문화라는 키워드를 법과 접목시켜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법감정에서부터 소송의 준비과정과 절차 그리고 판결에 이르는 일련의 형태를 통해서 당시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생생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주제가 돋보이는 책이다. 법이라는 규칙규범은 윤리라는 도덕규범과 더불어 한 시대 문명의 잣대를 가름할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규칙규범인 법은 나라를 운영해 나가는 핵심적인 소프트웨어로 고조선의 시대부터 명문화되기 시작하여(물론 이전 선사시대에도 이러한 규칙규범은 존재했을 것이다) 위정자의 정책이념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더욱더 심도 깊은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왕조국가에서의 법집행은 절대권력자인 군주의 영향력이 지대했겠지만 일반민중들의 법감정 역시 마냥 무시할 수 만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기에서 언급한 소송의 예를 보더라도 극히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도 이렇듯 최하층의 계층에게 까지 소송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근대 법감정으로 재단하긴에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서 그동안 곡해되었고 잘못 알려져 왔던 조선시대의 법과 사회에 대한 일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조선사회는 소송이라는 쟁송이 잦지 않는 사회, 즉 유교적인 집단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혈연과 지연으로 무장한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에 소송이 거의 없었을 거라는 착각, 그리고 비단 소송이 있었더라도 지금의 근대적인 법집행, 형식이나 절차등과는 사뭇 다른 관리의 일방 독주적이고 전근대적인 법집행이 자행되었을거라는 생각, 그리고 소송이라는 행위자체가 신분상 양반계열에서나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등 이러한 일련의 속설아닌 정설을 한방에 해결해 주는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만만한 사회도 아니였고 그리 매정한(법집행면에서) 사회 역시 아니였다. 고려가 멸망했던 원인중에 하나가 바로 과도한 송사가 한 몫을 차지했듯이 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소송의 남발을 줄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지만 결국 수많은 송사로 지방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고, 소송당사자 역시 사대부를 떠나 모든 계층에서 각양각색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노비가 주인을 대리하는 소송도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점을 볼때 오히려 지금의 우리사회보다 법대로라는 의식이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금의 법원과 법관의 역활을 담당했던 지방관들은 소송당사자들을 직접 대면하고 일일이 사안에 대한 확인과 검증절차를 거쳐 판결을 했다. 물론 이에 불복하는 자는 상급심에 해당하는 중앙관서에 항고할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 왕에게 호소할 수 도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조선의 법집행과정이 안하무인격이 아니였다는 점 역시 확인된다. 어린 사촌동생이 버선을 훔쳐갔다고 소송을 제기한 사촌형에게 오죽했으면 태형을 가하고 벌금을 물릴 정도로 조선의 지방관은 부임과 동시에 소송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했고 최초의 목민서 역시 소송관련 서적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는 소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해답은 다름아닌 신분제사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평등한(100% 수긍할 수 는 없는 부분이더라도)사회와는 달리 반상이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신분제 사회에서 최하층의 권리를 최소한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은 관아에 호소하는 소송이라는 형태가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역사 사초를 살펴보더라도 유독 신분관련 쟁송이 많았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조선의 민중은 자신의 한계를 달리 호소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법은 사회전반에 걸쳐 있는 문화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라는 컨텐츠가 법이라는 형태로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법을 살펴보면 그 사회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나주관아에 접수된 이 소송은 판결은 원고의 승소로 그 막을 내렸다. 피고인 다물사리는 자신이 양인의 신분이었지만 관청의 하급관리와 결탁하여 관노비로 투탁까지 하여 노비신분을 회득했지만 결국 이러한 전모가 밝혀져 원래의 양인신분으로 돌아갔다. 이는 자신이 노비와 결혼하여 낳은 자신들이 결국 원고의 노비로 귀속됨을 최대한 막고자 하였던 방편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모계의 신분을 따라가는 종모법을 선택하였기에 다물사리는 사노비보다는 자식들을 좀더 자유로운 관노비로 살아갈 길을 열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소송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신분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과 또한 철저했을것 같았던 신분사회의 헛점 역시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소송의 절차와 형식 그리고 판결이 내려지기까지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일반인들로 하여금 마치 고을 동헌에 나와 있는 느낌을 갖게 하는 현장감 있는 저서이다. 우리는 이번 저서를 통해서 조선시대의 법질서와 법집행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지만 무엇보다 당시의 사회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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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사 - 조선왕조실록에서 다루지 못한 진짜 조선이야기 박영수의 생생 우리 역사 시리즈 2
박영수 지음 / 살림Friends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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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우리의 최고의 역사서는 이미 알고 있는 대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로 전통적인 역사서술방식은 기전체의 형식을 바탕으로 역사를 편찬한 정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연스님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분야의 역사를 이야기 형식을 통해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사가 아닌 야사로써 역사를 바로보는 시각에서 정사보다는 낮은 등급으로 폄하하고 있는것 역시 사실일 것이다.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 만큼 승자의 시각에서 서술하게 되었있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의구심이 든다. 그럼 승자들의 기록인 정사를 제외한 나머지의 기록들은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고 역사적 타당성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정사만큼 소중한 우리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遺事는 단어 뜻 그대로 예로 부터 역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형식으로 전해준다는 말이다. 비단 정사에는 기록되지 못했지만 당시대를 살았던 일반대중 정확히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민중들의 시각을 반영한 역사가 봐로 유사와 야사라고 봐야 타당할 것이다. 오히려 역사편찬형식에 얽매여 있는 정사보다 자유분방한 소재와 주제로 그 시대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장점일 것이다.  

이런면에서 <조선유사>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그냥 설화나 전설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우리선조들의 살아있는 생생한 이야기들을 모아모아 한권의 책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한때 청백리의 표본으로 알려져 있었던 황희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바로 이러한 유사나 야사를 통해 정사를 고증한 결과 그 본색이 알려졌듯이 유사나 야사는 정사를 보완하는 자료로써 그 가치가 높은 것이다. 이번 책에서는 그동안 세인들에게 회자된 인물이나 사건들도 있지만 생소하면서 흥미있는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역사적 진실을 엿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다가온다. 왕이 하사한 은잔이 너무나 작아 그 크기를 늘려서 술을 마셨다는 손순효, 돼지머리와 닮았다고 해서 돼지정승으로 불리었던 장순손, 선조때 문재인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애끓는 순애보,을사사화로 역적으로 몰린 옛주인의 복수를 한 계집종, 연암 박지원의 재치있는 술 낚시와 홍국영과 바둑에 얽힌 이야기들은 그저 단순한 이야기로만 들어도 그 재미가 솔솔하다.  

하지만 이러한 야사를 단지 가십거리나 흥미위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정사에서 다루지 않는 일반 민중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사라는 것은 어찌 보면 위정자의 정책 메타포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역사기술의 한계성자체를 갖고 있지만 정사를 제외한 그 밖의 역사적 기록물들은 이러한 제약을 전혀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사상적 배경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문화사라고 봐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사마천 사기중에서 유독 <사기열전>이 지금도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사마천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중심에는 다름아닌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에 인간에 관한 이야기 즉 열전에서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후대에 교훈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야사에서 우리는 선조들의 삶, 특히 공식화되지 않은 개개인들의 삶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간미를 우리는 야사에서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에 있어 이러한 야사를 다 수용할 수 없지만 정사와 비견해서 참조하면서 상고할때 비로소 역사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눈이 뜨일 것이다. 모처럼 흥미있게 읽어나갔던 책이었다. 그만큼 그동안 우리의 역사서들의 경직성이 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팁으로 저자는 주막, 숙주나물, 막걸리, 흥청망청, 사약등 역사서나 현재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의 어원에 대해서 당시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고증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별도의 페이지를 마련해 주고 있어 청소년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여러모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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