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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비로소이다 - 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 ㅣ 너머의 역사책 3
임상혁 지음 / 너머북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586년(선조 19년) 나주 관아에 기이한 訴가 접수 되었다. 다름아닌 칠순의 노파가 자신은 양인이 아니라 노비라는 주장과 원고측은 노파가 노비가 아니라 양인이라는 소송이 들어왔다. 당시 나주 목사로 재임하고 있던 이는 학봉 김성일이었다. 일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게의 송사라는 것이 노비임을 부정하는 것이 태반사 일텐데 이번의 경우는 스스로 나서서 노비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니 송관인 김성일의 입장도 대략 난감했을 것이다.
<나는 노비로서이다>는 다름아닌 조선시대의 집행되었던 법을 통해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사회문화를 엿 볼 수 있는 책이다. 문화라는 키워드를 법과 접목시켜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법감정에서부터 소송의 준비과정과 절차 그리고 판결에 이르는 일련의 형태를 통해서 당시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생생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주제가 돋보이는 책이다. 법이라는 규칙규범은 윤리라는 도덕규범과 더불어 한 시대 문명의 잣대를 가름할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규칙규범인 법은 나라를 운영해 나가는 핵심적인 소프트웨어로 고조선의 시대부터 명문화되기 시작하여(물론 이전 선사시대에도 이러한 규칙규범은 존재했을 것이다) 위정자의 정책이념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더욱더 심도 깊은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왕조국가에서의 법집행은 절대권력자인 군주의 영향력이 지대했겠지만 일반민중들의 법감정 역시 마냥 무시할 수 만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기에서 언급한 소송의 예를 보더라도 극히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도 이렇듯 최하층의 계층에게 까지 소송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근대 법감정으로 재단하긴에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서 그동안 곡해되었고 잘못 알려져 왔던 조선시대의 법과 사회에 대한 일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조선사회는 소송이라는 쟁송이 잦지 않는 사회, 즉 유교적인 집단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혈연과 지연으로 무장한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에 소송이 거의 없었을 거라는 착각, 그리고 비단 소송이 있었더라도 지금의 근대적인 법집행, 형식이나 절차등과는 사뭇 다른 관리의 일방 독주적이고 전근대적인 법집행이 자행되었을거라는 생각, 그리고 소송이라는 행위자체가 신분상 양반계열에서나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등 이러한 일련의 속설아닌 정설을 한방에 해결해 주는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만만한 사회도 아니였고 그리 매정한(법집행면에서) 사회 역시 아니였다. 고려가 멸망했던 원인중에 하나가 바로 과도한 송사가 한 몫을 차지했듯이 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소송의 남발을 줄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지만 결국 수많은 송사로 지방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고, 소송당사자 역시 사대부를 떠나 모든 계층에서 각양각색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노비가 주인을 대리하는 소송도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점을 볼때 오히려 지금의 우리사회보다 법대로라는 의식이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금의 법원과 법관의 역활을 담당했던 지방관들은 소송당사자들을 직접 대면하고 일일이 사안에 대한 확인과 검증절차를 거쳐 판결을 했다. 물론 이에 불복하는 자는 상급심에 해당하는 중앙관서에 항고할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 왕에게 호소할 수 도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조선의 법집행과정이 안하무인격이 아니였다는 점 역시 확인된다. 어린 사촌동생이 버선을 훔쳐갔다고 소송을 제기한 사촌형에게 오죽했으면 태형을 가하고 벌금을 물릴 정도로 조선의 지방관은 부임과 동시에 소송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했고 최초의 목민서 역시 소송관련 서적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는 소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해답은 다름아닌 신분제사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평등한(100% 수긍할 수 는 없는 부분이더라도)사회와는 달리 반상이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신분제 사회에서 최하층의 권리를 최소한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은 관아에 호소하는 소송이라는 형태가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역사 사초를 살펴보더라도 유독 신분관련 쟁송이 많았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조선의 민중은 자신의 한계를 달리 호소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법은 사회전반에 걸쳐 있는 문화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라는 컨텐츠가 법이라는 형태로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법을 살펴보면 그 사회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나주관아에 접수된 이 소송은 판결은 원고의 승소로 그 막을 내렸다. 피고인 다물사리는 자신이 양인의 신분이었지만 관청의 하급관리와 결탁하여 관노비로 투탁까지 하여 노비신분을 회득했지만 결국 이러한 전모가 밝혀져 원래의 양인신분으로 돌아갔다. 이는 자신이 노비와 결혼하여 낳은 자신들이 결국 원고의 노비로 귀속됨을 최대한 막고자 하였던 방편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모계의 신분을 따라가는 종모법을 선택하였기에 다물사리는 사노비보다는 자식들을 좀더 자유로운 관노비로 살아갈 길을 열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소송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신분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과 또한 철저했을것 같았던 신분사회의 헛점 역시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소송의 절차와 형식 그리고 판결이 내려지기까지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일반인들로 하여금 마치 고을 동헌에 나와 있는 느낌을 갖게 하는 현장감 있는 저서이다. 우리는 이번 저서를 통해서 조선시대의 법질서와 법집행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지만 무엇보다 당시의 사회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