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1 - 원시시대에서 남북국시대까지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1
강종훈 외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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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내력을 상징하는 족보라는 것이 있듯이 민족(근대화와 제국주의의 비뚤어진 표출로 인하여 대두된 개념이지만)이나 국가 역시 지나간 세월의 흔적들이 역사라는 기록에 의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문자의 형식을 갖춘 포멀적인 기록과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비공식적인 구두기록, 미술품이나 조각품등을 통한 제3의 기록등 다양한 형태로 전해내려 오고 있고 우리는 통상 이러한 일련의 흔적들을 통칭하여 역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 만큼 역사는 특정한 국가의 형성에서 성장에 이르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일종의 정체성을 표방하고 있어 비록 지난 세월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현재와 미래를 제단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는 살아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듯 한 국가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그 국가 전반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인지하는데 있어 오류가 존재할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역사 한국사는 이러한 측면에서 과연 제대로된 역활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명쾌하게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현재까지도 동북공정이니 독도영유권등(물론 이러한 분쟁이 상존하는 곳은 세계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으로 상처받고 백의민족등을 운운하면서 소극적인 사관을 스스로 주입하고 있는 국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선진국의 지표인 OECD회원국이자 G20의장국으로서 상당한 지위에 올라섰다고 자부하는 나라중에 자국사를 선택과목으로 교육시키는 나라는 세계사를 통틀어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선진산업국은 경제적 지표의 우월성만으로 주목되고 부러움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선진산업국의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자국의 문화에 대한 긍지와 이에 대한 대외적인 인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저에서는 다름아닌 역사인식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념과 줄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교육은 모년 모월 모일에 누가 무슨일을 했다는식의 그야말로 입시위주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에 치중했고 전반적인 사관에 대한 큰 흐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역사하면 자연스럽게 귀찮고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쯤으로 치부하게 되고 관심밖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고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이성적인 대응보다는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어 온 것이다. 여기에서 여러가지 요인이 존재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서가 없었다는 것이다. 지엽적인 부분이 아닌 통사를 개괄할 수 있는 교양서로서의 역사서가 없다 보니 갈수록 역사인식에 대한 모호한 사관만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측면에서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시리즈는 학계는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모처럼 제대로 된 역사서의 출간이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린 자녀에서부터 부모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같이 읽으면서 토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눈에 돋보이는 점]

1.다양한 시각자료를 통한 생동감 넘치는 편집

그동안 독자들은 역사서에 나오는 강역도, 연표, 의미있는 유물 사진 및 인물 사진을 많이 접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나 출판사가 달라도 그 속에 등장하는 시각 자료의 경우 거의 대동소이한 경우를 경험했을 것이다. 왠만한 독자라면 너무나 많이 보는 자료에 식상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그 중요성을 잊게 마련이다. 특히 선사시대의 유물자료는 판박이를 하듯이 중복된 자료들의 일람표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어린학생들의 배려 차원도 있겠지만 왠만한 성인독자들이 보더라도 생소한 자료들이 다량으로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좀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선사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며 그 시대의 역사 역시 우리의 역사라는 자긍심을 부여하게되는 동기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우수한 편집이라고 봐야 한다. 

2. 단군신화에서 역사로

그리스로마신화를 우리는 단순하게 폄하해서 신화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 이유는 신화속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상황들속에 숨겨진 진실이 신의 이야기보다는 바로 인간들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바로 이러한 부분들의 전래가 일종의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우리의 단군신화는 올바른 접근과 더불어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늘 아쉬운 대목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다소 미흡한 부분은 아직까지 있지만 단군신화를 역사의 일환으로 해석할려고 하는 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호랑이, 곰, 신시등의 상징성을 역사적 표현으로 해석하여 신화에서 잠자고 있던 단군의 실체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싶다. 

3. 북한학계의 학설 소개와 통일신라시대

분단 이데올로기의 확산은 정치권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적대적인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고 학계에 이르기까지 그 미치는 분야는 엄청나게 넓기도 하다. 그동안 금기시 되었던 북한학계의 사관을 단군릉, 단군신화, 발해와 신라의 관계분야에서 소개함으로써 남북간 사관의 형성틀과 기본방향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기본 삼국시대 이후의 시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인식했던 사관에서 발해와 신라가 공존했던 남북국시대로 사고의 발상이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보여진다. 그동안 노론식민사관의 잔재로 인한 소극적 사관의 청산에 상당히 많은 부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4. 발해사에 대한 재조명

무엇보다 이번 책의 강점중에 하나가 바로 발해사의 재조명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그동안 우리의 역사에서 경계인의 자리에 밖에 머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에 대한 연구나 자료도 적었지만 통일신라시대가 강조되다 보니 발해사는 자연스럽게 소외되었던 것이다. 근대화의 일환으로 등장한 민족이라는 개념의 획일화로 인해 고구려유민과 말갈인들이 세운 발해는 왠지 우리역사가 아닌 별개의 역사로 인식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발해의 건국과 구성원의 구성등을 집중적으로 설명하면서 발해가 우리의 역사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지금의 민족적인 개념의 잣대로 당시를 고찰한다면 고구려, 백제(요서와 일본통치시대)역시 우리의 역사로 볼수없을 만큼 다민족을 그 구성원으로 하고 있다. 특히 발해사 부분에서 담비의 길(sable-road)이라는 새로운 교역로의 발견으로 실크로드에 비견될 만큼의 교류가 있었고 그 중심에 발해가 있었다는 점에서 발해는 거대한 제국이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팁으로 백두산폭발과 발해의 멸망에 대한 부분도 언급되어 있어 변화하는 흐름에 맞추어 가고 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5. 사회/문화사의 부각

역사하면 대게의 경우 군주나 사건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를 지칭하기고 하고 일반인들에게 이 부분이 많이 익숙해져 있는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는 정치사만을 다루는 편엽적인 시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부분이 돋보인다. 사회/문화사에 대한 대폭적인 보강과 서술로 인해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를 통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온달과 평강공주, 서동과 선화공주등의 설화에서 부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조에 수록된 기사를 통해서 당시의 의식주 및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고찰을 보여줌으로서 역사적 고증과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는 점이 여타의 역사서와는 다른 점이자 강점이기도 하다. 고구려尺이라는 당시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권의 표준 도량형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덤으로 알게 된다. 

[아쉬우면서 향후 보완 되어야할 부분]

▣ 한사군 문제

한국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제외하고는 현존하고 있는 공식적인 문자기록에 의한 역사서가 발굴되지 못한 관계로 항상 상고사부분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고 이에 대한 제대로된 고증이나 실체에 확립이 상당히 어렵다. 그러하다 보니 특히 제국주의 실증사학의 영향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유물이나 기록에 의존하는 경향이 우세했다. 무엇보다 일제감정기 시대를 거치면서 태동한 근대사학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의 상고사는 많은 오류를 낳게 되는 결정적인 역활을 하게 된다. 이는 일제를 중심으로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논거로 자리잡았고 그들의 사관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들이 학계를 점령하면서 지금까지도 엄청난 여파를 미치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통설을 그대로 승계하여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내로 확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정작 이러한 위치 비정에 대한 구체적인 사초는 공개하지 않고 점제현 신사비나 부조예군도장등 일제시대 일본사학자들에 의해 발견한 유물을 수록하면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우리측 사초가 부족하다면 가장 근접한 중국측의 사초를 1차적인 검정방법으로 삼아야 하는게 상식인데 이점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진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오환선비동이전)을 통해 고구려,부여,동예,옥저등의 당시 정치,문화,사회,경제등을 설명하면서 굳이 부기된 강역도에 낙랑을 표기한 저의가 사뭇 이해가기 힘든 부분이다.(마치 진수의 삼국지에 낙랑이 한반도내에 설치되었다는 자연스러운 생각을 갖게 하는) 중국측 1차사료를 인용하면서도 결국 자의적인 해석으로 나아가는 점이 큰 의혹으로 남는다. 물론 지도상에 요서유역설(일부 재야 학자)이라는 명기라도 해놨다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학계 통설이 이러하니 이것이 정답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법률적으로 다수설이나 통설과 상반되게 소수설이 존재하지만 판례의 경우 통설만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통설이 전부다가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물론 법률적 논거와는 입장이 다를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통설 역시 솔직한 표현으로 제밥그릇의 크기를 제단하는데 더 크게 작용하고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한 문제는 이론의 여지가 상당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측의 주장을 다 수록하여 독자들의 판단여지를 남겨두었으면 더 좋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크게 남긴다. 

한사군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훌륭한 역사서임에는 틀림없다.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여 시각 자료의 다양화와 차별화 그리고 현재 제기되고 있는 백두산 화산과 발해 멸망의 연계성, 정치사 일변의 서술에서 사회/문화사 부분을 대폭적으로 강화한 부분등이 기존의 역사교양서와 차별화되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새롭게 다가갈 것으로 보인다.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여 좀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관형성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교양서의 한획을 긋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부모와 아동이 같이 읽으면서 토론해 보고 새로운 사실도 알아가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관심을 가질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향후 개정판 출간시 미비했던 부분에 대한 (한사군 설치 부분의 논거) 보충 내지는 별도의 학설을 보완한다면 보다 나은 정말 미래를 여는 한국사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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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세상을 바꾼 여인들
이덕일 지음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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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라는 영어 표현의 어원에서도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이야기 즉 역사는 남성들의 이야기를 남성들을 위해서 잘난 남성들이 기술한 시시콜콜하면서 멜랑꼬리하고 나름 의미있는 이야기들의 총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인류의 반인 여성들의 시각에선 땅따먹기와 온갖 추잡한 염문으로 뒤범덕된 본받아서는 아니될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특히 한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역사는 그야말로 시종일관 변함없이 남성들의 이야기로만 도배를 한 세계사에 유래없는 남성중심의 사회를 투영하고 있다. 여러가지 원인들이 상존하고 있지만 춘추시대 중원을 주유하면서 자리하나 얻어볼까라는 얄팍한 신념으로 괴상한 도를 설파했던 공자와 그의 사유를 지배이념으로 정착시킨 유방에게 힐난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만 뭐니 뭐니 해도 성리학을 지상최대의 과제로 받아들인 조선의 개국으로 인해 이 땅의 여성들의 이야기는 흔적도 없이 살아지게 된다.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절대불변의 교리는 조선시대의 여성 나아가 지금 현대의 여성에게 이르기 까지 아직도 그 두려운 상념의 흔적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러한 교조주의적 사관은 마치 세상은 남성 그것도 일부 사대부 남성으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삶자체에 대한 의미 부여가 불가했던 것이고 하물며 여성들의 삶은 여기서 논제하지 않더라도 뻔한 것이다. 

이러한 남성중심적인 시각과 사유확장은 후대인들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강요했고 이런 비뚤어진 사관은 남녀관계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덕일의 <세상을 바꾼 여인들>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서 남녀 불문하고 공히 심각한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특히 패배주의(다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에 빠져 있는 여성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우월감을 내세우는 남성들에겐 필히 일독을 권할 만한 역사평설이기도 하다. 저자의 기본 저술방침이 일반대중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방편으로 스토리텔링 기법을 이용한 흥미로운 진행으로 전문적인 역사적 지식이 없더라도 무난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즐비하다. 현액 최고의 고액권의 상징인 신사임당, 군주위에 군림한 천추태후, 나라를 창업한 소서노, 시대를 앞서간 소현세자빈 강씨등 한국사전반에 걸쳐 길이 기억될 여성들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그동안 왜곡된 시각으로 평가된 이들 여인들의 역사적 평가를 새롭게 한다는 면에서 그 의의가 클 것으로 보인다. 

새삼 지금와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여 역사적 평가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할 수 도 있지만 삶의 한쪽에 대한 부정확하고 왜곡된 정보는 나머지 한쪽의 삶을 피폐시키기 때문이다. 역사는 더 이상 남성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그리 되어서도 안된다. 새가 한쪽의 날개로는 창공을 날 수 없듯이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하고 인지하는 것 역시 올바른 양안의 렌즈가 필요한 것 처럼 그동안 평가절하되고 왜곡된 여성들의 삶을 제대로 잡아가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사관을 가지는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역사의 중심에는 하나가 아닌 둘이 이끌어 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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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 용인술의 대왕
장야신 지음, 박한나 옮김 / 휘닉스드림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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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간웅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저 버린 조조는 약방의 감초 같이 삼국지를 거론하면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조조없는 삼국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조조와 삼국지를 별개로 생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 깊은 곳에 자리잡은 조조는 과연 간웅이었을까? 어찌보면 조조는 한족중심의 중화사상과 유학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인물이다. 조조를 피눈물도 없고 간계로 뒷통수를 치는 파렴치한 인물로 묘사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조차 유심히 살펴보면 시쳇말로 유비나 손씨집안 역시 대의를 저버린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고 있지만 유독 조조에게 집중되는 이유는 너무나 뛰어난 영웅에 대한 일종의 시샘이나 질투심도 가세했겠지만 조조의 출신성분과 가계도(황관집안)에 유교적인 명분에 쉽게 수긍할 수 없는 점이 작용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왜곡된 관념들이 시대를 거쳐 확대재생산되면서 정설로 남게 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수의 삼국지보다 삼국지연의를 정사로 인식하는 과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나마 근래에 들어서 조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지면서 조조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에 대한 연구서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서적들이 조조의 일면목에만 집중되고 있다. 예를 들어 자기개발서적이나 경영전략서적등 조조의 경영이나 치세부분에 대한 집중조명으로 역사적 조조나 개인적인 조조에 대한 진면목을 알 수 없게 하는 폐단도 낳게 되었다. 이번 장야신의 책은 장쭤야오의 <조조평전>과 더불어 조조의 출생에서 패업달성 그리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평전형식을 취하면서 조조의 정치사상과 정신세계등 각론적인 요소들까지 망라하는 그야말로 조조에 관한 모든것을 서술하고 있는 몇 안되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으로 당시 시대상과 더불어 삼국지를 개괄하는데도 기여를 하고 있는 책으로 비록 상당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론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특히 조조에 대한 불편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겐 조조의 정확한 면모를 보게 하여주고 조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이들에겐 진정한 조조의 진면목을 보게 한다.

흔희 우리는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조조를 간괴와 그리고 의리도 없고 사람목숨을 파리 목숨 다루듯이 하는 일개의 모략꾼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타당한 면도 충분히 있다. 조조는 정적이나 적군들에게 그다지 관대하지 않았고 또한 과도할 정도로 무자비한 복수의 향연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에서 이러한 모습은 비일비재하였고 조조만의 전매특허로 낙인 찍기엔 어딘가 부족함이 있다. 실례로 여포를 참하는 과정에서 유비가 보여준 모습은 오히려 의리를 저버린 행동으로 더 비난 받을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조의 강점은 다름아닌 "절대"라는 개념의 상실 그 자체라고 해야겠다. 조조에게 절대라든지 불변이라는 개념은 자리잡고 있지 않을 정도로 조조는 임기응변의 대가였고 항상 열려있는 사고방식으로 일변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점이 조조 주위로 인재들이 몰려들게 하였고 그런 인재를 조조는 적극 활용했다. 자주 비견되지만 제갈량 사후 촉의 급격한 쇠퇴와는 달리 조조의 위는 철저한 인적 네트워크의 구성으로 인해 한 개인의 공백이 조직자체를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바로 이점이 조조의 치밀한 인적 구성원들의 조정능력이었던 것이다. 조조는 군사,경제,사회,문화등 여러방면에 걸쳐 다방면의 전문가를 육성하는 메트릭스구조체를 가동했다.

또한 조조는 건안문학이라는 중국문학의 한줄기를 뒷받침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악부시나 오언절구시등의 통해서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발굴의 기재를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고, 경제사로서의 경제정책(토지정책)에 남다른 기지를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군사적 지략가를 뛰어넘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돋보이는 역량을 발휘했다. 이는 조조가 정치가로서의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주희의 <통감강목>에서 조조를 희대의 간신, 찬역한 도적등으로 폄하하기 시작한 부분이 후대 나관중의 모티브가 되어 조조에 대한 이미지는 되돌리기 힘든 형국에 이르게 되었지만 거의 동시대 인물인 진수의 <삼국지>등에서 묘사되고 있는 조조는 천하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극과 극을 달리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조조가 이처럼 역사와 소설속에서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다는 자체가 바로 그 만큼의 애증과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조조는 간웅과 영웅이라는 양면을 다가지고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러한 면모를 한쪽면으로만 몰아가는것 역시 잘못된 인식일 것이다. 당시 난세의 형국에서 이러한 양면성을 보이지 않았던 인물은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지 못한 인물은 그야말로 역사의 저편으로 살아지는 그런 한치 앞도 못보는 시기에 한시대를 풍미했고 그리고 수천년이 흘러서까지 세인들의 하마평에 오르내릴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조조는 분명 영웅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조조가 유비나 손권에 비해 사실상 뛰어난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말은 액면가 그대로 보더라도 그나마 황실의 핏줄이라는 대의명분을 안고 있었던 유비나 강남지방에 대대로 정착하여 지역민심을 등에 업고 출발했던 손씨집안에 비교한다면 그 출생성분도 명확하지 않고 황관의 양자로 출발하는 조조는 시쳇말로 게임이 되지 않는 출발선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조조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제대로 그야말로 철저하게 자신으로 것으로 이용할줄 아는 냉철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계획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있었다는 점이 성공의 key였다. 특히 조조는 인적 네트워크에 대한 탁월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 인재의 등용에 있어 자질만을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결국 조조가 대업을 이루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손씨집안(손권)은 지역에 뿌리는 둔 향토기업의 형식으로 출발했고 유비의 경우는 의리 감정에 역점을 둔 가내수공업의 형태라면 조조의 가업은 철처하게 인맥이나 지연, 학연을 배제한 인적네트워크를 메트릭스구조로 활용한 초일류기업의 전략을 채택했던 것이고 이러한 경영방식이 폐업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단 하나의 삽화나 사진, 역사지도 한장 없이 1200페이지를 읽어 나간다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렇더라도 이번 조조의 일대기와 그 개인적인 성격,가계도등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조조를 만난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러한 고역은 독자들에게 그저 즐겁게만 다가올 것이다. 조조는 예나 지금이나 자의든 타의든 세인들의 한복판에 서 있고 우린 조조의 재조명을 통해서 진정한 시대의 영웅을 다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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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세기 - 20세기는 왜 피로 물들었는가
니얼 퍼거슨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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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과 안정적인 정치이데올로기의 산실인 민주정(아직도 일부에서는 진행중이고 체득하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을 바탕으로 물질적인 기준만으로 보면 풍요로운 21세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지금 21세기의 이러한 일련의 발전된 모습의 뿌리는 당연히 20세기의 산물임을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 1900년으로 시작된 지난 세기 20세기는 현재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시기이기도 하고 현재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근원적인 시대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정작 지난 20세기에 대한 명확한 자리매김을 하는데는 주저할 수 밖에 없는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통계수치와 외관적인 현상으로만 제단할 수 있는 20세기는 제2의 물결이라는 산업화의 물결과 제3의 물결로 불리우는 디지털혁명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역사상 가장 커다란 변혁을 가져온 세기이다. 그야말로 인류가 탄생하고 진화해온 지난 수십세기를 다 합친 변혁들을 들이대더라로 20세기의 변혁을 제단하기란 그리 녹녹치 않을 정도로 지난 20세기는 인류에게 있어 거대한 변곡점을 가져온 세기라는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럼 과연 이러한 일련의 표현들이 20세기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일까?  거의 전 대륙에 걸쳐 자행된 전쟁과 학살이라는 어두운면을 애써 외면한다면 맞는 표현들일 수도 있다. 

<증오의 세기>는 보통 사람들의 뇌리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의 해석을 거부한 새로운 20세기를 평가하고 있는 저서이다. 우선 책 제목부터가 짙은 회색빛을 감지하게 하는 [증오]라는 단어를 채택하면서 20세기 전반의 색깔을 미리 짐작하게 한다. 저자가 지난 20세기를 증오의 세기로 명명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인류간의 끔직스러운 학살이 난무했던 시기가 바로 우리에게 그토록 부의 폭발을 가졌왔고 거대한 패러다임의 기폭제였던 20세기에 발생했고 이러한 전쟁과 학살은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가장 공개적으로 뻔뻔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증오]라는 단어이외에는 달리 어떠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20세기를 단적으로 증오의 세기로 규정하고 있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크고 작은 충돌을 겪으면서 왔다. 씨족이나 부족체간의 전쟁과 학살 나아가 민족의 개념에서 근대국가라는 개념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학살은 지금도 진행중에 있다. 저자는 왜 이처럼 인류사와 전쟁은 수레바퀴처럼 함께 진행되어왔는데 전쟁과 학살이 유독 지난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모토로 그 상징성을 부여해야 할까라는 점에 의구심을 갖게된다. 로마제국에서 칭기스칸까지, 그리 멀리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삼국시대등 인간에게 전쟁은 역사를 퇴보시키기도 하고 발전의 촉매제 역활을 하면서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해왔던 것이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전쟁과 학살의 양상은 그동안 인류가 경험했던 전쟁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게 된다. 우선 지난 전쟁에 비하면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의 세계양차대전을 통해 8200만명이라는 인명이 사망을 했다는 점만으로도 그 인적피해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상 이러한 규모의 피해는 존재하지 않았을뿐더러 일부민족간의 충돌을 떠나서 세계대전으로 그 대상자가 늘어난 경우도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성을 띠고 있다는 측면에서 분명 지난 세월의 충돌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전쟁당사자인 군인들의 피해보다 민간인들의 피해가 더 컸다는 점 그리고 오히려 민간인의 피해를 조직적으로 조장하고 실행했다는 점에서 인류사를 통틀어 지난 20세기에 발생했던 전쟁들의 참혹성은 그 어떠한 세기보다 컸다는 점이다. 이는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살상무기의 집적화와 고도화로 인한 살상의 용이성이 증대한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몇가지의 숨겨진 원인이 있다는 것이 저자가 주목하는 바이다. 저자는 20세기 전쟁의 원인을 근대민족국가의 출현, 경제변동성(호황/위기), 호전적 종교간의 갈등, 인종/민족 대립, 제국의 쇠퇴에 주목하면서 각 원인별로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동기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생활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동원하여 전쟁의 조짐에서 확산에 이르기까지의 양상을 설명하고 있으며 경제적 변동성은 파시즘등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를 낳고 이는 곧 전쟁으로 이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20세기의 전쟁을 크게 두 부분으로 규명하고 있다. 저자의 표현를 빌리자면 50년 세계전쟁과 제3세계 전쟁으로 규명된다. 1904년부터 시작하여 한국전쟁으로 끝맺는 1953년까지를 50년 세계전쟁으로 그리고 이후 발생하는 국지전의 양상을 띤 전쟁들을 제3세계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세계2차대전의 발발시점을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시점은 극히 유럽적인 시각이고 실질적인 시점은 1937년 7월 7일 일본 중국을 침공했던 시점을 그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번 저서에는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의 비리, 케인스의 2차대전 발발 예측,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반지의 제왕]의 탄생배경등 읽을거리 또한 소소하게 보이고 있다. 특히 한반도와 관련하여 일본종군위안군과 징집병문제에 대해선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으나 제3자의 시각이 어떠한가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필요케 한다. 

<증오의 세기>는 최대 1억8000만명의 묵숨을 앗아간 지난 20세기 전쟁사를 다루고 있다. 유럽,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등 사망자 수 만큼이나 광범위 하게 지구 전 대륙에서 자행되었던 정규군을 포함한 비정규군과 민간인들이 자행하는 학살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으며 과연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정당했는가에 대한 냉철한 의견을 제시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판단케 한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억울하게 아니 왜 죽어가야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죽어간 이들의 주검을 발판으로 또 다른 세기를 맞이하여 살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겐 지난 세기 굴곡의 역사적 산물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혁명적인 산업화와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문명의 이기로 인해 인류 역사상 그 어느때 보다 많은 풍요로운 해택을 받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면엔 지난 세기 왜곡된 이데올로기와 비뚤어진 우생학이 낳은 전쟁과 인종학살로 인한 상처 역시 고스란히 들어 있다. 우리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20세기는 어쩌면 화려하고 눈부신 발전만을 기억하고 싶어하는 인자가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항상 전쟁과 학살로 인한 상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보다 빨리 잊어버리는게 바로 인간이라는 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류는 전쟁과 학살을 되풀이 하면서 진화해왔을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전쟁과 학살은 아마도 없어지지 않을 지도 모르는 등식과도 같은 존재로 남을지도 모르고 발달된 과학기술로 인해 그런 가능성이 갈수록 더 높아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들이 어쩌면 인류에게 새로운 해답을 제시할 수 도 있다는 역논리가 강하게 대두될 시점으로 보인다. 금세기에 다시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더 이상 인류에게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공감대와 더불어 이제는 전쟁과 학살의 기억들이 새로운 인류발전의 기폭제로서 상기되어야 하고 반성하면서 상호 모색의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분쟁으로 인한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어쩌면 20세기의 한축이었던 제3세계 전쟁의 연장선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겐 공존과 상생의 길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에 지금 이 시각에도 분쟁으로 인한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하지만 금번세기는 뭔가는 달라져야 한단는 절박한 시기에 와닿아 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수 도 없고 물러나서도 안되는 지점으로 가고 있다. 공존과 상생의 길은 상호 존중이라는 아주 작은 실천에서 시작하고 작은 실천이 모여서 증오의 시대를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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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말하다 2 - 이덕일 역사평설 조선 왕을 말하다 2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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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나 과거나 한 국가의 흥망성쇄를 절대적으로 좌지우지 하는 것은 대다수의 민중계층이나 일부 지배계층이 아니라 절대권력자의 정치적 역량과 인간적인 소양에서 발전이라는 방향으로 도약하느냐 늪의 구렁텅이로 빠지느냐를 결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서 그들의 의사결정은 결국 국시라는 형태로 포장되어 권력유지를 위한 일종의 방편으로 그리고 자신의 치세를 이끌어가는 나침반 역활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권력자에 대한 검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조선왕을 말하다>는 조선시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서있었던 군주들을 통해서 그들의 정치적 철학과 의지로 인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줌으로서 현재의 바로미터 역활을 하고 있다. 물론 왕이라는 군주 한사람만으로 평가하기엔 지배계층의 역활이 지배적이었던 시대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책임은 군주가 감당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 바로 절대권락자의 비애이기도 하다. 또한 시대적 순차에서 어긋나지만 9명의 군주을 통해서 조선사 전체를 개략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하고 있어 시대흐름 전체와 군주 개인에 대한 치세를 동시에 고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그동안 대한민국 사학계를 일맥상통하게 지배해왔던 거대한 사학권력에 대한 비판도 서슴치 않고 있고, 바로 노론식민사학계가 주류를 이루는 우리의 역사관에 반기를 들고 있다. 물론 저자의 반론는 정확한 사초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호기로 치부할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번 책에서는 크게 예종과 경종처럼 독살설에 휩싸인 임금과 조선시대를 통들어 가장 성공했다고 공인받은 세종과 정조, 그리고 인조 이후 삼종 혈맥의 시대를 연 효종,현종, 숙종을 조명했고 마지막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나라을 닫은 고종에 대한 담론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런 9명의 임금중에서 효종시대 북벌정책을 둘러싼 진실, 세종의 치세중 알려지지 않았던 세종의 또 다른 면모, 그리고 얼마전 공개되어 학계에서 독살설을 일축했다는 정조의 비밀어찰에 대한 재해석등이 저자 자신의 일관된 사관을 증빙사료를 통하여 일관되게 전개하고 있는 점이 눈에 돋보인다. 흔히 우암 송시열이 효종의 북벌정책을 지지했다는 노론사학계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낭설인지에 대한 논거와 대왕세종으로 만민의 아버지였던 세종이 한때는 백성을 괴롭히는 악법으로 회귀등으로 지탄받았다는 점과 한글창제에서 부터 한글변천사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정조의 화성신도시 건설의 내막등은 역사를 볼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본보기로 남는다. 

전편에서 연산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해석을 끌어내면서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왜곡된 사관과 평가들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었던 저자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장을 확대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역사평설(스토리텔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면서 대중들에게 역사에 관한 편견을 일소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옛날 옛적의 이야기라 아니라 현대를 투영할 수 있는 유일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대중화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정도로 그동안 노론식민사학계가 주류를 이룬 우리사학계에 자성의 목소리를 던져 주었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새롭게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했다. <조선왕을 말하다>는 기존의 사관과 상당하게 배치되는 부분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의 행간을 읽는 눈은 항상 자의적일 수 밖에 없지만 객관적인 사초자료나 당시의 정황을 추정하는 일은 객관적이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국가와 민족의 생타여탈권을 행사했던 군주에게 이러한 공명정대한 평가는 두말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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