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참모실록 - 시대의 표준을 제시한 8인의 킹메이커
박기현 지음, 권태균 사진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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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시대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원한다. 예를 들어 여말선초의 혁명의 시기와 왕권과 신권이 대립했던 조선초 상황이나 외침으로 인해 국가존립자체가 위협받던 시기에는 군주를 비롯하여 이를 보좌하면서 이끌어 갈 수 있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면서 개혁적인 인사가 필요한 법이다. 정도전, 하륜, 유성룡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속칭 난세라 일컫는 시기에 영웅이 나오듯이 바로 이러한 인물들이 난세를 헤쳐나가는 방식은 후대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고 대체로 이러한 인물들에 대한 관심과 평가에 후대인들의 관심이 쏠리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난세가 아닌 지극히 평탄한 시절의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를 상고해 보면 한왕조나 시대를 개혁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수성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참모실록>는 바로 난세의 개혁적인 참모들이 아닌 조선왕조의 수성에 이바지한 참모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업으로 비교한다면 초기 설립의 시대를 넘어 시장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단계의 전략과 전술등을 창조해 나가는 역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골육상잔의 권력암투를 벗어나 조선의 주춧돌을 놓는 단계였던 세종조의 맹사성, 훈구와 사림의 피할 수 없는 대결로 인한 반목의 시대의 이준경, 임진왜란이라는 국가붕괴 시대의 이원익과 이항복, 17세기 새로운 시대의 길목에서 새로운 정치를 역설한 김육과 최석정 등 후대에 잘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그 역활에 비해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한 참모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시대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융화력과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 넓은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난세나 개혁의 시대의 참모들은 정해진 한방향을 위해서 그 어떠한 타협도 불사하는 도전적인 성향이 강했다면 수성의 시대 참모들은 그 어떠한 반대의견도 수렴하면서 다양성과 민의를 융합하는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선조 이후 본격화 되는 당쟁의 갈림길에서도 이들에겐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의견제시에 지나지 않았기에 견제와 핍박속에서도 자신의 정치철학을 견지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군주의 태도만을 쫒아가는 권력지향적이라던가 이도 저도 분명하지 않는 우유부단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보신주의로 일괄했다는 비판마저도 받았지만 오히려 이들은 이런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상생의 원칙을 져버리지 않고 추진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상고해 보면 이들의 행위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수성의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들에게는 역사적 평가가 후하지 못하다. 잘해봐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성의 시대는 난세보다 쉽게 보이지만 오히려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군주를 보좌하는 참모의 역활은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인물보다는 융화와 포용력이 강한 인물이 적격임에는 역사적 사례를 비견해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킹메이커가 있으면 이를 유지보수하는 참모가 있어야 왕조의 기반이 반석위에 놓이기 되는 것이다. 이번 저서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8인의 인물들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부응해서 시의적절하게 수성한 참모들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참도들이 존재하였기에 조선이라는 국가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장수를 누리게 되었고 바로 이들이 그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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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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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여간 곤란하지 않다. 그저 흘러간 과거지사로 치부할 수 도 있지만 분명 우리는 역사에서 또 다른 현재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한편으로 미래에 대한 구상을 하게 된다. 역사는 지엽적으로 고찰하더라도 특정 민족공동체의 공통된 사유가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류사의 발자취를 엿 볼 수 있는 비록 흘러간 강물이지만 그 면면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살아있음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만큼 고리타분하고 현대와 동떨어진 개념의 분야도 드문것이 현실이다. 특히 고대사의 경우 신화적인 요소와 메타포들로 인해 역사와 신화사이를 넘나 들어야 하는 고역을 감내해야 하고 시간적으로 후대에 기록된 사서를 통해 당시를 상고함에 따라 다소의 왜곡이 첨가되는등 여러모로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역사 그중에서도 고대사이다. 하지만 이런 수고를 감내하고 역사를 접하게 되면 분명하게 그에 대한 댓가를 얻을 수 있는 분야가 바로 고대사일 수 도 있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가 바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만화로 서술된 역사서라고 해서 기존의 딱딱하고 주가 본문의 반정도를 차지하는 고상한 역사서에 비견해서 그 질적인 면이 결코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각적인 효과로 인해 독자들의 기억속에 오래토록 남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긴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도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세세한 깊이 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사적인 흐름을 개략적으로 정립하는 데 실로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권두에서 밝혔듯이 많은 부분중에서도 왜 하필 <한나라 이야기>인가라는 의문점이 생긴다. 진시황을 기점으로 유방과 항우로 대변되는 역사의 흐름은 익히 독자들로 하여금 줄줄 외울정도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아니겠는가? 물론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시기를 선택해서 한층 흥미를 자극할 수 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무엇보다 진나라에서 출발하는 중국 나아가 동양사는 서양의 로마제국과 일견 비교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냉정하게 고주알 미주알 따진다면 제국이라는 성립시기가 200년이상 앞서기 때문에 더욱더 이 시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만큼 진나라의 성립은 서양사에서 로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듯이 동양사적인 입장에서도 커다란 획을 긋는 대사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의미는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를 통합했다는 단순한 의미보다 진의 출현으로 <제국>이라는 프로파간다의 시대로 접어들어기에 제국, 황제가 갖는 의미가 큰 것이다. 봉건제에서 군현제라는 중앙집권체제로의 전환, 법가사상의 도입으로 효율적인 인적네트워크의 창출, 전문적 관료제의 도입으로 경영과 소유를 분리한 혁신적인 기법등 그동안 보여주었던 체제와는 한 차원 다른 면을 진시황은 세상에 보여주었다. 비단 미완의 성공이었지만 이후 한나라를 필두로 탄생하는 모든 국가체계가 진시황의 정책을 거의 100%수용하여 국가통치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진시황을 창조적 파괴자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대게 역사를 보게 되면 처음 시행하는 자는 알게모르게 욕을 먹게 되는 법이다. 이러면에서 진시황의 역사적 재평가는 중국내부에서도 설득력을 얻고 있고 다시 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이번 편에서 주목되는 점은 그동안 진시황과 이사 그리고 법가사상에 대한 편향된 사고들을 새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 졌다는 점에서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흔히들 분서갱유라는 희대의 사건은 후대에 두고 두고 진시황을 폭정과 잔인함의 화신으로 몰아가고 고착화 시켜 버렸다. 책을 불싸르고 유생들을 생매장했으니 그 얼마나 안하무인한 행동이겠는가? 하지만 정말 진시황이 이런 행동을 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러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후대에 평하는 분서갱유는 유가적인 입장에서 진시황과 법가사상을 폄하했던 내용들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분서갱제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유가학자들을 처형했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민중을 현혹시켰던 방술사들과 체제번복을 바랬던 불순분자들을 칭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또한 분서에서도 현실생활에 실용적인 의학,과학등의 서적을 제외한 국가이념에 반하는 책들을 사장시켰던 것이 마치 모든 서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표현은 과장되어도 그 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좌시할 수 없는 국가반역행위였고 이에 대한 처분은 어떠한 형태로 있어야했던 것이다. 오히려 후대에 가혹한 행위에 비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뿐이다. 단지 중국사의 최초의 황제이자 제국이었던 진의 프로파간다가 한나라이후 제국들과 대척점에 놓였던 관계로 본의아니게 왜곡과 폄하가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하나 진시황과 법가사상에 대한 오해는 역사서를 비롯한 다양한 문헌에 소개되는 진시황의 초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탐욕스럽게 비쳐진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경우 황제들의 흉상과 비교해보면 왠지 초라할 정도로 까지 표현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사상으로 알려진 법가라는 사상에도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진시황의 초상부터 새로 정립했다. 그 기본적인 메타포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카리스마와 분위기를 접목시켜 진정한 최초의 황제에 부합되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이런 이미지가 진시황의 실제적인 이미지에 더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제국을 창설한 진시황은 법가사상을 필두로 제국경영에 온힘을 바쳤다. 비단 다음자리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이 없었고 제국,황제라는 새로운 제도에 대한 운영의 미가 떨어졌지만 분명한 것은 진시황의 진을 시작으로 제국,황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대두되었고 2000년을 걸쳐 도도하게 중국땅을 흐르게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평가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황제의 관이나 의복 그리고 제사, 가옥의 형태등 고대 유적터에서 발굴된 유물들의 기초로 역사적으로 재구성하여 현장감 있는 장면을 연출해주고 있어 역사서라는 딱딱한 고정관념을 불식 시켰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게만 다가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와 차트의 끝부분에 사기의 열전이나 금석문의 내용들을 첨부하여 역사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삼국시대 조조와 유비까지 편찬 될 작가의 이번 시리즈는 중국고대사를 보다 쉽게 그러면서도 생각을 많이 하게끔 하는 훌륭한 기획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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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일본의 알몸을 훔쳐보다 1.2 세트 - 전2권
시미즈 이사오 지음, 한일비교문화연구센터 옮김 / 어문학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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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近代化;modernization)의 의미,특히 동양에서의 근대화의 의미는 좀 더 다른 뉘양스가 담겨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라는 높은 파고는 순식간에 유럽 전역을 휩쓸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쉼없이 퍼져 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근대화는 인류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사유의 다양성을 던져 주었지만 또 다른 이면엔 제국주의라는 치명적인 독소 역시 동시에 던져준 양면의 칼날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근대화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었던 동양에서는 강요와 강박으로 문호가 개방되면서 제국주의에 의해 도입된 근대화의 왜곡된 측면은 오랜기간 동안 그 중심을 잡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메이지 일본의 알몸을 훔쳐보다>는 바로 이렇게 서구열강에 의해 동북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 일본의 시대상을 서구인의 눈으로 그려낸 화보집이다. 좀 더 엄밀하게 보자면 풍속화첩이라고 해야 할까. 철도,근대적인 병사들의 모습, 게이샤와 창부 그리고 하녀들의 모습, 일본인들의 풍습, 각종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펜으로 스케치하여 당시 메이지유신 시대의 살아있는 현장감을 보여주는 일본에서도 보기드문 장면들이 많을 정도로 그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작가인 프랑스인 조르주 비고는 직접 일본인과 결혼까지 하여 일본에 대한 애착이 컸던 인물로 대게 서구열강의 신민이라는 우월적인 가치관에서 미개한 동양인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을 가진 보통의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 그가 바라 보았던 일본에 대한 시각이 좀더 객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태생적 한계를 모두다 극복했다고 할 수 는 없으나 일본이라는 거대한 국가차원의 껍데기를 관찰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세세한 부분을 촛점에 맞춤으로서 생동감 있고 현실성 있는 일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계층이나 직업에 지엽성(군인,게이샤,창부,하녀등)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시각으로 판단하면 오히려 신분계층상의 최하층의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진귀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근대화의 가장 큰 특징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강력한 힘 그리고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이다. 대게 이를 반영하는 것이 철도라는 동양인들에게는 난생처음 접하는 바퀴 달린 괴물같은 동체였고 제복을 멋찌게 입고 총칼로 무장한 신식군대에서 강력한 근대화를 느끼게 된다. 최초로 개통된 <도쿄-고베>간 철도와 객실의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 근대화를 상징하는 의상과 그 의상과 어울리지 않지만 근대화를 온몸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상부층의 인물들과 아직까지도 근대화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는 일반인과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근대화 추종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군대입대를 위한 예비소집 광경을 묘사한 그림에서 우리는 신분적인 파괴를 볼 수 있다.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근대화의 시발점은 다름 아닌 강력한 근대화의 군대 구성이었다. 그동안 사무라이라는 특정계층에 의해 유지되었던 군이라는 개념이 하층민에게도 개방되면서 일종의 신분상승의 창구역활을 하였고 결국 이는 비뚤어진 제국주의 학습효과를 가져오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렇듯 근대화를 대표하는 철도와 군대는 일본을 빠른시간내에 근대화로 이끌어 갔지만 한편으로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운명을 바꾼 역활을 하게 된다

근대화가 가져온 결과가 다 좋을 수 만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례가 게이샤와 창부들 그리고 하녀들이라는 최하층의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들의 삶은 사실상 막부시대가 종식되고 근대화를 상징하는 메이지유신이 개창 되었다고 해서 변하는게 별로 없었다. 오히려 굴절된 근대화라는 공간속에서 더욱더 개개인의 인간적인 가치보다 상품화되고 타자화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물론 그중에서 힘있는 서양인의 눈에 띄여 정부로 신분 상승한 게이샤도 있었지만 대게의 경우는 근대화라는 물결속에서 몸에 대한 금전적인 가치로 환원된 삶을 살아야 했다는 점이 이들 하층민들의 현실이었다.

당시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들에게 유행했던 것은 안경과 자전거였다고 한다. 특히 안경은 검은색을 더 선호했고 그래서 남녀노소를가리지 않고 안경을 쓰고 다니는 대유행이 이었던 것 같다. 또한 자전거 역시 처음엔 고가였던 것이 보급화되면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 되었다. 우편배달에서 부터 유용하게 그리고 공적인 개념을 사용되던 자전거가 급기야 게이샤들의 오락거리로까지 파급 되면서 근대화는 계층의 차별을 뛰어넘는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일본인들에게 전해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비고에게 한편으로 신나는 풍속화 재료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고의 눈에 비친 평범한 일본인들의 모습은 때론 많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특히 남녀혼욕은 그야말로 신비한 재료감이었고 비고의 손을 쉴사이 없이 바쁘게 했던 것 같다. 비고는 교사,외교관,병사,사진사,누드모델,외국인가정의 메이드,건널목 여자철도원,근대식 레스토랑의 여종업원, 간호사등 다양한 직종에서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스케치하여 당시 근대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인물들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준다. 한편으로 비고는 근대화와는 동떨어져 있는 순박하면서 전통적인 일본의 모습을 간직한 어촌의 여자들과 막 시작된 근대화를 쫓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일반인들의 어울리지 않는 근대화 과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특히 후반부에 그려져 있는 이 시대의 다양한 불평등조약체결과 그에 대한 평가 그리고 사상의 변화로 인한 지식인들의 혼란속에서 비고는 어쩌면 강요된 근대화의 어두운 면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근대화라는 시대적 대세를 뒤쳐지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사람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과연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번 책은 그동안 가해자로만 각인 되었던 일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들 역시 크게 근대화의 피해자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우리와 일본의 독특한 관계를 걷어내고 철저하게 근대화의 과정과 근대화 시대를 맞이 하여 살아가는 운명에 놓인 일반인들의 모습에서 사뭇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토대로 근대화를 받아 들였고 자체적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받아 들인 근대화의 장단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불행한 과오를 범하게 되면서 동북 아시아에서 근대화라는 단어를 그다지 유쾌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장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많은 단어로 이루어진 글보다 이렇게 단장의 시각적인 표출물이 주는 효과가 어쩌면 더 사람들의 머리속에 오래토록 각인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근대화가 어떻고 그로 인한 파급효과가 어떠했다는 말보다 비고의 삽화가 보여주는 상징성과 진실성이오히려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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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6 로마제국쇠망사 6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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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신이 그렇게 원하신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신의 뜻이오 십자가는 그대들을 구원하는 상징일지니 붉은 핏빛 십자가를 철회할 수 없는 신성한 계약의 증표로 그대들의 어깨나 가슴에 걸도록 하라"로 촉발된 십자군 전쟁은 그마나 제국의 버팀목 역활을 했던 약간의 다양성 표출에 직격탄을 날리고 하느님의 휴전이 확인될 때 까지 유럽과 중동인근을 대 혼란의 시대로 몰아가게 된다. 물론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역사라는 수레바퀴는 변함 없이 굴러갔지만 이 전쟁이 가져온 댓가 역시 수레바퀴의 동력만큼이나 값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했다.

기번은 십자군 전쟁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평가한다. 그것은 "야만적인 광신의 표출" 이다. 원래 성전(聖戰:holy war)이라는 의미는 평화시대의 군주을 섬기는 자들이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불가피하게 정당한 싸움에 나서는 경우가 아니라면, 파괴의 칼을 뽑은 명분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다고 본 기번은 십자군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 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가 속세의 영역속으로 들어오면서 급기야 속세와 종교의 통상적인 잣대를 단하나 종교의 잣대로 저울질 하면서 벌어진 참흑이었다. 결국 십자군원정의 구성원들은 빚이나 이자, 명예훼손죄, 세속의 처벌 면제등 속죄에 대한 댓가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를 독려받게 되고 이러한 모든 속세의 죄들이 성전이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면죄부를 받다 보니 결국 전쟁의 결과는 불을 보듯 명확약관해 지는 것이다. 이는 비잔티움 함락 후 발생했던 마호메트 2세 군대의 약탈행위 보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약탈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음을 전쟁으로 인한 약탈은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를 매우 작게 만든다라는 기술로 그 씁쓸한 뒤맛을 느끼게 한다. 그만큼 십자군 전쟁은 광신으로 둘러싸인 일부 지도층의 광기와 더 이상 삶의 존재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 민중의 분풀이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실패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정작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장악했지만 로마시민들 대다수에게 로마 교황청의 이름과 권위는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만큼 현실적인 괴리가 존재하였고 물론 이는 현세적인 괴리만큼이나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평민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그리스도를 거부했듯이 로마인들이 화려하고 거만한 현세적 지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대리인(교황)을 몰라본 것처럼 말이다.이러한 괴리감은 결국 교황의 선출과정을 바꾸는 계기로 이어진다. 기존에 성직자와 민중의 투표로 추대되던 방식에서 1179년 알렉산데르3세와 1274년 그레고리우스 10세에 이르러 추기경으로 만 구성된 협의체(콘클라베) 탄생하면서 성 베드로의 제자들은 민중과 결별을 선언하게 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그 정체성에 대한 확신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기번은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마무리 하면서 1430년 포기우스라는 인물이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올라 황폐해진 로마시 전역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회로 자신의 대작을 마무리 한다. 아이네이아스와 로물로스의 건국으로 시작된 로마가 공화정과 제정을 거치면서 해가 지지 않는 세계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정작 지금 포기우스의 눈앞에 서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패허나 다름없는 쇠잔한 정경으로만 다가온 이유를 기번은 티투스의 원형경기장으로 잘알려진 콜로세움의 붕괴 과정을 네가지 이유를 상정하여 설명하고 있다. 

 1) 시간과 자연에 의한 훼손
 2) 야만족과 그리스도교도들의 적대적 침략
 3) 건물 자재들의 도용과 남용
 4) 로마내부의 분쟁 

기번은 특히 위의 4가지 요인중 두번째와 네번째 요인에 주목하고 있다. 야만족으로 대변되는 알라리크와 가이세리크의 병사들이 승전의 열정에 취하여 무분별한 탐욕과 잔학함을 휘두르긴 했지만 그들이 주 목적은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귀중품이었지 집정관들과 황제들이 남긴 기념비들을 철저히 파괴하는 무익한 행동은 아니였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눈에는 악마의 조각상이나 제단, 신전들은 모두 증오의 대상이었고 로마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선조들의 우상 숭배 흔적을 없애기 위해 열과 성을 다 바쳤고, 다만 신앙의 논쟁거리에서 살짝 비켜간 공공건물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그만큼 다양성에 대한 포용이 현격히 살아지면서 세상을 이분법적인 잣대로만 생각한 후대인들의 로마계승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대략 4천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과 본문에 맞먹는 주석으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일반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고리타분한 고전으로 인식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기에 상당한 인내와 고통을 수반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여기에 로마제국의 번성기를 다루는 내용도 아닌 쇠망기를 다루다 보니 역사적 인용자료가 방대하다 못해 기번 자신 역시 긴가민가하는 주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다소 산만한 내용들과 중복되는 내용들이 상당부분 차지 하고 있는 것 역시 가독성을 저해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기번이 살았던 팍스 브리타아니아시대나 지금의 팍스 아메리카나시대에서도 로마라는 대제국에서 멀어져서 사유할 수 없는 이유를 기번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로마는 그리스도교라는 암적인 존재(물론 이 표현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해석한 말이다)가 출현하기 전까지 그야말로 해가 질 수 없는 대 제국이었다. 도시국가에서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다름 아닌 문화와 종교를 비롯한 각종 사회제도 심지어 인종적인 편견에서 까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받아들인 다양성과 포용력에 그 근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사회를 잠식하면서 로마는 두 가지의 원동력을 상실한 채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가치관으로 점철되면서 결국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로마는 서양역사와 문화 그리고 제도등에서 지금도 서양 대부분의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다만 로마死後 등장한 열강들이 진정한 포스터로마가 되지 못한 것은 로마의 진정한 정신인 다양성의 포용을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포스터로마를 자처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국가들에게 로마의 흥망성쇠는 역사속의 지는 노을이 아닌 현실속에서 엄연히 살아 숨쉬고 있는 교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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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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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한쪽눈으로 봐서는 절대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파하는데 일등공신역활을 한 이덕일 선생의 새로운 역사평설 <조선 왕을 말하다>가 출간되었다. 조선 27명의 군주중 태종,세조,성종,연산군,선조,광해군,인조,영조 8명의 군주를 각각 4가지 테마로 묶어 군주 자신들의 삶과 치세를 살펴보면서 후대에 많은 부분 왜곡되었던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던져주고 있다. 물론 이번 저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저자는 정사인 조선왕조실록과 그외의 역사적 사초를 근간으로 역사책은 글자를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앞뒤의 정황과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적 시각은 바로 이러한 역사서를 있는 그대로의 문자로만 앞뒤의 시대적 배경이나 정치적 배경을 싹둑 걷어낸 골자만으로 인식되길 강요 받아 오다보니 사실상의 역사적 진실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그야말로 자신의 역사관이 아닌 주입되고 강요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측면에서 이번 저작 역시 새롭게 조선의 군주들을 만나 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역사는 과거학이 아닌 미래학이라는 측면에서 과거사의 올바른 인식 부족이 가져오는 정치의 파탄(이는 절대군주국가였던 조선의 경우 그 패해가 더 했음은 두말할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과 그로 인한 소용돌이가 군주를 비롯한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고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함을 넘어선 필연적인 선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지난날 조선에서 제왕학에 춘추나 자치통감등의 역사서가 필수과목이었던 이유 역시 과거의 사례를 반면교사삼아 현재를 상고하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었기에 꾸준히 역사에 대한 관심과 성찰이 이었던 것이다, 비단 이러한 과정과 교육을 받고 보위에 올라서도 올바른 치세가 쉽지 않았던것이 바로 왕이라는 지존의 자리였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는 위정자들의 역사관과 그로 인해 파생되고 전파되어지는 담론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번 저서에서 주목해야할 군주는 다름 아닌 희대의 폐륜 군주로 각인된 연산군에 대한 평가이다. 그동안 TV사극이나 역사물 그리고 픽션등을 통해서 우리에게 연산군은 폭군이라는 두 글자로 대변되었고 절대군주시대에 상상하기 조차 힘든 신하들의 반정으로 보위에서 쫒겨나 죽임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정당한 정치적 흐름이었다고 배워 왔고 그리고 믿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흥청망청의 원조격으로 폐위되는 그 순간까지도 장녹수의 치마폭에서 해쳐나오지 못한 색마, 자신의 향락을 위해 민초들의 삶을 처절하게 짓밟은 폭군 그리고 선왕의 후궁들까지 스스럼 없이 살해한 살인마의 이미지로 연산군일기는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실록을 바탕으로 전파된 야사는 연산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함으로서 군주폐위에 대한 정당성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과 그리고 실록을 세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연산군의 이미지에 대해서 의구점이 발견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연산군 이외에 또 다른 반정의 대상이었던 광해군은 끝까지 천수를 누린 반면 연산군은 폐위와 동시에 목숨까지 요구했던 것은 반정에 대한 정당성에 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점은 반정세력이 작성한 연산군일기에서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전부다 세탁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찌보면 연산군의 비극의 원인은 세조의 찬시(왕위 찬탈과 단종의 죽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태종이 모든 악역을 자처하고 반석위에 올려놓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헌정질서를 송두리채 꺽어버린 세조의 등극과 그에 빌붙은 훈구공신들의 역사적 퇴행이 가져온 비극이었던 것이다. 이미 조선은 군왕의 나라가 아니였음을 연산군은 인지하지 못하였고 그나마 자신의 편인 사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사화라는 훈구대신이 파놓은 덫에 걸려서 몰락하게 된 것이지 그동안 왜곡된 연산군의 비행에 그 원인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시쳇말로 태종만큼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연산군은 그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했던 차이가 폐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성종의 요절과 연산군의 폐위로 조선은 신하들의 나라 정확히 문신들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결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치명적인 우를 범하면서 민중들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그들만의 국가로만 존재했던 것이다. 비단 소현세자나 이후에 정조라는 불세출의 개혁군주가 탄생했지만 이들 역시 신하의 나라에선 필요치 않는 눈에 가시였고 결국 그들의 뜻대로 제거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태에 가장 근본적인 책임은 군주자신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끔 강요했다고 볼 수 도 있지만 결국 위정자의 잘못된 역사관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금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거울을 처다보듯이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번 저서를 통해서 다시금 그동안 알아 왔고 자연스럽게 인지 되었던 조선왕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치세 및 역사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역사는 과거학이 아니라 미래학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역사는 이를 보는 관점에서 正인 것이 反이 되고 反인 것이 正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냉철하게 살펴봐야 하는 것이고, 새가 한쪽 개로 날 수 없듯이 역사 인식이야말로 왼쪽 오른쪽을 모두 다 정확하게 살펴봐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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