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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교감 완역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국보 76호 난중일기(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공의 일기를 제대로 읽어 본 사람 역시 의외로 많지 않다. 公께서 초서체로 흘려 기록하는 바람에 오역도 많고 초고본, 전서본, 일기초 등 사료의 정비불비로 인해 많은 번역본이 두서 없이 출간되어 정확한 난중일기의 묘미를 느낄 수 없었다는 점도 있다. 특히 1595년 일기인 을미일기가 빠져있었던 관계로 일기전체에 대한 맥락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구국의 성웅으로 충앙하고 있지만 정작 공이 직접 남긴 일기 (어쩌면 실록이나 기타 기록보다 더 진솔하고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에 대한 후대인들의 완역에 대한 노력은 그리 깊어 보이질 않았다. 이번 노승석교수의 난중일기는 그동안 산재되었던 초고본과 전서본 그리고 기존에 빠져있었던 누락부분의 일기초을 통합하여 교감한 난중일기의 완역본이라데 그 의의가 있다. 특히 을미일기를 추록하여 완벽한 충무공의 난중일기가 재탄생하게 되어 무엇보다 기쁨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다이묘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왜는 명을 타도한다는 명분하에 1592년 4월 현해탄을 건너 부산 앞바다에 도달하고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한다. 이를 역사는 임진왜란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조선개국이후 200여년간 그야말로 평온한 시절를 보낸 조선으로서는 한마디로 아닌밤에 홍두깨였지만 왜는 철저한 준비끝에 감행했던 도발이었기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군왕이라는 자가 솔선수범하여 몽진하는 형국에서 신하들의 비겁함을 탓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토록 만반의 준비를 했던 왜의 전략중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전라좌수영의 수장 이순신을 간과했다는 것이고 이는 곧바로 옥포해전에서 부터 시작하여 칠전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까지 자그만치 5년간에 19차례 해전에서 전패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국 왜의 전략은 바다의 神인 이순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처음부터 새롭게 맞추어야 했고 결국 명의 참전을 불러오게 되면서 7년이라는 기나긴 원정을 하게 되면서 명분도 없고 성과도 없는 소모전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이러한 결과는 이후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커다란 반향을 가져오게 된다.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선조신록(수정실록포함), 유성룡의 징비록,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에 나와 있지만 그 내용이 그리 자세하지도 않고 전반적으로 전쟁을 통찰하는데 부족한 면이 있다. 실록은 정사라는 측면에서 특히 문신들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으로 전장의 치열한 기록을 알 수 없는 한계가 있고 징비록의 경우도 후방에서 겪고 보고 들었던 기록물이고 어우야담(유몽인의 경우 난중일기에 그의 암행어사로서의 허위보고와 편협한 사고의 대한 비판이 나옴)의 경우 그야말로 야담형식으로 민간의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런면에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임진년에서 부터 노량해전으로 戰死하기 이틀전인 무술년(1598년 11월 16일)까지 7년간의 방대한 기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대한 양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이 전쟁의 최일선에서 겪었던 생동감 있는 현장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전란을 통찰하는데 어떠한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승리한 해전을 거의 모두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전란중에 벌어졌던 행주대첩, 진주대첩등 다양한 육전에 대한 정보와 장수와 문신들의 활약상 그리고 그들의 치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또한 공의 일기에는 판옥선을 비롯한 전선의 제작과정과 둔전(병사가 직접 경작을 하여 군량미를 조달하는 방식)그리고 거북선과 정철총통을 비롯한 신무기의 개발과 개량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남겨져 있어 군수품관리와 전선보급 관리등에서 공만의 주도면밀함을 확인할 수 있다. 제하는 비록 일기라고 하지만 그야말로 7년전쟁을 세밀하게 다룬 전쟁사라고 해야 할 정도 전투전략, 적 정세파악, 국가의 전략, 인재의 배치 및 활용, 정규군과 의병의 활동등에서 카이사르의 내전기나 갈리아전쟁기보다 뛰어난 면을 보여주고 있는 기록물이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전쟁사로만 팍아해서는 그 의미를 십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난중일기에는 공 자신의 사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일기라는 자체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기록 하듯이 난중일기에는 공의 솔직담백한 내용들을 포함한 공의 모든것이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어느 누구라도 감추고 싶어하는 남녀간의 정사문제도 기록하므로서 정말 자신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그동안 원균과의 불화는 모두 인지하고 있지만 권율, 당시 암행어사로 파견된 유몽인, 윤두수, 윤근수, 이억기(전라우수사),기효근(남해현령),이일등의 인물평은 당시 조선군 전체의 분위기를 보는듯 해서 마음이 착찹해 질 뿐이다. 또한 일기를 통해서 본 공의 성격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자신의 오른팔 격이었던 순천부사(권준)과 사도첨사(김완),전라우수사(이억기)가 기한내에 작전지역에 도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냉정한 징계와 모함으로 백의종군하는 과정에서 백성이 준 음식을 받아온 종에 대한 질책에서 공과 사에 대한 확고 부동한 태도를 엿 볼 수 있다. 임진년 사천해전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은 이후 계속되는 신병와중에도 대필한 공문서의 글자모양이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처리하는 과정를 보면 공의 꼼꼼한 면을 확인할 수 있다. 부안의 첩과 동침한 여종에 대한 기록에서는 자신의 허울도 감추지 않는 솔직함을 볼 수 있다. 특히 원균을 비롯한 부하장수들의 술주정에 대한 힐책이 많이 보이는 점은 정신과 자세의 올바름을 강조하는 공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충무공의 전반적인 성격은 쉬이 범인들이 접근하기엔 상당히 어려운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례이다.
하지만 공의 이러한 성격이 오히려 관리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대변하고 있다. 진중에서 일반백성들과 병사들에 대한 배려는 장수로서 그리고 목민관으로서의 부족함이 한치도 없어 보인다. 최하층계층인 노비들의 이름과 승병들의 이름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이름 하나하나까지 거론하면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아픔을 자신의 아픔같이 감싸주는 모습에서는 그저 공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이다. 선조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이에 편승한 원균과 서인들의 중상모략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백의종군하고 모친의 죽음과 아들 면의 전사등 그야말로 안팍으로 괴로운 시기였지만 공은 일기가 끝나고 자신이 전사하는 노량해전까지도 단 한번도 임금에 대한 원망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듯이 정유년 9월의 일기에 송사 이강과 이약수전을 인용하면서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 주어 읽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비단 선조는 자신을 라이벌로 생각했더라도 신하인 공은 단 한번도 선조에 대한 충념을 버리지 않고 일기에 기록했듯이 목숨으로 섬김을 다했던 것이다.
이렇듯 난중일기는 전란의 진행상황과 전투의 결과, 전략의 수립, 신무기 개발, 유성룡을 비롯한 중앙관직 인사들의 언행과 행보 권율,원균,곽재우,이일,이억기등 최전방일선에서 활동한 장수들의 활약상, 목년,갓동,철매,한경,돌쇠,해돌,금이, 중 해당등 이름 없는 민초들의 이름, 가장(개고기),사슴고기,연포탕,동아등 당시 애용했던 음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백과사전 같은 방대하면서도 다양하고 그러면서도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기록들을 담고 있는 개인의 일기이자 전쟁사이며 하나의 문화사이기도 한 소중한 유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후대에 5.16쿠테타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충무공을 신격화 하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난중일기만을 놓고 보더라도 공의 위대함은 이런 비판을 잠재우고도 남는다. 우리는 난중일기에서 공의 성웅적인 기질을 보는 것 보다 공역시 일개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은 희노애락을 갖고 살아갔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올바른 난중일기의 접근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새로게 보완되고 첨부되어 완역된 난중일기를 통해서 공의 진중에서의 일상과 목민관으로서 자세, 자식으로서 효, 부모로의서의 자애, 목숨을 건 전장에서 전우애 그리고 나아가 국가에 대한 충념을 다시한번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는 지금처럼 가치관의 아노미상태에 접어든 시대에 충무공이 던져주는 삶의 화두일 것이다.
安國家定社稷, 盡忠竭力, 死生以之(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자신이 기록한 일기의 이 말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도 충무공에게는 국가와 백성이 최우선의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