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삼국지 - 위서 1
진수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라는 작품은 아시아 그중에서도 동북아시아에서는 서구 그리스도문화권의 베스트셀러인 성경만큼이나 대중독자들에게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랑받아온 보기 드문 작품이다. 나관중 스스로가 칠실삼허라고 밝혔고 대부분의 독자층에게서 <삼국지연의>를 역사서로 인식하지 않고 있지만, 小說로서의 삼국지와 正史로서의 삼국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는 마치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서 성경과 역사적 사초로서의 성경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신주의자들과 다를바가 없을 정도로 소설과 정사인 역사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드는 몇몇의 아쉬운 장면들로 인해 오히려 소설을 역사로 믿고 싶어함일 것이다. 이 역시 경전을 역사로 믿고 싶어하는 맹목적인 믿음이나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엄연히 소설과 역사는 다른 것이고 우리가 소설속에서 예술적인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듯이 역사속에서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느낄수 있는 것이다. 

<삼국지>는 삼국시대를 마감하고 사마氏에 의해 불안정한 통일을 이룬 시점에서 촉나라 출신의 진수에 의해 완성되었다. 역시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기전체의 형식을 근간으로 위서,촉서,오서를 편찬했으나 사기처럼 테마를 형성한 열전이 아닌 인물들의 전을 나열식을 기술했다는 점에서 사기에 비해 그 깊은 다소 떨어지는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역사서로서 그 가치는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의 주축은 촉이자 촉의 창건자인 유비 그리고 그를 보필했던 제갈량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진수는 삼국의 정통을 조조의 위나라로 판단했다. 진수가 위를 정통으로 판단했던 것은 천하삼분지계는 위를 중심으로 그 역활을 해갔다는 점, 단적으로 강역을 비교해도 거의 2/3을 위가 통치했다는 점에서 촉이나 오를 번국으로 생각했다. 비단 자신이 촉출신이었지만 사관으로서 촉을 정통으로 보는 것은 불합리했다는 점에서 진수의 사관은 객관성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진수는 위서에서만 황제의 치세를 다루는 紀를 채택하여 조조를 비롯한 그 후예들을 황제로 인정했다.  

무엇보다 삼국지연의로 인해 가장 큰 피해자였던 조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소설과는 천양지차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영향으로 그동안 조조는 간웅에 가까운 평가가 독자들의 뇌리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지만 정사속의 조조는 난세을 극복한 유일한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러한 평가는 조조 주변에 모여든 인물들의 질이나 양에서부터 촉의 유비나 오의 손권과는 사실상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조조의 인적 경영은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장수를 받아들여 공을 세우게 하는 인용술은 조조가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비범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조의 이러한 인용술의 근간은 公과 私에 대한 엄격한 구분을 두어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자제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조조의 가장 큰 장점은 참모들의 진언을 들을 수 있는 열려있는 통치술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바로 사과하고 시정하여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철저한 자기관리에 있다는 점이 유비나 손권에 비해 뛰어난 재사와 장수들이 앞다투어 조조를 찾게 했던 비결이었다. 유비의 촉이나 손권의 오는 혈연과 지연등의 인맥구성의 사적인 시스템이 강했던 반면 조조는 철저한 인적시스템 관리를 기반으로한 네트워크를 확립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 오히려 위가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촉이나 오를 국경안에 기반을 두고 경영하는 국지적 기업에 비유한다면 조조의 위는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력과 인적자원을 확보한 다국적 기업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조조의 경영철학 1순위는 인재확보와 인재들의 적절한 이용이었다. 군주를 보좌했던 대표적으로 뛰어난 참모를 흔히 제갈량을 사례로 들지만 사실 촉에는 제갈량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참모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조조에게는 순욱,순유,가후,종요,화흠,왕량,정욱,곽가,동소등 그 수를 헤아릴 수 도 없이 많이 존재하였고 제각각만의 특유한 보좌를 했던 것이 위나라의 숨겨진 힘의 근간이었던 것이다. 둔전제를 입안하고 활성화하여 국가 살림을 확장했던 원환과 국연, 지금도 사형제 존폐를 두고 설왕설래하듯이 당시 사형제의 확대와 축소를 두고 쟁쟁한 설전을 벌였던 종요와 화흠등 조조에겐 이런 인적 네트워크가 확립된 인재풀이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魏는 이렇게 조조라는 군주와 지연이나 혈연적으로 무관한 외부 인적자원과 하후돈과 조인등을 대변되는 내부적 인적자원의 상충되는 시스템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조조를 중심으로 빈틈없이 돌아갔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가능토록 한 것은 조조만의 인용술과 경영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진수의 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조조는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었던 것이다. 조조는 66세인 220년 임종할 때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고대의 규정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 없다. 매장이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고 자신의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라" 라는 말을 유지로 남길 정도로 공과 사에 대한 구분을 철저하게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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