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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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의 저자인 혜경궁 홍씨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군주로서 개혁정치를 단행했던 정조의 생모이자 조선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운의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의 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아니 조선후기 구중궁궐의 삶과 외부와 차단된 채 정치권력의 한 복판에서 한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 여인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하는 역사적, 문학적으로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문헌자료의 저자로 더 유명할 것이다. 1980년대 국사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특히 한중록의 의미는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으로써 임오화변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더불어 사도세자라는 인물의 성정과 왜 그런 사단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상세하게 그것도 가슴 애절하게 들려주고 있어 읽은 이들로 하여금 애잔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혜경궁이 묘사하고 있는 사도세자는 정신분열증과 중증의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는 광인으로 묘사되고 있고 이러한 자신의 정신병적 성정과 영조의 엄함 부정의 충돌이 결국 임오년의 변으로 진행되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고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렇게 믿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국정 교과서인 국사와 국어과목을 통해서 교육 받았고 그 진위성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세대가 바로 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내 이들의 공통된 역사관이기도 하다.

 

그러면 과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의 내용은 진실일까? 정말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이 정신병이나 엄한 부정등 개인적인 원인에 의한 것일까? 그리고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과 관련해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 정상적(상식적)인 사유의 방법론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구심마저 가질 수 없는 교육체제를 겪다 보니 사도세자==광인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역사적 진실을 새롭게 조명하고 혜경궁 홍씨의 작품인 한중록의 이면에 감춰진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을 밝힌다 있다. 첫 출간 당시 많은 반향을 일으켰지만 강단사학계의 터무니 없는 공격과 학계권력을 이용한 파상공세등으로 오히려 역사왜곡을 단행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역사학자도 아닌 서울대 정병설 교수의 비판은 전입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사실상 독자들로 하여금 의혹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개정판으로 이번에 출간된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통해 저자는 정병설 교수가 제기한 점에 대해서 조목 조목 역사적 문헌를 들어 반박함으로써 노론식민사관를 신앙처럼 받들고 있는 강단사학계의 현 주소를 만천하에 들어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그동안 배워왔고 그렇게 달달 외어왔던 한중록은 정병설 교수 자신의 말처럼 사실에 기초한 역사서라고 할 수 도 없고, 허구의 수준은 거의 소설에 가깝고 그 소설적 논리는 소설이 되기에도 터무니 없는 그런 그런 작품이다는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해서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기 합리화의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극히 개인적인 소견을 피력한 작품(그것도 앞뒤의 논리가 서로 상충되고 맞지 않는)이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공식적인 역사기록서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보다 우선시 평가되어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일부의 공식적인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개인 기록의 중요성과 신뢰성을 인정할 수 도 있겠지만 조선시대는 오히려 지금 우리의 역사기록보다 더 처절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무리 당파가 달라 역사적 판단 견해가 달라도 조선시대에는 기록 전체를 말살하지 않고 수정실록이라는 형태로 반대당파에 맞선 논리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집권층인 노론이 직접 편찬한 영조실록의 기록들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한중록이라는 잣대로 역사를 판단하고 있다는 자체가 넌세스이자 코메디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 몸담고 있는 교수라는 작자의 역사관이 이렇다고 하니 그 대학을 다녀본적이 없는 이들에겐 더 말하면 입만 아플것이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는 사도세자의 죽음의 진실을 숙종시대부터 고찰하여 경종독살과 영조의 치세 그리고 정조의 치세에 이르기 까지 조선후기 기울어 가는 왕권의 실상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택군을 떠나서 살군에 이르는 그야말로 왕조국가라고는 볼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시정잡배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심에 송시열의 끄나풀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당파와 가문을 위해서라면 남편과 사위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그것도 모자라 소설아닌 소설같은 작품으로 자신의 행위를 감추고 정당화 할 수 밖에 없었던 혜경궁이라는 비운의 여인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책을 통해서 다시금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많은 가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위서도 많은 것이고 다른 견해도 널려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역사적 기록물을 한쪽의 프리즘으로 제단해서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동시대의 기록물을 같이 보면서 어느 것이 정당한 역사를 말해주는 것인가를 먼저 판단해야 보다 진실에 가까워 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노론식민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학계권력에서 설파하고 있는 교리가 바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역사관을 마치 검인 부동산 계약서처럼 유포하고 있고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일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결여된 일반 대중들에게 이들 전문가의 견해는 곧 법전의 효력을 가지기 때문에 더욱더 세심하고 바른 견해가 필요하다. 물론 이제 이들의 세치혀에 수긍하는 대중들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자와 같은 이들의 노력이 서서히 독자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이제 한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이 열리기 시작했다. 중국이나 일본같이 역사자체를 왜곡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적어도 어느것이 제대로된 한국사인지에 대해선 알아야할 권리를 이제 대중과 독자들이 찾아야할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번 책을 통해서 잘못된 역사관이 미치는 폐해가 얼마나 심각해지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관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변하지 않고 확대 재생산되어 많은 병폐를 낳게 됨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다음 세대들에게 이러한 잘못된 노론식민사관이 그대로 전수된다면 앞선 세대를 살아간 우리들의 책임 역시 면할 길 없을 것이다. 

서산대사의 시가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는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그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반드시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늦었다고 할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처럼 이제라도 우리는 눈 내린 들판을 처음 걸어가는 심정으로 올바른 한국사 찾기에 나서야할 때이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음세대 우리의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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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한국사 1 - 단군조선에서 후삼국까지, 식민사관을 벗고 고대사의 원형을 복원한다 교양 한국사 1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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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사 만큼이나 여타 세력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서 변질되고 왜곡된 사례는 세계사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팽팽했던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일제에 의해 조선반도 식민지 정당화의 도구로 전락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동북공정이라는 중화중심주의 세력에 의해서 상처받고 있다. 비록 시간대를 달리하지만 이들 두 세력의 공통점은 다름아닌 팽창주의(정신적 침략주의로 시작했지만)사관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별반 다른점이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두 세력은 우리 한국사의 시원적인 고조선을 비롯한 상고사를 부정하면서 자신들의 사관을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재야학계 일각에서 저자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지만 식민사관에 철저하게 물들어 버린 학계 대다수의 시각은 아직도 일제 감정기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만큼 아직도 우리 깊숙한 곳에서는 식민시대의 잔재들이 뿌리깊게 남아 있고 그 뿌리가 뿌리를 뻣어 우리 위대한 한민족의 정신에 거미줄 처럼 끈질기게 달라 붙어 있는 실정이고 우리의 정신(한국사)은 독거미의 독에 의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고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김부식의 삼국사기 초년 기록을 부정해 버리는 국정 국사교과서를 달달 외워야 하고, 한4군이 한반도내에 위치했다는 증거로 몇가지 되먹지 못하는 일제학자들의 증거를 신앙 같이 받드는 나라 그리고 겉무늬만 일제에서 대한민국으로 갈아 타버린 학계의 주장을 성서보다 더 굳게 믿고 있고 그 믿음을 강요하는 나라, 한나라의 고등교육을 평가하면서 자국사를 선택으로 책정하는 나라, 바로 이 나라가 G20 의장국이면서 수출 1억불을 달성했다고 동원할 수 있는 매스컴은 다 동원해서 나팔을 불던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현주소이다.

 

각 개인에게 개성과 정체성이 있다면 그런 개인들의 모임체인 국가 역시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세계사를 상고해 보면 한 민족이나 국가만의 정체성이 불확실했던 나라나 민족의 결과는 굳이 여기서 밝히지 않더라도 그 최후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아니 없어서는 아니되는 필수조건인 것이다. 바로 역사가 그 국가가 존립할 수 있는 정체성의 기반인 것이기 때문에 한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는 그 어떠한 종교적인 믿음이나 경전보다 최우선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가 없듯이 국가와 역사는 사람의 몸과 같은 일심동체의 역활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일본이나 중국처럼 올바르지 못한 사관의 정립은 문제가 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과대망상증에 해당하는 정신병적인 정체성을 스스로 주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기술은 올바르고 정확하게 해야 하고 그 해석과 판단 역시 제대로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순리인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과대망상증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인식하면서 우리 한국사의 대인기피적인 증세와 공황장애 증세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을 맞이 하고 오늘에 이르면서 한국사는 뜻있는 몇몇 선각자와 그 후예들에 의해서 많은 심적불안증세를 걷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정신세계는 이런 강박관념과 피해의식를 기본으로 그 위에 영원히 패배자 의식을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식민사관 바이러스와 기식하고 있어 좀체로 체력 회복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는 것 역시 현실이다. 이덕일의 <교양 한국사> 시리즈는 의미 깊은 역사서로 다가온다. 사실 그동안 이덕일 소장의 한국사 전반에 걸친 각론적인 저서들은 많은 반향을 일으키면서 오랜 세월 왜곡된 한국사의 진실을 일깨워 주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굳이 이 자리에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많은 논쟁거리 내지는 학계에서 다수설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의 사실로 밀어붙이는 사안들에 대해서 요목조목 반증(이병도를 비롯한 식민사학자들이 신앙처럼 받들었던 실증사학이라는 고증방식을 이용하여) 을 들어 올바른 사관을 심어 주었고 이제 많은 독자들이 서서히 새로운 아니 진실된 한국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교양 한국사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퍼즐조각처럼 다루어 왔던 단편적이고 정체적인 논거들을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대한제국의 멸망에 이르는 긴 세월을 통사 형식으로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다가온다.

 

구슬도 꽤어야 보물이 되듯이 그동안 시대사별, 사건별, 인물별로 한국사를 접해왔던 독자들이라면 더할나위 없니 좋은 기회로 우리 한국사를 처음부터 근대에 까지 한차레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시리즈 첫번째는 단군조선에서 후삼국까지라는 부제에서 확인되듯이 고조선(물론 구석기시대부터 시작한 선사시대의 기술도 포함되어 있다)에서 시작하여 고려가 재통일하기 전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특히 많이 왜곡된 상고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독자들에게 눈을 잠시라도 떼기 힘들게 한다. 고조선과 이후 태동하는 고구려를 비롯한 열국시대(우리는 흔히 삼국시대로만 인식하지만 고구려,부여,동예,옥저,백제,가야,신라등 3국만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고조선의 강역(고구려에 의해 계승된다)과 한4군의 실체(특히 낙랑군의 위치 비정과 낙랑국의 존재등을 고고학적 유물과 문헌학적 사초을 제시시하여 새롭게 고증한다) 사라진 역사 가야제국의 실상,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부정여부(고구려의 개국연도등),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반증, 발해사의 복원등 그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던 우리 상고사의 전반적인 논점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어 일괄된 역사의 흐름을 재확인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동안 저자를 비롯한 진보재야학자들이 출간했던 각론적인 역사서와 비교 하여 본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 된다.

 

하늘을 나는 새가 한쪽의 날개로만으로는 창공을 날 수 없듯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한쪽으로만 편향된 시각으로 제단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는 통서라고 봐야 한다. 이점은 일제감정기를 통하고 남북 분단의 아픔을 겪으면서 삼국통일을 고구려나 백제가 이룩하였다면 저 광활한 중국대륙이나 일본열도가 우리의 영토였을 것라는 아쉬움과 더불어 당나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역사의 정도를 무시하면서까지 반쪽짜리 통일을 일구어낸 신라 통일 행위에 대해서 폄하하는 지금의 풍토에 대해서도 저자는 많은 경계를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강자독식(위주)의 사관이 결국 중화사관과 식민제국사관을 불러오는 개연성이 높은 것이고 역사란 가장 약자라고 여겨지는 대상도 역사의 당당한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 역사라는 것을 신라의 통일과정이 대변하는 좋은 사례라고 보고 있다.


전반적으로 한국사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 그동안 제대로된 한국사를 접해보지 못했던 독자들, 시대사, 사건사, 인물사 중점으로 한국사를 접했던 독자들에게 <교양 한국사> 는 한국사를 처음부터 통찰하면서 어떤 사관으로 역사를 인식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전해주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혹은 알고 있기를 강요당했던 한국사는 공황장애나 대인기피증을 앓는 심신이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저 광활한 중국대륙과 열본열도를 호령했던 대륙-해양성을 겸비한 위대한 역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제대로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진정한 자신을 볼 수 있듯이 제대로된 한국사의 정립이 다가오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말해주기 때문에 올바른 한국사 알기가 그 만큼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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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본 임진왜란 -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와 전쟁의 기억
김시덕 지음 / 학고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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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임진년을 맞이하여 올해는 420년전 이 땅에 발생한 임진왜란과 관련된 많은 서적들이 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임진왜란은 우리 韓민족에겐 상당한 트라우마를 가져다 준 일대의 충격적인 사건(더욱이 중국의 각종 다양한 문물과 조선 특유의 독창적인 문화를 나름 전수해주었다는 오랑캐한테 당한 일이라 그 충격은 더했던 것이다)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향후 양대호란을 거치고 제국주의의 발호로 인해 국권 강탈로 이어지면서 상당한 근원적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임진왜란을 다소 지엽적인 혹은 우리 중심적인 시각으로 바로 보는 경향(피해자란 입장에서 더욱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합리화적인)이 있는 것 같다. 그저 섬나라 일본 내전을 평정하고 내부의 압력을 전쟁이라는 형태로 분출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를 따르는 강경론자들의 도발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높고, 임진왜란을 섬나라 오랑캐들의 도발적인 만행으로 치부하고 그 도발에 맞서 의롭게 일어난 의병들과 이순신을 비롯한 영웅들의 활약상에 무게감을 더 두고 있는게 보통의 시각들이다.

 

하지만 엄밀한 시각으로 보면 임진왜란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계편도를 뒤흔든 일대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난세를 통일한 왜국의 무력 표출과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명의 마지막 포호 그리고 임란을 계기로 더욱 강력한 교조주의로 빠져드는 조선은 향후 동북 아시아의 판세를 뒤바꾸는 일대의 변혁을 가져오게 된다. 이런 역사적 흐름은 청이라는 강력한 국가가 발호하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드는듯 보이지만 커다란 역사의 흐름에서는 제국주의의 발호라는 대세를 거역하지 못하고 국권강탈의 대의 명분을 제공하는 기틀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그저 단순하게 섬나라 오랑캐의 도발정도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그들이 본 임진왜란>그 동안 민족적인 감정(혹은 피해자적인 감정)이 압도적이었던 우리의 시각에 보자면 상당히 불편한 내용들로 점철된 왜곡된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거부감이 절로 들게 만드는 책이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지적했듯이 상당한 용기를 가지지 않고서는 완독하는 고통을 감내하기 힘들 정도의 황당감을 갖게 하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그동안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각은 철저하게 우리의 시각에서 이루어졌고 항상 우리의 방식대로 해석되어져 왔다는 점에서 사건의 당사중에 하나인 가해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임진왜란은 과연 어떤 전쟁이었는가에 대한 물음에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해본 적은 없었던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저서는 왜의 입장에서 바라본 임진왜란(동시대를 넘어서 에도시대 막후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담론)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다만 역사적 사초에 기반한 역사사실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민가에 유행했던 소설이나 문집의 형태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게 여겨지지만 오히려 민간의 기록물들이 정사의 기록물보다 더 뿌리깊에 자리잡고 확대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볼때는 왜(일본)인들의 임진왜란에 대한 담론을 확인할 수 있는 적절한 문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는 임진왜란의 시각과 담론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정한론을 이론적 감정적 당위성을 제공하였고 이러한 기본적인 담론들이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국권 강탈이라는 미증유의 사태로 발전하게 될 수 밖에 없는 분위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정반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담론들이 지금 현재까지 극우세력들(그리고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는 대중들의 심리상태를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 더 무서운 것이다)의 뇌리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근원적인 면책을 주고 있다는 점이 더 우려 되는 바이다.

 

굳이 이런 책을 접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수 도 있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들을 용기가 없을때 벌어지는 사태를 우리는 420년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뼈저리게 느껴고 이후 철저하게 우리만의 시각으로 살아온 결과에 대한 반성차원에서라도 일본이 바라보는 임진왜란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황당무게한 담론들을 담고 있지만 이러한 황당함은 우리측의 논거일뿐이지 그들에겐 당연한 논거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일본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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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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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스템속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가치라는 말은 이미 퇴색되어 버린지 오래되었다. 자본,물질,금권만이 모든 것을 제단하는 사회속에서 삶의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시대 역행적인 발상이면서 패배주의자적인 자기 연민의 합리화 대상으로 비쳐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화라는 파고를 자의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에겐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의 회상 그 자체만으로도 누워서 침뱉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강요되고 수용되어야 했던 서구문명의 근대화는 이제 당연한 절차상의 방법론이었고 서구가 설계해왔던 산업자본화에 익숙해지면서 그 어떠한 담론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구조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겐 전통의 가치가 가져다 주는 무게감은 클 수 밖에 없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중심으로 각 개인들 생활패턴까지 깊숙히 침투한 근대적 가치판단의 근거들에 대한 재판단이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유교와 선비(사대부)에 대한 담론들이 봇물터지듯이 제기되고 있고 현대적 가치관과 전통적 가치관의 접목이라는 흐름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과거를 되돌아 보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선비(사대부)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우리가 선비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조와 의리로 자신의 주장을 그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관철해나가면서 청빈과 안빈낙도 같은 삶으로 타의 모범이 되는 정신적인 주체로서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상례이자 거의 머리속에 도식화로 각인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비라는 그 단어자체가 발산하고 있는 아우라 그 자체만으로 별다른 부차적인 설명의 필요성 자체를 제기할 필요 없는 담론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처럼 고고한 절개와 한일합방이라는 국치를 당해 초개처럼 목숨을 던진 매천 황현같은 이들이 선비의 대명사로 우리의 뇌리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와 선비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을 다룬 출간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선비는 지고지순의 선과같은 존재, 현대처럼 각박한 시대에 정신적인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발칙한 서술들과 더불어 기존의 상식을 무참하게 짓누르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물론 어느 정도 인지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들어내기보다는 될수록 좋은면만 보고자 했던 우리에겐 상당히 당황스럽기도 하다). 세계화라는 무정체성 시대에서 그나마 전통적인 가치관을 회복하고자 열열히 노력하는 이들에게 그야말로 찬물을 끼엿는 불편한 담론들을 담아내고 있기에 도끼눈을 뜨고 바라볼 수 밖에는 없는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특히 식미지를 경험하면서 소극적인 식민사관에 점철된 우리 역사사관을 그나마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사관으로 전환코져 선비와 유교 조선을 재조명하는 이들과 그들의 바램에 동승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겐 전통 가치관의 확신성에 대한 믿음마저 뒤 흔들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의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선비의 모습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조와 의리, 청빈과 안빈낙도의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선비의 또 다른 실재적인 모습을 고찰하면서 그들이 펼쳐나간 수신제가치국이라는 대의명분의 허와 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유교와 조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라도 그나마 선비라는 이들에 대해선 서두에서 말한 세한도나 시문등을 통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정형화된 이미지로 뇌리에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선비의 이미지는 근대화에 비록 늦게 발을 담갔어도 전통적인 가치관에서는 누구보다 남다르다는 보상심리와 자긍심이 마련한 일종의 현실왜곡장으로 역활을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 조선을 지배하고 이끌어왔던 선비들의 실재적인 모습은 그들이 신앙처럼 받들었던 성리학(주자학을 포함한 원시 유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자신들만의 이율배반적인 논리였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비라는 공동체 전체의 모습을 개인적인 삶과 공식적인(정치적) 행위 양단을 고찰함으로서 그동안 선비의 한쪽 면만 보아왔던 독자들의 편엽된 시선을 바로잡아 준다. 또한 지금 사회,경제,문화,정치적으로 일고 있는 유교의 접목화와 선비정신의 고양등이 적확한 사실판단을 근거로 진행되어야 하며 자짓 커다란 오류에 봉착할 수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선비라고 제대로 대접받아야 마땅한 인물들도 많지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선비들은 선비정신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 역시 사실이고 이런 선비들이 이끌어 나간 사회가 조선이다. 그리고 그 조선은 결국 이민족에게 짓?히는 미증유의 역사를 연출했고 그에 대한 합당한 책임 역시 있는 것이다. 단지 선비들이 주창했던 도덕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조선시대 선비들을 동급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 역시 제고해 봐야할 일이다. 물론 조선은 현대와는 사뭇 다른 시대였다. 그리고 지금의 시각으로 그들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선비들이 주창했던 담론과 그 담론들의 실천성를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은 벋겨지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 수양 측면과 공적인(정치사회부분) 참여부분등을 망라해서 선비의 거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고 항목별로 조목조목 비교해보는 논거들을 볼 수 있어 그동안 선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막연하거나 다소 왜곡된 이미지를 걷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인 논거들이 우리 전통가치관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나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흠집내기가 아니라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여 보다 나은 전통가치관의 확립에 기여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상을 위한 비판이라는 점을 염두해 두고 볼때 선비들에 대한 적확한 이해만이 우리 전통문화와 가치관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방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선비 일개 개인의 삶이나 담론이 아니 선비라는 특수계층의 전체적인 면을 볼 수 있었다는 점과 현대에 일고 있는 유교와 선비정신의 적용여부에 대한 핵심적인 사안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다만 아쉬운점은 정조의 죽음과 이이의 십만양병설등의 저자의 태도가 극히 정형화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점이 본 저서 내용과는 다른 문제점이기는 하나 역사전반을 다루는 학자 입장에서 한번쯤은 집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가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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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1-1 - 동양문명, 수메르에서 일본까지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1
윌 듀런트 지음, 왕수민.한상석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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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국내 독자들에게 세계사 내지는 문명사라는 개념은 상당히 협소한 의미의 세계사(문명사와 대동소이한 의미로 표현 하겠다)를 지칭해왔다. 굳이 범위를 조그만 좁혀 들어가면 세계사라는 허울을 쓴 서양사라고 해야할 정도로 서양사 일색의 세계사를 접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다 연대서술중심과 그 연대에 발생했던 사건중심들로 점철된 다소 정적인 세계사를 접하다 보니 연도와 인물 그리고 사건에 매달리는 우를 범하게 되었고 그러한 단편적인 파편들로 인해 국가(혹은 문명 내지는 민족) 중심으로 단절되어 버리는 경우를 왕왕 겪게 되고 결국 세계사를 선사시대부터 현대사까지 훓어보더라도 각각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 그런 세계사에 익숙해져 왔던 것이다. 특히나 선사시대를 벗어나 역사시대로 접어드는 부분은 당연히 그리스-로마시대부터라는 일종의 암묵적인 공식화에서 출발하다 보니 사뭇 세계사에서 동양이 차지하는 부분은 사실상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못하고 이는 서양중심의 세계사, 연대와 사건중심의 세계사라는 왜곡된 인식을 갖게 했고 결론적으로 세계사는 재미없고 다소 까다로운 분야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면에서 윌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시리즈는 그 동안 세계사 접근 방법이나 서술방식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을 감히 드러내놓고 하고 싶은 저작이다. 그동안 일률단편적인 세계사 내지는 문명사 혹은 인류문화사를 접해왔던 독자들에게 윌 듀런트의 문명이야기는 그야말로 사막속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듯이 끊임없이 목말라왔던 갈증을 단번에 해갈해 줄 수 있는 단비같은 저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한창 세계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한번쯤 어렵고 긴 이름과 사건들 그리고 모년모월이라는 년도의 나열속에서 큰 줄기를 잡지 못했던 일반독자들에겐 무엇보다 반가운 출간이라 해야 겠다. 또한 그동안 문화사(문명사)에 대해 어렵게 생각해왔던 독자들에게 문화사와 역사서술의 흐름을 적절하고 오묘하게 서술한 이번 문명이야기는 인류탄생에서부터 시작해서 선사시대, 역사시대를 일목요연하게 한번즘 정리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기대되는 저서이기도 하다. 비록 1930년대에 집필되어 선사시대나 인류의 기원등에서 지금과는 다른 정의나 학설들이 있지만 저자가 기술하고 있는 인류의 문명이야기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고 오히려 한시대나 한문명에 대해서 지금보다 더 심도 깊은 기술들이 문명이야기속으로 한층더 빠져들게 한다는 점도 있다. 

무엇보다 <문명 이야기>는 문명의 제요건들을 서두에서 방대한 인류학적 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하므로서 인류의 문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의 해석과 이해를 돕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 문명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방식의 서술은 암기위주식의 체득보다 이해중심의 체득이 얼마나  많은 효과를 가져오는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문자발명과 더불어 역사기술을 시작했던 역사시대의 첫장에 수메르 문명을 필두로 시작되는 부분은 지금으로 생각해도 상당히 진보적인 발상으로 그동안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매러니즘에 빠져있던 서양학자들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 하다. 수메르, 이집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유대, 페르시아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언급되어 왔지만 시살은 이집트나 유대정도를 제외하고는 그동안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이 점은 저자가 책을 출간한지 70여년을 더 흘러지지만 지금도 대동소이하다는 점에서 저자의 식견이 돋보인다고 해야겠다) 또한 주목받은 문명들이라도 유물이나 인물중심정도로 압축하다보니 문명의 탄생에서 성장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라이프싸이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저자는 각각의 문명에서 이러한 문명 라이프싸이클을 절도있게 서술하면서 인적궁성관계, 경제생활, 통치제도, 종교, 도덕과 윤리, 문학과 예술, 학문 그리고 몰락의 배경 및 타 문명의 탄생등 그야말로 방대하고 포괄적인 면에서 서술하고 있어 한 문명을 정말 제대로 집고 있다. 이러한 스토리텔링방식의 서술이 특정 문명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주고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뿐 아니라 각 문명들의 가지고 있는 특징이나 타 문명과의 연결고리(특히 수메르,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문명이 유대문명 전반에 걸쳐 끼친 영향을 아주 객관적인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장점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대표적으로 거시적인 틀에서 문명사를 다루고 있지만 독자들에게 낮익은 람세스, 길가메시, 함무라비, 다리우스등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더불어 각 문명이 창조해낸 종교, 신화, 예술등의 미시적인 부분까지도 꼼꼼하게 기술하고 있어 다소 무겁고 딱딱하게 느낄수 있는 문명사에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넓은 독자층의 호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 만큼 저자가 많은 자료와 시간을 들여 준비했다는 반증으로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잡는데 손색이 없어 보인다. 저자의 이러한 접근방식은 인류 문명사가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그 끈을 이어왔다는 측면에서 각각의 문명들이 상호보완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점 그리고 각 문명들이 별개의 문명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전반적으로 인류 문명사와 세계사(보다 광범위한 범주의 잣대로 판단 한다면 같은 분류에 들겠지만 그동안 독자들에게 익숙한 형태의 분류에 따르면 구분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다)를 한번에 아우를수 있다는 점에서 이보다 뛰어난 저작은 없어 보인다. 인류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엿볼 수 있을 만큼 방대하면서도 세세하게 서술된 이번 저서는 그동안 단편적이고 연대/사건중심적인 관념의 세계사와 문명사를 단번에 일축해버린다. 그리고 문명(역사)의 시발점을 근동인 아시아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동안 서양중심의 세계사나 문명사와는 또 다른 면을 보여 주고 있다. 다소 분량이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독자도 있겠지만 서술방식 지금으로 보자면  스토리텔링방식에 근접해 있어 가독성에 크게 부담되지 않을뿐 더러 세세한 이야기들이 사뭇 흥미롭게 다가온다. 윌 듀런트의 문명이야기는 문명의 흥망성쇠라는 라이프싸이클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사안을 담고 있고 우리 인간을 이해하는 척도로 손색없는 대작으로 남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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