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9단
양순자 지음 / 명진출판사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주 전, 토요일.
12시 조금 넘어서 반가운 전화가 왔다.
마드리드에 있는 사랑하는 L언니.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친구이자,
또 나를 제일 잘 알고 이해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명이다.

수선 : 언니, 근데 지금 몇시야?
L 언니 : 새벽 4시야...잠이 안와.
계속 뒤척이다가 아예 자는거 포기하고 책 읽고 있었어.
수선 : 우째...피곤하겠당. 근데 무슨 책 읽어?
L 언니 : 인생 9단.
수선 : 뭐? 인생 9단? 음하하. 그런 책도 있어? 누가 쓴건데?
L 언니 : 양순자. 할머니가 쓴 에세인데, 읽을만해.
배울만한 점이 많아.너도 한번 읽어봐.

이렇게 해서....
나는 <인생 9단>이라는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제목의 책을 알게 되었고,
온라인 서점에서 저자 설명도 기사도 읽지 않고 덜컥 주문을 했다.

사실...책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L언니와 공감대 하나, 이야기 거리 하나 더 만든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책을 주문했다.

언제나처럼 사무실에 택배가 도착하고,
살짝꿍 설레이는 마음으로 상자를 뜯고,
책의 첫장을 폈을 때,
난 좀...당황했다.

책이....반말로 써있었다.
" 곰곰히 생각해 보라구."
" 이 할머니한테 얘기 한번 들어 볼테야?"
" 잘 듣고 그대로 해봐."
뭐 이런 식으로....

이 책의 concept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인생 9단이 들려주는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인생 공식".

저자는 스스로를 "할머니"라 칭한다.
" 얼마나 좋아? 이 할머니가 미리 겪어 보고 말해주쟎아....."

내 머릿속에 "할머니"라는 개념은 적어도 여든은 된,
영화 <집으로>의 그런 연로한 할머니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포근하게 "할머니!" 라 부를 수 있는 그런 이미지였다.

스스로 "할머니"라 자칭하는 저자 양순자 할머니.
잠시 저자 소개를 보자.

1940년생. 서울구치소 교화위원으로 29년 동안 사형수 상담을 담당했다. 법무부 교정대상(박애상), 국무총리 인권옹호상, 법무부 장관상 등 수상한 바 있으며, 2005년 현재는 안양교도소 정신교육 강사, 양순자심리상담소 소장으로 있다.

40년생이 꼭 할머니로 불려야 하나?
그것도 스스로를 "할머니"라 불러야 하나?

책의 내용을 떠나
계속 되풀이 되는 " 이 할머니가 하는 말 잘 들어봐." 가
무진장 불편하고 거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40년생은 절대 할머니가 아니다.

새로운 사랑에 빠져 설레일 수도 있고,
자신의 일에서 그 빛을 발휘하며,
여자로도 여전히 매력적인 그런 나이다.

훌륭한 연기자로도 모자라 재테크 강사로 이름을 떨치는
전원주 - 1939년생

그녀의 연기를 보고 도대체 몇번을 울었던가?
여전히...너무도...아름다운,
또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의 저자
김혜자 - 1941년생

에너지가 넘치는, 그러면서도 절제된 연기를 하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의 주인공, 최고의 연극배우
박정자 - 1942년생

여전히 아름다운, 늘 새로운 여행을 꿈꾸는,
여행 다큐멘터리에 열광하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우리 엄마 - 1947년생

나이가 들수록 중후한 매력이 넘치는 신사복 모델들 처럼,
여자도 나이가 들수록 매력적일 수 있다는걸 증명한,
너무도 아름답고 세련된,
우리 이모 - 1948년생.

누가 전원주나 김혜자, 박정자를 "할머니"라고 부를까?
몇년 후, 우리 엄마나 이모가 스스로를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훈화 말씀"을 하시려 할까?

어제 미장원에서 머리를 하면서 이 책을 다 읽었다.
( 워낙 행간 간격이 크고, 거기에 삽화도 아닌 소도구 사진컷 까지 대량 들어가 있어서
금~방 읽는다.)

어시스트 언니가(어려 보이는데, 아들이 고등학생이라고 함)
책에 관심을 보이기에, 다 읽은 책을 그 언니께 드렸다.

"이거 정말 저 가져요?"
뜻밖에도....그 언니는 너무도 좋아라하며
책을 안고 다니며 디자이너들과 다른 스텝들한테
" 저 책 선물 받았어요!" 하며 자랑을 했다.

그 순간 난...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안볼 책이라 드린건데....양심에 찔렸다.
언젠가 내 책이 나온다면 꼭 한권 선물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삐딱한걸까?
인생 지혜롭게 살라고 인생 9단 할머니가
구구절절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데,
감동을 하기는 커녕 불편하고 거북해 하다니....

인생 9단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식모나 머슴 될 자신 없으면 결혼하지 마"
"당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부터 시작해"
"팔자 바꾸고 싶다고? 생각부터 바꿔" 등등....

처세술 책은 기본적으로 모두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니...이 책을 읽으면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와 같은 잔잔한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삐딱한 나는 불편했지만,
기쁘게 책을 선물 받은 그 언니가 행복하게 읽어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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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1-26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엄마를 사드리나 어쩌나 나왔을 때 잠시 고민했던 책인데.
자신을 할머니라 칭하면서 말끝마다 한 수 가르쳐 주려는
책이라고요?
좀 거시기하네.ㅎㅎ
그리고 40년생이 할머니가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는 수선님,
덕분에 저도 할머니가 되려면 엄청난 세월을 벌었군요.ㅎㅎㅎ

2005-11-26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클 2005-11-26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36년생인 우리 어무이도 아직 할머니가 아닌가베??? ^^
그나저나 수선낭자, 책 언제 나와요? 진행은 하고 있는건가요?

바람돌이 2005-11-2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정 어머니가 40년생인데 우리집 아이들은 할머니라는데....^^
근데 진짜 수선님 책은 작업하고 있는건가요. 기대돼요. ^^

kleinsusun 2005-11-26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엄마께 선물하기는....좀 아닌 책 같아요.
로드무비님 어머님은 인생 10단이 아니실까요?^^
참고로, 이 책은 인생 9단 할머니가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얘기랍니당.

야클님, 그럼요.할머니가 아니죠!!! 누가 만약 할머니라고 부르면 제게 일러 주세요.ㅎㅎ 참....책은.....내년으로 연기했어요.ㅠㅠ

바람돌이님, 아...바람돌이님 어머님이 인생 9단 할머니와 동갑이시군요.
바람돌이님 아이들은 할머니라고 부를 수 밖에 없죠.ㅎㅎ
근데...책은요....내년으로 넘어갔어요.ㅠㅠ

글샘 2005-11-27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저 책 한번 딱 펴보고 도서관에서 쳐다도 안보고 있습니다만...
음... 내년에 살 책이 한 권 생겼군요. ㅎㅎㅎ 집필중이신가요?
저도 태어나서 첨이자 마지막으로 책을 남긴 적이 있었죠.(이러면 속을 듯... 제 이름 석자가 떡하니 박힌... 석사학위 논문이라고..ㅠ.ㅠ)
리뷰를 읽어 보니 안읽긴 잘 한 거 같네요.
우리도 슬슬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지 않나요? 절대적 시간으로...

kleinsusun 2005-11-27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헉...."우리도" 란 우리 모두, 알라디너 모두를 말씀하시는거죠? ㅎㅎ
저 아직...아줌마도 안 되었는데 벌써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으면 우째요??? 흑흑.

moonnight 2005-11-2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40년생은 저얼대 할머니가 아니죠. 이십년생이신 환자분께서 치료받으러 오시는데 분명 할아버님인 그 분도 얼마나 멋쟁이에 젊게 사시는데요 ^^ 처세술에 관한 책은 왠지 읽기가 싫어요. -_-; 호호. 저도 수선님 책 기다리고 있답니다. 열심히 써주세요!! ^^

kleinsusun 2005-11-28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onnight님, 좋은 아침입니당. 어제 푸~욱 잤더니 과음 후 쓰린 속을 잡고 맞이했던 지난주 월욜 대비 컨디션 최상입니당.ㅎㅎ
그죠? 40년생은 할머니가 아니죠? 계속 "이 할머니가..." 하는데 상당히 거북하더라구요. ^^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세용!
 
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난 김영하의 일촌이다.
김영하의 일촌은 몇명이나 될까?
김영하는 가끔씩 일촌 파도타기를 할까?

작년에 우연히 김영하에게 cy 미니홈피가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호기심의 대마왕인 나는 냉큼 cy에 접속,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미니홈피를 발견했다.
일촌이 되면 더 보이는 폴더가 있을까 하는 욕심에
일촌을 신청, 다음 날 접속해 보니 일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더 보이는 폴더는....없었다.

작년엔 가끔 점심시간에 cy에 들어가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회사에서 cy접속이 차단되었다.
뭐...그런 기사가 신문에도 나고 했었다.
그러다 보니 원래 썰렁했던 내 미니홈피는
"최근 2주간 게시물이 없습니다" 가 항상 떴고,
덩달아 김영하 미니홈피에도 안가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김영하가 미니홈피에 있는 글들을 엮어서 책으로 낸다는 말을 들었다. 낭독회도 하고....
평일 저녁에 강남 교보에서 하는 낭독회에는 가지 못했지만,
책은 주문했다.

누군가 말했다.
김영하를 좋아하지만,
이 책만큼은 사지 않고 서점에서 서서 읽겠다고....

사실 잡지 연재를 모아서 거기에 살포시 삽화만 곁들여
책을 내는 작가들을 보면 얄미울 때가 있다.
뭐....리메이크 앨범을 자주 내는 가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소설가가 책을 내면 일단은 지갑을 연다.
이런 희망도 가져본다.
안정된 수입으로 자질구레한 청탁을 쿨하게 거절하고
소설에 집중할 수 있기를....

김영하 산문집 <포스트 잇>을 읽으면서 가벼운 질투를 느꼈다.
어떻게 이 남자는 "캉가루표 구두약"(말푠가??) 같은
아무 것도 아닌 얘기도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이 책 <랄랄라 하우스>도 마찬가지다.
한가한 주말에 쇼파나 침대에서 만고 편한 자세로 뒹굴거리며
가끔씩은 낄낄거리며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고양이, 소년중앙, 때밀이, 말풍선, 스타벅스, 민방위, 예비군 훈련...
이런 일상적인 소재들을 가볍게, 또 짧게 썼는데도 재미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구 기분이 좋아지는 부분이 있었다.
소제목은 <소설의 엔진>.

예전에 소설의 동력은 주로 "연애"였다.
<안나 카레리나>나 <마담 보바리>처럼...
이제 그 약발이 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소설의 동력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이것은 어쩌면 작가들의 착시현상은 아닐까.로라는 말한다.많은 작가들이 부업(혹은 본업)을 따로 가지고 있다.그들에게 있어 진짜 일은 글쓰기이며 다른 일은 글쓰기를 위한 하찮은 생계수단일 뿐이다.그렇게 살다 보면 글쓰기(혹은 예술)는 휘황한 아우라에 둘러싸인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
직장은 그저 단순한 업무만 반복하는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들의 꿈은 글만으로 먹고 사는 전업작가가 되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우리 작가들은 그곳을 잘 모른다.
그러니 우리의 주인공들은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직장을 나오는 것이다.이제는 우리의 주인공들을 직장에 머무르게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대신 작가들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지만.
(p206)

아하하하.
미래의 소설 동력은 "직장"이 될꺼라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 작가들은 직장을 잘 모른다.안 다녀봤으니까...
그래서 한국 소설의, 특히 여자 소설가들의 주인공은
하나 같이 출판사 직원, 방송 작가, 잡지사 직원....다 이런거다.
자기들 직업이었으니까...

이제 소설의 새로운 동력이 "직장"이 된다면,
나의 숨가빴던, 또 힘들었던 회사생활도 싱싱한 에너지가 될 수 있겠지.....(물론 내가 소설을 쓴다면...)

한 선배가 아멜리 노통의 <두려움과 떨림>을 읽고 내게 말했다.
"너도 회사 생활 얘기를 이렇게 한번 써봐. 생생하게..."

아...이런 생각을 하니 저물어 가는 일요일 밤이 두렵지 않다.
내일도 씩씩하게 회사에 나가볼까?
리얼한 소설의 엔진 만땅 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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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4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5-09-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수선님, 멋진 리뷰십니다. 사실 전 이렇게 사랑방에서 얘기듣는 것같은 리뷰가 좋습니다...

야클 2005-09-0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영하씨 책은 나오자마자 늘 사서 본답니다.
그리고 수선님은 소설 보다는 수선도서관에 있는 글 같이 짤막한 신변잡기성 글이 더 어울릴듯.(혹시 습작하신 소설이라도 있으면 공개 좀 하시죠. ^^)

로즈마리 2005-09-04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괜히 땡겨서, 오빠가 돌아왔다, 사 놓고 아직 안 보고 있어요. 이 책이 저의 김영하에 대한 편견을 제거해주길 기대합니다만...^^;;;

끼사스 2005-09-04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갑자기 회사 다닐 맛이 나는군요. ^^: 전해 들은 얘기인데 김영하씨는 실제로도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요?" 하며 시작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수도 없이 갖고 있다는군요.

플레져 2005-09-05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인용하신 부분...제가 밑줄 쫙쫙, 틈 나는대로 읽는부분이에요!
랄랄라~ ♪

2005-09-06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본은 없다 1
전여옥 지음 / 푸른숲 / 1997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왜 아직 절판이 안되었는지 모르겠다.

전여옥 본인도 절판을 원하지 않을까?
아무리 자기가 쓴 책이지만 쩍 팔릴 것 같다.

아무리 연금처럼 받아 챙기는 인세가 좋다지만,
이런 책을 써 놓고 쩍 팔리지 않는다면
전여옥은 분명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2년 전 일본 관련 업무를 맡고 일본 출장을 자주 다니게 되면서,
일본어를 배우고 또 일본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전여옥의 그 유명한(?) <일본은 없다>가 어떤 책인지 궁금했다.

전여옥은 또라이인가? 아니면 마케팅 천재인가?

이런 자극적인 책 내면 분명히 팔린다.그것도 대박난다.
(그러니까 10년도 넘게 팔리고 있지만...)
그리고 유명해진다.
논리고 뭐고 반일 정서에 힘입어 한 인기 얻을 수도 있다.

책의 대박과 유명세를 노리고 일부러 이런 책을 냈다면 차라리 안심이다.

그런데...그런데...
이 책의 내용이 정말 전여옥이 생각하는 그대로라면
이건 정말 큰 일이다.
대한민국 최대야당의 대변인이 이렇게 논리도 논거도 없이
무작정 자기 감정을 내뱉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궁금한 점 몇가지.

1. 전여옥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 이 책을 읽으며 정말 혼란스러웠다.
전여옥은 거듭 되풀이해서 자신을 "센 여자", "드센 여자"라고 말한다.
또 메트로폴리탄, 세계화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아무리 10년 전에 쓴 책이라지만
이해가 안되는, 이해 할 수 없는 표현들을 하고 있다.

굳이 서양사회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보석을 받는 여자는 창녀밖에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p30)

일본 여자들이 명품을 좋아하며,
크리스마스에 샐러리맨들이 여자친구 선물을 사려고
티파니나 미키모토가 터져나간다는 점을 비난하며 쓴 글이다.

아....어떻게 이렇게 비약을 할 수가 있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티파니나 미키모토에서 비싼 선물을 사는게 사회적 현상이라면 그건 "과소비"와 관련된 문제일 수 있겠다.

그런데...여기서 "창녀"가 왜 나오나?
남자친구한테 티파니에서 반지 선물 받으면 창녀인가?
아무리 일본을 싸잡아 비난하고 싶다 하더라도,
비약이 너무 심하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이런 비약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자신의 남편과 아버지가 아니고는
술을 따르지 않는다는 설명을 뭐 그런 장소에서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p168)

일본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옆에 사람들이 다 서로의 술잔을 챙기며 첨잔을 계속 해주자
받아 마시기만 하며 한 말이다.

그 후, 술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로 부터
"교양이 없다"는 말을 듣자 전여옥은 불끈하며 말한다.

"한국 여자들은 너희나라 여자들처럼 아무한테나 술을 따르지 않아.교양없이...."

아...정말 놀랍다.
어떻게 메트로폴리탄,세계화, 페미니스트...이런 좋은 말은 자기한테 다 갖다 쓰면서 이럴 수가 있나....

일본사회의 보수성과 폐쇄성에 대해서는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은 이런 해괴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 여자들을 아무한테나 술 따라주고, 술집 나가는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어쩌고 하며 비난한다.

도대체 전여옥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2. 그럼 한국도 없나?

전여옥은 여러가지로 일본을 비난한다.

일본 여자들이 명품을 너무 좋아한다고...
신용카드로 24개월 할부를 해서 핸드백을 산다고...
돈도 없이 명품을 사들이는 신용 불량자들이 많다고....

그래서 일본은 없다고 말한다.
그럼....한국도 없나?

가령 지하철을 타면 20대 젊은 직장여성은 정말로 거짓말 안보태고 다섯명 가운데 세 명 정도가 '루이비통'이라는 프랑스 상표의 값비싼 핸드백을 들고 있다.(p203)

10년 전 한국은 루이비통 "이라는" 프랑스 상표라고 설명해야 했던 시절이었나 보다.

그런데...지금 한국은?
짝퉁이건 뭐건 루이비통 지갑이라도 다 하나씩 있다.
신용불량? 국가적인 문제다.

그래서 "일본은 없다"고 말하는
황혼 이혼, 이지매, 영화의 폭력성, 집단 행동(자살 site 등)은
지금의 한국에서 다 만연된 문제다.

그럼 한국도 없는가?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그렇게 한 나라를 폄하할 수 있는가?

3. 아직도 마음에 드는지?

이 책을 쓴 이유에서 전여옥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내 스스로 이 책이 내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왜냐하면 이 책은 바로 '오기에 찬 한국인',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p7)

궁금하다. 아직도 이 책이 마음에 드는지...쩍 팔리지 않은지...

불행한 사실은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지 않고 샀다는 것이고,
다행인 사실은 이 책을 "헌책방"에서 샀다는 거다.(한권 2천원)
걱정이 되는 사실은 사는 김에 2권도 샀다는 것이다.

고민이 된다. 2권을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저질 드라마를 짜증난다고 마구 욕하면서도
다음회에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하는것 처럼
2권은 또 어떤 황당한 내용인지 궁금하다.

2권 책 날개를 보니
최보은이 칭찬 일색인 "추천사"를 썼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최보은은 아직 전여옥을 지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강유원이 말했다. 복거일에게 필요한건 논술 선생님이라고...
전여옥 의원께도 논술 선생님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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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08-29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진짜 아직 이 책이 절판 안됐네요? 신기신기 +_+

바람돌이 2005-08-29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직도 이 책이 팔리고 있다는 말인가요? 웃기는 대한민국...^^

글샘 2005-08-29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거일은 오히려 귀여운 쪽에 속하지 않을까요? 꼴통이지만 리버럴리스트로서 너무 우리말에만 얽매이지 말자는 주장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맹목적 애국심에 충분히 손상을 줄 수 있었지요.
전여옥은 논술이 문제가 아니라, 선생님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보기엔, 저런 경우를 지도 불능 학생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의 미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여옥의 미래가 없는 거죠.

오렌지향 2005-08-29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여옥이라는 여자가 국회의원이라는 것이 "전"짜만 들어도 심기가 불편합니다.(좋은말로 하면)

코마개 2005-08-29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원 동기 중에 저 책을 보고 전여옥이 정말 리버럴 하고 페미니스트여서 반했다고 하는 사람을 봤죠. '헉스'했습니다. 그 말을 한 사람도 딱 전여옥 스타일 이었거든요.

로드무비 2005-08-29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거 아세요?
그나마 전여옥의 책 중에 저게 제일 낫다는 거?
결혼하고 나서 낸 책들 보면 더, 더, 더 골때립니다.

moonnight 2005-08-2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은 담부터는 전여옥이란 이름도 듣기 싫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할 말 없게 만듭니다. 정말 쩍팔리고 골때리는 책이죠? ^^;;

2005-08-29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벌식자판 2005-08-29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들을 보는 행위 = 스스로를 자학하는 행위

아직 2권을 않보셨다고 했죠? 보지 마세요.

이것들이 "책"이면... 담배는 불로초입니다.

식후장초, 불로장생~~~

kleinsusun 2005-08-30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벌식 자판님, 웃겨, 웃겨, 넘 웃겨요.우하하하.
이 책들을 보는 행위 = 스스로를 자학하는 행위.
맞는 말이네요. 이 책 읽으면서 스트레스 엄청 받았어요.
정말 예리하고 또 재미있네요.

kleinsusun 2005-08-3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onnight님, 네...정말 쩍팔려요.이런 책이 10년 넘게 팔리고 있는 것도 넘....차라리 슬프다고나 할까...

로드무비님, 아니....이것보다 더 골때리는 책이 있단 말이예요??? 헉...

강쥐님, 그 대학원 동기란 사람.....참...좋은말로 엽기적이네요.
리버랄 뜻이 바꼈나? 영어사전을 찾아봐야 겠어요.ㅋㅋ

오렌지향님, 원래 싫어하긴 했지만 이 책을 읽으니 현기증이 나요. 이 책이 아직도 팔리고 있다니 참...

kleinsusun 2005-08-30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아하.... 선생님 100명이 개인지도를 해도 어쩔 수 없는 지도불능학생.정말 적확한 표현이예요. 헌책이 사서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ㅋㅋ

바람돌이님, 이거 읽고 감동한 사람들도 있다는데요.헉...

야클님, 좋은 책들은 일찍 절판되어서 헌책방을 찾아 헤매야 하고...이런 책은 참...
푸른숲한테 실망했어요.

2005-08-30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zz 2005-09-26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상당히..
이런 분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듣는다면, 슬프지요..

kleinsusun 2005-09-26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izz님, 안녕하세요.
네...슬프기도 하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게 웃기기도 하고....^^
 
사랑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들
무라카미 류 지음, 김춘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무라카미 류 아저씨 책을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몇년 전에 [In the Miso Soup]을 읽은 후로 단 한권도 읽지 않았다.

[In the Miso Soup]은 읽은 후로도 며칠간 불쾌함이 남는,
찝찝한 공포영화 같은 소설이었다.
영화 [8mm]를 봤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8mm]는 여태까지 내가 본 최악의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거의 한달간 지나가다가 극장에 걸려있는 그 영화
간판, 포스터만 봐도 오바이트가 쏠리는 것 같았다.

<사랑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들>은 무라카미 류의 "연애론"이라기에,
여자의 경제적 자립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기에 한번 읽어봤다.
최소한 에세이니까 끔찍한 내용은 없을꺼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이 책의 원제는 [誰にでもできる恋愛].
그대로 번역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연애>.
이 제목은 무라카미 류 연애론의 핵심이다.
왜냐면 내용 자체가 연애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책 제목은 이런 내용의 "반어적 표현"이라고 수차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웅진에서 이 책 제목을 왜 <사랑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들>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연애>가 제목 자체로도 더 도발적이고,
본문에서 계속 제목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한글 번역본 제목은 뜬금 없이 <사랑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들>이니....
사실 번역 소설들 제목 이상한거 너무 많다.

이 책...참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무라카미 류가 "재수 없게"보이기도 한다.
텍스트 내용과 별 관계 없이
나는 지금 이탈리아 어디에 있다,
나는 지금 쿠바 어디에 있다 하며
별 다섯개 짜리 호텔 스위트룸에서 자고
비싼 와인을 마시고,유명한 사람을 만난다는 자랑이 계속 된다.

만약 뭐 하나 건질 것 없이 허접한 책인데
이런 자랑만 계속된다면
이 책을 확 집어던질 수도 있겠다.

몇년 전에는 "여자의 경제적 자립"이 연애의 필수조건이라는 주장이 참신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뭐....이제는 상식적인 얘기가 되어 버렸고
무라키미 류의 연애론이 관심을 끌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연애 같은 건 없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마찬가지다.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인간,즉 홀로 설 수 있는 남녀에게만 연애를 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p13)

이런 말 한두번 들어보나?
그리고....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의존적인 사랑은 서로를 피곤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건,
이 책에 "개인이 없는" 일본 사회에 대한 조롱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하시모토 류타로" 얘기다.

어제 TV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봤다.하시모토 류타로 수상이 영국 버밍검에서 G8 서밋(summit)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선진국 수뇌회담 얘기이다.

회의에서도 하시모토는 전혀 주체성을 발휘하는 일 없이
'세계의 정치 지도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게 기뻐요'라고
흐뭇해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영국의 블레어 수상이 주최한
콘서트의 영상을 봤을 때 나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콘서트장은 훌륭한 극장 같은 곳이었다.2층의 칸을 막은 귀빈석 같은 장소에 클린턴이랑 블레어랑 하시모토가 있었다.곡은 비틀즈의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이었고,그 뉴스 영상으로는 누가 연주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영국에는 유명한 아티스트가 많으니까 누가 연주했는가는 이 글하고는 관계가 없다.클린턴은 자기 자신이 섹스폰을 불 정도니까 힐러리 부인과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블레어는 나하고 동갑인 비틀즈 세대니까 자연스럽게 즐거운 듯이 손을 두들기며 춤추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의 하시모토 류타로다.
하시모토는 아마도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몰랐으리라고 생각한다.모르니까 흥얼거릴 수는 물론 없다.그렇다면 얌전하게 잠자코 즐거운 듯이 보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하시모토 류타로는 생글생글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양손은 일본의 여름 축제 때 추는 윤무 같은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었고,몸은 일본 춤을 출 때처럼 흐느적흐느적 구불거리고 있었다.끔찍한 악몽 같은 움직임이었다.
(p103~104)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우하하하하하하.

하시모토 류타로가 춤추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안 봐도 비디오다.
어떻게 흐느적 거리며 음악과 따로 노는 춤을 췄을지....

그 순간의 하시모토 류타로가 불쌍한 생각도 든다.
옆에 있는 클린턴이랑 블레어가 춤을 추니까
"나도 춰야 되지 않을까...나만 안 추면 이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큰맘 먹고 춤을 춘다는게 그런 망신이었을 테고....

하시모토 류타로는 춤을 출 필요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서있어도 되고,
연주가 끝나면 박수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하시모토 류타로는 왜 춤을 췄을까?
그건....자신감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 중심이 약했기 때문이 아닐까?

남들이 추니까 나도 춰야 한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
남들 다 결혼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
남들 다 대학가니까 나도 가야 한다.

이런 "남들 다 하니까 나도..."가 한국, 일본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가? 자기 자신의 가치관 보다는 이런 사회의 급류에 휩쓸려 가는게 한국이고, 또 그 옆나라 일본 아닐까?

무라카미 류가 일본 사회를 조롱하는 얘기를 읽고 있자니 정말 남의 얘기 같지가 않았다.
개인이 없는 나라.다 함께 휩쓸려 가는 나라.

무라카미 류는 말한다.

일본적 시스템은 개인을 억압한다기보다는 개인이라고 하는 개념이 애당초 상실되어 있다.모두가 어딘가 집단에 소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자기의 기술이나 재능보다도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가에 의해 주위의 평가가 정해져 버린다.(p161)

아....."세상에 이런 나라도 있어?" 하며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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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05-08-27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군요. 어딘가에 속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참 힘든 나라. ㅠㅠ 옛날에 읽은 책인데도 수선님의 리뷰를 읽으니 새록새록한데요. 다시 한 번 펴봐야겠어요. ^^

marine 2005-08-2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저도 8mm 생각하면 토할 것 같아요 전 8mm가 단편 영화 만드는 그런 건 줄 알고 비디오방에서 봤는데, 보는 내내 어찌나 불편하던지...

kleinsusun 2005-08-27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onnight님,이 책 읽으셨군요. 어딘가에 속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나라....
그래서 그렇게 다들 "왜 결혼 안하세요?" 물어보나봐여.ㅋㅋ 핀란드 언제 가세요?

나나님, 8mm보셨구나....단편영화 만드는건지 알고 보셨다면 더더욱 놀라셨겠어요.정말 제가 본 최악의 영화였어요.으윽...

로드무비 2005-08-27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mm 전 재밌게 봤는데......;;;
며칠 전 이 책에 별점 두 개 준 리뷰(punk님)를 읽었어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같은 책도 이렇게 다른 리뷰가 나오는군요.^^

kleinsusun 2005-08-2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8mm 재미있게 보셨다구요? 전 너무 잔인해서....
저도 punk님 리뷰 읽었어요. 무라카미 류가 하도 잘난체를 많이 해서 거기 focus를 맞추면 그냥 확 집어 던지고 싶은 책이예요. 근데...전 일본 얘기가 재미있어서요.
무라카미 류는 잘난척쟁이래요.^^

2005-08-27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내 홈피의 글들을 자주 읽는다는 한 출판사의 기획자가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같은 "치열한 직장생활"을 담은 책을 한번 써 보라고 했다.
기획자는 내가 당연히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를 읽었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하지만...나는 읽지 않았다. 오히려 "과하다" 싶은 제목에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난 페미니스트, 일하는 여자를 이렇게 오버해서 표현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툭하면 전사, 투쟁,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 총 없는 전쟁터 어쩌고.....

난 분명 이 책을 읽기 전에 심각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 책 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이기는 게임만 한다>
<사람들은 나를 성공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벼랑 끝에 나를 세워라>

제목만 들어도 팍팍하다.
이런 책들의 제목은 사뭇 위협적이다.

" 여자가 성공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아니면 이 책 읽고 감동이나 하거나...."
이런 은근한 협박.

조선희의 글들을 <씨네 21>에서 수차례 읽어보긴 했지만,
조선희의 책을 읽은건 처음이다.
조선희의 소설 <열정과 불안>을 몇년 전 샀는데 아직 읽지 않았다.
뭐...그런 책들이 좀...많다.

조선희는 참 "대단한" 여자다.
참 대단한 "성취"를 했다.
<씨네21> 편집장을 하면서 일관되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치적 입장을 유지했다.
흔들림 없이....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멀지만,
여자들이 일할 수 있는 이 만큼의 토양이 갖추어진 것도
조선희 같은 선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한다.

하지만...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는 뭔가..."아쉬움"이 느껴지는 책이다.

이 책은
1부 씨네21, 성공모델 만들기
2부 일하는 여자, 그 뒷모습
3부 영화계에서 보낸 한철
4부 씨네 21 편집장이 독자에게
이렇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부는 책장을 채우기 위해서 부록처럼 달았다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씨네 21에 연재했던 편집장이 독자에게 쓰는 편지를
책의 1/4로 구성했다는건 좀....너무...성의가 없다.
1~2부의 "치열함"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느슨한" 구성이다.

3부 또한 1~2부와 따로 논다.
1~2부의 치열함과 리얼함, 한국사회의 남자위주 조직에 대한 신랄한 비판, 일하는 여자가 만나는 수많은 장애들과 조직의 벽들, 그 극복과 열정....이런 것들을 숨가뿌게 써 나가다가
3부에서 뜬금 없이 "내 인생의 영화" 7편을 소개하고 할 때는
김 다 빠진 콜라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이 책은 1~2부를 확장해서 써야했다. 처음의 박자 그대로 치열하게...
제목은 팍팍하고,
글에서 느껴지는 조선희의 삶은 치열하고,
책의 구성은 느슨하다.

내가 쓰고 싶은 책은,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은

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노라....
내가 얼마나 아프게 피를 흘렸노라....
살아 남기 위해 내가 얼마나 이를 악물고 버텼는가...
하는게 아니다.

뭐...그렇게 치열하게 살지도 못했지만...

나는 "커리어 우먼"이란 말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커리어 맨"이란 말이 없듯이...
바꾸어 말하면...
"일하는 여자"에게 별의 별 수식어와 편견이 따라 다니는 현실이 슬프다.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밥벌이는 자기 스스로 해야하는거 아닐까?

내가 바라는 세상은
여자가 일을 하는게
특별한 것도 아니고, 비장한 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세상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여자들이 더 이상 마이너리티로 존재하지 않는,
더 이상 조직의 거대한 벽에 머리를 쿵쿵 부딪히지 않는,
그냥 밥먹고 화장실에 가듯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일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남자들이 수월하게 가질 수 있는걸 가지려고
아둥바둥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언제쯤....그런 세상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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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08-1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디지만 조금씩,다가오고 있는것 같은데요? ^^
잘 읽고갑니다.

수선님 글 보니까 갑자기 새콤한 싱글벙글복매운탕이 생각나네요.ㅋㅋㅋ

로드무비 2005-08-13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거북함을 콕 집어주셨군요.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과도한 제스처. 그리고 얼렁뚱땅 끌어 모은 원고....
그의 단짝친구 최보은은 더더욱 마음에 안 들어요.
수선님의 균형감각이라니!^^
(반가워요.^^)

kleinsusun 2005-08-13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글벙글...저도 먹고 싶어요. 이제 구미에 갈 일이 없네요. 담에 가시면 포장을 좀...ㅋㅋ

로드무비님, 이 책 읽으면서 참....불편했어요. "치열함"은 작가가 외치는게 아니라 독자들이 느껴야 하는건데....자극적인 제목과 느슨한 구성의 부조화란....
"커리어 우먼"이란 말이 없는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BRINY 2005-08-1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여자 ***니까][여자니까 남자들보다 더 잘하고 조심해야한다]는 말 좀 안듣고 사는 세상이 빨리 되면 좋겠습니다.

kleinsusun 2005-08-13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정말, 간절하게...
"여자는 안된다." , "여자라서 안된다" 이런 말 안듣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moonnight 2005-08-13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이 꿈꾸는 세상에서 저도 같이 살고 싶어요 ^^ 딱 맞춤으로 가슴에 와닿는 리뷰네요. 치열한 페미니스트의 삶 어쩌고 하는 말은 화려한 싱글이란 말처럼 왠지 속빈강정처럼 느껴지거든요. 시원한 글 감사합니다. 당연히 추천!! ^^

바람돌이 2005-08-1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예리한 수선님!
수선님이 꿈꾸는 세상이 바로 제가 꿈꾸는 세상이예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서로가 좀 더 사람답게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왜이리 멀까요? 저는 전투적으로 살기 싫은데...

kleinsusun 2005-08-1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onnight님, 이런 책을 읽으면 갑갑해요.
그런데....왜 그 편집자는 저한테 이 책 얘기를 했을까요?
일하는 여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치열하고 전투적이어야 할까요?
제가 쓰고 싶은 책이랑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요.ㅋㅋ

바람돌이님, 맞아요. 전투적이고 소모적인 삶이 너무 싫어요.힘겹고....
다함께 좀 편안하게, 평등하게,사람답게, 평화롭게...그런 세상을 꿈꿔요.
이런 책들도 사람들을, 특히 여자들을 "강박"하는 것 같아서 읽으면서 편하지가 않더라구요.

2005-08-14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