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 - 2006년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정이현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헬스에서 자전거를 타며 읽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20대 초반 여자 트레이너 : 이런 책도 있어요?
30대 후반 실장 : 이거 삼풍백화점 생존자가 쓴 책이예요?
20대 후반 남자 트레이너 : 수선님도 참~ 삼풍백화점 무너진 지가 언제데...아직도 이런 책을?

사람 좋은 실장의 예상과 달리 <삼풍백화점>은
2006년 현재 김영하와 함께 베스트셀러 작가의 양대산맥인
정이현이 쓴 단편소설의 제목이며, 51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소설집을 읽으며 정이현을 재발견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사실....
정이현은 그저 팔랑팔랑, 가볍게, 감각적으로 쓰는 작가라고,
어떤 글이 팔리는지 아는, 마케팅 감각이 뛰어난 작가라고
비하(?) 또는 은근 무시했었다.

수상작인 <삼풍백화점>과 수상작가 자선작인 <어두워지기 전에>를 읽으며
정이현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삼풍백화점이 폭발하듯이
산산이 깨져버렸다.

정말...놀랐다.
그녀의 두 작품을 읽으며 느꼈다.
작가는 진화한다!

정이현의 문체는 여전하다.
톡톡 튀고, 가볍고, 도발적이다.

심사평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가독성" 면에서는 단연 최고다.
난독증 증세를 보이는 고딩들이 읽어도 일단 페이지는 넘길 것 같다.

잘 읽히는 글은 무게감이 없고 그저 가벼운 글로 오해받기 쉽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정이현의 두 작품은,
특히 <어두워지기 전에>는 정말...장난이 아니다.
누가 <어두워지기 전에>를 읽고 정이현이 "가벼운"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소설집을 읽으며 건진 또 하나의 수확은
정지아라는 걸출한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지아 같은 훌륭한 작가를 여태 모르고 지냈던 게 아쉽다.

이 소설집에 실린 정지아의 <풍경>은
2006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정지아의 <풍경>을 수상작으로 선정한 이효석 문학상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낼름 주문했고, 지금 읽고 있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별로였던 작품은,
그러니까 읽으면서 끝까지 읽을까 말까 망설였던,
살살 짜증이 났던 작품은
이응준의<약혼>이었다.

소개팅에서 스펙은 뛰어나나 너무 잘난 척을 하는 남자를 만난
그런 기분이었다. <약혼>을 읽으며 느꼈다.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많은 "지식"을 얻을 수도 있구나!
그러나..."지식"이라는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작품의 주제의식과 독자의 흥미가 솔솔 빠져나가는 비극이...

일요일 저녁, 편한 자세로 앉아 소설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
6시그마 BB(Black Belt) 인증 시험!

아...차라리 태권도 까만띠면 열심히, 열성적으로 준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열람실로 올라가 시험 공부를 하자!
밥벌이 보다 중요한 게 무엇이랴?

초가을 저녁, 어느 도서관 매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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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9-10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정이현을 인정했다니, 저도 그렇게 하렵니다.
-말 잘듣는 마태-

다락방 2006-09-10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이현의 단편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보고 그녀가 좋아졌어요. 그 단편집에 실린 동명의 소설과 바로 그 뒤에 실린 [트렁크]라는 단편이 좋아서요. 그런 정이현을 재발견 하셨다니 기분이 좋은데요? 헤헷 :)
그나저나 시험공부라니..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군요. 힘내세요, 수선님.

kleinsusun 2006-09-1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미녀 말만 잘 들으시는거죠? 음하하하

다락방님, <트렁크> 저도 잼 있게 읽었어요. 그때 까지만 해도 구성이 뛰어난 작가,하지만 넘 표피적인.....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번 <어두워지기 전에>는 정말 경탄하면서 읽었어요. 만약 안 읽으셨으면 강추!^^

시험공부 오랜만에 하니 힘드네요.ㅎㅎ 홧팅!

비로그인 2006-09-1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가 박희정이 시대성에 있어서 세밀한 작가라면, 정이현도 그렇지요? 저는 그녀의 다른 소설집에서 각주까지 달아가며 쓴 단편들을 보고, 그리 생각했어요. 만약 타임캡슐에 넣어두면, 우리가 뭘 먹고 마시는지 다른 이들이 알기에 적합하겠구나, 하고.

moonnight 2006-09-1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녀의 전작을 좋아했지만 스타일리쉬하고 가볍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수선님 리뷰를 읽으니 필독해야 할 책이 한 권 더 느네요. ^^;
 
생의 이면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의 신작이 나왔다. 그것도 장편. <빛의 제국>
최고 인기 작가답게 모든 일간지는 <빛의 제국>을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보도했다.
<빛의 제국>은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잊혀진 남파간첩 김기영의 24시간을 아침 7시 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시간별로 묘사했다.
김영하의 오랜 팬 답게 책이 나오자 마자 샀다.
아침 7시~8시까지의 얘기만 읽었지만...
(지금 읽어야 할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행복한 고민^^)

제목은 <生의 이면>인데 왜 김영하의 <빛의 제국> 얘기를 하냐구?

<빛의 제국>에는 첫 챕터,그러니까 거의 처음부터
고양이한테 밥 주고, 주인공 김기영이 고양이를 쓰다듬고 하는 설정들이 보인다.

김영하는 고양이를 키운다.
(그의 여러 산문들에서 각별한 고양이 사랑을 알 수 있다.)
만약 김영하가 강아지를 키운다면,
소설의 설정은 고양이 대신 강아지가 될지도 모른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냐?
소설은 어떤 소설이나 다분히 "자전적"이다.
물론 허구지만, 최소한 어떤 소설에나 "자전적 요소"는 있다.

<生의 이면>은 각별히 "자전적"인 소설이다.
주인공 박부길과 작가 이승우가 헛갈릴 정도다.
이승우 또한 <生의 이면>은 자전적인 작품이며,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生의 이면>은 제목 만큼이나 "진중한" 작품이다.
주제는 "살부의식".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이 만큼 "살부의식" 같은 어려운 주제를 정면으로 다른 소설은 드물 것 같다.

너무나 치열해서 쇼파에 기대거나 침대에 누워서 읽기가 부담스럽다. 작가에게 미안한 기분이 든다고 할까....

하루키나 바나나 같은 다소 가벼운 소설들에 익숙한 독자라면
다소 읽기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무겁고 처절하며, 게다가....장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솔직히 힘들지만(결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하지만(너무도 치열해서),
침대나 쇼파 보다는 도서관이나 책상에 자세를 잡고 앉아 읽어야 할 만만치 않은 소설이지만,

타협하지 않고, 피해가지 않고
너무도 본연적인 인간의 문제를 정면에 부딪혀 쓴
"정통" 소설을 만나 보고 싶다면

그 하나의 선택으로 <生의 이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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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8-21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좋아서 10년 전에 책이 나왔을 때 바로 읽었어요.
'정통'에 한 마디 덧붙인다면 정통본격......
요즘은 소설을 많이 읽으시는군요.^^

moonnight 2006-08-2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무서운 -_- 소설이로군요 요즘 스스로도 너무 가벼운 책들에 익숙해져버린건가 싶어요 고민해야 하고 머리를 써야 하는 책은 자꾸 피하게 되는 것이. 반성반성 ㅠㅠ;

stella.K 2006-08-21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우 선생 글이 원래 그렇죠. 저도 책 하나 받아 놓은 게 있긴 한데 부담스러워서 언제 읽을런지 모른답니다. 흐흐

2006-08-21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6-08-22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부의식 하니까..예전에 봤던 한승원 소설이 생각나네요.10여년 전에라 제목은 가물가물---일종의 살부계였는데.친일파 아버지를 둔 자식들이 서로 상대의 아버지를 죽이는 모임같은 것이었어요.불의를 막돼 존속살인이라는 윤리를 저버리지 않는 -어떻게 보면 눈가리구 아웅하는-방식이었지요.그 살부계 주인공들과 80년대 정치인의 아들인 주인공이 두 축이었어요.책 제목이 뭐더라?

2006-08-24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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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투성이 연인>,<장밋빛 인생> 등 정미경 소설에 대한 주변의 호평을 여러번 들었지만, 정미경 소설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이번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으며 처음 만난 정미경의 소설.
아쉬웠다. 왜 진작 읽지 않았을까?

정미경의 소설은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그러니까..."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다." 라는 말이 아니라,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라는 말이다.

가볍게 슬슬 읽히면서도, 잠복하고 있던 몇몇 독한 문장들이 펀치를 날린다.
잠시도 긴장을 풀수 없는 스릴러...가 아니라,
긴장을 조였다 풀었다 리듬을 타게 한다.

허구한 날 주인공은 출판사 직원이나 잡지 기자, 그것도 아니면 방송 작가나 소설가,
소재는 불륜, 배경은 지방 소도시....
이런 여자 작가들의 고만고만한 소설에 언젠가부터 시큰둥했다.

그런데....정미경의 소설은 삶은 계란 세개를 연거푸 먹고 마시는
차가운 "칠성 사이다" 같았다. 그 통쾌함과 후련함이란!
정미경이 옆에 있다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소설을 읽으면서 "고맙다"라는 생각이 든건 처음이다!)

대상수상작인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
정미경의 자선 대표작인 <나의 피투성이 연인>,
우수상 수상작인 김영하의 <아이스크림>,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를 읽고 독서의 "양극화" 또는 "빈익빈 부익부"를 생각했다.

<개그콘서트>를 50~60대가 보면 별 재미가 없다.
왜? 패러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그맨들이 <친절한 금자씨>를 꼬아서 웃기고 있는데,
<친절한 금자씨>를 보지 못한 사람은 웃기지가 않는다.

김경욱의 소설 <위험한 독서>도 마찬가지다.
<위험한 독서>에 나오는 소설들을 읽었거나,
최소한 그 소설들을 쓴 작가의 스타일을 아는 사람에게만 웃기다.

인간의 성적 욕망을 대담하게 표현했던 D.H.로렌스였다면 어땠을까.....
하드보일드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적 방식은 어떤가...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제임스 조이스의 방식은 어떨까...
-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中 -

이런 식이니 읽는 이에 따라서 유머가 될수도 있고,
한 없는 지루함이 될 수도 있다.
(후자라면 다시는 김경욱의 소설을 읽지 않을 것이다!)

심사평에서 은희경은 김경욱의 소설을 평하며
"유머도 강해져서 소설을 잘 받쳐준다." 라고 했는데,
김경욱의 유머는 제목 <위험한 독서>만큼이나 "위험한" 유머다.

나머지 우수상 수상작인
구광본의 <긴 하루>, 함정임의 <자두>, 전경린의 <야상록>,
윤성희의 <무릎>도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 주었다.

구광본의 <긴 하루>는 몇장 안되는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제목 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새로운 형식, 새로운 시도도 좋지만 내겐 상당히 읽기 힘든 소설이었다.

정미경, 김경욱의 단편집을 읽어볼 계획이다.
살짝꿍....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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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6-08-18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수선님. 너무 반가워요. 정미경을 좋아하게 되셨다니 말예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도, [장밋빛 인생]도 정말 너무너무 좋아요. 특히 [장밋빛 인생]은 정말이지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을 만큼 맛있는 소설이예요. 수선님 말씀처럼 불륜이 배경인것은 흔하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이 남다르다고 할까요. '김경욱'이라면 제가 잘 모르지만, '정미경'에게 설레이신다면 반드시 만족하실거예요. 아, 기쁘다, 정말 :)

잉크냄새 2006-08-1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란 세개 후의 칠성 사이다라면.......트림 같은 소설이군요.^^

moonnight 2006-08-18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게 재미있나요? 제가 모르는 작가인데. 저도 읽어볼래요!! >.<

kleinsusun 2006-08-18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다락방님도 정미경을 좋아하시는군요. <장밋빛 인생> 빨리 읽어봐야 겠어요. 요즘 제가 읽는 책들이 다락방님의 환영을 받네요.^^ 호홋 언젠가 다락방님과 술을 마신다면 정말 술 안주가 필요 없겠어요. 기대만빵!^^

잉크님, 음하하, 네....트림 같은 소설이예요.^^

달밤님, 네...정미경 소설 강추!^^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선배 중에 이런 남자가 있다.
키 크고(187cm) 잘 생기고, 옷 잘 입고, 잘 놀고....
아저씨 같은 와이셔츠는 입지 않고 항상 랄프 로렌 셔츠를 입는다.(랄프 로렌 마니아)
소품도 다 명품들이다.
루이뷔통 지갑에, Lazy Susan 시계, Zegna 넥타이 등등...

70년생인데 아직 결혼 안하고 있으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playboy겠거니....
구속 당하지 않고 이 여자 저 여자하고 놀고 싶은가 보다... 생각한다.

나도 그 선배를 처음 봤을 때,
아주 전형적인 playboy인지 알았다.

그런데 한 번은 그 선배랑 둘이서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별로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무슨 고해성사를 하듯이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는
진실게임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 얘기를 했다.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너무너무 싫었다고...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집에서 절대 권력자였고, 엄마는 아버지의 노예 같았단다.
아버지의 절대권력은 자식들에게도 어마어마해서
아버지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단다.

자기는 결혼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자기는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데,
문득문득 자신의 모습에서 그토록 싫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한다.
어떨 때는 거울을 보다가 아버지랑 너무 닮아서 놀란다고 했다.
자기가 결혼을 하면 자기 아버지 같은 가장이 될까봐 그것이 너무도 두렵다고 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으면서 그 선배 생각을 했다.
정신분석이건 심리상담이건 뭐건,
결국 한 인간의 거의 모든 문제와 정체성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세진이란 여자가(김형경 자기 얘기다)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 들이는 내용인데,
세진의 그 많고 복잡한 문제들이 모두 유아기 때 부모와의 관계에 있었다.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세진은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하고 외할머니한테 보내졌는데
자신이 부모의 이혼에 책임이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자란다.
(<사람풍경>에 김형경이 자기 얘기를 쓴 거랑 똑 같다.
 읽으면서 소설인지 자서전인지 마구 헛갈렸다.)

항상 단정적으로 말하고, 너무도 도덕적이고, 도무지 애정표현을 할 줄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심지어 딸에게도 절대 신세지지 않으려 하고, 
모든 것을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엄마가 싫고 화가 나지만
자기도 엄마랑 똑 같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소설로 쓴 정신분석 이야기" 처럼 느껴진다.
그 만큼 정신분석을 받는 과정이 세밀하고 길게 묘사되어 있다.

세진은 또는 김형경은 (하도 자전적이라 읽으면서 내내 헛갈렸다.<사람풍경>을 먼저 읽어서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왜 감기가 걸려도 툭하면 병원에 가면서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정신분석은 받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항변한다.

소설 속에서 세진은
정신분석을 좀더 일찍 받았다면
그렇게 자기자신을 혐오하며 혼란 속에서 살지 않았을 꺼라고 한다.
또 엄마도 정신분석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한 시간 면담료가 7만원인데, 그 돈이 결코 아깝지 않다는 말도 나온다.

귀가 얇은 나는 정신분석을 한번 받아볼까 잠시 솔깃했다.
그러다 작년에 들은 성형외과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 신경정신과 애들 방송 나와서 말만 잘하는 거지,
  실제로 상담해서 환자 치료하는 의사들 몇 안돼.
  우울증 약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아? 다 약물치료한다고...
  방송 나와서 썰 풀고..."

뭐...이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금을 내고 모르는 의사 앞에 앉아서
억지로 옛날 기억을 들추어내서 말하며 어깨를 들썩거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정신분석을 받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싸~악 가신다.

"내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결혼하기가 두렵다는 선배나,
이런 정신분석 사례들을 읽을 때면
애를 함부로 낳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성숙한 부모가 애를 낳아
끊임 없이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끊임 없이 애를 학대하고,
그래서 또 하나의 상처 받은 어른이 생겨나고...

"내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결혼하기가 두렵다는 선배는
결혼을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 아닐까...
보통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거나,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말이다.

나도....내 자신이 엄마, 아빠의 "미니 인간", "복제 인간" 처럼 느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가끔씩 징그럽기도 하다.

우리 엄마는 자신을 위해서 돈을 한푼도 쓰지 않는다.
그 흔한 택시 한 번 타지 않고,
좋은 미장원 좀 가라고 그렇게 사정을 해도 좁아 터진 동네 미장원에 가고,
화장품은 샘플까지 아껴 가면서 쓰고...

그런 엄마에 대한 반감으로 나는 돈을 흥청망청 썼다.
출장을 갈 때 마다 면세점에 들러
엄마한테 SK II, 겔랑 이런 비싼 화장품을 사다 주고,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한벌 통째로 사다 주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좋아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 돈 아껴 써라. 저금 해야지."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엄마에 대한 반감으로
흥청망청 돈을 쓰고 다니면서
또 내 소비행위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이래도...저래도...자유롭지 못하다.
부모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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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1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01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5-08-02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아버지하고 성장환경도 다르고 삶의 경험도 다르고 문화적 체험도 다른데 왜 저마다 아버지의 복사물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지 전 잘 모르겠네요 혈통에 대한 신비주의 같아요(혹은^^아들이라고 아버지 피만 받는 것도 아닐 텐데...)

로즈마리 2005-08-02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듣기로도 정신상담을 받은 경험을 기반으로 쓴 것이라고 하더군요. 거의 자서전적 소설이겠죠.^^;; 실은 전 상담을 많이 받아봤는데, 학교 생활 상담소에서라 돈은 내지 않았어요. 그래도 심적으로 도움은 많이 받았던 듯...약간 오버해서, 이제 제가 남을 상담해줘도 좋을 지경이예요..^^;;;;;;;;;; 수선님 말씀대로 대체로 가족관계에서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

야클 2005-08-02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버지랑 완전히 딴 판인데요? 크면서 보고 자라서 닮았으려니 하시지만 커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도 많이 좌우되는듯.
그나저나 여행에서 벌써 돌아오셨나요? @.@

moonnight 2005-08-0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우리 수선님이시잖아요. ^^ 저도 궁금. 벌써 돌아오신 건 아닐테구.. ;;
수선님의 그 선배는 정말 결혼할 자격이 충분한 거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줌으로써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수선님과 무척 가까우신가봐요. (뭔가 핑크모드를 상상 ^^;;)
가족, 특히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지만 전 그렇다고해서 모든 걸 '부모가 잘못 길러서', 의 투는 받아들이기 힘들더라구요.

드팀전 2005-08-0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해요.저희 아버지는 비교적 자유롭고 자상한 편입니다.가정적이시기도 하죠.그런데 할아버지는 무지하게 엄하고 권위주의적이었다고 합니다.예전에 너무 무서워서 집에 안들어가고 도망다닌적도 있다고 하더군요.그때 아버지는 생각하셨데요. '내가 다음에 아들낳으면 절대 우리 아버지처럼 무섭게 하지말아야겠다.' ㅋㅋ ...저희 부모님은 맞벌이셨는데.그래서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가사분담이 상대적으로 많았습니다.청소.빨래.설겆이...등등.도시락도 아버지가 싸주신 경우가 많았죠.ㅋㅋ 어쨋거나 아버지의 선택 덕분에 전 좀 널널하게 컷습니다.저는 그게 제 생각의 범위나 관심의 범위를 마구 확장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억압이 적었기때문에... 전 제 아버지를 닮아가려합니다.그분 역시 시대적 인식의 한계에 갇혀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열려있었던 분이었고...저두 그런 방향을 선택하겠지요.

mannerist 2005-08-02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나 제 경우를 돌아보면, 작용과 반작용. 가족이 미치는 영향은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저렇게 살아야지(작용)' '저렇게 안살아야지(반작용)'근데 상대적으로 똑같이 널널하게 컸어도, '작용'에 의해서 널널하게 된 사람과 '반작용'에 의해 널널하게 된 사람은 꼭 결정적일때 차이가 나요... 뭐 사람하기 나름이겠지만. 그래서일까. 난 불편해가지구 저 책 끝까지 못 읽겠더라구요. 전역한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지 싶네요.=)

클리오 2005-08-02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그래서 여자들이 참 좋아했었죠.. 그 주인공 뿐 아니라 자신도 치료의 실마리를 얻는 듯한 느낌이요.. 정말 부모와의 관계는, 참.... ㅎ

2005-08-03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05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6-08-18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 작가는 말이죠, 참 공부를 많이 하는 노력파 작가인것 같아요.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에서도 그렇고 이 작품에서도 그렇고. 참 노력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가였어요. 왜 이 책중에 서로 모여서 상담하는 부분 나오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의 컴플렉스를 보상받기 위해 상대방을 선택한다, 는 부분말예요. 굉장히 공감했던 기억이 나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 소설은 진.정. 웃기기로 유명하다.

이 소설을 읽은 수많은 사람들의 독후감을 요약하면
"통쾌하게, 눈물이 나도록 웃기는 책" 또는
"웃다가 허리가 휘어지는 책".

소설가 김영하도 "웃자"라는 제목의 리스트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올렸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그 리스트에
성석제의 <조동관 약전>,
현태준의 <뽈랄라 대행진>
무라카미 류의 <69>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웃기는 책"으로 나를 유혹했다.

이 책을 산건 1년 전.
아....정말 읽고 싶었다.
책장에서 이 책과 눈이 마주칠 때 마다 읽고 싶었다.
그런데...왜 안 읽었느냐구? 아껴 읽고 싶어서?

아니다.아니다.아니다.

이 책을 읽기가 두려웠다.
뭐가 두렵냐구? 웃겨서 기절할까봐?

아니다.아니다.아니다.

난 "야구"가 두려웠다.
야구를 기억하는게 두려웠다.
난...야구를 잊고 살고 있었다.

내가 야구장에 처음 간건, 2000년 여름이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2000년 여름 잠실, LG와 두산의 경기.

야구장은 생각 보다 훨씬 컸고,
처음 바다를 보는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야구장에 가게 된건....그건....
야구를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취미도 특기도 없었던 그 남자.
야구 하나만은 정말 정말 좋아했다.
야구 얘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거렸다.

새로운 일이나 관심거리를 만나면 항상 관련된 책을 찾아 읽는 나는 레너드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 1~2>까지 읽었다.이 책... 야구경기 규칙 설명하는 그런 책 아니다. 전문서다.
"산업"으로서의 야구를 설명하는...

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난 정말 야구에 관심이 없었다.
야구 규칙도 제대로 몰랐다.
<아는 여자>에서의 이나영 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고나 할까...

2000년 여름.
그 남자를 만나면서 나는 야구를 알게됐다.
야구장에 가고,
야구장에서 실컷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하고,
KFC 팝콘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좋아라 하고,
<야구란 무엇인가> 책까지 읽으며 공부를 했다.
기왕 시작하면 "파고야" 마는 내 생격은
야구를 "공부"하게 했다.
야구는...참 재미있었다.
어찌 야구를 모르고 인생을 살아왔을까...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남자와 헤어진 후...
다시 야구에 관심이 없어졌다.

야구장에 한번도 가지 않았고,
TV에서 야구중계를 하고 있어도 드라마로 돌려 버렸고,
누가 야구 얘기를 하면 하품을 했다.
이번 시즌에 어떤 팀이 우승을 했는가 하는
그냥 신문만 대충 봐도 알 수 있는 정보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정말 웃긴다는,
너무 웃겨서 읽으면서 기절할 뻔 했다는 소설이...
하필 야구를 소재로 한 거였다.

야구를 멀리 하듯이,
난 이 소설도 멀리 했다.
의식적으로 멀리하지 않아도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어제...
설 연휴를 달랑 하루 남겨두고
이 책을 읽었다.

정말....눈물이 나도록...웃겼다.
읽으면서 연신 키득거렸다.
아....웃겨,웃겨,정말 웃겨.
앞으로 박민규가 책을 내면 계속 사주고 싶을 정도로 웃기다.

"가벼움"과 "진지함"이,능숙한 성석제의 칵테일처럼 잘 섞이지 않고,
진지할 때 갑자기 너무 진지해져서 읽는 이를 당황하게 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웃긴 소설을 읽고 쓸데 없는 "썰"을 푸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자제한다.
썰이야 나같은 회사원들 가만 있어도 평론가 아저씨들이 넘쳐나게 푸시니깐...

68년생 소설가 박민규.그가 쓴 작가의 말.

이 소설을 시작했을 무렵엔, 아무 대책이 없었다.
4번의 이직 끝에 결국 사표를 냈고,내친김에 빚을 얻어 노트북을 사버렸다.여름이었다.늘 그랬든 모든 게 엉망이었지만,기분은 좋았다.언제나 그랬듯,맴맴맴.

그래서 간 곳이 삼천포였다.삼천포도 처음,소설을 쓰는 것도 처음이었다.모든 게 처음이었지만,여전히 기분은 좋았다.바라던 소설을 쓸 수 있어 모든 게 흡족.단지 비타민 C가 조금 부족한,서른 두 살의 나이였다.


박민규처럼 낙관적이면 좋겠다.
연휴를 하루 남겨둔 2월, 실컷 놀고 감기에 걸렸다.콜록 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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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2-1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웃긴 소설을 읽고 쓸데없는 썰을 푸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호호호~~~ 왕창 웃고 갑니다.^^

nemuko 2005-02-1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구 감기 걸리셨군요. 푸욱 쉬실래도 이젠 연휴가 끝나버린건가요...
이 소설이랑은 상관없는 얘긴데. 저도 스포츠랑 친하지 않은 관계로 월드컵 전까지는 축구에 포지션이란게 있다는 것도 몰랐답니다. 다같이 우루루 뛰다가 젤 앞에 있는 사람이 골을 넣는 건줄 알았다지요. 어제 밥먹다 그 이야길 꺼냈는데 어찌나 무시를 당했던지 ㅠ.ㅜ
여튼 감기 얼른 나으시길 빕니다^^

kleinsusun 2005-02-1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진정 웃기기에 썰풀기가 미안한 책이예요. 로드무비님도 읽으셨나요?
numuko님,"다같이 우루루 뛰다가 젤 앞에 있는 사람이 골을 넣다". 넘 재미있어요!!!
저도 월드컵할 때 축구장 첨 가봤어요. 한국-터키 3~4위전 보려고 대구까지 갔었죠.
TV 중계볼 때는 클로즈업도 해주고, 해설도 있고 한데 축구장에서 보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더군요.심지어 누가 골을 넣었는지... 누구나 스포츠를 좋아할 수 있나요? 설날에도 축구 안봤어요.ㅋㅋ

코마개 2005-02-2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차라리 웃기던 그 80년대를 더더욱 웃기게 쓴 책이죠. 성석제 소설중에 '아빠 아빠 불쌍한우리아빠'도 죽여주죠.

야클 2005-04-1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anks to 한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