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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선배 중에 이런 남자가 있다.
키 크고(187cm) 잘 생기고, 옷 잘 입고, 잘 놀고....
아저씨 같은 와이셔츠는 입지 않고 항상 랄프 로렌 셔츠를 입는다.(랄프 로렌 마니아)
소품도 다 명품들이다.
루이뷔통 지갑에, Lazy Susan 시계, Zegna 넥타이 등등...
70년생인데 아직 결혼 안하고 있으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playboy겠거니....
구속 당하지 않고 이 여자 저 여자하고 놀고 싶은가 보다... 생각한다.
나도 그 선배를 처음 봤을 때,
아주 전형적인 playboy인지 알았다.
그런데 한 번은 그 선배랑 둘이서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별로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무슨 고해성사를 하듯이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는
진실게임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 얘기를 했다.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너무너무 싫었다고...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집에서 절대 권력자였고, 엄마는 아버지의 노예 같았단다.
아버지의 절대권력은 자식들에게도 어마어마해서
아버지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단다.
자기는 결혼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자기는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데,
문득문득 자신의 모습에서 그토록 싫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한다.
어떨 때는 거울을 보다가 아버지랑 너무 닮아서 놀란다고 했다.
자기가 결혼을 하면 자기 아버지 같은 가장이 될까봐 그것이 너무도 두렵다고 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으면서 그 선배 생각을 했다.
정신분석이건 심리상담이건 뭐건,
결국 한 인간의 거의 모든 문제와 정체성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세진이란 여자가(김형경 자기 얘기다)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 들이는 내용인데,
세진의 그 많고 복잡한 문제들이 모두 유아기 때 부모와의 관계에 있었다.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세진은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하고 외할머니한테 보내졌는데
자신이 부모의 이혼에 책임이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자란다.
(<사람풍경>에 김형경이 자기 얘기를 쓴 거랑 똑 같다.
읽으면서 소설인지 자서전인지 마구 헛갈렸다.)
항상 단정적으로 말하고, 너무도 도덕적이고, 도무지 애정표현을 할 줄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심지어 딸에게도 절대 신세지지 않으려 하고,
모든 것을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엄마가 싫고 화가 나지만
자기도 엄마랑 똑 같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소설로 쓴 정신분석 이야기" 처럼 느껴진다.
그 만큼 정신분석을 받는 과정이 세밀하고 길게 묘사되어 있다.
세진은 또는 김형경은 (하도 자전적이라 읽으면서 내내 헛갈렸다.<사람풍경>을 먼저 읽어서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왜 감기가 걸려도 툭하면 병원에 가면서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정신분석은 받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항변한다.
소설 속에서 세진은
정신분석을 좀더 일찍 받았다면
그렇게 자기자신을 혐오하며 혼란 속에서 살지 않았을 꺼라고 한다.
또 엄마도 정신분석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한 시간 면담료가 7만원인데, 그 돈이 결코 아깝지 않다는 말도 나온다.
귀가 얇은 나는 정신분석을 한번 받아볼까 잠시 솔깃했다.
그러다 작년에 들은 성형외과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 신경정신과 애들 방송 나와서 말만 잘하는 거지,
실제로 상담해서 환자 치료하는 의사들 몇 안돼.
우울증 약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아? 다 약물치료한다고...
방송 나와서 썰 풀고..."
뭐...이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금을 내고 모르는 의사 앞에 앉아서
억지로 옛날 기억을 들추어내서 말하며 어깨를 들썩거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정신분석을 받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싸~악 가신다.
"내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결혼하기가 두렵다는 선배나,
이런 정신분석 사례들을 읽을 때면
애를 함부로 낳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성숙한 부모가 애를 낳아
끊임 없이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끊임 없이 애를 학대하고,
그래서 또 하나의 상처 받은 어른이 생겨나고...
"내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결혼하기가 두렵다는 선배는
결혼을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 아닐까...
보통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거나,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말이다.
나도....내 자신이 엄마, 아빠의 "미니 인간", "복제 인간" 처럼 느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가끔씩 징그럽기도 하다.
우리 엄마는 자신을 위해서 돈을 한푼도 쓰지 않는다.
그 흔한 택시 한 번 타지 않고,
좋은 미장원 좀 가라고 그렇게 사정을 해도 좁아 터진 동네 미장원에 가고,
화장품은 샘플까지 아껴 가면서 쓰고...
그런 엄마에 대한 반감으로 나는 돈을 흥청망청 썼다.
출장을 갈 때 마다 면세점에 들러
엄마한테 SK II, 겔랑 이런 비싼 화장품을 사다 주고,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한벌 통째로 사다 주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좋아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 돈 아껴 써라. 저금 해야지."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엄마에 대한 반감으로
흥청망청 돈을 쓰고 다니면서
또 내 소비행위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이래도...저래도...자유롭지 못하다.
부모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