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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자, 딜비쉬 - 딜비쉬 연대기 1, 이색작가총서 2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너머 / 2005년 5월
평점 :
젤라즈니의 전작주의자로서, 이 책을 안 살 수 없긴 하다. 젤라즈니와 르귄을 동시에 좋아하다니, 난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일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세상에는 그 둘을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이 예상 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라딘을 여행하면서 알았다.
그래 사람에게는 이중성이라는 게 있지. 나의 심리를 들여다 볼작시면, 르귄은 존경하고 젤라즈니와는 연애하겠다는 거겠지. 그래서 이 사람의 소설을 읽으면 가슴이 뛴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들이 다 마초임에도 불구하고 아, 진짜 멋있다, 이러면서 그 품에 나 자신을 맡기고 싶어지는.......(뭔 주착이랴, 아줌마가)
그게 왜 그런걸까, 항상 의문이었는데 어느날 라일라님이 올린 페이퍼에 마초의 해악도에 관한 자세한 분석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젤라즈니의 소설에 나오는 마초는 해악도가 아주 가벼운 편에 속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다니, 뭐 나만 이상한 건 아닌듯.
< 마초 의무주의자>
"내가 널 지켜줄게. 조건 없이."
해악도 15.
순수 마초 부류 중에서 해악도가 가장 낮다. 마초의 덕목 중에서 권리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의무에만 "싸나이"의 근성을 걸고 정진하는 부류다.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죄"로 스트레스를 주긴 하지만, 그 이상의 혜택이 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으나, 아쉽게도 숫자가 많지 않다.
젤라즈니의 주인공들은 다 이 부류이다. 사랑하는 여자는 무조건 보호, 무한히 큰 능력과 힘을 가지고, 무한의 생을 살면서('불사'를 빼고 젤라즈니 얘길 할 순 없다) 사랑하는 여자의 유한한 삶으로 인한 이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고독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너무 멋지지 않은가. 물론 그의 소설이, 문체가, 그 주인공들이 폼생폼사에 올인(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유치한 폼생폼사는 못봐주게 역겹지만 그것도 어느 경지를 넘어서면 알면서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 딜비쉬는 아직 좀 약하다. 계속 이어질 거라니 클라이맥스까지 보고 나야 뭐라 말하겠다만 단편이 계속 이어지는 듯한 구조도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고, 아무래도 그의 주요 걸작들을 다 보고 난 후에 보게 된 딜비쉬는 임팩트가 덜한 듯. 어쨌든 그의 소설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불사, 복수, 이런 것들이 여기서도 여전히 얘기된다. 주로 복수가. 그리고 다른 소설과는 달리 SF적 요소는 없는 순수 판타지이다.
이어지는 연작에서 그의 복수가 성공할지, 그가 딱딱히 굳어버린 동상의 몸에서 깨어나면서 악마에게 지불한 것이 무엇인지 나오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