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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과 영혼의 경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오근영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히무로 유키는 심장외과 수련의로 격무에 시달리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해가며 의술을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 심장에 문제가 있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는 사명감도 없진 않지만, 사실 그녀에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녀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대동맥류라는 심장 질환으로 수술을 받다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아버지의 집도의는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인 니시노조 선생으로 누구나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던 수술에 실패해 충격을 준 바 있다. 당시에는 수술도 사람이 하는 것이라 늘 100퍼센트 성공할 순 없었을 것이라며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아버지 사후 니시노조 선생과 유키의 어머니가 사실상의 애인 관계로 발전함에 따라 의혹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혹시 니시노조 선생이 어머니를 얻기 위해 일부러 수술에 실패해 아버지를 죽인 건 아닐까?"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들에 가야 뱀을 잡는 법, 유키는 그 의혹을 풀기 위해 니시노조 선생의 지근거리를 맴돌게 된 것이다.
한편 유키가 일하는 병원에는 또 다른 불운한 기운이 감돈다. 전자기기 회사의 엔지니어인 나오이 조지가 병원 간호사에게 접근해 병원의 정보를 빼내가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산업 스파이? 아니었다. 그는 병원이 은폐하고 있는 의료사고 기록을 공개하지 않으면 병원을 폭파하겠다는 내용의 협박장을 보낸다. 아무리 찾아봐도 별다른 의료사고 기록이 없는 병원 측은 난감해하고 결국 경찰에 신고하지만 협박장은 계속되고 중요한 수술이 잡혀 있는 날을 타깃으로 한, 목적을 알 수 없는 조지의 병원 테러 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간다.
<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이렇듯 유키의 과거에 얽힌 비밀과 현재 조지가 꾸미는 테러가 맞물려 돌아가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메디컬 스릴러다. 언제나 그렇듯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구구절절한 해설이 필요없고 짤막한 내용 소개면 충분하다. 워낙 흥미진진한 플롯을 잘 짜기로 이름이 높고, 작품의 핵심 콘셉트 자체가 시쳇말로 독자를 백발백중 낚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 손에 든 독자들은 아마 대단히 기대가 컸을 것이다. 지난 날의 미스터리한 의료 사고와 현재의 긴박한 테러가 겹친다니, 이거 하나도 아니고 둘이네, 완전히 재미의 혼수상태로 빠져들겠군, 하면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작품에서는 살짝 기대를 접어도 좋을 듯하다. 아니, 어쩌면 다른 의미에서의 혼수상태를 맛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비밀>이나 <게임의 이름은 유괴>같이 뒷 이야기가 전혀 짐작이 안 되는 작가의 페이지터너들에 비해서 이 소설은 너무 빤하다. 마치 처음 시도되는 무슨 인터랙티브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으니까. 내가 상상한 내용 그대로가 페이지에 펼쳐지니 심지어 신기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히가시노 게이고에 익숙한 독자 혹은 그렇지 못한 누가 읽어도 점쟁이가 방구들에 앉아 천리 밖을 내다보듯 훤히 결말이 내려다 보일 것이다. 화투 패 다 까고 치면 그걸 무슨 재미로 하나. 적어도 미스터리라는 딱지를 붙이고 나온 작품이라면 이보다는 더 치밀했어야 한다고 느낀다. 하다못해 반전이라도 그럴싸한 게 나와주면 좋았을 텐데, 게이고가 요즘 줄기차게 밀고 있는 감동 코드에 대한 집착으로 한 방을 끝까지 기대했던 내 기대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용의자 X의 헌신> <붉은 손가락>의 신파에 가까운 감동으로 제법 재미를 보았을까. 이 작품도 기어이 독자를 울리려 하는 것 같은데, 감동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지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언급한 두 작품이 출중한 미스터리적인 재미에 감동의 요소를 버무려 미스터리 애호가와 보통 독자들을 다 만족시킬 수 있었다면, <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미스터리로서는 실패했고,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끝에 가면 모두가 다 착해지는 종잇장같이 얄팍한 사람들이 빚어내는 억지 감동 일변도라 점수를 높게 줄 수 없다. 사실 이 작품에서 조지가 꾸미는 계획이라는 것도 대전제 자체가 말이 안 되고 너무 불안요소가 많아, 이 책을 보고 실제로 같은 계획을 꾸미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고 싶을 지경이니까. <백야행>이나 <편지> 같은 작품들을 보면 단순히 관객의 눈시울을 적셔 주머니를 털어내는 말랑한 작가만은 아닌데, 요즘 입금이 잘 되는 모양인지 약간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다.
<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몇몇 흥미로운 소재를 짜집기해서 철저히 기계적으로 쓴 작품이라 장인의 화려한 솜씨는 느낄 수 있을지언정 깊이 배어나오는 맛이 없다. "그 정도 벌었으면 이제는 좀더 매 작품마다 시간과 공을 들여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셔야죠"하고 작가에게 투정하고 싶어진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굉장한 다작 작가라 그만큼 범작이나 태작이 나올 확률도 높은 것 같다(당연히 걸작이 나올 확률도). 물론 범작이라도 게이고 특유의 미칠 듯한 '읽히는 맛'은 항상 있고, 이번 작품에서 강조하는 사명이라는 주제에도 상당히 공감하는 편이지만 가장 아끼는 작가라 부득이 쓴소리를 적는다. 사실 신인 작가의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지만, 내가 좋아하고 기대하는 게이고의 수준은 이 정도가 아니라서. 작가의 사명은 역시 언제나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전작보다 늘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닐까. 독자에게 또 한 번의 신선한 충격을 전할 수 있는 그의 신작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