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광 게임 - Y의 비극 '88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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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을 떠올려보라면 밤새도록 며칠이고 술판을 벌인 축제도 있고,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나갔다 실망만을 안고 돌아오던 미팅도 있겠지만 역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MT가 아닐까 싶습니다. 배낭과 버너, 각종 밑반찬과 술(!)을 바리바리 싸들고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MT! 직장에서 가는 야유회와는 달리 의무도 아니고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이기 때문에 그저 즐겁기만 합니다. 밤이 깊어가면 한두 명씩 눈이 맞은 남녀가 사라져 로맨스도 꽃피고, 술에 떡이 되도 그자리에서 누워 자면 되기 때문에 부담도 없죠. 게다가 술 취한 멤버가 벌이는 막장 주정은 훗날까지 오래오래 회자되어 당사자를 창피하게 만드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도 합니다. 아, 이렇게 적고보니 당장 MT를 떠나고 싶네요. 그때 그 멤버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건지...

 

대학 문화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어디든 비슷한지 에이토 대학의 법학부 신입생인 아리스가와 아리스도 첫 여름 방학 때 동아리 선배들과 함께 MT를 떠납니다. 물론 경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는 필수겠죠. 그런데 아리스가 몸담은 동아리는 추리소설연구회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장인 4학년 에가미 지로를 비롯해 만담가에 가까운 2학년 모치즈키와 오다 선배, 아리스 본인은 모두 미생미사, 미스터리에 죽고 미스터리에 사는 골수 마니아들입니다. 기찻간에서도 미스터리 소설 이름으로 끝말 잇기를 할 정도니까요(그런데 이 장면은 일본어로는 끝말 잇기가 되는데 한글로는 맞지가 않아, 번역자 주가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지인 야부키 산의 캠프장에 도착한 그들은 놀러온 다른 대학의 세 동아리와 합류하게 되는데, 스터디 그룹도 있고, 산행 동아리도 있네요. 결국 총 17명의 대식구가 된 그들은 모두 젊기에 낯가림도 없이 금방 친해져 캠프 파이어도 하고, 서서히 남녀상열지사도 이뤄지며, 다시 올 수 없는 청춘의 즐거운 한때를 보냅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휴화산이던 야부키 산이 분화하며 평화로운 정경은 지옥의 한복판처럼 변해버립니다. 게다가 산을 내려갈 수 있는 길도 지진으로 끊어지고 말았어요. 완벽하게 고립되고 만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식사량도 제한하며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또 하나의 재앙이 그들을 찾아옵니다. 멤버들이 한 명, 한 명 살해되어 시체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힘을 모아도 살아날까 말까인 상황에 연쇄살인범까지 숨어 있다니...과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차디찬 시체가 될런지, 또한 대체 누가 범인일까요?

 

<월광 게임>은 '관 시리즈'의 아야쓰지 유키토와 함께 신본격 미스터리 열풍을 이끌었다고 알려진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1989년 데뷔작입니다. 부제는 'Y의 비극 88'로 아마도 엘러리 퀸의 명작 <Y의 비극>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나 싶은데, 이 작품에서는 두 명의 피살자가 죽어가면서 'y'로 보이는 다잉메시지를 남기고 그것들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까닭에 'Y의 비극 88'이란 부제를 단 것 같습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본격파로 많은 작품을 써내고 있는데, <월광 게임>에 등장하는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연구회의 대학생 아리스가 등장하는 몇 작품을 비롯해, 에이토 대학 범죄사회학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와 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등장하는 시리즈가 유명하다고 하네요.

 

두 시리즈에 모두 등장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직업, 즉 학생과 작가에서 시리즈명을 따와 각각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로 나뉘어진다고 하는데 두 아리스 사이에 접점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미스터리 소설가다운 재미있는 시도라는 생각이 드네요. 참고로 '학생 시리즈'는 <월광 게임>을 비롯해 단 3작품만 나와 있었는데 작년에 15년 만에 4번째 작품 <여왕국의 성>이 나와 반응이 매우 뜨거웠다고 합니다. 편수가 적은 '학생 시리즈'는 물론이고 꼭 '작가 시리즈'에서도 대표작들을 골라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부제에서 엘러리 퀸을 떠올릴 수 있듯이,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엘러리 퀸을 무척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엘러리 퀸 하면 역시 독자와의 페어플레이와 사건 해결 과정에서 논리를 중시한다는 걸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월광 게임>에서 작가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엘러리 퀸을 떠올리게 합니다. 폐쇄된 공간, 한정된 등장인물, 독자에게 숨김없이 모든 단서를 공개하는 공정함, 논리적 해결, 심지어 '독자에의 도전장'까지 모든 점에서 엘러리 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대학생들 이야기다 보니 학생 아리스가 유력한 용의자를 연모해 수사에 혼선을 빚는다든가, 살해 동기가 사랑에 기반한다든가 하면서 로맨스에도 주력하는 건 약간 달라 보입니다(동기가 그다지 납득이 가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류의 본격 미스터리에서 하이라이트는 역시 탐정이 등장인물들을 모두 모은 후에 '추리쇼'를 펼치는 장면이 아닌가 싶네요. <월광 게임>에서도 탐정역인 에가미 지로가 하산 과정에서 살아남은 모두를 모아두고 진상을 밝히는 장면이 백미입니다. 하나하나 상황과 단서를 짚어 범인을 추려내는 과정은 정말이지 짜릿함마저 느껴질 정도예요. 하지만 핵심 단서 중 하나인 다잉메시지 'y'의 정체를 우리나라 사람은 온전히 추리할 수 없다는 건 유일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물론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요.

 

등장인물이 무척 많고 때로는 성으로, 본명으로 심지어 별명으로까지 부르기 때문에 계속 맨 처음 페이지 등장인물 소개면을 왕복하면서 읽어야 했습니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다잉메시지의 전모를 절대 알 수 없다는 단점도 있구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아리스를 비롯한 추리소설연구회 멤버들이 너무도 호감 갑니다.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온 순간에도 그들은 그간 읽었던 추리소설들을 이야기하며 편안함을 느끼거든요. 죽기 직전에도 유일한 아쉬움이 절판된 미스터리 소설을 못 구한 거라니, 이건 완전히 우리 미스터리 마니아들의 습성 그대로 아닙니까?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연구회 4인방의 피 속에는 추리소설의 DNA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 몸 속에 흐르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입니다. 이들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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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01-09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오랜만입니다.^^흐흣...
추리소설의 DNA라...멋진데용..ㅇ.,ㅇ 고전추리소설을 떠올리면서 읽으면 괜찮을듯..
저도 사려고 담아놓았는데, 평쓰신 분들의 평점이 화끈하게 별 다섯개쯤 나와주지는 않네요.;;;;그..그래도 봐야지!

물만두 2008-01-0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추리마니아의 피를 끓게 만드는 동질의 그것!!!
별이 짜다해도 애플님 보셔야죠~

jedai2000 2008-01-0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시즈님...너무 오랜만에 써봤네요. 제가 갑자기 백수가 되서 이제 리뷰를 좀 많이 쓰려고 생각 중이예요. 고전 추리소설을 멋지게 현대에 재현한 작품인 듯 합니다. 무엇보다 대학생들 이야기라 옛날 생각도 나고 그 분위기 자체가 좋아요. 아무래도 다잉메시지가 한국인들은 이해불가라 점수가 좀 짜지지 않았나 싶네요 ^^

물만두님...별 4개면 아주 짠 건 아닌 것 같고, 아주 재미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꼭 보시라고 애플님께 전해주셔요 ㅎㅎ

쥬베이 2008-01-24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축하드려요^^
1월 3째주 이주의 마이리뷰 선정입니다ㅋㅋㅋ

jedai2000 2008-01-2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아, 축하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 한 2년만에 된 것 같은데 기분 너무 좋네요. 호호

boogie 2008-01-25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추리문학을 좋아하는데..
잘 읽고 갑니다...
자주 보고 가겠습니다...^^

jedai2000 2008-01-25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기님...추리문학 좋아하신다니 반갑네요 ^^ 앞으르도 가끔 리뷰 올릴 테니 놀러오셔요^^

이매지 2008-01-2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제다이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
얼마 전에 네이버 메인에도 뜨셨던데 ㅎㅎㅎ
일본의 신본격미스터리와 비교적 코드가 맞는 것 같아서 이 작품도 땡기는군요 :)
미스터리 동아리의 일원이 여행을 가서 일을 당하는 내용을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는군요.
(십각관인 것 같기도 한 데 맞나 -ㅅ-a)
어쨌거나 별 다섯은 아니라 망설여지지만 보고 싶네요 :)

jedai2000 2008-01-2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아, 고맙습니다 ^^ 네이버 메인에 뜨니 무섭더라구요. 하루에 3만 명 가까이 들어오시다니 ㅎㄷㄷ 근데 네이버는 조금 우스운 게 일단 메인에 띄워놓고 나서 나중에 통보를 해주더군요. 저야 상관없지만 조용하게 블로그 운영하시고 싶은 분들은 기겁하시겠던데요 ^^

신본격 미스터리 초기작이죠. 여행가서 일 당하는 건 십각관이 맞는 것 같네요. 근데 십각관에서는 둘 빼고 다 죽지만, 여기선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습니다ㅎㅎ 일본어를 이용한 다잉 메시지라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그 부분을 빼더라도 논리적인 맛이 있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재미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