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론
리사 가드너 지음, 박태선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미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 경우에는 할리우드다. 영화 산업은 20세기 초반부터 미국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세계 만방에 미국과 미국인의 (조작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어찌 보면 미국의 근간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한 편 만드는데 1천억씩 쓰는 나라가 미국 외에 어디가 또 있겠는가. 이렇게 영화가 발달한 나라다 보니 미국의 대중소설가들은 대부분 애초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거나, 혹은 어린 시절부터 줄기차게 봐왔던 영화의 영향을 무의식 중에 받아 글을 쓰는 것 같다. 스릴러 작가들에게 이런 경향은 연쇄살인범을 등장시켜 엽기적인 방식으로 살육을 저지르는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준 <양들의 침묵>의 토머스 해리스 이후에 더욱 심화된 듯하다. 인육을 먹고 시체 입에 나비 유충을 넣어두는 등의 장면들이 시각적으로 대단히 인상적이라 영화화하면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던 것이다.

 

토머스 해리스 이후에 등장한 베스트셀러 스릴러 작가들, 제임스 패터슨이나 조지프 파인더, 할란 코벤 등의 작품은 별다른 각색도 필요없을 정도로 영화적이다. 작가들로서는 책의 판매 이외에도 천문학적인 영화화 판권 수익이라는 가욋돈을 노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얼론>의 리사 가드너 역시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예 영화화하기 용이하게끔 눈을 사로잡는 박력 있는 도입부로 시작한다. 아내와 아들을 학대하는 폭력 남편이 권총을 들고 두 사람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아내 캐서린은 남편의 눈을 피해 경찰에 신고하고, 신고를 받은 보스턴 경찰국의 저격수 바비가 출동해 맞은편 건물에서 남편을 노린다. 바비는 아직까지 실제로 사람을 죽여본 경험은 전무한 상태로 되도록이면 피를 보지 않고 끝났으면 싶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의 발광이 심해져 권총을 아내의 머리에 똑바로 겨누자 바비는 결국 방아쇠를 당긴다. 폭죽처럼 터져버리는 남편의 머리.

 

아무리 공무수행이라지만 살인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바비는 내사를 받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보통 세력가 가문이 아니었다. 남편의 아버지인 저명한 가뇽 판사는 아들이 아니라 캐서린, 즉 며느리가 손자를 학대한 것이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남편을 죽이기 위해 살살 약을 올려 결국 그의 폭발을 유도한 것이고, 신고를 한 이유도 경찰국의 저격수가 출동해 남편을 대신 죽여줄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바비는 혼란에 빠진다. 나는 명예로운 경찰 저격수로서 한 여자와 아이를 구한 것인가, 아니면 사악한 여인의 계략에 휘말려 살인의 도구로 전락한 것인가. 이 도입부는 정말로 굉장하다. 시종일관 빠른 템포에 강렬한 긴장감과 도덕적인 망설임을 곁들여 바비의 혼란스런 심리를 선명하게 그려낸다.

 

가뇽 판사는 바비를 살인죄로 고소하고, 손자의 양육권을 요구한다. 서로 엇갈리는 가뇽 판사와 캐서린의 모호한 주장들은 각각 설득력이 있어 누구의 말도 쉽사리 믿을 수 없다. 예컨대 판사는 며느리가 손자의 밥을 제대로 주지 않고, 손자의 배변을 냉장고에 담아두는 등 기행을 일삼는다고 지적하지만, 캐서린은 아들이 희귀병을 앓고 있어 음식을 제한할 수밖에 없고, 아들의 상태를 매일 체크하기 위해 배변을 보관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더구나 바비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캐서린의 매력에 흠뻑 빠짐으로써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캐서린은 초등학교 때 유괴와 감금, 성폭행을 당한 희생자로서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악몽을 꾸고 있었기에 바비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던 것이다.

 

스릴과 서스펜스, 속도감, 반전까지 구색은 다 갖췄다. 적어도 마지막 50페이지 전까지는 최고의 페이지터너로 부족함이 없고 한 편의 잘 빠진 할리우드 스릴러를 보는 듯한 완성도가 출중하다. 그러나 리사 가드너가 뒤로 갈수록 익숙한 할리우드식 스릴러의 클리쉐들을 반복하면서 몰입감이 떨어지고 말았다. 캐서린을 유괴했던 사이코가 출감하면서 다시 그녀를 노린다는 설정은 사이코 연쇄살인마와 주인공들이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전형적인 스릴러 공식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데 그칠 따름이고, 반전조차도 너무 진부해 이런 류의 소설이나 영화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결말에서 왜 가뇽 판사가 그토록 손자의 양육권을 원했는지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만은 기발하고 전체적인 내용과도 잘 어우러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외에는 전부 안이하게 끝맺었다. 이 정도 이야기를 짜낼 수 있는 작가가 왜 더 도전적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이런 전형성을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독자라면 평가가 후해질 여지는 있다. 문장력이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출중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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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11-0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그럽게 봐줬습니다^^

Apple 2007-11-0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거 보려고 노리고 있었는데,살짝 아쉬운 작품이었군요..으음...

jedai2000 2007-11-0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항상 너그러우신 물만두님 멋져요 ^^

애플시즈님...솔직히 재미있게는 봤는데 마무리가 영 평범해서 걸리네요. ^^ 그래도 한번 읽어보세요.

2007-11-16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7-11-1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디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