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성 살인사건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절규성 살인사건>의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지형도 안에서 '관 시리즈'의 아야쓰지 유키토와 좋은 맞수가 되는 것 같다. 각각 도시샤 대학과 교토 대학의 미스터리 창작 동호회에서 습작을 하며 실력을 갈고 닦다, 80년대 중후반이라는 비슷한 시기에 아리스는 아유카와 데쓰야, 유키토는 시마다 소지라는 거장급 멘토의 추천을 받고 데뷔했으니 얼추 그 점도 비슷하다. 게다가 확실한 팬 베이스를 만들어준 시리즈를 둘다 보유하고 있는데, 유키토는 위에서 말했듯 그 유명한 '관 시리즈', 아리스는 현재까지 4권이 나온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그 밖의 대부분의 작품이 포함된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미스터리 스타일은 어디까지나 다른데, 유키토가 기발한 서술 트릭과 깜짝 놀랄 만한 반전, 하나하나 기괴한 개성을 가진 저택 등 추리소설다운 분위기를 강조한다면, 아리스는 철저한 논리와 페어플레이 정신, 주인공들의 행동과 심리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인간미 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유키토는 독자의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반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보통 추리소설에서는 금기시되곤 하는 초현실적인 설정도 등장시키는 등 다소 무리한 수도 주저없이 쓴다. 사회파의 거두 마쓰모토 세이초가 리얼리티가 부족한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결점으로 지적했던 '요란뻑적지근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추리놀음'을 아예 시리즈 테마로 잡았으니 역시나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느낌도 없다.


반면에 아리스는 유키토처럼 여러 번 뒤집히고 끝에 가서 한 번 더 뒤집는 그런 결말보다는, 살인사건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앞에 제시하고 탐정과 조수가 단서를 하나둘씩 수집해 냉철한 논리로 핵심에 파고 드는 고전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 같다. 배경도 유키토처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저택이 아니라, 산 속 휴양림, 외딴섬 등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가 서양 미스터리 작가 중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엘러리 퀸이라고 하는데, 과연 일본판 엘러리 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비슷한 느낌이다. 왜 반전의 깜짝쇼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작품 앞부분에 공들여 쌓아둔 설정이 뒤의 반전과 충돌하면서 작품의 내적 구조가 스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악수가 나오기도 하지 않나. 그런 면에서 아리스의 작품은 건실한 돌탑을 보는 것마냥 단단한 느낌을 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화려한 기술을 가진 유키토는 도미, 아리스는 가자미인가-_-;


꼭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고유한 스타일일 뿐 누가 잘하고 못하고는 아니니까. 나는 유키토의 신작을 보면서 이번에는 또 어떤 독특한 저택이 나올까, 무슨 반전으로 뒷통수를 때릴 것인가 기대하며 그가 공들여 안배한 설정들을 즐거이 소비한다. 아리스의 작품을 보면서는 꼼꼼하게 타임 테이블을 그리며, 얘는 이 시간에 여기에 있었으니까 절대 범행이 불가능하지, 하면서 나름의 논리와 소거법으로 범인을 맞춰보려 노력하는 맛에 빠져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한다. 과연 추리소설의 재미란 이렇게나 다양한 법이군.


어쩌면 유키토의 장기에 도전하고 싶었던 걸까. <절규성 살인사건>은 '관 시리즈'처럼 6개의 기묘한 외형을 가진 건물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일종의 연작 단편집이다(표제작인 '절규성'은 실체가 있는 건물은 아니다). <월광 게임> <외딴섬 퍼즐>에 나온 에가미 선배와 풋풋한 대학생 아리스가 주인공이 아니라, 국내에는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에서 첫 선을 보인 바 있는 임상범죄심리학자 히무라와 추리소설 작가 아리스가 탐정과 조수 역으로 사건을 푼다. 그러니까 '작가 아리스 시리즈'란 말씀. 표제작을 제외하고는 5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라 아주 난해하지도, 여러 번 꼬여 있지도 않은 깔끔한 추리 퀴즈를 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품들의 수준 편차도 별로 없이 적당한 재미가 다 있어 한마디로 만족스럽게 읽었다. 경천동지할 트릭이나 경악스런 반전은 없지만, 해답을 알고 나면 무릎을 한번 탁 치게 되는 절묘한 맛이랄까(위에서 '관 시리즈'와 비교했지만, 건물의 구조나 특징을 이용한 단편은 몇 개 없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모든 내공이 응축된 그런 대작 추리소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크게 머리 쓰고 싶지 않고 기분 좋게 책장을 열었다가 개운한 맛으로 덮고 싶은 그런 심정의 독자라면 충분히 좋아할 단편집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비행청소년 남녀가 폐쇄된 호텔 설화루에서 노숙하다 그중 남자아이가 추락사하는 '설화루 살인사건'이 인상적이었다. 아직 서로를 감당할 수 없는 미숙한 두 아이가 때로 싸우고 소리치고 서로를 원망하다, 그래도 부둥켜 안고 추위를 이겨내는 따뜻하고도 쓸쓸한 이미지가 뇌리에서 오래오래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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