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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 상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벌써 작년인가, 인기 여성 그룹 소녀시대의 노래 잘하는 보컬 태연 양의 아버님과 잠깐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워낙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상 깊었던 말씀은 그분의 아버님(태연 양의 할아버님)이 1950년대에 안경점을 여셨고, 아버님은 1980년대부터, 그 아드님(태연 양의 오빠)도 가업인 안경점을 이어받기 위해 안경 관련 학과를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삼대가 같은 일을 한다라. 요즘같이 휙휙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수십 년 세월 동안 한 가족이 대를 이어 같은 일을 한다는 건 당연히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자식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는다는 데는 그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준 직업인으로서의 올곧은 자세,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의 삶 전체를 긍정하고 인정한다는 커다란 의미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경관의 피> 역시 경찰이라는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경관 삼대의 이야기를 유장하게 그리는 장편소설이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도처에 부랑아들이 들끓고 범죄가 빈발하는 생지옥이 된 일본(물론 자업자득이다만). 치안을 위해 그저 그런 교육만 몇 달 받으면 경찰이 될 수 있었던 시대다. 막 임신한 아내를 둔 안조 세이지는 생계를 위해 경찰에 투신해 하급 순사가 된다. 처음부터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다같이 못 사는 처지에 남을 등 처먹는 사기꾼도 잡고, 어려운 사람 돕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물론 제일 좋은 건 단칸방이나마 마련할 수 있어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오손도손 지내는 거지만. 서서히 공을 세워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덴노지 주재소에 부임한 세이지는 몇 년 전 관내에서 벌어진 미모의 남창 살해사건을 끈질기게 조사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다.
듬직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늘 동경했던 세이지의 장남, 다미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관이 된다. 다미오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혀내는 것. 하지만 다미오가 경찰학교에 입학한 시기는 '전공투'라 불리는 좌파 학생운동이 극심했던 1960년대 초. 다미오는 훗카이도 대학교에 위장 입학해, 흔히들 프락치라 부르는 스파이가 된다. 아버지처럼 평범한 경관이 되어 서민을 돕고 싶었지만, 노도 같은 시대의 흐름이 그의 작은 소망을 외면한 것이다. 정체가 탄로나는 순간, 생명이 위험한 스파이 생활을 몇 년 겪고 정신이 완전히 피폐해져버린 다미오는 이제 폭력남편에 불과하다. 더 이상 스파이짓을 하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간신히 일반 제복경관이 된 다미오는 지역의 평범한 소시민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예전의 꿈을 이루며 서서히 바른 정신을 회복한다. 그러나 아버지 세이지와 관련된 과거 때문일까. 다미오 역시 죽음을 맞게 되고, 이제 바톤은 손자 가즈야에게 넘어왔다. 50년을 넘게 끌어온 일족의 비극의 역사를 해결해야 할 숙명을 가진 가즈야의 활약을 지켜보시길.
두꺼운 책으로 2권 분량이지만 숨 쉴 틈 없이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로하는 일없이 담담하게 서술하지만 묘하게 박력 있고, 흡입력이 뛰어나 이게 거장의 솜씨구나, 했다. 작가 사사키 조는 1979년에 데뷔해 모험소설, 첩보소설, 하드보일드 등 다채로운 작풍을 보여왔는데, 특히 태평양 전쟁 당시 스파이전을 소재로 한 1990년작 <에트로프발 긴급전>이 유명하다. 개인적으로는 꽤 마음에 든 작가로 이 작품도 국내에 소개된다니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최근에는 경찰소설에 매진한다는데, <경관의 피>가 '200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베스트 1위에 올라 노장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2008년 일본 미스터리의 정점에 오른 <경관의 피>는 또한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격동의 일본 현대사를 경관 삼부자의 이야기 속에 담아내 시대소설 혹은 사회소설의 맛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1940년대 세이지의 사건이 강매, 야바위, 들치기 같은 소박한(?) 것이었다면, 1960년대 다미오의 그것은 좌익 세력에 의한 폭탄 테러 등이고, 1990년대 가즈야는 마약이나 권총 밀거래, 동료 경관의 독직 사건 등을 수사하는 것이 시대상을 절묘하게 반영한 듯해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나 미스터리보다는 감동과 인간, 긍지 높은 삶에 방점을 찍은 작품이라고는 해도 미스터리 구조가 기대했던 것보다 조금 더 허약했다는 약점, 또 공공봉사를 위해서라면 다소의 부정은 허용할 수도 있다는 작가의 '경찰관'에서 도덕적 모호함을 강요받는다는 찝찝함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슨 책이든 어떤 작가든 보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는 달라질 수 있는 법이고, 적어도 나는 읽는 동안 즐거웠다. 무엇보다 경관이라는 직업 속에서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는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할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가족과 직업윤리, 명예와 긍지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경찰의 이미지란 흔히 정권의 시녀로 약한 시민들 때려잡고, 뒷돈이나 받는 불한당 정도에 그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시민의 안녕을 위해 생명을 걸고 분투하는 경찰도 분명히 있다. 앞으로 나쁜 경찰은 나쁘다고 계속 욕하더라도, 좋은 경찰, 훌륭한 경관에게는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시민은 경찰을 돕고, 경찰은 시민을 지키는 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경관의 피>같이 경찰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잘쓴 소설이 나와 그런 사회 풍조 조성에 이바지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