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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cite mill 인사이트 밀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학창시절에 아르바이트(이하 편하게 알바로^^) 한 번 안해본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한창 젊은 혈기가 왕성하던 대학생 때 놀고도 싶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데 돈은 없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알바를 해본 적이 있다. 나와 친구 3명이 타이어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내 천성이 게을러서인지 딱 3일 나가니까 힘들고 귀찮아서 그만두겠다고 말하러 갔다가 미모의 여대생이 내일부터 알바로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외치고, 친구들과는 먼저 말 붙이는 사람이 승자로 만원빵 내기를 했지만 다들 소금쟁이 사촌 소심쟁이인지라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하고 묻은 돈으로 노래방을 갔던 찌질한 옛 추억이 떠오른다.
<인사이트 밀>도 비슷하게 시작한다. 자동차가 있으면 여친이 자동으로 생길 것 같아 방학 때 알바를 뛰어서 자동차 마련(과 더 중요한 여친 마련)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아르바이트 잡지를 뒤적이던 주인공 유키. 그런데 잡지 구석에 실려 있던 인문과학적 실험의 지원자를 구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보고 기겁을 한다. 시급이 무려 11만 2천 엔이라는데...100엔당 원화 환율이 700, 800원대였던 작년과는 달리 최근 환율이 1천 500원이니까, 대충 한 시간에 170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여기서 잠깐 딴 소리, 경제에 완전 문외한인 내가 봐도 엔화 환율이 1년 사이에 두 배나 더 뛰다니 비정상적인 일인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음...아무리 생각해봐도 작년과 달라진 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 것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2008년 11월 현재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시급을 보고 유키는 당연히 실험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헌데, 실험 장소는 구비구비 깊은 산중에 있는 기묘한 생김새의 원형 건물이라는 것이 아닌가. 건물의 이름하여 '암귀관'. 유키를 비롯한 실험 참가자는 모두 12명으로 불세출의 미남부터, 신비스러울 정도의 우아함을 갖춘 미소녀, 나이도 많은데 로커 차림을 고수하는 아저씨까지 몽타주만 봐도 범상치 않은 그룹이다. 자, 이제 배경과 인물은 모두 갖춰졌다. 그러면 이제 인문과학적인 실험 내용만 공개되면 되는데...
하나, 참가자들은 암귀관에서 일주일간을 외부와 완전 격리된 채로 지내야 한다. 각자의 방과 더불어 적절한 의식주는 보장된다.
둘, 참가자 중 어느 한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면 시급 2배의 보너스를 받는다. 이 금액은 누적된다.
셋, 참가자 중 어느 한 사람이 탐정이 되어 살인자를 밝혀내면 시급 3배의 보너스를 받는다. 이 금액은 누적된다.
등등.
어쩐지 참가자들 사이에 살인을 부추기는 룰이다. 더구나 참가자들은 고전 추리소설의 흉기 한 가지씩을 복불복으로 지급받은 상태. 유키가 받은 건 셜록 홈스 <얼룩끈>에 나오는 부지깽이다. 이래서는 언제 어디서 살인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사실 12명이 다 그냥 얌전히 있다가 나가기만 해도 시급이 워낙 세기 때문에 일주일에 1천 800만 엔이라는 거액이 보장되는지라 멤버들은 그렇게 하기로 신사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평온하게 참가자들이 수다나 떨면서 일주일을 때우다 나가는 이야기라면 굳이 책으로 쓸 이유가 없겠지. 다음 날부터 12명의 참가자들은 하나씩 죽어 나가기 시작하는데...
여기까지만 소개해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유독 촉이 빠른 분들이라면 주저없이 이 책을 집어들 것이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 날 끝을 보고 대만족의 환성을 지를 것이다, 바로 나처럼. 몇 명의 참가자가 서로를 죽인다는 설정에서 <배틀 로열>을, 비정상적인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릴 넘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영화 <큐브>나, 연쇄살인이 철저하게 게임 감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일본 드라마 <극한추리 콜로세움>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여러 장면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Y의 비극> 같은 고전 걸작 추리소설에 노골적으로 오마주를 바치기도 한다. 참가자들에게 지급되는 흉기는 전부 잊지 못할 걸작 추리소설들의 소품이라 많이 본 사람일수록 더 흐뭇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는 국내에도 소개된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 등의 소소한 사건들을 소박하게 풀어나가는 일상계 추리소설로 명성을 떨쳤지만, <인사이트 밀>에서는 의외로 본격 추리소설의 약점으로 흔히 거론되는 작위적인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여, 속도감이 넘치면서 젊은 층의 구미에도 딱 맞는 게임 감각의 재미로 충만한 새로운 스타일의 본격 추리소설을 내놓은 게 이채롭다. 요 몇 년 사이에 나온 책 중 재미 만으로는 최고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결말도 본격풍으로 논리적으로 모든 진상을 도출해내는데, 범행의 진짜 목적이나 동기 같은 부분까지는 몰라도 단순히 범인을 맞추는 것만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걸 유일한(억지로 찾자면) 약점으로 꼽고 싶다. 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요즘같이 흉흉한 시국에 골 아픈 건 읽기 싫고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 책을 집어라.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키리고에...>를... 죄송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