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패러독스 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저는 그녀의 이름을 한번씩 쓸 때마다 웬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저 같은 골수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게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이름은 거의 예수와도 같은 경건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지요. 오래 되서 누가 한 말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크리스티의 소설을 X선으로 비추면 추리소설의 뼈대가 나올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1퍼센트의 주저도 없이 이 말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어요. 적어도 크리스티는 클래식한 퍼즐 미스터리 분야의 창조주요, 그 장르의 완성자라 불려도 손색이 없지요.

 

그러면 크리스티가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준 추리소설의 뼈대란 무엇일까요. 누구나 한 권쯤은 읽어봤다시피(그녀의 판매 부수는 억 부를 가뿐히 뛰어넘죠), 어느 살인사건을 맞아 명탐정이 기회와 동기를 가지고 있던 몇 명의 용의자들 중에서 치밀한 조사와 논리적 추리를 통해 범인을 찾아내는 지적 유희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80권이 넘는 그녀의 소설 대부분이 이런 구조라 빤하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네요. 어찌 보면 천편일률적인 동어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4편의 인상적인 작품을 통해 그 함정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한정된 용의자 안에서 범인을 찾는 그녀의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10명의 용의자 모두가 범인인 <오리엔트 특급살인>의 결말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중간에 피살된 판사가 범인이지요. 흔히 추리소설을 읽을 때 시체가 된 인물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독자들의 부주의를 간파한 멋진 트릭입니다. <커튼>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을 본능적으로 의심하고 보는 노련한 크리스티의 독자들마저도 빼놓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사람, 즉 에르큘 포와로 탐정이 범인입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크리스티의 동반자로 무수한 사건들을 해결한 정의의 상징 포와로를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퇴역시키다니, 이쯤 되면 어떻게든 독자를 속이고야 말겠다는 크리스티의 집념에 일종의 장엄함까지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최초의 근대적인 추리소설인 <모르그 거리의 살인>에서부터 등장해 결코 추리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왓슨'역의 화자(포와로 못지 않게 독자들이 의심을 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독자는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술하는 화자를 무의식중에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가 범인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있습니다. 포와로의 활약을 옆에서 지켜보며 충실히 기록하는 셰퍼드 의사가 범인이라는 게 밝혀질 때 당시 독자들이 느껴던 충격과 분노(?)는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페어와 언페어 논쟁이 뜨거울 정도니 말해 무엇할까요.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는 추리소설 기법상의 혁명을 불러온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패기가 놀라운 추리소설, 혹은 크리스티와 추리소설에 대한 분석서, 독서 행위 자체에 대한 일종의 에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의 문학 교수이자 정신 분석가인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첫 장에서 크리스티의 수많은 작품들을 살펴보며(그녀의 작품 수십 편의 스포일러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옵니다), 그녀의 핵심 트릭을 몇 가지로 정의합니다. '위장'은 말 그대로 범인의 특징을 철저히 위장함으로써 범인의 정체를 숨기는 것으로, 예를 들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범인은 자신을 시체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전환'은 독자의 주의를 교묘히 다른 곳으로 이끌어서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의미한 징표들을 나열해 수사에 혼선을 주는 범인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네요. 피해자 이름의 알파벳 순서대로 세 건의 살인이 벌어지는 <ABC 살인사건>의 범인은 실은 그중 한 명만이 진짜 목표였지만, 기묘한 연쇄살인이라는 그럴 듯한 외형을 만들어 독자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버렸습니다. '전시'는 너무도 뚜렷한 단서를 독자의 눈앞에 대놓고 제시해 오히려 이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독창적인 트릭입니다. 포의 유명한 <도둑맞은 편지>를 생각해보시길.

 

한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크리스티는 이 방법들 외에 '생략에 의한 거짓말'이라는 새로운 트릭을 선보입니다. 작품의 화자인 셰퍼드 의사가 범인이기 때문에, 그는 기록자임에도 자신의 행적을 모조리 다 적을 수 없는 딜레마에 부딪치게 되죠. 자신의 행동이나 심리를 전부 적으면 자신의 범행 장면도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애거서 크리스티식 퍼즐 추리소설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크로이드 씨는 본디 고집이 몹시 셀 뿐 아니라, 억지를 쓰면 쓸수록 더욱 굳어지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 파커가 편지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8시 40분, 내가 편지를 마저 읽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한 채 애크로이드 씨의 서재를 나온 것은 정확히 8시 50분이었다. __<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중에서

실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범행은 셰퍼드 의사가 서재에 있다가 별 소득없이 나왔다고 주장한 8시 40분과 8시 50분 사이에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셰퍼드 의사는 위에서 말한 이유에 걸맞게 자신의 구체적인 범행 장면을 생략하고 넘어갑니다. 피에르 바야르의 의문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한 번 생략을 통한 거짓말(즉 셰퍼드 의사의 기술을 이제 누구도 100퍼센트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을 시도한 셰퍼드가 다른 부분에서 또 비슷한 생략과 거짓말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피에르 바야르는 이 본질적인 의문점을 토대로 셰퍼드의 기술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 다른 해석이 가능한 부분 등을 샅샅이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포와로조차 완전히 간과한 진범을 찾아내는데 성공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읽은 지가 이미 십여년이 지나 피에르 바야르의 이 책을 보다 재미있게 읽기 위해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그렇게 두 권을 순서대로 보니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의 세세한 설명 하나하나가 너무도 쉽고 재기발랄하게 다가오더군요. 아, 모처럼 정말 짜릿한 추리소설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석학이라는 평가에 부끄럽지 않은 피에르 바야르의 정신 분석과 문학 비평이라는 두 분야를 오가는 화려한 논리에 흠뻑 빠져서 내내 킬킬 거리고 말았다구요. 비길 데 없는 명탐정 포와로가 순식간에 고집불통 망상 늙은이로 떨어지는 꼴이라니, 하하. 그러나 다만 해석망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3장은 문외한이 보기엔 지나치게 어려워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장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미칠 듯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저처럼 크리스티를 숭배하는 분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경전으로 모시는 분들은 이 책을 보며 어쩌면 우상이 망가지는 데서 오는 불경스러운 쾌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뭐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수준높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망가뜨린다면(?) 하늘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도 그닥 큰 불평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itty 2009-04-10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오랜만에 이렇게 강력한 지름신을 ;;;;
크리스티 이름 들을 때마다 화장실에서 손 씻고 싶다는 첫문장 읽고 '이건 바로 내 얘기야!!!!' 하면서 구경하러 갔다가 마침 중고가 있길래 바로 주문 버튼 눌러서 결재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_-;;; 땡스투라도 드려야 하는건데 ㅠㅠ 추천이라도 누르고 갑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너무 기대돼요 >_<

비연 2009-04-10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보관함에 쑈옹~ 넣었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해요~

jedai2000 2009-04-13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티님...앗^^ 키티님도 크리스티 신자셨군요~ 넘 반갑습니다. 피에르 바야르의 다른 책에 대해서도 소개하신 글을 보았습니다. 이 친구가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도 깠(?)다니, 너무 보고 싶네요 ㅠ.ㅠ 챕터3이 제 수준에 지나치게 어려웠는데, 다른 장들은 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보실지 너무 궁금하네요. 좋은 말씀 넘 감사드립니다 ^^

비연님...좋게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드리죠^^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다시 한 번 복기하시고 연달아 읽으심 쵝오의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듯 하옵니다 ^.~

젠장 2009-05-22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는 문장은 못 봤네요. 안돼 ㅠ.ㅠ

jedai2000 2009-05-2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젠장님...죄송합니다 ㅠ.ㅠ 제가 더 눈에 확 띄는 곳에 써뒀어야 하는데...추리소설을 읽을 때 스포일러 뿌리는 사람만큼 증오스런 게 없죠. 본의는 아니지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