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가족 세이타로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영화계 은어 중에 쌈마이라는 말이 있다. 간단히 말해 3류 배우란 뜻인데 반대로 연기 잘하고 자세 좋은 배우는 니마이라고 부르더라. 이 책을 보면 원래는 일본 대중연극에서 코믹하고 넘어지며 망가지는 역할을 지칭하는 산마이메와 멋진 주인공을 뜻하는 니마이메라는 말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대중연극이란 무엇이냐. 지방 흥행 무대를 전전하며 신파극, 시대극, 여장 쇼, 오래된 엔카 등을 공연하는 일종의 유랑극단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주로 가문의 후계자들에게만 전승되어 내려오며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가부키 배우들과는 달리 대중과 함께 울고 웃으며 수십 년을 버텨온 종합 엔터테인먼트쯤 되겠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세이타로는 대중연극의 전성기에 배우로 날렸고 극단까지 하나 꾸렸을 정도로 인정받았던 인물이지만 은퇴 후에는 하는 사업마다 실패해 영락하고 말았다. 전형적인 옛날 아버지라 자기 의견에 무조건 순종만을 내세우는 덕에 가족들에게도 별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표현에는 둔감하고, 배우 후계자로 키우려던 첫째 아들은 이지메에 못 견뎌 중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며, 첫째 딸은 19살의 미혼모, 막내 아들이자 작품의 화자로 자주 등장하는 간지는 정신지체아다. 

 

함께 살지만 실질적으로 교류가 별로 없는 이 가족을 이끌고 세이타로는 신종 사업을 구상한다. 가족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짜 가족 역할을 해주며 시간에 따라 돈을 받는 것이다. 누군가의 가족 대행을 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연기의 일종이고 연기라면 세이타로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뭉치 가족인지라 출장 갈 때마다 사건이 터져 제대로 돈도 못 받고 엉뚱한 고초만 겪는다는 것이 전반부의 내용. 대여가족이라는 소재는 사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뻔한 이야기고, 생각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없어 여기까지는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이타로가 언제나처럼 대여가족 사업에 실패하고 연기 스승이자 최고 권위의 극단을 소유하고 있는 단노스케에게 돈을 빌리러 가는 대목부터 재미가 확 살아나기 시작한다. 세이타로는 단노스케의 배우들을 몰래 데리고 나가 자신의 극단을 세웠기 때문에 일종의 배신자나 다름없다. 다혈질의 단노스케 노인이 노구를 들어 일본도를 휘두르기에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그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자기 아들에게 극단 하나를 만들어줬지만 아직 어리니 자네가 단장보좌대리를 해주게. 세이타로는 일선에서 물러난 지 십수년 만에 복귀를 결심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지방 순회공연에 참가한다.

 

그런데 불후의 명우 단노스케의 아들은 전통 대중연극을 경멸하고 자기도 잘 모르는 브레히트 같은 서양연극에 경도되어 기괴한 공연만을 추구한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로미로와 주리' 같은 저질연극을 펼치니 무대에는 계란 투척이 예사. 결국 아들은 줄행랑을 쳐버렸고 당장 공연을 앞두고 있는 단장보좌대리 세이타로에게도 발등의 불이 떨어진다. 세이타로는 오랜 예인 경력을 바탕으로 몇 명의 베테랑과 함량미달의 배우들에게 착착 지시를 내려 결국 공연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늘 패배자 같던 세이타로가 정말로 멋지게 보이는 유일한 순간이다.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온 관객을 만족시켜주는 것만이 배우의 소명이라는 세이타로의 자존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전에 어떤 영화잡지를 봤는데 지금은 작고한 신상옥 감독과의 인터뷰였다. 세부적인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무슨 이야기였냐면, 그분이 강제로 납북된 분이 아닌가. 거기서도 영화를 찍게 됐는데 일제시대 때부터 여배우로 활약했던 분이 당시 할머니 연배가 되어 그곳에 계셨다 한다. 다리도 불편해서 거의 걷지도 못하는 양반이 신감독이 왔다니 이제 연기할 수 있게 됐다고 펄쩍 뛰며 좋아하는데, 그 다리로 하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자 한사코 손을 저으며 "안 아파, 나 안 아파. 연기하면 하나도 안 아파" 이러셨다는데 이 정도는 되야 진짜 배우가 아닐까 싶다. 연기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고통도 즐거움으로 여기고 삶의 보람을 느끼는 그런 진짜배기 배우. 아무리 인기가 많고 얼굴이 반반한 배우라도 이러한 열정과 배우로서의 진지한 자세가 없다면 쌈마이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한번 공연할 때마다 많아야 수백 명앞에서 웃음과 눈물을 파는 신세라도 세이타로는 당연히 니마이 배우다.

 

<유랑가족 세이타로>의 가장 큰 재미는 대중연극의 막 뒤에서 벌어지는 세세한 준비 과정과 막이 오르고 나서 펼쳐지는 대중연극 자체의 매력에서 나오는 것 같다. 특별한 목적의식이나 예술성보다는 관객들과의 호흡을 중시하기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싶으면 일발 애드립으로 웃음도 주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유기적으로 진행되는 이 대중연극은 그렇기 때문에 세이타로 같은 베테랑들의 역량이 중요하다. 작품 속에 언급된 '철새를 사랑한 엄마'라는 극은 실제 있다면 반드시 보고 싶을 정도. 물론 망가져가던 가족이 조금씩 철들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과 정신지체아 간지가 무대에 오르면서 점차 성장해가는 이야기도 충분히 웃음과 감동을 준다.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약간 쓸쓸한 느낌도 좋았고. 처음 읽어본 오기와라 히로시의 작품이지만 독특한 소재와 재미가 제법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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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8-05-2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댄디 제다이님^^
지금 오기와라 히로시의 '하드보일드 에그'를 읽고 있는데 초반부지만 그 코믹함에 쓰러질 지경이라...(읽으셨나요?)그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서 검색하던차 역시 제다이님이 계시군요.오랜만에 오게 되었어요^^ 작품내신거 축하드려요
히로시 작품이 출간된게 많네요...다 읽어볼 작정입니다.느낌이 좋아요!

jedai2000 2008-05-2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익후, 댄디를 아시네요 ㅎㅎ

<하드보일드 에그>는 전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도 아직 못 봤네요. 재미있다는 평판이 많아요. 속편은 <써니사이드 에그>랍니다. 아마 나오게 될 거예요. 저도 오기와라 히로시를 주목해보려구요. 축하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bongbong 2008-05-2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알다니요ㅋㅋㅋ 제가 오아시스인걸요
'미키 스필레인' 검색하다 역시나... 제다이님이 리뷰 첫장을 장식 하시네요^^
ㅡ'키스 미 데들리'라는 좋아라하는 하드보일드 b급무비 원작자가 스필레인이란걸 뒤늦게 알게되었어요ㅡ 일일이 하나하나 댓글 다시는것 그대로이시네요..정보 감사드립니다.
킹 오브 카인드니스! 확실하네요^^

jedai2000 2008-05-28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오아시스님이시구나 ^^

아주 오래전부터 방문해주셔서 낯익은 아이디였는데, 그분이 오아시스 님이실 줄이야..
넘 방갑구요 ^^ <키스 미 데들리> 들어본 적 있어요. 보지는 못했지만요. 나중에 스필레인이 직접 마이크 해머 역할로 영화를 찍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재미있죠 ^^
킹 오브 카인드니스는 과찬이시구요.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